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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0 열반 상기 6, 죽음관 4가지
<아비담맛타상가하> 9장 깜맛타나(kammaṭṭhāna. 수행 주제) : 우빠사마눗사띠(열반 상기) (6)/ 죽음관 4가지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붇닷사
8. ①Buddhānussati ②dhammānussati ③saṃghānussati ④sīlānussati ⑤cāgānussati ⑥devatānussati ⑦upasamānussati ⑧maraṇānussati ⑨kāyagatāsati ⑩ānāpānassati ceti imā dasa anussatiyo nāma. |
제9장 수행(깜맛타나. 명상)의 장에서 계속 상기하면 좋은 것 10가지 중에서 우빠사마눗사띠, 열반에 대한 상기입니다. 열반은 제일 좋은 대상이니까 떠올리면 제일 좋겠죠. 열반을 모르지 않습니까? 모르니까 들은 것들을 조합해서 떠올리면 됩니다. 그중에서 열반 게송을 계속하겠습니다.
1. viññāņṁ anidassanaṁ anataṁ pabhaṁ. ettha āpo ca pathavī tejo vāyo na gadhati viññāņassa nirodhena etthataṁ. uparujjhyati 2. sadevakassa lokassa ete vo sukhasmmatā yattha cete nirujjhyanti Taṁ. team. dukkhasammataṁ. 3. sukhaṁ dittham ariyebhi sakkāyassa nirodhanaṁ. 빠라맛타로 분명한 5온의 소멸에서 오는 열반의 행복을 성인들은 보았다. paccanīkan idaṁ hoti. sabbalokena passataṁ. 이 열반을 직접 본 참사람들은 어리석음으로 덮인 모든 세상에 역행한다. |
열반 게송 : 성인(聖人)들은 세상에 역행한다.
5온은 분명히 존재하는 빠라맛타입니다. 5온은 물질과 정신이죠. '나'가 아니고 물질과 정신뿐인데 나라고 알고 있는 5온. 분명히 존재하는 5온의 소멸로, 열반의 행복(sukhaṁ)을 성인들(ariyebhi)은 딧탕(ditthaṁ), 지혜의 눈[慧眼]으로 보았다. 빠라맛타로서 분명히 존재하는 5온이 소멸한 자리에 있는 열반을 아리야들은 자신들의 지혜의 눈으로 분명히 보았다. 5온만 한 고통이 없다고 했으니까, 5온이 소멸한 자리에 있는 열반, 고통이 없어졌으니까 행복이 있겠죠. 열반을 아리야들은 자신의 지혜의 눈으로 분명히 봤다는 거죠.
자기들은 본 것이지만 범부들은 보지 못했는데 자기들은 눈을 감고 본 거라서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도 없고. 그 행복을 분명히 보았다. ‘이당(idaṁ)’, 많은 범부들의 지혜로는 볼 수 없는 그 열반을. 여기서 ‘이당’은 열반인데 지혜가 둔한 범부들은 볼 수 없는 ‘이 열반’이라는 뜻입니다. 그 열반인데 아리야들이 지혜의 눈으로 본 그 열반을 범부들의 지혜로는 볼 수 없다는 거죠. 범부들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이 열반을 ‘빳사땅(passataṁ)’거듭해서, 분명하게, 여러 번 본 아리야들은, 범부들이 보지 못한 것을 아리야들은 자신의 눈으로 직접 여러 번 봤다. 전해들은 것이 아니라, 영화관이나 사진으로 보는 것과 직접 그 현장에서 보는 건 다르겠죠. 다른데 실재하는 열반을, 도저히 상상할도 수 없는 것을 자기의 지혜로 본 것이죠.
삽발로께나(sabbalokena), 어리석음으로 덮이고 어리석음과 집착으로 만들어진 모든 세상, 어리석음과 집착으로 만들어지는 게 세상이죠. 어리석음과 집착 없이 만들어지는 세상을 로꿋따라(lokuttara. 출세간)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벗어나는 세상이죠. 나머지 세상들은 욕계 색계 무색계 전부 다 삽바 로까(sabba-loka), 모든 세상이 다 어리석음과 집착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무지와 집착이 있어야 만들어지는 세상, 이 어리석음과 집착으로 만들어진 모든 세상에, 빳짜니까 호띠(paccanīka hoti), “이 세상에 반대한다, 역행한다.” 이런 뜻입니다. 어리석음과 집착으로 만들어진 모든 세상으로부터 벗어난다. 반대한다, 거부한다, 저항한다. 이런 뜻입니다.
빠라맛타로서 분명히 존재하는 5온이 소멸한 행복을 아리야들은 자신들의 지혜의 눈으로 분명히 보았다. 근데 범부들의 지혜로는 볼 수 없는 그 열반을, 직접 거듭해 본 아리야들은 어리석음과 집착으로 만들어진 이 세상에 반대한다. 역행한다.
마라나눗사띠 : 죽음에 대한 상기 = 죽음관
그다음 일곱 번째 상기하면 좋은 것이 죽음에 대한 상기(마라나눗사띠 maraṇānussati)입니다. 우리는 열반은 알 수 없지만 죽음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가까이서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열반은 못 봤지만 죽음은 많이 봤죠. 과거생에 수 없이 죽었을 것이고 가까운 이들과 죽음으로 여러 번 헤어졌겠죠. 그래도 그 순간뿐 잊고 지내니 상기하라는 것입니다. 죽음을 잊고 살지 말고 죽음을 상기하면 번뇌가 식습니다. 죽음에 대한 상기입니다. 나의 죽음을 떠올리는 거죠.
이것은 하기 쉬울 것 같습니다. 이게 제일 쉬울 것 같은 마라나눗사띠, 마라나(maraṇa)+아눗사띠(anussati), 죽음에 대한 거듭된 사띠(sati), 상기, 떠올림, 죽음을 거듭해서 상기함입니다.
죽음에 네 종류가 있습니다.
첫 번째 사뭇체다 마라나(samuccheda-maraṇa. 완전한 죽음), 아라한들이 윤회의 고통이 완전히 다 끊어져서 대열반에 들 때, 마지막 죽음이죠. 돌아오지 않는 열반에 들 때 윤회가 완전히 딱 끊어진 상태입니다. 아라한이 되어도 5온의 고통은 남아 있지 않습니까. 아라한이 되면 번뇌는 사라졌지만 몸이 있고 업의 결과들이 오고 그래서 고통이 있죠. 그분들은 두 번째 화살을 맞지는 않지만 첫 번째 화살에 의한 고통이 있죠. 근데 그것도 완전히 없어지는 것, 마지막으로 죽을 때 대열반에 들 때 없어지죠. 이렇게 죽는 죽음이 사뭇체다 마라나입니다. 완전히 잘리는 죽음이라는 거죠. 큰 나무의 둥치가 완전히 잘려서 다시 자라지 못하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죠. 사뭇체다(samuccheda)는 자른다는 뜻입니다. 나무를 잘라서 넘어지게 하듯이 죽는 죽음, 아라한들의 죽음입니다. 번뇌가 소멸한, 다시는 생을 만들지 않는, 다시 생을 만드는 어리석음과 집착이 없는 자들의 마지막 죽음이 사뭇체다 마라나입니다. 완전히 잘리는 죽음이라는 뜻이죠. 다시 이어지지 않는 죽음. 우리의 죽음은 잠시 죽고 그리고 빈틈없이 다음 생으로 바로 이어서 태어나서, 또 좋아 하면서, 죽을 때는 힘들었는데, 금세 또 까맣게 잊어버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영원히 살듯이 방일합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는 카니까 마라나(khaṇika-maraṇa). 상카라의 소멸, 소멸하는 그 순간, 카니까 마라나입니다. 상카라는 물질과 정신이죠. 상카라는 무상한 거죠. 모든 게 무상한데 여기서 상카라의 무상은 물질과 정신, 5온의 무상함입니다. 내 몸과 내 정신, 정신적인 것들의 무상은 순간순간 생기고 순간순간 소멸하죠. 순간 일어났다가 금방 사라지는 이 물질과 정신이 소멸하는 그 찰나, 소멸했지만 금세 또 생깁니다. 왜냐하면 어리석음과 집착이 있어서 금세 또 생깁니다. 소멸하는 그 찰나, 그 찰나의 마라나를 카니까 마라나라고 합니다. 카니까 마라나, 순간 죽음인 거죠. 한순간 소멸하는 딱! 그 찰나만 죽습니다. 금세 또 다시 생깁니다. 또 자띠(jāti) 태어남이 있죠. 죽어도 두려워하지 않고 죽으면 됩니다. 금세 또 태어날 거니까. 어디에 태어날지 모르지만. 그 소멸하는 순간 그 카니까 마라나. 카니까(khaṇika), '순간' 죽음입니다. 찰나의 죽음. 계속 찰나찰나 죽고 있죠. 모든 중생은 찰나찰나 죽고 있습니다. 인간의 죽음도 사실은 카니까 마라나죠.
이번 생에 입태했던 욕계 결과의 마음이 이번 생에 끝이 나면 이게 곧 카니까 마라나죠. 카니까 마라나이기도 하고 이번 생의 죽음이기도 하고, 그것도 카니까 마라나이고, 또 지금도 계속 소멸하고 있는 생기고 소멸하는 물질과 정신의 소멸, 이것도 카니까 마라나죠, 그 상카라 물질과 정신(5온)이 소멸하는 그 찰나들. 5온이 사라지는 그 찰나찰나들이 카니까 마라나, 순간의 죽음입니다.
세 번째는 삼무띠 마라나(sammuti-maraṇa. 관념의 죽음). 나무가 쓰러지고 건물이 무너지고 이런 밖의 물상(사물)들이 죽는 것들입니다. 물질들을 보면 계절이 바뀌고 꽃이 시들고 지고 이러는 것들, 이렇게 죽는 것들. 건물이 불타거나 지진으로 무너지는 것, 나무가 죽는 것들 이렇게 죽는 것, 이런 것들도 죽음이죠. 이것을 삼무띠 마라나, 관념의 죽음이라고 합니다.
계속 변하는 것. 좀 전에 말한 상카라의 소멸은 위빳사나에서 말하는 지혜가 있는 눈으로 볼 때의 소멸입니다. 위빳사나 지혜로 볼 때 내가 관찰하고 있는 대상이 순간 소멸하는 것, 이게 상카라 카니까 마라나(saṅkhārā-khaṇika-maraṇa)이고, 지금 말하는 것들은 위빳사나 지혜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살면서 보는 죽음들이죠. 쓰고 있는 것들에 끝이 있지 않습니까? 쓰는 물건들이 다 언젠가 폐기 처분되는 것, 그렇게 끝나는 것을 관념의 죽음이라고 합니다.
그다음 네 번째 지위띤드리야 우빳체다 마라나(jīvitindriya-upaccheda-maraṇa. 생이 끝나는 죽음). 죽음은 한 생이 끝나는 건데, 우리 인간 생이 끝나는 것, 집에서 키우는 개나 고양이가 죽고, 소가 도살장에서 죽는 것들입니다. 이렇게 한 생이 끝나는 것, 지위띤드리야 우빳체다 마라나라고 합니다. 지위띤드리야(jīvitindriya. 생명기능)가 끊어지면서 오는 죽음. 지위띤드리야, 생명을 다스리는 힘의 끊어짐이죠. 목숨이 계속 유지되다가 그거 딱 잘리는 그 순간, 좀 전에 말한 카니까 마라나, 상카라의 소멸, 물질과 정신의 소멸을 카니까 마라나라고 했습니다.
또 우리가 이번 생에 욕계 선업 결과의 마음으로 재생연결한 뒤에, 그 선업 결과의 마음이 쭈띠(cuti. 이번 생의 마지막) 마음으로 죽을 때, 그게 카니까 마라나이기도 합니다. 지위띤드리야 우빳체다 마라나, 그러니까 생명을 관장하는 마음부수가 잘리면서 오는 죽음과 겹치는 부분이 있죠. 이렇게 죽는 것이 보통 우리가 아는 유정물(중생)들의 죽음입니다. 정신이 있는 중생들의 죽음인 거죠. 지위띤드리야 우빳체다 마라나, 한 인생이 끝나면서 죽는 죽음. 이렇게 죽음(마라나)에는 네 가지가 있습니다.
다시 정리해 보면
1. 아라한들이 윤회의 고통이 완전히 끊어지면서 돌아오지 않는 열반에 들면서 죽는 죽음, 사뭇체다 마라나,
2. 상카라(물질과 정신)가 소멸하는 매 찰나마다 죽는 카니까 마라나, 아비담마에서는 이걸 죽음이라고 하죠. 이 카니까 마라나, 우리는 계속 순간순간 죽고 있고, 그래서 한 생이 끝나고 죽는 것도 여기에 넣어서 생각할 수 있는 거죠. 이것은 매 순간 죽는데 한 생이 죽는 것이 별반 다르지 않고 다 같다고 봅니다.
3. 삼무띠 마라나는 알고 있는 물상들의 죽음, 쓰고 보이는 것들이 끝이 나는 거죠. 나무가 죽고 건물이 무너지고 꽃이 시들고 이런 것들, 폐기처분되고 이런 것들, 관념의 죽음입니다.
4. 한 생이 끝나는 것, 지위띤드리야 우빳체다 마라나입니다. 한 생이 끝나면서 죽는 것입니다.
보통 우리는 아라한의 죽음은 알지 못합니다. 아라한의 죽음을 무슨 수로 알겠습니까? 아라한의 죽음은 우리랑 상관이 없다고 <바사띠까>에 나와 있습니다. 카니까 마라나, 상카라의 소멸, 물질과 정신이 순간순간 소멸할 때 아는 그 찰나 죽음, 이것은 지혜가 있어야만 볼 수 있다. 지혜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마라나이다. 그렇죠. 물질과 정신이 순간 소멸하는 거 보기 어렵겠죠. 이건 지혜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마라나입니다. 지혜의 눈으로 안 보고 숙고 지혜로 볼 수도 있겠죠.
'목숨이 끝나는 죽음'을 상기하여 경각심이 생긴다.
그다음에 세 번째 관념적인 마라나, “삼무띠 마라나는 경각심이 생길 수 없다. 물상들의 죽음, 나무가 죽고 시들어 보이는 것들이 폐기처분되는 것, 쓰레기가 되어 더 이상 못 쓰게 되는 것들은 경각심을 일으킬 수가 없다.”
왜 경각심을 일으킬 수 없다고 하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충분히 경각심을 일으킬 수 있을 것 같은데. 쓰다가 지금은 아무리 좋아도 언젠가는 깨지고 버려야 되고 망가져서 버려야 된다는 걸 알면, 집착도 덜하게 되고 그리고 집착할 만한 것들을 만들지 않게 되고 폐기 처분될 때도 덜 아쉽고 덜 아깝고, 쓸데없이 시간을 쓰지 않게 될 텐데, 충분히 경각심을 일으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건에 집착하지 않습니까? 물건에 집착해서 물건을 많이 사죠. 그런데 이 책에는 이 삼무띠 마라나는 경각심을 일으키는 데 적정하지 않다고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세 가지 마라나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중생들의 죽음, 생이 끝나는 죽음, 지위띤드리야 우빳체다 마라나, 목숨을 관장하는 마음부수들, 물질과 정신 두 가지 지위띤드리야가 있죠. 이 두 가지가 잘리는 마라나, 그게 끝나는 죽음만을 죽음이라고, 그것을 보며 경각심을 느낄 수 있다. 이걸 보면서 마라나눗사띠, 죽음에 대해서 상기할 수 있다고 나와 있습니다.
<앙굳따라 니까야>에 네 가지 말에 대한 얘기가 나오죠. 말 네 마리가 있다.
1. 말은 채찍의 그림자만 보고도 달리고,
2. 말은 채찍이 털에 닿으면 달리고,
3. 말은 채찍이 살에 닿으면 달리고,
4. 말은 채찍이 뼈에 닿아야 달린다.
1. “옆 마을에 누가 죽었다더라.” 이런 말을 듣고 “죽음에서 빨리 벗어나야 되겠다.” 이게 채찍의 그림자만 보고 두려워서 달리는 말과 같고,
2. “우리 마을에 누가 죽었다더라.”는 말을 듣고 “죽음에서 빨리 도망가야 되겠다.” 싶어서 달리는 말(= 채찍이 털에 닿으면 달리는 말)이 있고,
3. 자기 가족이 죽는 것을 내가 보고 죽음이 두려워서 달리는 말이 있고(= 채찍이 살이 닿으면 달리는 말),
4. 자기가 아주 아주 심하게 아파서 죽음에서 벗어나야 되겠다. 죽는 것은 진짜 무섭겠구나. 죽을 때 아주 아프겠구나. 이렇게 생각해서 달리는 말(= 채찍이 뼈에 닿으면 달리는 말)이 있다.
네 종류의 말이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속하시는 것 같습니까? 달리지 않는 말은 말이 아니라 동상이지요. 아니면 게으름뱅이거나. 네 종류의 말이 있다.
법문으로 돌아가서 지위띤드리야 우빳체다, 죽음을 보고 상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옆 마을에 사람이 죽는 것도 봤고, 우리 마을에서 죽었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우리가 다들 오래 살았으니까, 그리고 친척 친지들이 죽는 것도 봤고, 나도 아파봤고. 안 아파 본 사람들은 모를 수도 있겠네요. 죽음을 상기하기는 쉽습니다. 전 텔레비전에서 주로 봤던 것 같은데 어릴 때 tv에서 많이 봤습니다. tv에서 연기자들이 죽는 거 보고 “죽으면 되게 힘들겠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죽음들 떠올리시면 됩니다.
멀리 있는 옆 마을 사람의 죽음과 가까이 있는 죽음과 나한테 다가오는 죽음에 대해서 상기하는 마라나눗사띠입니다. 다음 시간에 “어떻게 마라나눗사띠, 죽음을 어떻게 상기하는가?”에 대해서 하겠습니다.
회향하겠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공덕이 우리를 번뇌의 소멸로 이끌기를.
이러한 우리의 공덕을 모든 존재들에게 회향합니다.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사-두 사-두 사-두
편집자: 담마삐야
* 2023-06-20 인터넷
(https://us05web.zoom.us/j/4694074327?pwd=b2pNRUk4VzExbWFMSitFa1Jkc0wyUT09)으로 하신 법문을 필사하였습니다. 필사 후 위뿔라냐니 식카와띠님께 보여드리고 요약, 수정, 추가한 부분이 있습니다.
https://cafe.naver.com/dhammadipakorea/389
일부용어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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