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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閔妃暗殺>(22)-6
이상이 호리구치의 「민비사건의 추억」 등 2편 수필의 요지다. 이것은 코바야카와 히테오(小早川 秀雄)가 쓴 것과 비교하면, 「대원군의 별장을 자주 방문했다」와 「미우라 공사로부터 파견되었다」가 다르고, 동행자도 다르지만, 「대원군이 본심을 내 비치고 미우라 공사의 지원을 간절히 바랬다」는 중요한 점은 일치하고 있다.
호리구치의 수필에 대하여 나는 몇 가지 의문이 있고, 그대로 이것을 믿을 수는 없다. 의문점을 들어보자.
첫째로, 미우라는 뒷날 히로시마 지방재판소의 조사를 받을 때, 「호리구치에 의하여 대원군의 결의를 알았다」고 “대원군 주모설”을 주장하나, 그것을 믿지 않는 예심판사 요시오카 미히데吉岡 美秀)를 향해서 「대원군 자신이 결의를 쓴 두루마리를 호리구치가 가지고 돌아왔다」고도 하지 않고, 하물며 「나의 짐 속에 그것이 있으니까, 찾아보라」와 같은 요구를 하지 않았다. 훗날 판사는 미우라의 짐 속에 있던 대원군 관계의 서류를 꺼내고, 그에 대하여 신문 하였으나, 거기에도 「호리구치와의 필담 두루마리」는 없었다. 대원군의 야심을 입증하는 데는 「필담한 두루마리종이」 보다 나은 증거는 없다고 생각되나, 판사로부터 「대원군이 첫 대면의 호리구치에게 중대한 음모를 밝힐 이는 없을 것이다」라는 질문을 받은 미우라는, 「나도 그렇게 생각했으므로 호리구치는 그때까지 때때로 대원군의 집에 드나들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했으나, 그러나 그것을 호리구치에게 확인하지는 않았다」는 등, 종잡을 수 없는 대답을 하고 있다.
둘째로, 요시오카 판사도 지적하지만, 가령 대원군에게 야심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초대면의 호리구치에게 말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게다가 호리구치의 기술(記述)에 따르면, 그는 자기의 신분을 알리지 않고 최후까지 여행자로 행세한 것이다. 대원군과 같은 경력의 정치가가, 신분도 모르는 상대에게 필담으로 음모계획을 보이고, 증거인 두루마리까지 건넸다는 위험을 무릅쓸까. 드러나면 대원군 에게 파멸이 있을 뿐이고, 애손 이준용도 말려들게 된다.
셋째로, 호리구치의 「대원군은 궐기를 위해 미우라의 지원을 간절히 바랬다」는 기술과, 사건당일 밤 대원군의 행동이 결부되지 않는다. 뒤에 상세하게 말하지만, 대원군은 오카모토 유우노스케岡本 柳之助) 등 일본인들의 마중을 받고도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시간을 허비하고 계획을 빗나가게 한다.
넷째, 사건 직후에 호리구치 등의 증언 같은 것을 간추린 우치다 사다츠치(內田 定槌) 영사의 보고서에는 「대원군은 호리구치의 면전에서, 필담한 두루마리 전부를 태워 버렸다」고 쓰여 있다. 호리구치가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또 우치다는 「호리구치는 아유카이(鮎貝)와 같이 우연히 대원군의 별장을 방문했다」고 적고 있는데 이것은 고바야가와 히데오(小早川 秀雄)의 기록과 일치한다.
우치다 영사는 미우라 공사의 「민비암살계획」을 젼혀 모르게 하고, 사건과는 관계가 없으며, 그러고도 후에 시말을 처리하게 된 사람이므로, 그의 보고서는 가장 신빙성이 높다. 그러나 사건의 범위 밖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보고서의 내용은 관계자로부터 들어서 알게 된 것이 주이고, 증언에는 “허”가 있어도, 그것을 그대로 전한다는 약점이 있다.
다섯째로, 호리구치의 수필을 읽으면, 전반에 대원군이 한시를 주고받은 것은 시문의 전부가 쓰여 있는데, 후반의 「대원군이 결의를 보였다」는 중요한 부분에는 용어 하나도 쓰여 있지 않다. 그로부터는 시가 아니고 산문으로 바뀌었기 때문인지 모르나, 그렇다고 해도 갑자기 실감이 없게 되고, “꾸며낸 일”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이상 5가지 이유로 호리구치 구마이치(堀口 九万一)의 수필 내용을 믿을 수가 없다. 후반 부분은 “꾸며낸 일”일 것이다. 그것도 호리구치가 “꾸며낸”것이 아니고, 「우연히 방분했다」든가 「파견되었다」는 것은 모르겠으나, 대원군과 호리구치가 한시를 주고받은 것을 토대로 미우라와 스기무라가 “꾸며낸 일”을 덧붙인 것이 아닐까.
미우라와 호리구치 사이에는, 만일 사건 전의 사정을 물으면 이 설로 억지로 통과시키자는 약속이 있었을 것이다. 사건 직후부터 호리구치는 말을 맞추고, 40년 가까이 지나 브라질 공사, 유고 겸 루마니야 공사 등을 역임한 후에 “새삼스리 진상을 말해서, 남에게 상처를 입힐 필요가 없다”는 마음에서 미우라의 “꾸며낸 일”의 선에 따라 수필을 쓴 것이 아닐까.
히로시마(廣島)지방재판소에서 조사를 받은 48명 중에 수기를 남긴 사람은 많으나, 그것을 단서로 그들의 행동을 추구해도 진상을 파악하기 어렵다. 그 전형적인 예가, 이 「대원군과 호리구치 구마이치(堀口 九万一)의 필담」이다.
호리구치는 수필에서, 「본문 중의 시는..... 당시의 일기 중에서 한글자도 고치지 않고, 그대로 여기에 발췌했다」고 썼다. 그 일기가, 지금도 호리구치가에 있을 듯 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긴장했다. 1986년(소화61년) 연초였다.
어느 모임자리에서 야마모토 켄키치(山本 健吉/예술원 회원, 일본문예가협회이사장, 문화훈장수장)가, “민비는 내가 아주 좋아하는 여성으로, 특히 역사를 조사한 것은 아니지만, 일본세력을 조선반도에서 몰아내려고 한 왕비는 반드시 품격 높고, 훌륭한 여성이라고 생각 합니다”라고 나에게 말했다. 그의 말은 다시 이어진다.
“그래서, 평소부터 친했던 호리구치 다이갓고(堀口 大學)씨에게, 아버님의 당시 일기가 있을 것 같은데 보여주지 않겠는가 하고 부탁했으나, 아니 그것은 우리 집 수치이기 때문에 남들에게 보일 수 없다고 사절해서 결국 그것으로 끝났습니다. 다이갓고(大學)씨는 아버지인 구마이치(九万一)씨가 민비 암살에 가담한 것을 일가의 오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으나, 이제는 사건이 있은 지 100년 가까이 지났고, 지금이라면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호리구치 다이갓코(堀口 大學)는 프랑스 근대시의 여러 명시 집으로 문화훈장을 받은 시인으로, 1981년(소화56년)에 사거했다. 나는 다이갓코의 외동딸 다카바시 스미레코(高橋 스미레子)에게 연락을 했다. 그녀는 조부 구마이치(九万一)의 일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찾아보겠습니다. 찾으면 연락 하지요” 하고 나의 부탁을 선뜻 승낙해 주었다.
일기는 찾을 수 없었다. 호리구치 다이갓코가 소각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었다. 일기를 불태운 것이 구마이치 자신이 아니고, 아들인 다이갓코였다는데서 나는 새삼 시대의 흐름을 느꼈다. 만년(晩年)의 구마이치가 만일 민비 사건에 깊은 뉘우침을 남기고 있었다면, 그 수필집은 쓰지 않았을 것이고, 일기도 자기 손으로 태워버렸을지 모른다. 그러나 메이지(明治)이전에 태어난 그는, 일기를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1895년(명치28년)10월을 맞이한 직후, 미우라 고로(三浦 梧樓)공사는 민비 암살 결행의 날을 이달 10일로 앞당겼다. 이유는 주위상황의 긴박화와, 예정대로 11월에 결행하면 그 사이에 계획이 누설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10월2일, 미우라 공사는 이미 그의 협력자인 쿠스노키 유키히코(楠瀨 幸彦) 중좌를 공사관으로 불러, 군대동원에 대하여 협의하고, 다시 수비대장 우마야와라 무모토(馬屋原務本)소좌를 불러, 구체적인 동원계획을 다듬었다. 각 중대장에 대한 지시는, 결행일이 박두하였을 때, 우마와야라가 내려 주기로 했다. 부재중인 제5사단에서 편성한 후비 보병 독립 제18대대(3중대, 각 중대 2개 소대편성)가 서울의 경비임무를 맡은 것은 전년 11월부터였다. 총 인원수는 약 450명이다.
영사경찰 동원에 대하여는, 미우라 공사와 스기무라 서기관이 직접 지시를 내렸다. 현장지휘는 하기와라슈우지로우(萩原秀次廊) 경부 담당이다.
민간인 동원은 아다치 켄조오(安達 謙藏)의 몫이다. 그가 긴급동원을 개시한 것은 7일 오후 3시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훨씬 전부터 “이 사내라면” 하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불렀다. 코바야카와 히데오(小早川 秀雄)의 수기에 따르면, 아다치는 먼저 『한성신보』 주필 쿠니토모 시게아키(國友 重章)를 불러내고, 이어서 히라야마 이와히코(平山 岩彦)에게 계획을 털어놓고, 히라야마는 곧 그것을 코바야카와에게 알렸다. 그들은 모두 쿠마모토 켄(熊本縣) 사람으로, 히라야마와 코바야카와는 한성신문사 내의 같은 방에서 지내는 친우였다. 그밖에 국민신문의 특파원 키쿠치 켄세(菊池 謙讓) 등, 민비암살계획을 아는 청년들 전부, 아무런 주저도 없이 실행대 참가를 결심했다.
코바야카와는 결행 전에 왕궁의 상태를 살피려고 경복궁 주위를 걸어서 돌았고, 어떻게든 내부에 들어갈 수 없는가 하고, 광화문 위병에게 “뇌물”을 건넸으나 성공하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으로, 사건당일, 대원군의 가마를 뫼신 일본인 집단이 여기로부터 왕궁으로 침입했다.
경복궁 정면에 서 있는 중층누각, 광화문을 올려볼 때마다, 나는 붓 한 자루의 힘으로 이 문의 위기를 구한 야나기 무네요시 (柳宗悅/미술공예연구가, 민예 주창자)와 그 정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야나기는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였던 시대에 “일본의 부정”을 솔직히 인정하고, 「이에 나는 그 죄를 귀하들에게 사죄하고자 한다」고 쓴 사람이다. 또 조선 민예의 아름다움을 무한히 사랑하고, 경복궁 안에 조선민족 미술관을 설립한 것도 그였다.
야나기가 그 독특한 미에 감동된 몇 개의 조선 건축 중 하나가, 광화문이었다. 이것은 1395년에 이씨조선왕조의 태조 이성계(李成桂)에 의하여 건립되었으나. 임진난(壬辰亂/豊臣秀吉(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출병)의 전화로 소실하였고, 1865년에 대원군에 의하여 재건된 경복궁의 정문이다.
조선총독부의 의도로, 광과문이 파괴되는 것을 알게 된 야나기는, 『改造(개조)』 1922년(대정11년) 9월호에 발표한 「잃어버리게 될, 한 조선건축을 위해」 가운데,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강화문이여, 광화문이여, 너의 목숨이 이제 경각에 임박하고 있다. 네가 일찍이 이 세상에 있었다는 기억이, 차가운 망각 속으로 매장되려 하고 있다. 어찌하면 좋을까. 나는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잔혹한 정(鑿)이나 무정한 망치가 너의 몸을 조금씩 부시게 될 날은 이제 멀지 않았구나(중략) 문 앞에 멈춰서 우러러 볼 때, 누구도 그 위엄한 아름다움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지금 너를 죽음에서 구하려는 자는 반역의 죄로 추궁한다. (중략)
오, 광화문이여, 광화문이여, 웅대한 너의 모습. 이제부터 약 50여년의 옛날, 네가 왕국의 든든한 섭정 대원군이 그의 두려움을 불허하는 의지에 따라, 왕궁을 지키라고, 남향의 멋진 장소에 너의 주추를 튼튼하게 굳힌 것이다. 이곳에 조선이 있다고 말 하듯이 여러 건축이 전면의 좌우에 늘어 놓여, 광대한 도시대로를 직선으로, 한성을 지키는 숭례문과 아득히 어울리며, 북은 북악에 장식되고 남은 남산에 마주하여, 황문은 그 위엄 있는 자리를 태연히 차지하고 있다.」
야나기 무네요시 (柳宗悅)의 반대는 효력을 나타내어, 광화문은 파괴를 면하고, 경복궁의 동쪽, 건춘문 북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이 비운의 문은, 그대로의 모습으로 오늘의 바른 위치에 돌아온 것은 아니다. 동쪽으로 옮겨져 약 30년 후, 6.25동란의 전화를 전신에 입은 것이다. 나는 그 사진을 봤지만, 2층 지붕을 가진 목조 상층부는 자취도 없이 소실되고, 3개의 석조 아취 형 통용부 만이 남은 무참한 모습으로 되어 있었다.
옛날 위치로 되돌리도록 재건을 계획한 것은 1966년(소화41년), 옛 기록이나 사진 등에 의하여 복원이 완성된 것은 1968년(소화43년)이었다. 「광화문」이라는 한글 문자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필적이다.
10월5일, 미우라 공사는 오카모토 유우노스케(岡本 柳之助)를 대원군에게 보냈다. 지난해와 같이, 이번에도 대원군에 의한 쿠데타의 형태를 취할 계획이므로, 다시 그의 양해를 받아 둘 필요가 있었다.
오카모토는 대원군에게 승인을 받기 위한 4개조항의 「약조(約條)」를 가지고, 공덕리의 아소정으로 갔다. 이것은 스기무라 서기관이 지난해의 힘든 경험에서, 생각해 낸 것으로, 아집이 강한 대원군은 쿠데타 성공 후에 어떤 태도를 취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처음부터 그의 권한을 극히 좁은 범위에 봉쇄해 두려는 의도에 따른 것이다. 그 내용은---.
(1)대원군은 궁중 사무에 전념하고, 일체 정무에 관여하지 않을 것.
(2)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세분을 수뇌로 하고, 기타 개혁파 인사들을 천거하여 요 로에 세워 오직 정무를 맡겨, 고문관의 의견을 들어 개혁을 결행할 것
(3)이재면(李載冕)을 궁내대신으로, 김종한(金宗漢)을 협판으로 할 것.
(4)이준용(李埈鎔)을 일본으로 유학 시킬 것
오카모토의 방문을 받은 대원군은, 결행일이 가까워 온 것을 기뻐하고, 「약조」를 무조건 승인했다---고, 고바야카와(小早川)를 비롯하여 몇 사람이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오카모토는, 그렇게는 말하지 않는다. 그는 히로시마 지방재판소에서 예심판사에게 “대원군은 「나도 이제는 나이가 들었으므로 끈기를 뒤따를 수 없고, 이대로 죽음을 맞이할 운명으로 체념하고 있다」고 물러서고,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동석한 자제나 손자의 조언으로, 겨우 받아들였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도 호리구치의 수필내용을 부정하는 것이므로, 만일 대원군이 “굳은 결의”를 필담으로 보이고 있다면, 오카모토는 그것을 확인 하는 것만으로 좋았을 것이다. 나에게는 오카모토의 말인 “겨우 의견을 받아들였다”라는 부분은 믿어지지 않으나, 전체적으로는 이것이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지난해 일본에서 추대된 결과가 어떠했던가, 대원근은 그것만 생각해도, “궐기”할 마음이 아니었을 것이며, 이날 내보인 「약조」는, 쿠데타가 성공한다 해도 그가 얻는 것은 거의 없다는 것을 보이고 있다.
또 오카모토 쪽에서도, 이 자리에서 무리하게 대원군을 승낙하게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궐기”를 촉구하고, 결행할 날이 가까이 다가왔음을 전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좋지 않았을까. 결행할 때 지난해와 같이, 대원군을 강압적으로 대리고 나오면 일은 되는 것이다.
오카모토는 대원군 방문의 이유를 “귀국인사”라고 주위에 말했으며, 이튿날인 6일, 인천으로 갔다. 또 쿠스기(楠瀨)중좌도 귀국명령을 받았으므로, 관민 다수의 배웅을 받고 인천으로 출발했다.
2사람의 이 행동은, 민비 파를 방심시키기 위한 공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