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장화 속의 날들
1
자식 걱정이 어떤 것인지, 어린 나는 알지 못했다. 지는 해를 등에 지고, 털벙털벙 비좁은 농로를 걸어가던 순한 어미 소가 자꾸 뒤돌아보던 이유를 알지 못했다. 벼락처럼 등짝에 떨어지는 채찍 때문이 아니란 걸, 둑 위를 천방지축 뛰어 다니는 어린 새끼 걱정 때문이란 걸 그땐 알지 못했다.
2
검은 장화 속 같은 날들이었다. 들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버지가 검은 장화를 벗으면, 퉁퉁 불어터진 발가락들이 꽈배기처럼 꼬여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빚 보증 같은 건 서지 말라니까! 밤마다 엄마가 소리치며 울부짖었다. 검은 장화 속 같은 날들이었다.
3
나는 열아홉 살, 역 광장 앞 음악다방에서 해진 백판 재킷과 함께 너무 빨리 늙어 갔다. 어린 창녀들과 비틀즈를 들으며 낮술을 마셨고, 저탄장에서 날아온 탄가루가 내 몸을 더럽혔다. 취한 날엔 화물열차에 실린 미제 야포의 무늬처럼, 둥근 소매가 핏자국으로 얼룩지기도 했다.
4
밤마다 명멸하는 유서(由緖), 철 지난 크리스마스 트리가 얼어붙은 유리문 밖에 서서 힘겹게 불빛의 대(代)를 이어갔다. 나는, 뗏목처럼, 의자를 붙여 만든 잠자리에 누워 희미하게 빛나는 천장의 야광별 일가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5
피 끓는 청춘의 혈흔, 옷소매에 길게 얼룩진 핏자국은 손톱으로 긁어도 지지 않았다. 광장에 불려나가 눈보라에게 싸대기를 맞은 날엔 터진 입술 후후 불어가며 유리창 위에 손가락 시를 썼다. 일인(一人) 시화전을 열던 날 저녁, 눈사람이 되어 나타난 아버지. 밥은 먹고 다니는 거냐? 아버지는 설탕도 넣지 않은 쓴 커피를 마시며, 나를, 이해한다고 했다. 용서하지 못할 것도 없는, 눈 내리는 겨울밤이었다.
6
사촌과 함께 텅 빈 역 광장을 지나갈 때, 붉은 유리창 안에서 낯익은 얼굴이 아는 체했다. 나는 천천히, 아버지 뒤에 서서 걸었다. 아버지가, 어미 소처럼 자꾸 뒤돌아보았다. 그날 밤, 중국집 둥근 요리 탁자에 둘러앉아 고량주를 마시며 듣던, 아버지가 이생에서 부른 마지막 노래, 울고 넘는 박달재. 나는 천둥산 박달재를 한 번도 가보진 않았지만, 지금도 가끔 천둥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