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달 집으로 배달되었던 공산당 기관지 적기는 나를 변화 시키고 있었다.
학생운동으로 군대에 끌려가고 제대 후 정신을 차리고 유학을 오고, 동경대 야스다 강당의 실체를 알고 나서, 내가 한 짓이 얼마나 허무한 일이었는지 깨달았다.
처음 느낌은, 공산당이란 빨갱이에 대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있는 나라에서 온 나로서는, 겁이 났다. 반공법이 강하게 버티고 있던 시절이었다.
한참을 무시하다가, 우연히 적기를 읽다가, 서서히 흥미를 갖게 되었다. 전혀 정치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일반 신문 보다 덜 정치적이고, 사회에 대한 신선한 시각과 정보를 많이 주고 있었다.
서서히 독자가 되어가다가 한달에 600엔을 내는 정식 독자가 되었고, 그것은 곧 일본 공산당원이 되었다는 의미였다.
난 그래서 반공법을 위반한 범법자가 되고 말았다.
자전거와 赤旗가, 결혼을 결심하고 아내를 일본으로 데리고 온 이유 중에 하나일 것이다. 물론, 외로움이 더 컸겠지만.
맞선을 보고 네 번 만나고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 설악산 하루 다녀오고 아내와 일본에 왔다.
처음에는 아내를 자전거 뒤에 태우고 학교에 가서, 외국인 유학생 가족을 위한 일본어 교실에 태워주다가, 아내의 자전거를 사서 직접 가르쳐서, 아내도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되었다.
휴일, 아내와 우에노 공원에 놀러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 유시마 역에서 지요다선 전철을 타고, 아야세 역에 내려, 역 앞 이자까야에서 저녁 겸 술 한잔하고, 자전거를 타고 돌아 오는 길.
" 여보! 살려줘!"
내 뒤에서 자전거를 타고 오던 아내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야?"
아내에게 달려 갔더니, 아내는 자전거에서 내려 주저앉아 있었다.
발가벗은 남자가 육교 기둥에 숨어 있다가 도망을 갔다. 나는 뒤쫒으며 오랜만에 한국말로 마음껏 욕을 했다. 돌을 던지며......
남자는 너무 빨라 잡을 수 없었다.
남자의 알몸뚱이 하얀 색이 어둠 속에서 멀리까지 희미하게 사라졌다.
괜히 아내에게 미안했다. 변태의 나라에, 순진한 강릉 시골처녀를 데리고 온 것이 후회가 되었다. 아내는, 내가 모르는 사이에 수 없이 변태들에게 당했다고 했다. 상상을 초월한 아내의 이야기에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일본에서 와서 제일 인상 깊었던 것은, 학교 앞, 내 방 앞 문에 꽂혀 있는 공산당 기관지 '적기(赤旗)' 였다. 그리고 여자들이 타고 다니는 자전거.
그 적기가 한국으로 돌아와서 대학에 자리를 잡을 수 없었던 원인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대학 교수가 되지 못한 것은 참으로 잘 된 일이었다.
나는 묵호항 장삿꾼으로 만족을 했고, 묵호에서 글을 쓰면서 생을 마감할 생각에 기분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