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사고(南師古 1509~1571)의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경초(景初), 호는 격암(格庵)이다. 역학(易學)ㆍ천문(天文)ㆍ참위(讖緯)ㆍ감여(堪輿)ㆍ관상(觀相)ㆍ복서(卜筮) 등 모든 학문에 두루 통달하였고 도참서로 《남사고비결(南師古祕訣)》과 《남격암십승지론(南格庵十勝地論)》 등의 저술이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남사고(南師古)는 천지 운기를 내다보고 왜장 평수길이 태어날 줄을 알았고, 임진왜란의 액운(厄運)을 미리 알았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난리를 피할 복지(福地)가 열 곳이 있는데, 이것은 모두 세상에서 전하기를, 명승(名僧) 무학(無學)과 방사(方士) 남사고(南師古)가 잡은 곳이라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한성부」 기록에 의하면, 남사고(南師古)가 일찍이, “사직동에 왕기(王氣)가 있으니, 태평의 군왕이 그 방(坊)에서 나리라.” 하더니, 선조가 사직동 잠저(潛邸)에서 들어가 대통(大統)을 계승(繼承)하였다.
남사고(南師古)는 “소미성(少微星)이 광채가 없으니, 처사(處士)의 재앙이다.” 하더니 오래지 않아 남명(조식)이 과연 타계하였다. 남사고와 관련된 전거(典據) 기록은 다음과 같다.
상촌잡록(신흠)
남사고(南師古)는 명종(明宗) 때 사람으로 관동(關東)에 살았다. 그는 풍수(風水)와 천문(天文)ㆍ복서(卜筮)ㆍ상법(相法)을 잘 알아서 모두 전해지지 않는 비결(祕訣)을 얻었으므로 말하면 반드시 맞았다. 명종 말년에 서울에 와 살면서 판서(判書) 권극례(權克禮)와 친했는데, 일찍이 말하기를, “오래지 않아 조정에 반드시 분당(分黨)이 생길 것이며, 또 오래지 않아 반드시 왜변이 있을 것인데, 만일 진년(辰年)에 일어난다면 그래도 구할 수 있지만, 사년(巳年)에 일어난다면 구할 수가 없을 것이다.”하고, 또 일찍이 사람에게 말하기를, “사직동(社稷洞)에 왕기(王氣)가 있으니 마땅히 태평성대의 임금이 그 동네에서 나올 것이다.”하였다. 김윤신(金潤身)과 함께 동교(東郊) 밖을 지나다가 태릉(泰陵) 근처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내년에 동쪽으로 태산(泰山)을 봉할 것이다.”하니, 김윤신이 괴상히 여겨 다시 물으니, 남사고가 말하기를, “내년에 저절로 알 것이다.”하였다. 이렇게 말 한 것을 일일이 다 들 수 없다. 조정이 을해년부터 의론이 두 갈래로 갈라지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거의 50년이 되는데도 그치지 않으며, 왜병의 침입은 임진년에 시작되었으며, 선조(宣祖)가 사직동 잠저(社稷洞潛邸)에서 들어와 대통(大統)을 이었으며, 태산(泰山)이란 곧 태릉을 말한 것으로 문정왕후(文定王后)가 그 이듬해에 돌아가서 태릉에 장사지냈다.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사람이 있었으니 기이한 일이다.
송와잡설(이기)
남사고(南師古)는 울진(蔚珍) 사람으로 여러번 향시(鄕試)에 합격하였고, 음양(陰陽)의 여러 가지 방서(方書)에도 능통하였으며, 천문(天文)과 망기(望氣)하는 술법도 잘 알았다. 조정에서 불러서 동반직(東班職)에 제수하였으나, 6품으로 승진하지 못하고 서울 집에서 죽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원주(原州) 동남쪽에 왕기(王氣)가 있다.”
하였는데, 사람들은 모두 믿지 않았는데, 임진년 여름에 광해군(光海君)이 왕세자가 된 다음에야 그의 말이 증명되었다. 대개 공빈(恭嬪)의 부모와 그의 선대가 살던 곳이, 원주에서 동남쪽으로 1사(舍.30리) 되는 지역인 손이곡(孫伊谷)이었고, 그들의 무덤도 모두 그곳에 있었다. 이때에 와서 사람들이 비로소 그의 술법이 정묘(精妙)함에 탄복하였다.
연려실기술(이긍익)
갑자년(1564)에 남사고(南師古)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년에는 태산(泰山)을 봉할 것이라.” 하였는데,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이 없더니, 이듬해인 을축년에 문정왕후가 승하하여 태릉(泰陵)에 장사 지냈다.
남사고(南師古)는 명종 때 사람이다. 강원도에 살았는데 풍수ㆍ천문ㆍ복서(卜筮)ㆍ상법(相法)을 잘 알고, 아울러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비결을 터득하여 그가 말을 하면 반드시 맞추었다. 명종 말년에 일찍이 말하기를, “머지 않아 조정에는 당파가 나뉠 것이다. 또 오래지 않아 왜변이 일어날 것인데, 만약 진(辰)년에 일어나면 오히려 구할 길이 있지만 사(巳)년에 일어나면 구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사직동에 왕기(王氣)가 있어서 세상을 태평케 할 임금이 거기서 나올 것이다.” 하였다. 이와 같은 것은 일일이 다 들 수 없다. 조정에는 을해년부터 비로소 당파가 생겼고 왜란은 진년에 일어났고 선조(宣祖)는 사직동 잠저(潛邸)에 들어와 대통(大統)을 이었다.
남사고는 울진 사람으로 학문을 힘써 주역에 달통하여 그가 말하는 것은 모두 기이하게 맞았다. 여러 번 향시(鄕試.각 지방에서 보이는 과거의 예비시험)에 뽑혔으나 끝내 급제는 못하였다. 누가 묻기를, “자네는 남의 운명은 잘 알면서 자기 운명은 알지 못하여 해마다 헛걸음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한즉 웃으면서, “사사로운 마음이 동하면 술법도 어두워진다.” 하였다.
만년에 천문학 교수로 서울에 있을 때 태사성(太史星)이 흐려졌다. 이때 관상감 정(觀象監正)으로 있는 이번신(李蕃臣)이 그중 나이가 많아 이것은 내가 죽을 징조라 한즉, 남사고가 웃으면서 따로 죽을 사람이 있다더니 그 뒤 두어 달만에 남사고가 죽었다.
장마가 처음 개인 때에 남사고(南師古)가 영천의 인가를 지나다가 흰 구름이 소백산 허리에 가로 걸려 있는 것을 바라보고 기뻐하는 기색이 있으므로 다른 사람이 그 까닭을 물으니, “이것은 상서로운 구름이나 오래지 않아서 전쟁이 있을 터인데 산 아래에 있는 자는 안전할 것이니, 풍기(豐基)와 영천은 복지(福地)가 될 것이다.” 하였다. 이때에 와서 왜구가 이르렀는데 풍기와 영천은 조령(鳥嶺)에서 멀지 않으므로 며칠이면 올 수 있었는데도 적은 끝내 들어오지 않았다.
이산해가 남사고(南師古)를 길에서 만나 이야기를 하였는데, 남사고가 서쪽으로 안현(鞍峴)을 가리키고 동쪽으로 낙봉(駱峰)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훗날 조정에 반드시 동서의 당이 있을 것인데 낙(駱)이란 각마(各馬)니 그 끝에 가서는 각각 흩어질 것이요, 안(鞍)이란 변혁[革]한 뒤에 편안[安]할 것이다. 또 안현은 성밖에 있으므로 그 당이 때를 놓침이 많을 것이나, 반드시 시사(時事)의 변혁을 말미암은 뒤에 흥할 것이지만 끝내 반드시 져 버릴 것이다.” 하였다.그 뒤에 서당(西黨)은 때를 놓침이 많다가, 심의겸(沈義謙)의 무리가 공헌왕(恭憲王.명종)이 왕위에 오름으로 인하여 흥하였고, 정철의 무리가 역적 정여립의 변란으로 인하여 흥하였으며, 윤두수(尹斗壽)의 무리가 임진년에 파천하는 변란을 만남으로 인하여 흥하였으며, 또 몇 사람이 선조가 즉위함으로 인하여 초년부터 흥하였다. 동당(東黨)은 나뉘어 남ㆍ북, 대ㆍ소, 골ㆍ육의 명칭으로 되었으니 그의 말이 모두 맞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