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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느님은 농부이시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새벽부터 밤중까지 기도하는 농사꾼 부부다. 증조할아버님은 경기 안성 어느 줄 무덤에 잠들어 계신 무명 순교자이시다. 백 삼위 순교자들께서 복자로 시복되실 때이다. 친정아버지께서“증조할아버님의 세례명만 알아도 복자품에 오르실 수 있을 터인데” 하시면서 안타까워하셨다.
박해가 증조할아버지의 목숨을 앗아갔음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지켜내신 증조할머님의 신앙이 지금 우리 가족에게 쭉 이어지는 것이다. 증조할머니는 폭도들에게 들켜버릴까 염려스러워 자식들조차 비신자로 그냥 둔 채 혼자서 신앙생활을 하셨다 한다. 그 어려운 와중에 아들마저 앞세우셨으니, 몸과 마음의 고통을 참아내기 힘드셨을 것이다. 자랑스러운 여장부 증조할머니 해마다 봄가을에는 곱게 단장하시고 어딘가를 다녀오셨다. 봄가을 판공에 참석하시려고 안성에서 용인으로 걸어서 오가고 하시는 걸 자식들은 나중에 그 사실을 알았다. 용인 은이 공소로 짐작이 가는 점마을 교우들, 증조할머니의 부음 받자마자 안성으로 쏜살같이 달려와 장례를 치른 후, 놀라운 일을 감행하였다. 할머니와 식솔 모두를 당신들이 살고 계신 옹기마을로 데려가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전무하다시피 한 공동체 의식을 그분들에게 배우고 두고두고 반성해야 할 부분이 아닌가 한다.
또한, 눈썰미가 남다른 둘째 큰아버지께서 어깨너머 배움으로 만들어내신 뚝배기와 항아리 뚜껑 등등 자잘한 옹기를 할머니께 팔아보라고 했다. 할머니는 과부의 몸으로 받아들이기 쉬운 일이 아니었음에도 옹기 행상을 시작하셨다. 그 덕분에 자식들의 배고픔이 사라지고 가난에서 차츰 벗어날 수 있었다 한다. 친정어머니 말씀이 할머니의 견진성사 교리를 직접 가르치셨다 하니, 영세도 나이가 많이 들어서 받으신 모양이다. 어찌어찌 재산이 모이자, 독 짓는 기술자로 성장한 둘째 큰아버지만 용인 골배마실에 머무르시고, 할머니, 큰아버지, 고모와 우리 아버지는 경기도 광주 농촌 마을로 이사를 하셨다. 하여, 옹기장이 후손인 우리 남매들은 옹기 굽는 가마를 구경도 못 하고 살았다.
아버지 삼 형제와 고모 댁 그리고 외갓집은 물론 사돈의 팔촌까지 천주교 집안이다. 외교인 보다 천주교 신자가 더 많은, 경기도 광주군 도척면 노곡리 예전에 점촌이었다 하여 점말로 불리는 동네가 내 고향이다. 어릴 적에는 온 가족이 십자고상 앞에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삼종과 저녁기도를 바치고, 주일날에는 교우들이 한 곳에 모여 공과 책에 실려 있는 기도문으로 미사참례를 대신하였다. 돌아가신 조상님께 연도 바치고 성서도 읽어가며 농사일 미루어둔 채 온 파공罷工으로 하루를 보냈다.
봄가을 판공 때 본당 신부님은 공소마다 순회하셨는데, 삼십 리가 넘는 이천성당에서 우리 공소로 오실 땐 중간 지점까지는 버스를 타고 오시고, 남은 거리는 걸어서 오셨다. 남자 어른들과 꼬맹이들 버스가 지나가는 큰길가에서 신부님을 기다리는 것도 기쁨이었다. 명절보다 더 기쁜 날이 바로 판공 날이기 때문이다. 이웃 공소 신자들까지 다 함께 만과를 바친 후, 신부님께서 아이들에게 찰고를 받으셨는데, 촌구석에 의자가 있을 리 없다. 하여, 신부님은 곡식을 계량 할 때 사용하는 모말을 타고 앉으시고, 어린 우리들은 신부님 앞에 나란히 앉아 찰고를 받았다. 찰고 때마다 어머니가 가르쳐주신 기도문을 달달 외우고 상품으로 예수성심 상본이나 성모 성심 상본을 받아서 어머니의 기쁨이 되었다. 성물이 귀하던 시절 신부님께서 상으로 주시는 상본을 받아 든 고사리손과 꼬맹이의 가슴이 오랫동안 콩닥콩닥했다.
공소회장이신 큰아버지는 신부님이 화장실에서 볼일 보실 때 보초까지 서시고, 교우들 전부가 살아계신 예수님을 대하듯 신부님을 모시는 데 소홀함이 없었다. 신부님께서 잡수시고 남겨 놓으신 밥 한술의 효력 또한 대단해서 기도문을 빨리 배울 수 있다고 믿었다. 지금 생각해도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건 고해성사도 어머니가 가르쳐 주시는 대로 이 죄 저 죄를 고백했으니, 되돌아갈 수 없는 참 아름다운 날들이다. 판공성사를 보기 위해서 순서를 기다리는 큰아버지와 아버지의 근엄한 모습은 인장처럼 지워지지 않는 부분이다. 성체를 모시기 전 어른이나 아이들 누구나 공심재를 지키고 말소리조차 가만가만 삼가야 했으니, 지금처럼 어수선한 세상에서 신앙인의 바른 자세로 살아가기 어렵다 해도 그분들의 성숙한 모습을 본받기를 게을리 말아야 할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 말을 처음 배우기 시작할 때부터 성호경과 주모경, 그리고 사도신경을 외워야 하는 부모님의 주입식 교육이 새벽녘 이불속에서 시작되었다, 신앙심이 두터운 부모 슬하에서 성장을 하고서도 제 정신이 어찌 되었는지, 샤머니즘의 색깔이 지나치게 강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사람과 결혼하였다. 세상에 태어나서 첫 번째 무모한 짓으로 큰 사고를 치고 만 것이다. 어리석은 딸 때문에 우리 아버지 어머니 가슴이 쿵쿵 쿵 수도 없이 두근거렸으리라. 아들 셋 가슴에 묻으신 불쌍한 아버지, 늦은 퇴근길 마중 나오시던 내 아버지, 손 한 번 잡아드리지 않은 철딱서니다. 어두움이 내려오는 시골길 팔짱끼고 나란히 걸어가는 부녀의 모습을 하느님께서 보시고 “참 아름답다.” 하실 터인데, 그냥 재잘재잘 하루 일과를 고하는 게 다였다. 어릴 적 잦은 병치레로 고생하더니, 다리통 튼실하다며 엄청 좋아하시던 내 아버지, 늦게나마 부모님의 가르침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다.
요한 씨, 독학으로 교리 문답을 배웠는데도 혼인 주례신부님의 찰고에 합격하였다. 이 얼마나 감사하고 다행스러운가. 그러나 기쁨도 잠시 아침기도와 저녁기도 함께 바치고, 주일날 성당에도 함께 다닐 수 있으리라는 바람은 혼배성사 당일 송두리째 날아가 버렸다. 그때부터 가슴에 상처가 겹겹이 쌓여가고 삶의 기쁨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혼배성사를 주례하신 박지환 요왕 신부님께서“신랑이 찰고는 아주 잘했어! 앞으로 일은 자네에게 달렸어”라고 하셨다. 남편과 티격태격한 후 속상한 마음 다스리기 힘들 때마다 신부님의 당부 말씀이 떠올라 어리석은 발걸음이 한 번도 문지방을 넘지 않았다. 나에게 주어진 이 가정을 지키는 일 너무 힘들고 마음이 부서질 듯 아플 때마다 가슴에서 큰 돌덩어리가 요동치는 게 아닌가. 사람이 사는 게 아니고 그저 목숨이 붙어있어서 간신이 숨을 쉬었을 뿐이다. 이 남자 혼배성사 때 세례를 받았지만, 곧바로 냉담이었으니 왜 아닐까. 더 이상의 것을 바라는 건 서로에게 상처만 주는 일이다. 모든 걸 하느님께 맡기고 남편의 마음이 주님께 돌아서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아침저녁으로 바치는 주님의 기도에서“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는 심오한 뜻의 진리를 깨닫지 못한 우매함 때문이 아닌가 한다.
마트에서 생필품을 구입할 때나 의류매장에서 옷을 살 때도 꼼꼼히 따져본 후 지갑을 열어야 실수를 줄일 수 있다. 그런데도 일생이 달린 배우자를 번지르르한 겉모습만 보고 선택하였으니, 살아갈 나날이 순조롭지 않으리라는 건 자명한 일이다. 그나마 다행으로 아이들과 내 신앙생활에 너그러운 편이어서, 서울 수유리에 살면서 혜화동 상지회관에서 실시하는 성령 세미나를 받을 수 있었다. 어린 막내를 데리고 수유리에서 혜화동까지 버스 타고 다니기가 부담스러웠지만 봉사자들의 도움으로 교육을 마칠 수 있었다. 매주 교육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기쁨이 넘쳐나고 성서를 읽고 마음으로 가슴 설렜다.
통진으로 이사 온 후 인천교구청에서 여성 33차 꾸르실료도 수료하였다. 요한 씨 꾸르실료 수료식에 꽃다발까지 사 들고 통진에서 인천교구청까지 오셨다. 비밀을 요하는 교육이라서 수료식 시간을 제대로 알려 주는 사람도 없다. 그 때문에 굳게 닫혀있는 교육장 문밖에서 비지땀 뻘뻘 흘리며 2시간이나 기다렸다 한다. 토요일 오전 근무 마치자마자 시외버스에 몸을 실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학교 다니는 아이들이 네 명이니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 아니었을 터, 팔월 삼복더위에 착한 마음이 샘솟아서, 아니면 서서히 철들기 시작한 걸까 눈물 나게 고마운데도 고개가 갸우뚱 헷갈리는 부분이다.
1985년 김포 통진으로 이사 오기 전, 서울 수유동 성당에서 세 아이가 첫 영체를 받았고, 나이가 어린 막내는 세례성사만 받았다. 한데, 아이들 세례식이나 첫영성체 그리고 견진성사 받을 때 아버지가 없는 자식 같았다. 우리 아이들 부모의 축하를 받으며 기념사진을 찍는 또래 아이들이 돈 많은 부자보다 더 부러웠을 터인데, 다행스럽게도 아이들이 착해서 아버지의 불참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사 할 때마다 십 분 정도 걸어서 성당에 다닐 수 있는 가까운 곳으로 정했다. 덕분에 아이들이 어린이 미사와 주일학교에 빠지지 않았고, 나도 불편한 것 모르고 레지오 활동이나 성서 공부도 할 수 있었다. “언니 남들보다 자식을 여럿 두었으니, 뱃속에 든 아이는 아들이 건 딸이 건 무조건 하느님께 바쳐” 막내를 임신한 내게 외사촌 동생의 말이다. 하여, 당뇨로 고생하시는 시아버님의 구원과 곧 태어날 아이가 부르심에 응답하기를 기도하고 매일 미사참례도 거르지 않았다.
서울에서 통진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온 건 고통을 자초하는 두 번째 실수다. 시아버님의 건강이 안 좋으셔서 늘 걱정하는 남편의 청이라도 거절했어야지, 아이들 학교까지 옮겨가면서 이사를 하지 말았어야 한다. 우리 시어머니 길 찾아다니기에 선수다. 경기도 광주와 부평 백마장, 그리고 서울 수유동에 살 때도 수시로 어쩜 그리 잘도 찾아오시는지 모르겠다. 그것도 이 보따리 저 보따리 버려야 마땅할 농산물 싸 들고 토요일에 오신다. 성당 다니는 며느리 어찌해볼 심사로 그리하시는 거였다. 추운 겨울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농사철도 개의치 않고 말이다.
우리 아이들 느닷없이 찾아와 제 엄마 힘들게 하는 할머니에게 정나미가 다 떨어지고 오히려 가슴에 미움만 쌓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딸아이는 시치미 뚝 떼어내고 아침밥을 먹자마자 동생들에게 놀러 나가자 한다. 어디서 그런 지혜가 나왔는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 할머니 눈초리를 피해서 자기들끼리 성당에 가자는 신호다. 친정어머니의 초상을 치르고 삼우제까지 지낸 후 집에 도착하자 딸아이가 “ 엄마 우리가 외할머니 연도 바쳤어”라고 한다. 세상에나 어린애들이 외할머니께 연도를 바쳤다니 딸내미의 지혜가 남다르다.
시어머니 甲 며느리는 乙이라는 생각이 머리에 가득한 시어머니, 결혼식도 예식장이 아닌 성당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 때문에 경기도 광주 경안성당에서 내 친구들과 친정 식구들만 참석한 가운데 혼배성사를 받았다. 그나마 신랑이 혼인성사 당일 세례명 요한으로 세례를 받아서 관면혼배가 아닌 혼배성사를 제대로 받을 수 있었다. 다음 날 서울 모 예식장에서 시댁 친척들과 김포 용강리 사람들을 하객으로 또 결혼식 올려야 하는 우스꽝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나이가 드시면 잔소리가 줄어들지 않으려나, 아무리 기다려도 줄어들기는커녕 하느님께 부름을 받기 한 달 전까지 지속되었다.
한 달은 밤낮 가리지 않고 고래고래 악쓰시더니,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실 무렵에야 멈추었다. 오죽하면 우리 시어머니 아들 며느리에게 상처 주려고 세상에 존재하는 건 아닌가 하는 어리석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옛날 시어머니들 시집살이 모질어도 해산한 며느리에게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미역국을 끓여 주셨다는데, 나에게는 이웃 나라 이야기다. 큰댁 시어머니까지 모시고 오셨으니, 두 시어머니 시중들어야 하는 산모의 다리가 후들후들 온몸이 휘청거렸다. “찬물에 손을 넣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하시는 친정어머니의 당부마저 어디로 훌쩍 날아가 버린 서글픈 해산어미였다.
세 번째 실수는 맑은 하늘과 깨끗한 공기가 자랑거리인 민통선 마을로 삶의 터전을 옮겨 온 일이고, 보태서 호미가 퉁퉁 튀는 자갈밭에 빨간 벽돌로 농가주택을 지은 일이다. 그렇게 당하고도 시어미니 곁에서 뭔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남편을 꼬드겼으니, 머리가 정상 수치에서 한참 벗어난 상태가 아닌가 말이다. 시부모의 구원을 책임져야 할 사명을 받고 세상에 태어난 것도 아닐 터, 사람이 살아갈 집을 짓는 건지 소 키울 외양간을 짓는 건지 시어머니 불벼락의 연속이다.
아들네가 새집으로 이사하는데도 당신께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더구나 “내가 서울에 올 때는 벽에 걸린 저 십자가 떼어버리고 왔는데, 너희 얼굴을 보니 참을 수밖에 없다.”라고, 소리치던 그 십자가가 어이없게 거실 벽 한가운데 턱 하니 걸려있으니, 무속신앙에 길든 분께서 나름 힘드셨을 것이다. 처음 시작한 농사 일부러라도 서툰 것처럼 씨 뿌리고 수확할 때마다 시어머니께 여쭈어보아야 하는데, 논농사 밭농사를 자기들 마음대로 짓는 게 아닌가 말이다. 게다가 괘씸한 아들 며느리가 예전부터 농사를 지어 본 것처럼 농작물을 여우처럼 가꾸어 놓고, 한 술 더해서 남들보다 소출도 많으니, 심술을 부리고도 남을 일이다.
그나마 여기까지는 참을 수 있었다. 어느 날부터 당신이 감춰 둔 돈 십만 원을 누가 훔쳐 갔다며 난리다. 그것도 이웃에 사는 젊은 여자의 짓이라고```.나중에는 불에 태워야 마땅할 허접스러운 물건까지 이리저리 숨겨놓으셨다. 아들이 아침마다 날라다 드리는 음식도 그리하셔서 먹을 수 없게 되었다. 어이없게도 당신이 감춰 둔 물건들을 찾아내라고 수시로 찾아오시는데, 당하는 사람은 미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그렇다고 병든 부모에게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어서“컹컹 컹” 개가 짖는 소리를 신호로 옥상으로 뛰어오르기를 반복했다. 증상이 심해지자 입고 있는 바지에 큰 볼일 작은 볼일 처리도 못 하신 채 여전히 아들네 집을 드나 드셨다. 수돗가에서 뒤처리할 때 시어머니는 더러운 그걸 발로 밟아대고, 며느리의 못된 손바닥은 시어머니 엉덩이에서 악을 썼다.
세월 이기는 장사가 없다더니, 주치의 말이 어머니께서 곧 돌아가실 거라 한다. 시누이가 달래고 내가 달래서 간신이 우리 집으로 모셔 왔다. 모셔 왔으니 잘 구슬리어 대세를 받으셔야 하는데, 이만저만 걱정이 아니다. 뜻밖에 하느님의 은총이 절을 좋아하는 시누이에게 내렸다. “며느리가 하자는 대로 하시고 좋은 곳으로 가세요.”라는 딸의 부탁을 받아들이시어 안나 세례명으로 대세를 받으셨다. 집안의 대소사조차 무당과 상의하여 결정하시던 시어머니, 죽음의 복도 많으셔서 우리 집 거실에서 민영환 토마스모어 신부님께 장례미사까지 받으셨다. 또 감사하게도 며느리의 부탁을 선뜻 받아들이신 아버님(요셉)과 매일 저녁 ‘부모를 위한 기도’를 아들 며느리에게 이십 년째 받고 계시지 않은가.
삼십여 년의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시어머니의 지나친 간섭이 지속되었으니, 남편과 사이가 좋을 리 만무하다. 잠자코 있으려니 죽을 것 같아서 낮 시간 시어머니에게 당한 화풀이를 저녁 시간에는 죄 없는 남편에게 퍼부었다. 남편의 고통을 생각하지 못한 미련한 처사를 “레위기 19장 18절 너희는 동포에게 앙갚음하거나 앙심을 품어서는 안 된다.” 하는 성서 말씀을 읽으면서 깨달았다. 그리고 남편의 손잡고 사과했다. 더구나 우울증으로 시달리는 마누라 때문에 그 어려운 농사일 혼자 감당했으니,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서다. “알았어요, 알았어!” 이 남자의 시원한 답이다.
고통의 부산물이 바로 우울증이다. 김포우리병원에서 일 년 넘게 치료를 받아도 좋아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고 왼 종일 잠자는 게 일과였다. 억지로 약을 끊어서일까? 자식들 생일과 친정 부모님의 세례명조차 기억이 나질 않을뿐더러 자동차 몰고 엉뚱한 길로 들어서기도 했다. 검단 탑 병원에서 검사를 받아 본 결과 머릿속에서 기억을 관리하는 시스템이 세 곳이나 막혀있는 상태란다. 병원에서 처방한 약을 먹어도 별반 차도가 없다 해서 또 약을 끊어버렸다.
우울증이 다 빠져나간 지금, 보통 사람들보다 기억력이 월등하다. 낮에는 남편과 오순도순 농사일하고, 저녁기도로 하루를 마무리 한다. 어느 수녀님이 그러시는데, “하느님은 농부시니, 농사짓는 사람은 하느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다.”라고 하신다. 하느님 창조 사업의 조력자 농사꾼 부부에게 이보다 더 복된 삶이 또 어디에 있을지 싶다. “주일 미사참례 이 십여 년 넘게 개근했는데 상 안 주나?” 남편의 말이다. “담에 천당 가서 하느님께 받으셔” 하자 “지금 받고 싶어”라고 한다. 하느님의 뜻이 우리 부부에게 쉼 없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아이고! 뭘 더 바라는지 모르겠다.
첫댓글 아멘 🙏
이루어지실 거예요~^^
예! 고맙습니다.
땅에서는 주님의 평화
'주님의 평화'
오소서!
내 마음 속 깊은 곳으로
오시어, 골치 아픈 일에서
벗어 나도록 도와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