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개등대
마산에서 가포를 지나 그리 멀지 않은 해안에 사궁두미라는 어촌이 있다. 지명에는 으레 그 유래가 따르기 마련인데 워낙 특이해 현지를 찾아 원주민 할머니를 만나 물어도 정확한 어원은 잘 몰랐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봤더니 다양한 내용이 올라와 있었다. 뱀 궁둥이, 뱀의 머리와 꼬리, 뱀이 활 모양으로 휘어진 지형에다 임진왜란 때 활을 쏘던 병사들이 머물렀다는 곳이라고 했다.
사궁두미는 덕동생활하수처리장 근처다. 현동에서 유산삼거리 오른쪽으로 돌면 구산면 수정으로 간다. 왼쪽으로 가면 덕동마을이다. 가포에서 가면 KBS송신소를 지나 덕동마을에서 왼쪽 해안선 따라 굽이굽이 꼬부랑길을 따라 들어간 막다른 곳에 있는 한적한 갯마을이다. 횟집이 서너 집 되고 민박집도 있다. 텃밭 몇 뙈기에 홍합 양식과 자리그물로 활어를 잡아 생계를 잇는 어촌이다.
사궁두미는 웬만한 사진작가들은 잘 알고 있는 일출 명소다. 바다와 작은 섬에서 붉은 기운과 함께 불쑥 솟는 아침 해를 렌즈에 바로 담을 수 있는 곳이다. 마을의 민박집도 일출을 담기 위해 외지에서 찾아오는 출사객을 위한 숙소들이었다. 방파제에서 손에 잡힐 듯이 가까운 섬이 막개도다. 막개도엔 그림 같은 모개등대가 있다. 밤이면 합포만으로 드나드는 선박의 항로 길잡이다.
이월 둘째 토요일은 정유년 정월대보름날이기도 했다. 간밤까지 제주와 호남지역은 눈이 많이 내렸고 전국이 한파주의보가 내릴 만큼 겨울 막바지 강추위가 엄습했다. 우리 지역은 맑았지만 최저기온이 빙점 아래 떨어져 쌀쌀한 아침이었다. 집 앞에서 어시장으로 가는 좌석버스를 탔다. 그곳에서 덕동 가는 농어촌버스를 환승했더니 자산동에서 산복도로를 거쳐 다시 해안가로 내려왔다.
옛날 가포유원지는 매립이 되어 공장들이 들어섰다. 그 바깥은 우뚝한 교각에 쇠줄이 예각으로 좌우 균형을 잡아당기는 사장교량 마창대교가 드러났다. 낮은 고개를 넘으니 택지개발지구인 듯했다. 원주민이 떠난 자리 위치한 초등학교는 문을 닫지 않아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거렸다. 인근 길가 주택은 이주가 완료되어 산언덕에는 문화재 시굴구획이 그어져 작업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가포 KBS송신소를 지나니 아늑한 포구가 나왔는데 그 마을 이름이 날개였다. 합포만에서 바깥으로 나가는 포구라는 의미로 짐작해보았다. 밀물과 썰물을 들물과 날물이라 하지 않은가. 날물은 물이 빠져나가는 썰물과 같다. 날개는 바깥 바다로 나간다는 뜻이지 싶었다. 덕동생활하수처리장을 앞두고 매립지가 나오고 덕동 본동이었다. 덕동 본동은 하수처리장에서 이주한 마을이었다.
덕동 본동에서 내려 포구로 내려섰다. 날씨가 쌀쌀해 귀가 시려왔다. 방파제엔 조업을 나가지 않은 어선이 여러 척 묶여 있었다. 어딘가 설치된 스피커에선 마을 이장이 대보름날 행가가 회관에서 열리니 동민 여러분이 모두 나와 주십사는 안내 방송이었다. 구제역 파동으로 달집태우기 행사는 취소했지만 풍물패와 실내 윷놀이는 진행된다면서 점심은 뜨끈한 국밥을 대접한다고 했다.
나는 집을 나서면서 목적지로 삼은 사둥구미를 해안선을 따라 걸었다. 근년에 와서 장비가 좋아 차도가 생겨났지 예전엔 찻길도 없이 벼랑길 타고 갔거나 바깥에서 어선만이 접근되던 외진 갯마을이었다. 사둥구미를 가는 길에서 덕동과 인접한 또 다른 포구 골매마을이 있었다. 인가라곤 불과 서너 집에 지나지 않은 작은 포구였다. 골매는 구산면소재지 수정으로 넘는 고개 근처였다.
사둥구미를 가기 전 살개 포구가 나왔다. 인가라곤 굿당 서너 채가 전부였다. 바닷가에는 성불사 용왕굿당을 비롯해 전문적인 무속인촌이었다. 살개를 지나 산모롱이를 돌아가니 사둥두미였다. 여남은 가구가 사는 동네는 민박도 한산하고 횟집도 썰렁했다. 두어 시간 전 아침 해는 이미 솟아 해수면은 윤슬로 반짝거렸다. 무인도 막개도는 방파제와 가까웠다. 모개등대는 그림 같았다. 17.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