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자의 일상
허봉조
차가운 겨울, 두툼한 외투 주머니에서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준 밀감 한 알이 입가에 훈훈한 미소를 그려준다. 직장으로부터 은퇴한 지 7년 차, 나름대로 분주한 시간을 보내면서 잊고 싶은 일보다 웃을 일이 더 많으니 행복하다고 해야겠다.
도서관에서 10회에 걸쳐 매주 다른 강사가 다른 내용의 강의를 하는 ‘신노인 포럼’이라는 제목의 무료 강좌를 들었다. 메타버스, 인공지능 등 급변하는 사회의 물결 속에 적응해야 하는 시니어로서 알아두면 좋은 새로운 지식이나 정보를 깊이 있게 만나볼 수 있는 기회였던 것 같다.
그날은 ‘이 정도는 알아야, 신노인이다’라는 명쾌한 주제로 강의가 시작됐다. 강의 도중 ‘페이스북, 블로그 등 사회관계망서비스 활동을 하시는 분이 있느냐’는 질문에, 앞쪽에서 오른손을 가만히 들어 보였다. 강사는 예상 밖이라는 듯 놀라운 표정으로 다른 수강생들의 손뼉을 유도하며, 작은 밀감 하나를 상으로 주었다. 우습기도 하고,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했다.
왕복 3시간 가까이 버스와 지하철을 번갈아 타야 하는 거리지만, 정해진 시간에 배울 것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뿌듯한지. 수업을 마치고 다른 수강생과 가벼운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당신의 연세가 여든여섯이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 마스크로 가려진 얼굴에 조금 연배가 높으리라 짐작만 했는데, ‘나도 그맘때쯤 저렇게 밝은 표정으로 도서관 수업을 들을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해가 거듭될수록 직장생활을 할 때는 생각지 못했던 일이 참 많았음을 깨닫게 된다. 30년 가까이 한 아파트에 살면서도 주변을 제대로 둘러볼 여유를 갖지 못했다. 그리고 사회에서는 시니어들이 어떤 활동을 어떻게 하는지도 몰랐다. 가까운 사람을 만나 적당히 시간을 때우는 정도로만 알았을 뿐, 새로이 무언가를 시작하기에는 늦었을 것이라는 어설픈 선입견만 갖고 있었던 것이 솔직한 표현이다.
하지만 학교와 직장을 떠나서도 배울 것과 할 일이 무수히 많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자격증을 취득하거나 낯선 분야의 이론이나 상식을 공유하고, 다방면의 동아리 모임이나 봉사활동에도 참여한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이곳저곳 두루 살피며, 날로 새로워지는 모습과 나무 이름과 꽃이 피고 지는 시기를 알게 된 것도 보람이 아닌가 싶다.
사회에서는 친구의 범위도 매우 넓고 다양하다. 배움에는 연령제한이 없다는 사실과 마음먹기에 따라 비슷한 연령대에서도 노화의 속도가 천차만별임을 인정하게 된 것도 소중한 일이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는 상당하다. 고장이 날까 두려워 멀리하는 전자기기 사용도 주의사항이나 요령을 익히면 훨씬 쉽고 빠르게 접근할 수 있다는 것도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50세 이후의 운명은 스스로 결정한다’라는 말이 있다. 미움과 욕심은 버리고, 조금은 느리고 불편한 것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밖으로 나가서 따스한 햇볕을 쬐고, 이웃과의 대화에 참여하며 소통을 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일이다. 적당한 무질서와 주변 환경에도 적응하고, 혼자서도 커피를 마시고 밥을 먹으며 느긋하게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습관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은퇴자의 일상을 더 가볍게 하는 것은, 등교하는 학생처럼 가방을 메고 씩씩한 발걸음을 옮길 수 있을 때가 아닌가 싶다. 이왕 걷는 길, 힘든 표정으로 마지못해 걷는 것보다 나날이 달라지는 꽃나무와 새소리에 관심을 기울여보는 것도 달콤한 묘미가 될 것이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라는 말처럼 건강하지 못하면 취미활동은 물론 친구나 지인을 만나는 일도 어려워진다.
한 주가 지나고 나면 다음 한 주의 일상을 미리 그려보기도 하니, 하루하루 나만의 여행을 즐기는 기분이다. 여행은 꼭 배낭을 메고 어딘가로 떠나야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하는가에 달려 있다. 영화나 공연을 감상하러 가는 길도 여행이 될 수 있고, 지인을 만나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것 또한 여행이 될 수 있다.
삶의 질을 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시대다. 자유롭게 이동하고, 존중받으며 스스로 즐길 줄 아는 삶. 세월 가는 속도는 연령에 비례한다는 우스갯소리처럼 시간은 정말 날개 달린 새처럼 훨훨 날아다니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분야의 호기심과 참여 활동이 여든여섯 노인을 젊은이처럼 보이게도 하니, 놀라운 일이다.
동아리 활동, 스터디그룹의 어학 공부, 외부 수업 참석, 만 보 걷기, 지인과의 만남 등 나름대로 빠듯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간혹 대형서점이나 중고 서점을 찾아가 책을 뒤적이거나, 철도역이나 터미널에서 사람 구경도 한다. 그런 중에도 주중 하루 정도는 완전히 비워놓고 있다. 예정에 없던 특별한 일이나 비상시에 대비하기 위해서라고 할까.
오랜 직장생활로 친숙한 컴퓨터 등 전자기기 활용으로, 젊은이들의 전유물처럼 느껴지는 SNS 활동을 한 덕분에 받은 작고 단단한 밀감 한 알은 아직 입으로 가져가지 못하고 있다. 주머니 속에서 조물조물 손때가 묻도록 달달한 온기를 전해주는 것이 한층 고맙게 여겨지니 어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