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에 던져버리고 빈 배 시원한 바람 뉘에 전할까”
모든 존재가 하나로 돌아가거니와
하나는 어느 곳으로 돌아갑니까?
청주에서 베적삼 한 벌 만들었는데
베적삼의 무게가 일곱근이었지!
...
모든 짐 다 내려놓고 유유히 내려간다
조주선사께서 머무셨던 옛 관음원인 백림선사(柏林禪寺). 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삼베적삼 일곱 근을 알 수 있으려나.
강설
자유자재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경지란 어떤 것일까? 말과 행동에 한 치의 어긋남도 없고 망설임도 없는 것이다. 완벽한 경지에 이른 선지식은 모든 이들의 작은 재주를 능가한다. 선지식이 펼치는 지도법은 마치 번갯불이 번쩍하듯 너무나 재빠르기에 안목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로서는 선지식의 능력을 파악하기 어렵다. 강렬한 불길은 바람이 어쩌지 못하듯 선지식의 탁월한 솜씨는 아무도 꺾을 수 없고, 거센 물길을 칼날이 끊을 수 없듯 선지식의 재빠른 솜씨를 일반 범부들이 막을 수가 없는 것이다. 머리가 좋고 뛰어난 재주를 지닌 사람이 선지식을 시험하려 할지라도, 막상 경계에 부딪치면 입 한번 벙긋하지 못하고 말 것이다. 하지만 전혀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니, 지레짐작으로 포기할 것도 아니다.
본칙 원문
擧 僧問趙州 萬法歸一一歸何處 州云 我在靑州 作一領布衫 重七斤
만법(萬法) - 온 우주의 모든 것.
귀일(歸一) - 하나로 돌아감. 근본으로 돌아감.
청주(靑州) - 산동성(山東省) 청주(靑州)는 조주선사의 고향.
일령(一領) - 옷 한 벌.
포삼(布衫) - 베적삼.
본칙 번역
이런 얘기가 있다. 어떤 스님이 조주선사께 여쭈었다.
“모든 존재가 하나로 돌아가거니와 하나는 어느 곳으로 돌아갑니까?”
조주선사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청주에 있을 때 베적삼 한 벌을 만들었는데, 무게가 일곱 근이었지.”
강설
철학이나 종교가 추구하던 마지막 관문이 모든 존재의 근원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오랜 연구 끝에 결론에 이른 것이 절대 그 자체인 ‘하나’였다. 물론 이 ‘하나’에 대한 표현은 다양하다. 어떤 종교에서는 전지전능한 신(神)이라고 하기도 하고, 철학에서는 절대적 원리인 진리라고 하기도 했다. 불교에서도 이 근원에 대한 표현은 이미 홍수처럼 많은 설명이 나와 있다. 진여니 본성이니 본체니 주인공이니 법신불이니 하는 무수한 표현들이 바로 그것이다. 목숨을 걸고 정진하여 깨달아버리면 이런 표현들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바로 알아버리지만, 그저 이론적으로만 파고 들다보면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또 하나의 의심이 생긴다. 이런 모든 것을 배우고 익혔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들은 분별을 일삼고 괴로워하고 있는데, 근원자리라는 진리 따위를 어디에 쓴다는 것인가?
나름대로 열심히 수행했다고 자부한 어떤 스님이 바로 이 문제를 조주선사께 여쭈었다. 만약 조주선사께서 진리가 어떠니 본성이 어떠니 했더라면, 이 공안은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니 조주선사의 명성도 거기에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 노련한 선사께서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번개 같은 솜씨를 보여 주셨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답하셨다.
“내가 청주에 있을 때 삼베적삼을 한 벌 만들었는데, 무게가 일곱 근이었다네.”
여기에 한 생각도 움직이면 안 된다. 청주지방에 대해 자세히 알아봐도 소용이 없다. 왜 삼베 적삼이라고 했는지를 따져 봐도 그저 아득할 뿐이다. 일곱 근의 삼베옷을 만들어 아무리 살펴봐도 거기에는 답이 없다. 그러니 그런 것에 홀려서는 안 된다. 조주선사께서는 참으로 친절하고도 자세하게 직접적인 답을 해 주셨지만, 사람들은 자기의 분별 때문에 스스로 함정에 빠져버린다. 그러니 조주선사의 말씀에 바로 뚫고 들어가야 한다. 아니 이 말씀도 손가락에 지나지 않으니, 가리키고 있는 것을 바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송 원문
編辟曾挨老古錐 七斤衫重幾人知
如今抛擲西湖裏 下載淸風付與誰
편벽(編辟) - 모아서 뭉침. 만법이 돌아간 하나.
노고추(老古鎚) - 노련하고 오래된 송곳. 노련한 경지에 이른 조주선사.
포척(抛擲) - 물건을 내던짐.
하재(下載) - 배에서 짐을 내림. 빈 배.
하재청풍(下載淸風) - 물건을 싣고 강을 올라온 배가 짐을 내려놓고, 빈 상태로 시원한 바람을 받으며 강을 내려감. 그와 같은 시원한 깨달음의 경지.
부여(付與) - 지니거나 갖도록 해줌,
송 번역
하나로 뭉쳐 노련하고 오래된 송곳 때렸으나,
일곱 근 적삼의 무게를 몇 사람이나 알리오.
이제 서호 물속에 짐스런 물건 던져버리니,
빈 배에 시원한 바람 누구에게 전해 줄거나.
강설
제1구에서 설두선사는 ‘하나로 뭉쳐서 노련하고 오래된 송곳을 때렸다’고 표현했다.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하나로 귀결된 뒤에는 그 하나가 어디로 돌아가느냐며 젊은 스님이 아주 노련하고도 날카로운 조주선사에게 질문을 했다. 자신이 답을 모르고 하면 질문이 되는 것이고, 알면서 상대를 시험하면 공격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대화 다음에 젊은 선객의 대응이 없는 것으로 보아, 자신이 모르는 것을 질문한 것에 해당된다. 그렇기는 하지만 질문을 받은 이가 경지가 낮으면 역시 공격처럼 되기도 한다.
제2구에서 ‘일곱 근 적삼의 무게를 몇 사람이나 알리요’라고 설두 노인네가 평했다.
조주선사께서는 “내가 청주에 있을 때 베적삼을 만들었는데 무게가 일곱 근이었지”라고 답하신 것을 두고, 이 대답의 참뜻을 알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하고 되짚은 것이다. 그런데 설두 노인도 조주선사의 함정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여기서 함정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상대가 스스로의 경지를 드러내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상태라면 거기에 끌려 다닐 것이고, 안목이 있다면 그런 것들을 걷어치우고 핵심으로 들어간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청주라느니 삼베적삼이라느니 일곱 근이라느니 하면서 온갖 생각으로 답을 찾을 것이다. 그래서 과연 일곱 근 삼베적삼 무게를 알 수 있을까? 함정에 빠지면 아득히 멀어진다.
제3구에서 ‘이제 서호 물속에 짐스런 물건 던져버리니’하고 설두스님께서 자신의 소견을 슬쩍 밝혀 놓으셨다.
서호(西湖)는 강소성(江蘇省) 소주(蘇州)의 아름다운 호수로, 설두선사께서 머무셨던 취봉사(翠峰寺)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 선사들은 항상 멀리 달아나는 후학들 시선의 방향을 바꿔 가까이로 돌아오게 하여 바로 그곳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한다. 선객이 짊어진 ‘하나’건 조주선사의 ‘삼베적삼 무게 일곱 근’이건 모두 저 서호의 물속에 다 던져 버리면 어떻게 될까? 훌훌 털고 빈손이 되면 절대 자유인이 된다. 하지만 대개는 던져버리는 것을 두려워한다.
제4구에서 설두스님은 ‘빈 배에 시원한 바람 누구에게 전해 줄거나’라고 하여 그 일이 참으로 쉽지 않음을 갈파하였다.
짐을 잔뜩 싣고 거센 물결 거슬러 오르던 배가 이제 모든 짐 다 내려놓고 흐르는 물결 따라 유유히 내려간다. 게다가 뒤에서는 시원한 바람까지 불어주는구나. 누가 과연 이 경지를 알까보냐. 그러니 누구와 이것을 얘기라도 해 보겠는가. 사람들은 그저 힘들어하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잠시 도와주는 것을 자비라고들 하지만, 그런 어려움은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일어난다. 불교에서는 왜 복지에 신경을 쓰지 않느냐고들 떠들지만, 일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여 바람처럼 자유로운 삶을 되찾는 해탈로 인도하는 것보다 더 뛰어난 복지가 있으면 말해보라. 인간의 모든 행위는 행복해지려는 것인데 과연 누가 그 행복을 곧바로 가르치고 이르게 해 주는가. 그저 지엽적인 것 도와주는 것으로 생색을 내면서도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게 도와주는 것은 복지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니, 결국 제대로 된 마음공부를 시키지 않는 것이다. 참, 마치 최면을 걸듯이 감성적인 말을 늘어놓고 아주 이상한 행위들 시키는 것을 설마 마음공부라고 착각하는 것은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