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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고 자 |
보고 일자 |
참여 인원 |
비 고 |
G-2 일일보고 |
1948. 10. 21. |
24,00여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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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백일 |
1848. 10. 21. |
800~2,000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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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int Week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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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0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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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미군 제24군단 |
1948. 11. 10. |
3,000여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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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석 |
미 상 |
3,708명 |
사살 : 852명, 포로 : 2,856명, 탈출 : 수백명 |
※ 출 전
1. G-2 Periodic Report
2. [동광일보 호외] 1948. 10. 21.
3. 주한미대사관 보고서
4. G-3 Section, ⅩⅩⅣ Corps, History of the Rebellion of the Korean Constabulary at YEOSU and DAEGU, 1948. 11. 10.
5. Report on the Interal Insurrection After April, 1948, made by Minster of National Defense, Lee Bum Suk
위의 표에 나타나듯이 보고자와 보고시기에 따라 제14연대 봉기에 참여한 인원이 각기 다르다. 보고자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더라도 10월 19일 최초의 제14연대 봉기에는 최소 2,000여명의 병사들이 참여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숫자는 제14연대가 완전 편성되었을 때인 1948년 10월 초순 병력이 약 3,000여명이었음을 감안하면 부대원의 2/3 정도가 참가한 것이었다.
이렇게 제14연대 병사들의 다수가 봉기에 적극 참여한 이유는 무엇일까? 지창수의 연설과 [제주도 출동거부 병사위원회]의 성명, 그리고 여순사건 직후 발표된 현지 사령부의 발표문에는 이들이 봉기하며 적극 참여하게 된 동기가 잘 나타나 있다.
제14연대 인사계 선임하사관 지창수는 여수경찰과 일본군이 여수에 상륙하여 공격하려 하며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에 반대하고, 남북통일의 주장하는 요지의 연설로 병사들을 선동하였다.25) 10월 20일 [제주도 출동거부 병사위원회] 명의의 성명서에는, 제주도 애국인민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한 제주도 출동에 반대하며 조선 인민의 복리를 위하여 궐기하며, 주한미군 철수와 조국통일, 조선인민공화국지지 등을 봉기의 목표로 내세웠다.26)
제14연대의 봉기는 순식간에 인근의 전남 동부 지역으로 확산되었다.27) 또한 최근의 진실화해과거사위원회에 여순사건으로 분류되어 신청 접수된 지역에 의하면 전남북과 경남을 합하여 21개 지역에 이르고 있어 이는 조사결과에 따라서 여순사건이 단순히 전남동부지역에 국한한 사건이 아닐 수 도 있음을 예고하고 있다 보여진다. 그러나 여순사건은 남로당이 계획한 것도 아니고 조직적으로 준비도 되지 않은 봉기였다. 당은 미리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도할 수 없었다. 해방 후에 일어난 주요한 대중투쟁(1946년 '대구10월항쟁', 1948년 '제주4․3항쟁'과 여순사건)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중앙당이 조직적 또는 계획적으로 시작한 봉기는 아니었다. 이 점에서 대중운동을 지도․지휘한다고 자임했던 남조선노동당(1946년 11월 이전까지는 조선공산당)이 대중운동에서 수행했던 역할은 사실과 엄밀하게 대조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당이 주도하는 조직적 봉기가 더 중요하고 '현실적' 전망이 있는 투쟁이며 운동은 당연히 당이 주도해야한다고 생각한다면, 여순사건은 무척이나 '비현실적인' 봉기라고 생각하기 쉽다. 이승만정부는 이 봉기를 '폭동'이나 '반란'으로 불렀는데, 북한 또한 여순봉기가 일어났을 때 이를 단순한 폭동으로 여기고 즉각적인 지원을 하지 않았다.28)
그런데 여순사건은 14연대 하사관 그룹에 의해 '엉터리'로 '때 이르게' 시작되었지만, 시민들이 대거 이 봉기에 합류하게 됨으로써 이 봉기는 단순한 '군부 쿠데타'가 아니라 대중봉기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고, 이런 맥락에서 여순사건은 해방공간에서 발생한 마지막 대중투쟁이라는 중요한 위상을 갖는다. 이후에는 여순사건처럼 광범한 대중투쟁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이 확산은 다음의 과정을 거치면서 진행되었다. 제14연대 병영에서 봉기한 제14연대 병사들은 곧 바로 여수 경찰과 철도경찰을 격퇴하고 여수를 점령하였다. 그 뒤 지창수의 지휘 아래 주력이라 할 수 있는 600여명의 병사들이 여수 역에서 5량의 기차와 차량을 징발하여 10월 20일 오전 9시 20분 순천으로 이동하였다. 10월 20일 아침 순천에 도착한 반군은 순천에서 경찰과 교전한 뒤 이날 오후 순천을 점령하였다. 이 때 순천에 파견되었던 제14연대 2개 중대는 선임중대장인 홍순석의 지휘 아래 반군에 합류하였다. 순천을 점령한 뒤 1,000여명 정도의 반군은 남원을 향해 북진하였다. 10월 20일 오후에 순천 북방으로 전진한 반군은 이곳에서 처음으로 정부군의 저지를 받았다. 정부군은 이정일이 지휘하는 제4연대였다. 이곳에서 2차례의 교전 끝에 정부군의 저지선을 돌파하지 못한 반군은 다시 순천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순천으로 돌아온 반군은 김지회의 지휘 아래 순천 주변의 곡성, 보성, 구례 등지로 흩어졌다. 10월 21일 이후 정부군의 진압작전이 강력하게 전개되자 이들은 지리산으로 입산하여 빨치산 투쟁을 전개하였다. 한편 순천 방면으로 이동하지 않고 여수에 남아 있던 제14연대 병사들의 일부는 10월 21일 광양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이들은 진압부대가 제2차로 여수를 공격하기 앞선 10월 24일 밤 5시경이 되자 백운산과 벌교 방면으로 퇴각하였다.29) 제14연대의 주력이 떠나간 상태에서 여수지역에는 지역민들만 남아 있었다.
여순사건은 5․10사건 이전에 발생한 제주 4․3항쟁과는 또 달리, 전남 동부지방이 순식간에 ‘인민공화국 지지’를 외치는 좌익 손에 넘어갔다는 점에서 큰 충격을 주었다.30)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이를 즉각 반란으로 규정하고 진압에 나섰다.
그런데, 여순사건의 원인과 성격을 놓고 당시 정부와 현지 사령부는 서로 다르게 발표하였다. 이범석 국무총리는 사건 발생 직후 이 사건이 극우주의자와 공산주의자의 연합으로 발생한 성질의 반란으로 규정하였다.31) 당시 전투사령부 보도부에서는 여순사건의 발생원인으로 반경감정을 가진 하사관들과 연대 내의 좌익사상을 가진 간부들의 선동으로 일어났으며, 그 목적지는 구례경찰서였고, 지방 좌익과는 어떠한 연락도 없었다고 발표하였다.32) 이렇듯 정부 당국과 현지 사령부의 발표가 다른 이유는, 정부는 이 사건을 정치적 목적에서 이용하려는 의도가 있었고, 현지 사령부는 현지에서 잡힌 포로들의 심문을 통해서 얻어진 정보에 근거한 발표였기 때문이었다.
정부에서는 10월 21일 광주에 반군토벌 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사령관에 육군 총사령관 송호성 준장을 임명하였고, 송호성은 특별기편으로 10월 21일 하오 1시 광주에 도착하였다.33) 10월 22일 이범석은 ‘반란군에 고한다’는 포고문을 발포하였다.
10월 20일 진압작전이 시작될 때는 3개 연대를 동원한 진압작전을 수립하였다.34) 10월 21일부터 시작된 정부군의 진압작전에는 총 5개 연대의 10개 대대와 1개 비행대(경비행기 10대), 해안경비대 함정 등이 동원되었다.35) 이 여순사건 진압작전에는 총 140명의 장교와 4,732명의 군인들이 참가하였다. 그러나 신무기로 무장하고 잘 훈련된 반군의 저항으로 정부군의 진압작전은 처음부터 쉅지 않았고,36) 10월 21일 진압작전은 재조정되었다.
광주의 제4연대는 서쪽으로부터 여수를 포위하며, 전주의 제3연대는 대전의 제2연대와 협력하여 북쪽으로부터 여수를 포위하며, 군산의 제12연대는 여수의 북서쪽을 향해 군산을 출발하며, 부산의 제5연대는 바다로부터 포위를 유지하며, 대구의 제6연대는 여수의 북쪽을 산맥을 횡단하며, 마산의 제15연대는 여수의 동쪽으로 진격하는 것이었다.37) 10월 22일 국방부 총참모장 채병덕은 기자회견에서 광주와 마산으로부터 막대한 병력을 동원하였고, 순천과 여수반도에서 압박 섬멸전의 총공격이 시작되었음을 밝혔다.38) 정부군의 진압작전은 여수를 중심으로 사방을 포위하여 반군을 섬멸하는 압박 섬멸전이었다.
10월 27일 정부군은 여수를 탈환함으로써 여수순천지역의 진압작전은 마무리되었고, 이때부터 정부군의 작전은 남원, 구례, 백운산 그리고 지리산 지역의 반군들을 소탕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한편 정부군의 진압작전에는 주한 미군의 지원이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 주한 미군 제24군단 G-2는 1948년 10월 20일 오전 9시 10분에 속보(flash report)를 받았고, 10시 15분에 주한미군사령관은 지방군사고문단(Provisional Military Advisory Group)으로부터 여순사건을 확인하는 보고를 받았다. 그리고 이날 상오 주한미군사고문단장인 로버츠 준장 사무실에서 로버츠, 이범석, 송호성, 하우스만, 몇몇 참모들이 모여 회의를 가졌다.39) 이 회의에서는 전투사령부의 설치를 결정하였다. 그 뒤 리드와 하우스만을 비롯한 미군 고문관들은 정부군의 진압작전에 필요한 모든 역할을 수행하였다.40) 조기진압이 실패로 돌아가자 10월 22일 퓰러 대령을 추가 파견하는 등 진압작전을 적극 지원했다. 리드와 하우스만은 사령부에 배속됐는데, 이들 외에도 각 연대에 파견된 미군 고문관들은 진압작전에 적극 개입했다. 제4연대 고문관 모어 중위와 그린바움 중위는 제4연대 1개 중대를 순천의 동강에 배치했고, 한국군 지휘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제4연대를 정비해 진압군으로 투입하거나 제5연대의 상륙작전에서 김종원을 비롯한 한국군 지휘관들이 무리한 상륙작전을 계획하자 이를 제지하는41) 등의 예에서와 같이 고문의 역할을 넘어서 직접 진압작전에 개입했다.42) 당시 진압작전에 참여했던 하우스만의 회고처럼, 미군은 탄약․무기․식량을 비롯해 통신수단까지 제공하였다. 결국 거의 용병과 다름없는 미군의 원조가 없었다면 여순사건은 더욱 더 심각해졌을 것이다.43)
4. 진압에 참여한 주요 지휘관들의 성향44)
진압에 참여한 주요 지휘관(연대장급 이상)들은 송호성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이었다. 특히, 제5여단장 김백일․제3연대 부연대장 송석하․제15연대장 최남근․육군본부 정보국장 백선엽 등은 모두 만주 봉천군관학교를 졸업했으며45) 모두는 일제가 1939년 8월에 항일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창설한 간도특설경비대에46) 소속된 한인 군관 출신이었다.47) 이들 중에서 제15연대장 최남근은 다른 장교들과는 달리 중도적인 입장에서 진압작전에 적극 참가하지 않았고, 10월 22일 광양 방면에서 반군의 기습에 포로가 됐다. 이후 그는 탈출한 뒤 진압군에게 유용한 정보를 제공했으나 공산주의자로 몰려 숙군 과정에서 체포됐다. 그 뒤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1949년 8월 2일 경기도 수색에서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총살당했다.48)
전투사령관인 송호성은 광복군 출신으로, 10월 24일 미평전투에서 보여지듯이 용감하지만 능력이 부족한 지휘관이었으며49) 여순사건의 진압작전이 일단락 된 이후 총사령관에서 면직됐다.50) 진압 작전의 실제 지휘관은 제5여단장 김백일 대령이었다. 그는 1945년 말 백선엽, 최남근 등과 함께 월남해 군영을 졸업하여 임관한 뒤 제3연대장, 후방부대 사령관 등을 지냈다. 제3연대장 시절에는 비리와 가혹한 훈련, 남한 사람들을 무시하는 발언 등으로 인해 연대원들의 퇴진시위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51) 그는 만주군 군의관(대좌) 출신인 원용덕 대령이 전투를 지휘하는 것은 무리이며 모든 부대의 지휘를 김백일 대령으로 통일시키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던 채병덕의 판단에 따라 제5여단장에 임명됐는데, 만주군 시절에 빨치산 토벌 경험이 있었던 까닭에 중용됐다.52) 제2여단장 원용덕은 만주군 군의 출신의 장교로 해방후 군사영어학교에 만주군 출신들을 입대시켰다. 그는 여순사건 진압작전 때는 김백일이 지휘했던 까닭에 지휘권을 행사하지 못하다가 여순사건의 토벌작전이 완료된 후 북지구전투사령관으로 빨치산토벌전을 수행했다.
제3연대와 제12연대 그리고 제2연대는 연대장을 대신해서 부연대장인 송석하 소령과 백인엽 소령, 제2여단 군수참모 함병선이 지휘했고, 연대장들은 부대에 잔류했다. 이것은 제2여단장 원용덕이 이들을 지휘관으로 지명했기 때문이었다. 원용덕이 제3연대장 함준호 중령이나 제12연대장 백인기 중령을 신뢰하지 않았기에 부연대장을 출동부대장으로 지명했으며53) 제2연대장은 자신의 지휘권을 확립하기 위해 임의로 연대장을 임명했다. 백인엽은 학병출신으로 일본군 소위로 근무했다. 그는 여수 진압작전이 완료된 이후 부역자를 처벌한다며 구례 일대에서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 함병선은 평북 숭덕중학을 졸업한 일본군 지원병 출신으로 낙하산 부대에서 근무했다.54)
제6연대장 김종갑은 연희전문을 졸업한 일본군 학병 소위로 2년간 근무했다. 그는 해방 직후 학병동맹에 반대한 우파 성향의 학병 출신들이 만들었던 학병단에 참여했으며 이후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한 경력을 지녔다.55) 제4연대장 이성가 중령은 중국중앙군관학교를 졸업한 중국군이지만 극우파 중국 군벌인 왕정위군에서 복무했다. 1947년 4월 제1연대장으로 있을 때 김창룡을 연대 정보장교로 발탁해 숙군을 시작했으며, 1948년 8월 제4연대장으로 부임해 연대내 숙군을 진행했던 극우 성향의 지휘관이었다. 제4연대 부연대장 박기병은 만주군 출신으로 1947년경 김창룡을 정보장교 추천했던 극우 성향의 장교였다. 제5연대 제1대대장 김종원은 일본군 지원병 출신으로 일본군에 복무할 때부터 호랑이로 소문나 야만적인 사람으로 알려졌는데,56) 10월 23일의 상륙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정보를 제공했던 여성과 아이를 포함한 몇몇 어부들은 무자비하게 구타했고,57) 진압작전이 끝난 뒤에는 부역자를 처단한다며 일본도로 민간인들을 직접 참수하기도 했다.58)
이렇듯 현지에서 초기 진압작전을 지휘했던 부연대장 이상의 직위에는 과거 일본군 출신, 특히 만주에서 항일빨치산을 토벌한 경험이 있었던 만주군 출신 장교들이 중용됐다. 또한 이들은 대개 일찍부터 반공을 주장했던 극우 성향의 장교들이 주를 이루었다.
5. 이승만 정부의 정치적 대응과 국가폭력59)
여순사건이 정부수립 두달만에 일어났다는 사실은 이 사건의 성격을 규정할 뿐만 아니라 정부가 사건을 진압하는 방식 그리고 사후처리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1948년 5․10총선거와 제헌헌법 제정을 통하여 수립된 제1공화국은 남한만의 정권수립에 동의하는 이승만과 한민당 세력의 연대로써 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남한단독정권을 반대하며 남북협상을 이끌었고 단독선거를 보이코트 한 김구는 신생 이승만 정부의 큰 우환이었다. 그는 아직도 대한민국정부를 인정하지 않은 채 제도권 바깥에 머무르고 있었지만, 국민으로부터는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신망받고 있었고 무소속 소장파 국회의원 등으로부터는 반 이승만 세력의 구심점으로 자리잡으면서 가장 강력한 라이벌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순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을 알고도 이를 숨기고 있던 정부는 이틀이 지난 10월 21일 오전 11시 이범석 국무총리 발표를 통해 일반 국민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범석 국무총리는 22일 ‘반란군에 고한다’는 포고문에서도 반란군이 “일부 그릇된 공산주의자와 음모정치가의 모략적 이상물”이 되었다고 언급하였는데,60) 국무총리가 지목한 ‘극우정객’과 ‘음모정치가’가 누구인지는 이 날 각 신문에 일제히 보도된 김태선 수도청장의 혁명의용군 조작사건 발표를 통해 분명해졌다.
여순사건의 주모자를 혁명의용군으로 지목한 정부의 주장은 내무부의 국회보고에서 사건 배후는 ‘최능진, 오동기 등이 수모(首謀)로 된 혁명의용군과 좌익계열의 선동에 관련됨이 확실’하다는 것이 내무부의 입장이었다.
최능진에게 죄가 있다면 그것은 1948년 제헌국회의원선거에 동대문 갑구에서 출마하여 이승만에 대항한 죄였다. 최능진은 유엔감시 하의 남한 정부수립을 방해하고 남북협상이 실패한 후에는 마지막 수단으로 국방경비대를 이용하여 무력혁명을 감행하려한 인물로 발표되었는데, 그는 남북협상에 나서려는 김구․김규식을 남한 우익진영이 ‘공산주의자’나 ‘크레믈린의 신자’로 비난하는 민족 지도자에 대한 모욕적 언사인데도 이에 대항하지 못한 남한 청년들은 다 썩었다고 분개할 정도의 민족주의자였다.61)
단독정부 수립반대․남북협상 등의 정치적 입장은 당시 김구와 한독당 세력이 취했던 노선이었다. ‘국부 이승만’과 감히 경쟁하려 했던 최능진을 한번 손봐주려 했던 수사는 선거운동원으로 참가했던 군인을 신원 보증했던 오동기로 이어졌고,62) 여순사건이 오동기가 근무했던 14연대에서 일어나게 되자 뜻하지 않게 무력혁명의 죄까지 뒤집어쓰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당시 주한미군을 주둔시키고 있었으며 여순사건이 일어나던 당시까지도 군을 지휘하고 있었던 미군은 여순사건의 주동자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었을까?
미군은 기본적으로 김구의 한독당 세력과 진보적인 소장파 세력을 이승만 정권을 위협하는 불안요소로 지목하고 있었다. 분명하게 밝히지는 않았지만 미군은 반란이 김구 세력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거나 김구의 쿠데타 설이 나돈다는 식으로 김구의 혐의를 계속 주목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63) 이런 기본적인 시각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여순사건을 김구 세력이 일으켰다고는 공개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여순사건의 경위에 대한 10월 23일 주한미군사령관 콜터 소장의 발표에서는 반란을 일으킨 주동자는 제주도로 떠나기 위해 대기 중이던 장교와 경비대원이라는 언급만을 하여 정부 발표와 대조를 이룬다. 대한민국 정부측을 인용하여 반란의 주모자를 일부 군인들로 국한시키고 있었고 극우정객이나 혁명의용군 등 정부가 반란의 핵심분자로 지목한 인물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64)
한편 순천이 진압된 뒤인 24일 이곳을 방문하였던 서울주재 미 외교관은 반란지의 실정을 국무성에 보고하였다. 이 보고를 기초로 하여 27일 미국무성 맥더모트 대변인은 여순사건에서 남로당이 활동하였다고 발표했다.65) 이 같은 미국 측의 파악은 반란 원인, 주체세력 등의 내용에서 볼 때, 극우정객 결탁을 운운하는 당시 정부의 공식 발표와는 꽤 큰 차이가 있었다.
반란의 진원지로서 김구세력을 지목하고 이를 통해 공격을 취하고자 했던 이승만 정부의 의도는 분명한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고 일반 여론도 이에 동조하지 않았지만, 정부는 반 이승만 정치세력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의 주요한 공격방향이었던 것은 국회에서는 소장파 세력이었고 원외에서는 김구 등의 한독당 세력이었다.
여순사건이 14연대의 봉기와 이에 따른 지방 좌익세력 참여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순사건 직후의 정부 대응은 김구․한독당, 소장파 세력 등의 정치적 반대세력을 고사시키려는 의도를 분명히 보여준 것이었다. 이를 통해 이승만 정부는 여순사건을 정부의 실정에서 비롯된 밑으로부터의 저항이 아니라 일부 우익세력에 의한 쿠데타적 행동으로 국민에게 광고하고, 이를 계기로 삼아 정치세력을 재편하는데 활용하려고 했던 것이다.
김구의 명백한 부인과 일반 여론이 호의적이지 않자, 권력에서 소외된 극우정객과 공산주의자들이 합동으로 반란사건을 일으켰다는 정부의 초기 발표는 민간 공산주의자들의 행동으로 그 범위가 점차 변화하게 된다.
김형원 공보처 차장은 일반인들은 여수 14연대가 반란을 일으키고 민중이 여기에 호응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나 사실은 ‘전남 현지에 있는 좌익분자들이 계획적 조직적으로 소련의 10월혁명 기념일을 계기로 일대 혼란을 야기시키려는 음모를 획책하고 그들이 일부 군대를 선동하여 일으킨 것’이라고 하였다.
즉 반란의 주체는 14연대 장병이 아니라 계획적으로 조직된 민간 좌익들이라는 것이 발표의 요지였다.66) 이 발표는 정부조직인 국군 내부로부터 반란이 처음 일어났다는 점을 애써 외면함으로써 반란의 초기 주체가 국군임을 부정하고 그 책임을 민간인에게 떠넘기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공보처장의 발표는 우익과 공산주의자들의 연합으로 사건이 발생했다는 정부의 초기 발표를 사실상 수정하고 사건의 주체를 민간 공산주의자로, 14연대 군인은 이에 종속되는 지위로 파악한 것이었다. 정부가 여순사건을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으로 선전하기 시작하면서 이제 불똥은 북한 공산주의세력으로 번져 나갔으며, 결국 그 피해는 여수순천지역 일대의 민중이 고스란히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진압군이 순천과 여수를 완전히 점령한 뒤인 11월 3일 국방부는 ‘전국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벽보를 각지에 살포하였다. 이 벽보에는 먼저 여순사건을 ‘민족적 양심을 몰각한 공산도당의 조직과 명령을 통하여… 대한민국 정부를 파괴’하는 것이라 비난하는 한편 ‘소련제국주의의 태평양 진출정책을 대행하려는 공산당 괴뢰정권의 음모’라고 규정했다. 이제 여순사건은 반도 남쪽의 한 지방에서 이승만의 실정에 반항하여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소련 지배권을 확대하려는 국제 공산주의운동의 한 부분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67)
여순사건의 주체에 대한 규정은 이런 식으로 냉전적 설정으로 이동했다. 이런 뒤바뀜은 내부 갈등의 책임을 외부의 확인되지 않은 실체에게 떠넘김으로써 지배층의 실정을 은폐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또한 이 사건이 기본적으로 내부 갈등 때문에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외부의 사주로 몰아감으로써 사건 주체의 정당성을 박탈해버리는 효과도 가져올 수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11월 4일 담화는 이러한 시각 속에서 나온 강경한 입장 표명이었다. 이 담화에서 이승만은 “모든 지도자 이하로 남녀아동까지라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고 조직을 엄밀히 해서 반역적 사상이 만연되지 못하게 하며 앞으로 어떠한 법령이 혹 발포되더라도 전 민중이 절대 복종해서 이런 비행이 다시는 없도록 방위해야 될 것”이라는 말하였다.68) 불순분자 제거를 위해서는 어린아이까지 일일이 조사해야 한다는 강도 높은 표명은 대통령의 직위에서 맞지 않는 고압적이고 격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었다.69)
신생정부의 근간인 군 내부에서 반란이 터져 나왔다는 것은 정부의 통치력에 결정적 흠이 될 수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두 달이 조금 지난 뒤에 발생한 이 사건의 처리야말로 정부의 통치 능력을 대내외에 보일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나 다름없었다. 또한 반란에 민간인까지 가담했다는 것은 반란에 대한 민간인의 광범한 지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한편으로는 이승만 정부의 실정을 의미했다.70) 따라서 이승만 정부는 유엔의 한국 승인을 앞두고 있는 마당에 국민의 지지를 획득하지 못한 허약한 정부라는 것이 드러나는 것을 결코 인정할 수 없었고 이를 은폐시키려는 시도가 필요했던 것이다.
정리해보면, 이승만 정부는 여순사건의 주체에 대해 맨 처음에는 ① 우익과 공산주의자의 연합이라는 초기 발표에서 ② 민간인 공산주의자가 주동이 되고 군인 일부가 일으킨 것으로 변화되었고 마지막에는 북한으로 그 화살을 돌려 ③ 소련-북한-남한의 공산주의자들로 바꾸어 발표했다. 김구 세력을 공격하려는 이승만 정부의 초기 시도가 실패한 것이 분명해지자 공산주의자들로 그 방향을 바꾸었던 것이지만, 정부책임을 회피하려 한 점은 정부의 변함없는 일관된 의도였다고 볼 수 있다.
6. 초법과 무법적인 상태의 계엄법과 국방경비법
여수순천지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는 사실이 처음 알려진 것은 육군참모장 정일권 대령의 10월 26일 국방부 출입기자단과의 회견에서였다. 계엄령은 순천에 대한 작전이 이루어지고 있던 10월 22일 현지 사령관에 의해 처음 내려졌다.71) 계엄선포문에는 ‘본관에게 부여된 권한’이라는 표현이 있지만 과연 누가 이 권한을 부여한 것인지, 어떤 근거에서 부여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은 채, 반도를 은닉하거나 밀통하는 자에게는 사형에 처한다는 강도 높은 조치를 포함하고 있었다. 중앙정부가 내린 것도 아니고 현지 사령관의 판단으로 자의적으로 내려진 이 계엄령은 아무런 법적인 근거를 갖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72)
국군이 순천을 완전히 점령하고 여수에 대한 공격이 감행되기 시작한 10월 25일, 계엄령은 대통령과 국무총리(국방장관 겸임) 그리고 11명의 장관들이 참가한 국무회의에서 결정되었다. 계엄령이 통과된 후 호남방면사령관은 26일자로 여수․순천지구에 임시계엄을 선포했다. 이 선포문은 군사에 관계 있는 행정․사법사무는 계엄사령관이 담당한다고 명시하였다.73) 22일 현지 사령관의 계엄령에 뒤이어 26일에 또 다시 군사령관에 의한 계엄령이 발포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계엄법이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을 때였다. 계엄법이 아직 제정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국무회의가 이를 ‘제정’하고 ‘의결’했던 것이다. 국무위원과 정부는 법률안을 제출할 수는 있지만 제정할 수 있는 권한은 없다. 따라서 관보의 문구로 본다면 계엄령은 명백한 헌법위반이었다.74)
여수순천지역에 계엄령이 발포되었지만, 일제시대에 있었던 계엄령은 조선에서 한번도 실제로 발포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내용에 대해서는 일반인들뿐만 아니라 작전을 수행하는 군 관계 인물까지도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고 있지 못하였다.75)
이런 상황을 의식해서인지 계엄령 선포 후 한 신문은 계엄령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을 돕기 위해서라며 계엄령을 소개하였는데, 그 내용은 일제시기 계엄령의 내용 그대로였다.76)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지만 아직 계엄법은 제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법령 없는 계엄령 선포’라는 상황에 대해 국회는 의문을 제기하고 정부를 추궁했다. 먼저 문제가 된 것은 정부가 어떤 법에 근거하여 계엄령을 발포했는가하는 점이었다.
그런데 정부에서 발포한 것은 계엄령이 분명하였으므로, 이는 헌법 57조에서 규정하고 있는 ‘긴급명령, 긴급재정처분’과는 다른 경우이므로 정부가 이 조문에 근거하여 계엄령을 발포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헌법 64조와 72조가 사용될 수 있는 헌법조문인데, 당시에 계엄법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또한 계엄령 발포의 법적 근거로는 사용될 수 없었다.
그런가 하면 공포된 적이 없는 국방경비법도 문제이다. 미군정은 1948년 3월 17일 남조선과도정부법령 제175호로 국회의원선거법을 공포하고 1948년 7월 12일 대한민국헌법을 제정하고 국회의장 이승만은 7월 17일 이 헌법을 공포하였다. 그리고 정부조직법(법률 제1호)도 같은 날 공포. 시행되었으며 1948년 8월 15일에는 정부의 수립을 내외에 선포하였다. 이렇게 하여 대한민국이 탄생한 것이다.
그런데 법령집을 보면 '국방경비법', '해안경비법'은 1948년 7월 5일 공포, 1948년 8월 4일 효력발생, 법률호수 미상이라고 씌어 있다. 그러나 1948년 7월 5일에 이러한 법률이 공포된 일이 없다.
미군정은 군정법령(남조선과도정부법령) 이외에 1946년 8월 24일 군정법령 제118호로 창설한 조선과도입법의원에서 제정한 '법률'을 인준(認准), 공포한 일이 있으나 그것은 1947년 5월 6일 법률 제1호에서 1948년 5월 19일 법률 제12호(조선과도입법의원의 해산)까지를 제정하였을 뿐이었다.
남조선과도정부법령 제209호(법령 제173호의 개정)가 1948년 7월 3일에 공포되었고, 같은 법령 제210호(동결재산의 해제)가 1948년 7월 12일에 공포되었으므로 그 중간인 7월 5일에 다른 법령이 공포될 수 없고, 더구나 1948년 5월 20일로써 이미 해산된(법률 제12호) 조선과도입법의원에서 법률을 제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렇게 공포된 일이 없는 법률을 법률이라고 하려니까 그 법률호수는 '미상(未詳)'이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국방경비법을 법률인 양 적용했고, 군법 피적용자인 군인. 군속 등은 물론, 국방경비법 제32조(이적), 제33조(간첩)의 죄는 민간인에게도 적용되었다. 국민들은 이것이 법률인 줄 속아서 살아왔고 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 법률에 의하여 처형되었다.
"국민을 속이는 사람들"이라는 소제목으로 시작하는 유현석 변호사의 법조회고는 '국방경비법'과 '해안경비법'77))의 문제점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국방경비법'은 미군정에 의하여 '공포'된 일이 없고, 따라서 결코 '법률'이 아닌데도 대한민국정부와 법원에 의하여 정당하게 제정. 공포된 법률처럼 적용되면서78) 특히 한국전쟁기간 동안 "아마 상상도 못"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을 '합법적으로' 처형하는 데 동원되었다. 이것이 만일 공포된 일도 없는, 따라서 법률의 효력이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법'에 따라 재판을 받고 처형된 사람들은 참으로 무고하게 학살당한 피해자라고 밖에 할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국방경비법'의 문제가 반세기전, 어처구니없는 한국 역사의 한 장을 장식하는 에피소드로만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국방경비법'은 국가보안법은 물론 '사회안전법'을 거쳐 보안관찰법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의 법률에 인용. 계승되는 형태로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다. 그래서 '국방경비법'에 의해 수십 년간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피해자들이 우리 주변에 살아남아 있고, 나아가 이들에게 보안관찰처분의 족쇄를 채우는 근거가 되고 있다.79)
Ⅲ. 유형별로 본 여순사건의 집단학살
여순사건과 관련한 민간인에 대한 집단학살은 해방전후의 격동기 속에 해방 후 계급적, 민족적 모순의 해결을 둘러싸고 외세, 지배세력과 민중과의 대립이 최고 수준에서 가장 적대적 형태로 폭발된 형태의 반군과 지방좌익, 빨치산의 무장투쟁에 대한 남한 정부의 토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러한 토벌은 결국에 있어 한국전쟁으로까지 이어졌으며, 민간인에 대한 집단학살로 이어져 왔던 것이다. 이를 연대기별, 학살주체별, 피학살자별, 학살행위를 유형별로 구분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민간인학살의 연대기적 양상이다.
여순사건의 민간인에 대한 집단학살은 크게 네 시기로 구분해 볼 수 있는데, 반군에 의한 집단학살 시기와 진압군과 계엄 하에서의 집단학살 시기 및 토벌과정에서의 집단학살 시기, 그리고 국민보도연맹원과 정치범에 대한 집단학살 시기로 구분해 볼 수 있다.
1) 반군에 의한 집단학살 시기로 이는 국방경비대 14연대 반군들에 의해 자행되었는데, 이 기간의 학살은 주로 경찰과의 교전 이후 여수와 순천과 같은 소위 해방구인 점령지역에서 지역 유지들과 포로로 잡힌 경찰들이 학살을 당하였다.
2) 진압군과 계엄 하에서의 집단학살 시기인데 이는 반군에 대한 초법적인 계엄령 발동의 진압과정에서 아군인 진압군에 의해 자행되었는데, 이 기간의 학살은 주로 무차별한 진압과정과 계엄 하에서 자행된 집단학살로 무작위 다수의 민간인들이 이때 학살을 당하였다.
3) 토벌과정에서의 집단학살 시기로써 이는 진압과 계엄상황이 끝나고도 산악지역으로 근거지를 옮긴 반군과 지방좌익에 대한 이른바 빨치산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산악부근의 마을 민간인들이 피아간의 공방에 의해 학살을 당하였다. 그리고 이 토벌과정의 집단학살 시기는 한국전쟁기로 그대로 이어져 갔다.
4) 국민보도연맹원과 정치범에 대한 집단학살 시기이다. 여순사건을 계기로 정부는 이 지역의 수많은 좌익활동가들이나 정치범들에 대해 사상 전향을 종용했고 또한 대다수의 그들은 그에 따랐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거의가 집단학살을 당하고 마는데 여수 오동도 앞 바다 애기섬의 150여명, 대전형무소의 여순사건 관계 정치범 1,300여명이 죽임을 당한 사건이 후반기의 대표적인 학살이다.
둘째는 학살의 주체로 본 유형으로 우익 측에서는 국방군, 경찰, 우익단체 등으로 대별될 수 있고, 좌익 측에서는 14연대 반군을 주축으로 지방좌익과 빨치산으로 대별 될 수 있다.
셋째는 피학살자들의 유형이다. 피학살자는 우익의 경우 군인, 경찰, 지역 유지인사들 뿐만 아니라 보도연맹원, 형무소 수감자, 부역혐의자, 공비 및 통비 혐의자, 불심검문 또는 가택수색에 의해 뚜렷한 혐의도 없이 학살의 대상이 되는 거의 전 주민 다수가 학살의 대상이 되었다.
넷째는 학살행위 유형별로 본 민간인 학살과 야만성이다. 학살행위의 유형에는 총살, 생매장, 초토화작전, 수장, 일본도에 의한 참살, 죽창에 의한 척살, 굶어 죽이기, 때려죽이기, 폭격이나 비행기에서의 기총소사 등이 있다.
위의 여순사건에 대한 민간인 학살의 형태를 시기별로 대입하여 볼 때에 그 양상은 한국전쟁 전의 작은 전쟁기인 국지전 군인 봉기 시기에서부터 전면전의 형태인 한국전쟁 전기까지를 관통하고 있으며, 학살주체별 유형은 주로 진압군인 국방군에 의한 것이었으며 일부 반군과 지방좌익에 의한 것도 있었다. 또한 피학살자별로 본 유형은 부역혐의, 공비 및 통비 혐의 등 뚜렷한 혐의도 없이 학살의 대상이 되었으며, 지역별로는 사건의 진원지인 여수를 비롯하여 순천, 광양, 구례, 고흥, 보성, 화순 일부와 곡성 일부 및 경남 산청까지도 학살 대상지역이었다.
이러한 비인도적인 학살의 행위에는 지금까지의 모든 죽음의 형태를 총 동원한 인권 박물관과 같아 인권 유린 야만성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여순사건 희생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아직 불분명하다. 다만 전라남도 보건후생부의 이재민 구호자료는 당시 여수를 포함한 7개 지역에서 2634명이 사망하고, 4325명이 행방불명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총 7,000여명이 희생된 것으로 보이는 정부의 기록은 여수지역사회연구소가 피해실태를 조사하였거나 현재 조사하고 있는 피해 통계 추정치인 10,000여명에 육박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와 같은 학살의 주체는 국군과 경찰에 의해 9,500여명이었으며, 지방좌익과 빨치산에 의해 50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 비율로 보면 95%의 절대 다수가 국군과 경찰이라는 소위 아군에 의해 학살 만행이 저질러졌던 것이다.
Ⅳ. 맺는말
한국전쟁 전 대표적 학살극이었던 여순사건은제주 4․3사건과 함께 진압과 토벌과정에서 이뤄졌다. 여순사건은 4․3사건의 연장선에서 발생했다. 4․3사건에 대한 진압출동 명령을 받은 여수주둔 국군 제14연대가 48년 10월 19일 명령을 거부하고 봉기를 일으켰다. 14연대 병력 대다수인 2천여명의 군인이 참여한 봉기는 이 지역 좌익세력들이 가세하면서 순식간에 민군봉기로 발전했다.
그러나 여순사건 진압과 대량 학살을 겪으면서 봉기에 참여한 주력군과 좌익진영은 지리산 등으로 들어가 본격적인 유격투쟁을 전개한다. 이에 따라 전남동부지역 일대 8개시군 가운데 5개 군에서 유격전이 벌어졌고, 군․경은 남로당 게릴라 공비 토벌을 명분으로 49년 말부터 50년 초까지 무고한 민간인을 대량 학살했다.
여순사건은 기존의 정치 사회적 지형을 변화․강화시키면서 남한사회의 기본질서가 잡히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다. 그러나 여순사건이 일어난 지 61년이 지났지만, 이 사건의 사실과 실체에 대한 규명은 2007년과 2008년에 각각 구례와 순천지역 조사결과가 발표되어 이제 시작인 셈이다. 향후 나머지 지역에 대한 조사결과와 종합보고서가 금명간 작성 발표되면 어느 정도 사건의 실체에 대한 윤곽이 잡혀질 것으로 기대된다.
그동안 여순사건의 많은 사실들은 지금까지 정부의 고의적인 축소와 은폐로 근거 없이 확대되면서 왜곡되어 왔다. 당시 신문은 사실 확인 없는 보도를 양산했고 이후 관련 기록들은 한쪽의 일방적 시각 밑에서 서술되었다. 여순사건 연구가 먼저 사실에 대한 규명부터 출발하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돌이켜 보면 우리의 현대사에서 국가폭력은 끊임없이 재생산되어 왔고 재현되어 왔었다. 제주4.3에서 여순사건, 한국전쟁, 베트남 양민학살, 5.18광주민중항쟁, 민주화운동과정에서의 의문사 그리고 최근의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의 강경 진압사례는 가공스런 국가폭력이 강도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끊임없이 길들여지고 맛들여짐을 알 수 있었다. 한반도 남한 사회의 민주주의와 인권의 올바른 신장을 위해, 국가 도덕성의 회복을 위해, 국가폭력은 이제 더 이상 있어서도 용납되어서도 안 된다. 다시는 이 땅에 여순사건과 같은 엄청난 불행과 죽음으로부터 이 민족을 해방시켜야 한다. 민주주의와 인권의 전 사회적인 확산과 정착을 위해서도 이제 국가폭력의 사슬을 반드시 끊어야만 한다. 소위 국가폭력에 의한 민간인학살은 한반도 남한 인권문제의 시발점이었던 것이다.
국가폭력에 의한 국가의 자의적인 권력행사를 막는 일이야말로 노동인권, 여성인권, 소수자 인권이 보장될 수 있는 첫 걸음이고, 이 첫 걸음을 회피하는 모든 인권 운동이나 인권 담론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남한 인권문제의 근원적인 해결을 위해, 국가 도덕성과 사회 건강성의 회복을 위해, 여순사건을 비롯한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학살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문제인 것이다. 현재 정부에서는 지난 2005년 12월부터 진실화해과거사위원회를 통해 이 일을 수행하고 있지만, 조사인력과 조사기간의 문제로 인해 국가폭력에 대한 사건의 총체적인 진상규명보다는 개인적인 신청인 피해 중심으로 조사를 진행하고 있어 아쉬움을 더해 주고 있다.
1) 김득중, 2002, 「여순사건과 민간인학살」,제6회 동아시아평화인권국제학술회의 여수대회 자료집, 155~158쪽 참조.
2) 여순봉기에 대한 논문을 최초로 발표했던 桶口雄一는 여순봉기가 미군에 반대했던 봉기임을 상기시키며, 여순봉기가 국민당을 지원했던 미국과 싸운 중국 인민의 투쟁 그리고 프랑스 제국주의와 싸운 베트남 독립해방투쟁과 공통의 과제를 가진 투쟁이었다고 평가했다(桶口雄一, 1967, 「麗水․順天蜂起」, 朝鮮硏究62, 37~38쪽).
3) 한성일보 1949.12.4; 국도신문 1949.12.24.
4) 여순사건을 진압한 군 장교들-송요찬, 함병선, 백선엽, 김점곤, 박정희 등-은 이후 주요 요직을 거치며 한국사회의 중심인물로 활동했다(桶口雄一, 1976, 「麗水․順天における軍隊蜂起と民衆」, 海峽4, 社會評論社, 74쪽).
5) 1961년 5․16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는 여순사건 진압을 위한 토벌사령부의 일원으로 광주에서 활동했지만, 봉기가 진압된 직후에는 좌익혐의로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 받았다. 그러나 군부내 좌익조직 명단을 제공한 것과 만주군 출신의 군 지도부와 제임스 하우스만(James Hausman)이라는 미 군사고문단원의 구명운동으로 생명을 건지게 되었다.
6) 김정원. 분단한국사, 동녘출판사, 1985, 143쪽, 이기하, 「한국정당발달사」, 의회정치사, 1962, 54-80쪽, G. Henkerson, 「Korea : The politics of the Vortex」, Havard Univ. press. 1968, 196쪽.
7) 노영기, 2000, 「여순사건과 군」, 여순사건 실태조사보고서 3집, 198~199쪽 참조.
8) 국방경비대 창설 당시 국방사령부 고문이었던 이응준은 신원조사를 제안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미군정 관리는 군내 사찰기구의 활용 등을 이유로 내세웠고, 그 뒤의 과정에서 볼 때 미군정 관리의 말이 실행되었다.
9) 짐 하우스만․정일화 공저, 1995, 한국의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대위 한국문원, 138쪽.
10) 미군 방첩대는 경찰이 국방경비대 관련 보고를 어떻게 왜곡하는지를 각 지방의 방첩대 지부에 주지시키기 위하여, 광주의 제4연대에 관한 경찰의 의도적 왜곡보고 사례 7가지를 제시하였다. 이 때문에 미군 방첩대는 경찰과 국방경비대 관련 개별보고는 그 정보의 원천을 추적해야 하며, 서로를 비난하려는 것이지 파악해야 한다고 각 지부에 지시하였다. Weekly Information Bulletin(이하 Bulletin), #12, 1947. 7. 10.
11) 국방경비대 제1연대 연대장 베로스(Russel D.Barrows)중령은 국방경비대와 경찰의 대립이 “일주일에 한 번꼴(about once a week)”로 발생한다고 말하였다. United States Army Forces, Korea Counter Intelligence Corps Seoul District Offices Apo 235, Korean Constabulary, Conflict Between Korea Police and Summary of Information, 7 Jan. 1947.
12) 노영기, 2000, 「여순사건과 군」, 여순사건 실태조사보고서 3집, 202~199쪽 참조.
13) 조선일보 1948. 6. 4 ; 서울신문 1948. 6. 4(국사편찬위원회, 자료대한민국사 7권, 248쪽).
14) G-2 Weekly, #141, 1948. 5. 21~1948. 5. 28.
15) 1948년 7월 9일부터 16일까지의 미군의 주간 동향보고 중 남한의 무장력에 관한 항목에는 “사상검열은 계속되고 있다(Screening continues)”는 내용이 처음 나오고 있다. G-2 Weekly, #148, 1948. 7. 9~7. 16.
16) 1948년 9월 8일 이범석 국무총리는 미국 성조지와의 인터뷰에서 정치적 수단으로 실패하면 전쟁에 의하여 남북통일을 완성할 것이라고 말하여 무력에 의한 북진통일을 내비쳤다. 그러나 이에 대해 공보처장 김동성은 정부 일각에서 표명된 북진 무력통일은 정부의 공식입장과는 다르다고 해명하였다. 동아일보 1948. 9. 11. ; 동아일보 1948. 9. 18.
17) 이외에도 1948년 8월 1일 이후 지문채취작업(fingerprinting)은 진행되며, 이 작업은 경찰의 협조 아래 이루질 계획이었다. 9월 초순까지 대략 절반 정도의 국방경비대원 지문채취가 완료되었다. CG, USAMGIK, Current Constabulary Affairs, 1948. 7. 20 ; C.G, PMAG, PMAG Weekly Activites, 1948. 9. 13.
18) G-2 Weekly # 163, 10. 22-10. 29.
19) 당시 미군 고문이었던 하우스만의 에피소드는 숙군이 활발하게 진행되었음을 시사해준다. 하우스만은 여수사건 이전 어느 날 일선부대 방문의 애로를 백선엽 정보국장에게 토로했다. 그러자 백선엽은 정보국 명의의 쇠메달을 주었다고 한다. 그 이후 어느 부대를 방문할 때 이 메달은 조선시대의 마패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하우스만은 이 사례를 이야기하며 정보국은 그렇게 무서울 때였다고 회고했다. 하우스만․정일화 공저, 앞의 책, 187~188쪽.
20) 김영만의 증언.
21) 당시 남로당에서 이 계획을 사전에 알았는가가 논란거리이다. 최근 한 증언에 비추어 볼 때 남로당 전남 도당에서는 알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 문제를 두고서 심사숙고 할 만큼의 여유가 없었던 실정이었다. 즉 10월 11일 이후부터 제14연대 내에서는 심각하게 무장봉기를 고려했을 것이나, 이 결정에 대해서 전남 도당은 정부의 탄압으로 장흥에 피신한 상태에서 어떠한 결정도 할 수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22) 한국전쟁사, 485쪽, 육군본부,공비토벌사18쪽, J.R. Merril,Interal Warfare in Korea, 1948-1950,(Univ. of Delaware, PH, D. 1982), 210쪽.
23) 여수․여천향토지, 307쪽 따라서 군대기밀이 외부로 노출되어 연대내의 좌익과 여수읍내의 남로당 계가 사전에 반란을 모의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았다. 그 당시 왜 ‘일반전보’로 제주도 출동명령이 하달되었는지 그 이유는 분명치 않다.
24) J. Reed.The Turth about the Yosu Incident, 2쪽 J. R. Merrill. 앞의 책, 214쪽에서 재인용.
25) 지창수는 “지금 경찰이 우리한테 쳐들어온다. 경찰을 타도하자, 우리는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을 반대한다. 우리는 조국의 염원인 남북통일을 원한다. 지금 북조선인민군이 남조선해방을 위하여 38선을 넘어 남진 중에 있다. 우리는 북상하는 인민해방군으로 행동한다”고 선동하였다. 전사편찬위원회, 1967, 앞의 책, 1967, 452~453쪽 ; [해익, 여수재성동문회 회지] 2호(여수지역사회연구소, 1998, 앞의 책, 153쪽에서 재인용).
26) [여수인민보] 1948. 10. 2(여수지역사회연구소, 1998, 앞의 자료집, 153~154쪽에서 재인용).
27) 순식간에 동부지역으로 확산된 과정은 제14연대 주력 부대의 행로와 비슷하다. 물론 반군이 들어가기 전에 지방 좌익들이 먼저 호응하여 봉기한 경우도 있으나 대개는 제14연대의 행로와 비슷하게 진행되었다. 즉 한편으로 여수→순천→보성․곡성․구례→지리산의 행로와, 다른 한편으로 여수→광양→백운산의 행로이다. 이들 지역은 여수 주변 지역이면서 또한 제14연대 관할지역이기도 하다. 즉 제14연대 병사들의 고향이기도 하였다. 결국 향토연대의 특성이 일정하게 영향을 미친 행로일 가능성이 있다.
28) 여순사건을 하나의 운동이라기보다는 폭동으로 바라보는 것은 브루스 커밍스도 똑같다. 커밍스는 여순사건을 해방 후의 '좌절된 정치'에서 기인하는 '막판의 저항'으로 보고 있으며, 사건의 진행 또한 '찻주전자 속의 태풍'에 불과했다고 말하고 있다(Bruce Cumings, 1990,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Vol. 2, Princeton Univ. Press, pp.259~267). 이 같은 관점은 봉기의 직접적인 원인과 하사관 세력이 주체가 된 초기 상황에는 주목하지만, 군인'봉기'가 대중들이 합류하면서 '항쟁'으로 성격이 변화하는 점과 이에 따른 민간인학살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덜 주의를 기울인다.
29) 김계유, 「1948년 여순봉기」, 역사비평 1991년 겨울호, 277쪽.
30) 서중석, 1996,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2 - 1948~1950 민주주의․민족주의 그리고 반공주의, 역사비평사, 168쪽.
31) AMERICAN MISSION IN KOREA, Report on the Interal Insurrection After April, 1948, made by Minster of National Defense, Lee Bum Suk.
32) 자유신문 1948. 11. 8.
33) 「동광신문」 1948. 10. 23. 이외에도 주한미군사고문단의 하우스만 대위(임시군사고문단 G-3 고문관), 리드 대위(임시군사고문단 G-2 고문관), 트리드웰 대위(Treadwell. 제5여단 고문관),프례 대위(Frye, 제5여단 수석고문관), 채병덕 대령(국방부 총참모장), 정일권(육군 참모장), 백선엽 대령(육군 정보국장), 고중위(인용자 주: 고정훈으로 여겨짐. 육군 정보장교) 등이 광주에 도착하였다.
34) [자유신문] 1948. 10. 22.(자료대한민국사 8권, 792~794쪽.)
35) 전사편찬위원회, 1967, 앞의 책, 470쪽.
36) 채병덕은 10월 22일 기자회견에서 발표가 늦은 이유는 갑자기 일어났고 내부적으로 급습을 당하고 적의 병력이 상상보다 컸기 때문에 많은 부대를 집중시킬 필요와 작전의 비밀로 발 표가 늦었다고 말하였다. [서울신문] 1948. 10. 23. (자료대한민국사 8권, 820쪽.)
37) AMERICAN MISSION IN KOREA, Report on the Insurractions After April 1948, made by Minister of National Defense, Lee Bum Suk, 1948. 12. 14.
38) [서울신문] 1948. 10. 23(국사편찬위원회, 자료대한민국사 8권, 820쪽).
39) 하우스만, 앞의 책, 171~172쪽. 백선엽은 이와 다르게 회고하고 있다. 장소는 국방부에서 긴급대책회의가 있었고, 이범석, 채병덕, 정일권, 백선엽, 로버츠, 하우스만, 리드 등이 참여했다고 회고하였다. 백선엽, 앞의 책, 164쪽.
40) 이때 로버츠 준장은 하우스만에게 4가지 공식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1. 한국군사령부가 사태 진압에 적절한 대처를 하지 못하면 즉각 작전통제권을 직접 관장할 것, 2. 기동작전사령부를 구성하고 적절한 감독 행위를 할 것, 3. 결과를 신속히 고문단 본부에 보고할 것, 4. 면밀한 작전 계획을 세워 이를 성공적으로 이행할 것 등이었다. 하우스만․정일화 공저, 앞의 책, 172쪽.
41) Howard W. Darrow, The YEOSU Operation, Amphibious Phase.
42) 미군 고문관들의 역할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 Bruce Comings,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 The Roaring of the Cataract 1947-1950, 264.
43) Robert. Sawyer, 1962, Military Advisors in Korea ; KMAG in Peace and War, Washington, USGPO, 40쪽.
44) 노영기, 2002, 「여순사건과 군대의 변화」,제6회 동아시아평화인권국제학술회의 여수대회자료집, 183~185쪽 참조.
45) 김백일과 송석하는 5기, 최남근은 7기, 백선엽은 9기 출신이었다.
46) 사사키저․강창구편역, 한국전비사상, 1967, 병학사, 44~45쪽. 이 책에는 1941년으로 나왔 으나 사실의 오류이다.
47) 이중 최남근의 이름은 없고 최근철(육군대령, 군수참모를 지냄)만 확인됐다. 그러나 그가 1945년말 김백일․백선엽 등과 함께 월남한 것으로 보아 최남근도 봉천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간도특설대에 근무했을 가능성이 높다. 간도특설대 소속 한인들은 신주백 선생이 소지한 자료에서 확인됐다. 중요한 자료의 확인을 해준 신주백 선생의 호의에 감사한다.
48) 최남근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 노영기, 「육군 창설기(1947년~1949년)의 숙군에 관한 연구」, 1998,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석사논문, 54~56쪽.
49) 로버츠 준장은 송호성의 건강상의 문제로 야전 지휘관으로 부적절하고 야전상황의 평가를 잘 못하고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그가 대한민국에 충성스러우며 많은 군인들에게 존경받는 달변가(good talker)이기 때문에 국방장관의 특사(special representative)로 활용할 것을 제안했다. Headquarters Provisional Military Advisory Group, Apo 235, 12 NOVEMBER 1948.
50) 미국은 송호성이 탈락한 이유로 그가 국방경비대 내에서 김구 추종자들을 모집하고 있다는 소문, 이범석 국방장관의 알력 때문인 것으로 평가했다. Weeka 47, 1948. 11. 20(정용욱엮음, 『Joint Weeka』, 영진문화사, 300쪽).
51) 이때 연대원들을 지휘해서 연대장 배척운동을 전개했던 장교는 제12연대장 백인기였다. Hq, USAFIK, G-2 Periodic Report, 1946. 10. 6~10. 7. #349 ; 전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406~408쪽 ; 사사키저․강창구편역, 앞의 책, 158~160쪽.
52) 사사키저․강창구편역, 앞의 책, 337쪽.
53) 사사키저․강창구편역, 앞의 책, 336쪽.
54) 한용원, 창군, 1984, 박영사, 58쪽.
55) 육군본부, 창군전사, 1980년, 283~284쪽.
56) Howard W. Darrow, The YEOSU Operation, Amphibious Phase. 이 문건은 제5연대 고문관이었던 다로우 대위가 PMAG에 올렸던 보고서이다.
57) Howard W. Darrow, The YEOSU Operation, Amphibious Phase.
58) 전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471쪽.
59) 김득중, 1999, 「이승만 정부의 여순사건 대응과 민중의 피해」, 여순사건 자료 2집, 20~33쪽 참조.
60) 서울신문, 1948. 10. 24.
61) 연합신문, 1949. 2. 9.
62) 오동기가 구속된 것은 그가 소개하여 입대한 두 사람이 최능진의 선거운동을 도와줬기 때문이 었다. 하지만 오동기는 최능진과 만난 적도 없었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967, 한국전쟁사 1 : 해방과 건군, 485~486쪽을 참고.
63) 이에 대해서는 서중석, 1997,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2, 역사비평사, 178~180쪽을 참고.
64) 세계일보, 1948. 10. 24.
65) 조선일보, 1948. 10. 28.
66) 서울신문, 1948. 10. 29.
67) 평화일보, 1948. 11. 5.
68) 국제신문․수산경제신문, 1948. 11. 5.
69) 이승만은 여순사건이 발생한지 12년이 지난 1960년 4월 15일, 4월혁명이 있기 며칠 전 다시 여순사건을 언급했다. 그는 격렬해지는 마산시위의 배후에는 공산당이 있는데, 이들이 어린아이들을 선동하고 있다며 “과거 전남 여수에서 공산당이 일어나서 수류탄을 가지고 저희 부모들에게까지 던지는 이런 불상사는 공산당이 아니고는 있을 수 없는 것”이라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서울신문, 1960. 4. 15. 석간). 여수에서 어린아이가 자기의 부모에게 수류탄을 던졌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이승만의 이때 담화가 처음(?)인데, 이렇게 이승만은 자기 입맛에 맞는 역사를 창조했다.
70) 여순사건은 발생에 대해 서울 AP특파원은 “이 반란사건은 지난 8월 15일에 겨우 수립된 대한민국에 대한 최초의 큰 시련이었다”라고 논평하였고 미국의 포스트지는 “이승만 박사의 정부가 반란에 대하여 확고한 태도로서 처리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즉 안전과 독립을 요구하는 대한정부의 시금석이 될 것이다. 그리고 동 반란사건은 한국문제가 토의를 기다리고 있는 유엔총회의 행동에 필경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다”라고 보도했다(경향신문, 1948. 11. 3).
71) 계엄령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계엄령 선포
본관에게 부여된 권한에 의하여 10월 22일부터 별명(別命)시까지 좌기(左記)와 여(如)히 계 엄령을 선포함. 만일 차(此)에 위반하는 자는 군법에 의하여 사형 기타에 처함.
기(記)
1. 오후 7시부터 익조(翌朝) 7시까지 일절 통행을 금함(통행증을 소지한 자는 차한(此限)에 부재(不在)함).
2. 옥내 외의 일절 집회를 금함.
3. 유언비어를 조출(造出)하여 민중을 선동하는 자는 엄벌에 처함.
4. 반도의 소재를 알 시(時) 본 여단사령부에 보고하여 만일 반도를 은닉하거나 반도와 밀통하는 자는 사형에 처함.
5. 반도의 무기 기타 일절 군수품은 본 사령부에 반납할 것. 만일 은닉하거나 비장(秘藏)하는 자는 사형에 처함.
제5여단 사령부 여단장 육군대령 김백일(사사키 하루다카, 1977, 한국전 비사 제1권, 병학 사, 354쪽). 당시 계엄사령관은 송호성이었는데도, 계엄령을 김백일 제5여단장이 선포한 점은 당시 계엄령선포의 난맥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한편 사사키 하루다카, 위의 책, 354쪽 ; 대한민국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967, 한국전쟁사1 : 해방과 건군, 460쪽 ; 육군본부 전사감실, 1954, 공비토벌사, 부록1쪽 등에는 이 계엄령선포문이 10월 22일 이승만대통령이 선포한 것으로 잘못 적혀있다. 김석학‧임종명, 1975, 광복 30년제2(여순반란편)권, 전남일보사, 168쪽에는 10월 22일 오전 내무부, 국방부 관계자와 서울에 있던 국회의원들의 연석회의에서 계엄령을 선포하기로 결정하였고 이를 이대통령에게 요청하여 22일 정오 계엄이 선포됐다고 나와 있으나, 이 또한 사실 파악의 오해이다. 최윤동 의원의 국회보고에 의하면 22일 비공식적으로 위원장실에 모인 수십명의 의원들은 국회를 급히 소집하고 내무, 국방위원들은 항시 대기하라는 의장의 말을 들은 다음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내무부, 국방부 보고를 듣기로 결론을 내렸다 한다. 황희찬 내무부차관과 채병덕 국방부 참모장의 보고를 들은 것은 23일이었다(국회속기록제1회 제89차, 643쪽).
72) 이승만대통령은 10월 22일 “계엄령을 내렸다고 외국에서 전보가 들어오고 있는데, 사령관이 내 린 것은 해당지구에만 내린 것이다”라고 하여 계엄선포 사실을 확인했다(경향신문․동광신문, 1948. 10. 23).
73) 계엄포고문은 다음과 같다. “계엄고시 대통령령으로 단기 4281년 10월 25일 순천, 여수지구에 임시 계엄이 선포되고 따라서 해당 작전지구 일대내 지방행정사무 및 사법사무로서 군사에 관계있는 사항은 직접 본관이 관장하며 특히 군사에 관계있는 범죄를 범한 자는 군민을 막론하고 군법에 준거하여 엄벌에 처할 것을 이에 고시함. 4281년 10월 26일 대한민국 호남방면 군사령관“(동광신문, 1948. 10. 28).
74) 한편 여순지구에 내려진 계엄령 문구에는 계엄사령관이 누구인지도 분명하게 적시하지 않고 있었다. 11월 17일 대통령령 31호로 공포된 ‘제주도지구 계엄선포에 관한 건’에는 “계엄사령관은 제주도 주둔 육군 제9연대장으로 한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75) 계엄법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정부는 구체적인 지침도 내릴 수 없었다. 제주도에 계엄령을 발포하려 했을 때, 계엄사령관 자격을 갖고 있었던 송요찬 제9연대장은 “위에서 계엄령을 내리라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하는거냐”고 물었다고 한다(제민일보 4·3취재반, 1998, 4·3은 말한다5, 전예원. 389쪽). 더욱이 여순지구 계엄령이 제주지역보다 더 먼저 발포되었던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여순지구 계엄령에 대한 자세한 법적 규정은 진압군 측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76) 「계엄령이란 무엇인가?」, 동광신문, 1948. 11. 9. 메이지 15년(1882)에 포고되어 1913년부터 조선에 적용된 계엄령의 내용은 김순태, 1999, 「제주4․3 당시 계엄의 불법성」, 제주4․3연구, 역사비평사, 172~174쪽을 참고. 동광신문은 이 법의 주요부분을 요약한 것이다.
77) '국방경비법'은 미군정 당시 조선경비대에 적용되는 군형법, '해안경비법'은 해안경비대에 적용되는 군형법의 형식을 띠고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은 거의 같으며 실제로 많이 적용되어 사실상 군형법의 역할을 한 것은 국방경비법이다. 어쨌든 실제로 미군정에 의하여 공포된 일이 없으면서 미군정법률처럼 적용되었다는 점에서 이 두 '법률'은 똑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는데 이 글에서는 편의상 '국방경비법'이라고만 쓰기로 한다. 따라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이 글에서 말하는 '국방경비법'의 문제는 '해안경비법'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국방경비법의 내용은 陸軍本部, 法務五十年史(1996), 100-103쪽, 해안경비법의 내용은 海軍本部, 海軍法務 五十年史(1996), 54-62쪽 참조.
78) 1962.1.20.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군형법(법률 제1003호)과 군법회의법(법률 제1004호)을 제정. 공포하면서 그 부칙(군형법 부칙 제5조, 군사법원법 부칙 제8조)에서 '국방경비법'과 '해안경비법'을 폐지하였다. 이처럼 '국방경비법'과 '해안경비법'은 군형법과 군법회의법이 공포될 때까지 군 형사법의 역할을 하였다.
79) 보안관찰법 부칙 제2조 제2호에 의하면 국방경비법 제32조와 제33조 위반으로 복역한 사람은 보안관찰법 제2조에 정한 "보안관찰대상범죄"를 범한 것으로 보아 보안관찰처분을 할 수 있게 하고 있다. 보안관찰처분은 시민적.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International Covenant on Civil and Political Rights)이 보장하는 양심과 사상의 자유, 그리고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점에 관하여는 UN Doc. CCPR/C/79/Add. 6, 25 September 1992; Report on the mission to the Republic of Korea of the Special Rapporteur on the promotion and protection of the right to freedom of opinion and expression!, Mr. Abid Hussain, submitted pursuant to Commission on Human Rights resolution 1993/45. UN Doc. E/CN.4/1996/39/Add.1, 2 November 1995 참조. 이 글에서는 보안관찰법과 보안관찰처분의 문제점에 관하여는 다루지 않고 단지 '국방경비법'의 문제점만 언급한다.
첫댓글 (강교수님의 추신입니다),
하세요 27일 늦은 1:30에 향린교회향우실에서 있을 평화소모임 발표 과련 논문을 보냅니다. 이영일 교우께서 심혈을 기울여 작성한 논문입니다. 한 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당일 원고는 배포하지 않습니다. 많은 논의가 있기를 기대합니다. 일요일 뵙겠습니다. 향린교회,강정구교수 올림
저런 나쁜 이승만을 대통령이라고 ,,저넘도 개독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