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方廣佛華嚴經(대방광불화엄경) 疏序(소서)
●第2門(제2문) 別歎能詮(별탄능전)
剖裂玄微(부열현미)하고 昭廓心境(소확심경)하며 窮理盡性(궁리진성)하고 徹果該因(철과해인)하며 汪洋冲融(왕양충융)하고 廣大悉備者(광대실비자)는 其唯大方廣佛華嚴經焉(기유대방광불화엄경언)인저
유현하고 미묘한 내용을 분석하고 나누었으며 마음과 경계를 환하게 비추었으며,
이치를 다 드러내고 본성을 다 표현하여 결과에 사무치고 원인을 갖추었으며,
깊고 넓고 가득하여 넘치며 심원하고 융성하고 넓고 커서 모두 다 갖춘 것은 오직 대방광불화엄경뿐이로다.
여천무비 대강백 화엄경 왕복서 특강
(2019년 6월 24일-26일 대구 동화사 국제선센타)
汪洋冲融(왕양충융)하고 廣大悉備者(광대실비자)는 其唯大方廣佛華嚴經焉(기유대방광불화엄경언)인저
깊고 넓고 가득하여 넘치며 심원하고 융성하고 넓고 커서 모두 다 갖춘 것은 오직 대방광불화엄경뿐이로다.
왕양충융(汪洋沖融)하고 광대실비자(廣大悉備者)는
기유대방광불화엄경언(其唯大方廣佛華嚴經焉)인저
이걸 아까 법계에서 설명하듯이 설명하면
대방광불화엄경이라고 하는 것은 쭉 앞에서 설명해온 대로
부열현미(剖裂玄微)하고 소확심경(昭廓心境)하며
궁리진성(窮理盡性)하고 철과해인(徹果該因)이다.
따라서
왕양충융(汪洋冲融)하고 광대실비자(廣大悉備者)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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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양충융 그 글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40권 화엄경, 60권 화엄경, 80권 화엄경 또 거기서 보현행원품까지 합쳐서 81권 화엄경 하는데 거의 81권으로 굳혀졌어요. 청량스님도 81권으로, 물론 한 사람이 번역하고 같은 책은 아니지만 반드시 보현행원품이 끼어야 된다 라고 해서 그 후로 계속 출판할 때마다 보현행원품을 끼워서 81권, 81권 합니다.
제가 중국이나 대만에서 출판한 책들 다 보면 전부 보현행원품까지 해서 81권으로 그렇게 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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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그 법문이 왕양충융이라.
깊고 넓고 가득하여 넘치며 시원하고 융성하고 넓고 커서 모두가 갖춘 것은 오직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뿐이로다.
그 법문이요 정말 저 큰 바다에 대해가 넘실대는 것과 같은 왕양충융 큰 바다가 어디에도 걸릴 것 없이 넘실대는 듯한 느낌이 말하자면 화엄경을 읽어보면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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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실비자라 넓고 커서 모든 것을 다 갖추었다.
뒤에도 나오지만 그래서 ‘팔만대장경의 전체적인 이름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대방광불화엄경이다’ 이렇게 표현해요.
팔만대장경 여러 가지 6천여 종류의 경전 이름이 있지만 그거 복잡하게 할 것없이 <대방광불화엄경이다> 이렇게 해버리면 그 속에 다 포함된다 이런 내용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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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계하고 화엄경
제일 중요한 명제를 지금 우리가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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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계
우리가 다른 것 다 내려놓고 그동안의 불교상식 다 내려놓고 ‘아 이 세상에 참 복잡다단한데 많고 많은 현상들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데 이걸 한 마디로 이야기 하면 뭐라고 할까?’ 두 말할 것도 없이 ‘법계’입니다.
그것을 가장 작은 미세한 먼지에서부터 저 큰 은하계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존재들을, 그 넓고 넓은 세상 속에 명멸해간 성인이든 범부든 영웅이든 졸부든 할 것 없이 다 포함해서 그래서 뭉뚱그려서 한마디로 이야기 할 때 그것을 법계라고 한다. 그 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 까지도 다 법계라고 한다. 그렇게 한마디로 뭉뚱거리면 쉽기는 쉬운데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는 방법은 없겠는가?
화엄경이 그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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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화엄경도 여기에서 설명한 게 뭐
부열현미(剖裂玄微)하고 소확심경(昭廓心境)하며
궁리진성(窮理盡性)하고 철과해인(徹果該因)한다.
왕양충융(汪洋冲融)하고 광대실비자(廣大悉備者)다.
아, 태평양 바다가 넘실대듯이 그렇게 넘실대면서 설명했고 그래서 그 속에는 갖추지 아니한 것이 없다. 광대해서 다 갖추었다.
이건 너무 애매모호하잖아요. 그렇게 알기는 너무 애매모호한거야. 그래서 그걸로 끝나지 않고, 그래 버리면 또 할 일이 없죠.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게 됩니다. 실제로 아무것도 모르게 돼요. 그쯤 해놓으면.
‘그거 뭐 우리가 살고 있는 일 그대로인데 그거 뭐 들으나 마나 한 소리 아니냐?’ 이렇게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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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것을 좀 더 그야말로 깨달은 사람, 눈을 뜬 사람의 입장에서 환하게 설명할 길은 없는가?
이렇게 보았을 때 이제 3문(門) 교주난사(敎主難思)라고 하는 문이 등장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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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불교하면 깨달음의 가르침, 깨달은 사람, 그러잖아요. 두말할 것 없이 깨달은 사람의 가르침입니다.
깨달음 빼버리면 불교는 이야기할 수가 없어요.
그러면 깨달음과 깨닫지 못한 그 차이는 어떻게 설명하는가. 그것은 눈을 뜬 사람과 눈을 감은 사람의 차이입니다.
가장 간단하게 설명하면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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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모두 눈을 뜨고 있어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다가 이제는 차츰차츰 어두워지는구나’ 아주 섬세하게 1분 1초도 놓치지 아니하고 다 감지합니다. 이게 눈 뜬 사람의 일이예요. 이게 눈뜬 사람의 일이라.
그런데 눈을 감은 사람은 ‘야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다. 참 석양 아름답다’ 뭔 말인지 어떻게 이해하겠습니까? 눈 감은 사람이 그걸 어떻게 이해하겠어요?
그리고 또 5분쯤 있다가 ‘그새 저렇게 또 해걸음이 더 짙어졌는데 더 근사하네’ 옆에서 눈뜬 사람이 그렇게 이야기 한단 말이야. ‘야 아까보다 석양이 더 찬란하구나. 저 붉은 절 기둥 좀 봐 얼마나 근사한가’ 이렇게 이야기 한다 말이야 우리 눈뜬 사람은.
그런데 눈감은 사람은 어떨까요 그게.
참 답답하기 이를 데 없죠.
우리는 눈뜨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 감사한 일이요. 깨달은 사람과 깨닫지 못한 사람 이 인생문제, 세상문제 앞에서 설명한 모든 법계의 문제에 대해서 깨달은 사람과 깨닫지 못한 사람은 눈뜬 사람과 눈을 감은 사람의 차이다. 그렇게 알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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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제 우리는 그러한 것을 추적해서 ‘눈뜬 사람은 법계를 이렇게 본다’ 이러한 이야기를 펼쳐 나가는 것입니다.
잠깐 쉬었다 하라고 시계를 갖다 놨습니다. 잠깐 쉬었다 하겠습니다.
-2013년 7월 임제록 특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