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비마다 그가 있었다 [현임종]
미국 뉴저지에 사는 P는 나와 친형제처럼 지내는 친구다.
P부부는 내가 봉헌한 땅에 제주교구 연동성당을 신축하고 그 봉헌식을 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머나먼 길을 일부러 찾아와 축하해주었다.
성당 맨 앞줄 내 옆자리에 같이 앉아 미사에 참례한 그들은 천주교 신자가 아니어서 지루해할까 걱정했는데 오히려 미사의 엄숙함에 흠뻑 빠졌다고 했다.
그 부인은 미국에서 세례를 받고 싶었지만 성당이 너무 멀어 혼자서 교리공부를 했는데 고향에 온 김에 세례를 받을 수 있는지 물었다. 부인의 소원이 매우 간절한 것 같아 신부인 내 아들에게 특별 세례성사를 부탁했더니 "아버지가 앞으로 그분의 신앙을 책임진다고 하면 세레를 주겠다"고 했다.
그 소식을 듣고 하늘을 날 것처럼 좋아하던 부인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그 뒤 워싱턴에 살고 있는 P의 셋째 누이동생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오래된 신자인 자신보다도 뒤늦게 세례를 받은 올케언니가 성당 활동에 더 적극적이라면서 나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온 것이다.
사실 P의 우정과 도움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로 성장할 수 없었다. 1948년, 나는 제주북초등학교에 다녔는데 제주 4.3사건이 악화되는 난리통에 우리 집과 함께 책 보따리도 모두 불에 타 없어져 버렸다. 계엄령이 내려져 며칠 만에 빈손으로 학교에 갔더니 P는 마침 한 학년 위의 누님이 보던 책이 있으니, 집에 같이 가서 밥도 먹고 책과 공책도 가져가라며 나를 끌어당겼다.
그날 모처럼 굶주린 배를 채우고, 책과 학용품을 얻어 피난지인 큰누님 집으로 갔지만 그날 누님 집도 불이 나 P가 준 책과 공책도 모두 타버렸다.
그날 밤 우리 가족은 불타버린 엣 집터로 돌아왔지만 그곳에는 젊은 청년들이 숨어있었다. 그들은 그곳도 안전한 곳이 못된다며 피난 가라고 떠밀었다.
할 수 없이 우리는 그해 겨울을 눈 쌓인 한라산 속에서 추위와 배고품 그리고 공포에 떨며 지냈다. 이듬해 봄, 군인들에게 붙잡혔는데 하산하는 길목에서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인 김종철 선생님을 우연히 만났다.
선생님의 도움으로 수용소를 거쳐 석방되었으나, 집도 없고 먹을 것도 없는 처량한 신세였다.
그래도 학교에는 가봐야겠다는 생각에 등교했더니 친구들은 모두 내가 죽은 줄 알고 있었는데 살아 돌아왔다며 기뻐했다. 그런데 P가 보이지 않았다. 그 집 식구들은 모두 서울로 이사 갔다는 것이다. 나는 참으로 슬펐다.
중학교 진학을 포기한 나는 시골에서 부모님을 도와 농사도 짓고 땔감장사를 하면서 겨우 연명하고 있었는데 김종철 선생님의 도움으로 천주교회에서 운영하는 신성여중 급사로 취직했고, 뒤늦게 오현중학교 야간부에 입학도 했다.
고학을 하면서도 직장이 있어 잠시나마 평온한 생활이 이어지던 중 6.25가 터졌다. 나는 자원입대했는데 교전 중 다리부상으로 명예제대하여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제주 미국공보원에서 일하며 오현중 3학년으로 복학했는데 마침 피난 내려온 P가 오현고등학교 1학년에 다니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P와 나는 정말 형제처럼 지내게 되었다. P의 부모님과 가족들은 나의 어려운 처지를 가엽게 여겨 나를 한식구로 여겨주었다.
그 귀한 손목시계를 아들딸과 똑 같이 나에게도 사주셨고 가족끼리 야유회를 가거나 외식을 해도 나를 불러 데리고 다녔다.
그때는 전기가 일반선은 11시에 끊겼지만, 특선은 밤새 들어왔다. 미국공보원 숙직실에서 지내던 나는 특선 전기를 사용할 수 있어서 P와 함께 밤늦게까지 맘껏 공부했다. 그 후 P는 서울대 의대에, 그 뒤를 따라 나는 서울대 상대에 합격했다.
등록금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그의 부모님께서 해결해주셨다. 이렇게 그분들은 내 인생 고비고비마다 결정적인 도움을 주셨다. P는 군의관 생활을 마치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나는 서울에 살고 계신 그의 부모님을 자주 찾아뵙고 벗을 해드리곤 했다. 그리고 그의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나 역시 아들의 심정으로 상주 역할을 했다.
나는 신성여중 급사시절 세례를 받고 성당에 다녔지만, P의 식구들에게 한 번도 성당에 다니라고 말해보지 못했다. 그 부인도 이번에 세례를 받았으니 이제는 P 혼자만 남았다.
몇 해 전 우리 내외가 미국 여행 중에 마침 워싱턴에 살고 있는 P의 셋째 누이동생 남편의 부음을 듣게 되었다. 우리는 여행일정을 중단하고 장례미사에 참례하고 묘지에 안장하는 것도 지켜보았다.
그 누이동생은 나에게 "오빠는 우리 집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나타나 잘 도와주더니, 오늘도 또 먼 길을 오셨군요" 하며 내 손을 잡았다.
P는 장례미사의 엄숙함에 감동받았는지, 돌아오는 차 안에서 "종교 중 가톨릭 전례가 가장 마음에 든다"고 했다.
그의 마음이 교회로 한 발자국 더 가까와진 것을 느꼈다.
우리는 요새도 늘 소식을 주고 받으며 우정을 나누고 있다. 그 뿐 아니라 그의 누이들까지도 나를 친오빠라고 생각해주니, 나는 정말로 좋은 친구를 가진 행복한 사람임이 틀림없다.
[출처 : 월간 독자 Reader, 2016.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