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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anta_croce.blog.me/220345863352?Redirect=Log&from=postView
2013년 3월에 프레이저 보고서 원문을 입수하여 나름 정리해보려고 써 본 글입니다. 원문내용이 워낙 방대하지만 보고서에서 기술하고 있는 한국현대사와 경제개발부분만 발췌한 것임을 감안해서 봐주시기 바랍니다
사실 보고서의 대부분은 박정희 유신정권의 대미로비 이슈가 핵심입니다.
작성 배경 및 보고서 구성
프레이저 보고서 원본(주의, 프레이저 보고서는 원문이 이미지 파일이어서 사이즈가 80메가입니다.http://catalog.hathitrust.org/Record/002939983 )을 얻게 되면서 한번 차근차근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원래 프레이저 보고서를 읽게 된 동기는 박정희의 경제정책이 과연 뭐라고 보고서에 적혀있는가 알아보려고 했던 것인데, 이 보고서가 해방 후부터 1978년까지의 한미관계를 당시 미의회의 관점(아무래도 민주당의 시각인 면이)에서 서술한 것이어서 현대사 공부에도 도움이 되어 틈틈이 읽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468페이지를 모두 읽을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지만 해보는 데까지는 소개해 보겠습니다.
먼저 보고서의 작성은 하원 국제관계위원회의 프레이저의원이 위원장을 맡은 소위가 담당하였는데 그래서 프레이저 보고서라고 불립니다. 보고서 작성의 배경을 간단히 요약하면 1975년에 박정희 정부가 박동선이나 문선명의 통일교를 통해 미국 의회에 조직적인 로비를 가한 정황이 미국무부에 의해 포착됩니다. 이어서 동년 6월 한국의 인권문제 관련 청문회가 미의회에서 열리면서 로비관련 진술이 전직 한국 외교관의 입에서 흘러나옵니다. 그리고 1976년 가을에 미국의 유력지들이 앞 다투어 박동선의 하원의원 매수 로비활동을 폭로하면서 소위 박동선 게이트가 터지자 미 정계의 뜨거운 관심을 받게 됩니다.
프레이저 소위는 1978년 10월 보고서 제출까지 3년 동안 한미간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관계를 비롯한 제반 관계를 분석합니다. 특히, 소위는 77년 4월부터 78년 10월까지 11개국과 28개주를 다니며 1,563회의 관련자 인터뷰를 실시합니다.(잡설: 예산지원이 전제이긴 하지만 뭔 문제를 끝까지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작성되는 국회보고서가 아쉽습니다. 미국은 이런 소위보고서뿐만 아니라 의회소속의 GAO(우리 감사원과 비슷한) 보고서도 매우 전문적입니다. 물론 최근 국회예산정책처의 보고서를 보면 수준이 높아지고는 있어 그나마 다행입니다.)
보고서를 살펴보면 7개의 파트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Part A는 Introduction and Summary로 보고서 전체를 요약하고 있는데 짧지만 핵심내용을 모두 언급하고 있어 시간이 없는 분은 이 부분만 읽으면 될 정도입니다. 본고에서는 그래서 건너뜁니다.
Part B는 Review of Korean-American Relations로 1945년부터 1978년까지의 한미관계를 연대기순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본고에서는 B부터 다룹니다.
Part C는 Investigative Findings로서 소위 활동으로 인한 결과물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안보 및 정치문제를 다루고, 둘째는 박정희 중앙정보부의 대미활동을, 셋째는 중정활동에 대한 미국 행정부의 인식을, 넷째는 경제관계(이 부분이 박정희의 경제정책을 다룹니다.)를, 다섯째는 미국의 대한국 교육, 정보, 문화부문 활동(여기서 문선명의 통일교 조직을 다룹니다.)을, 여섯 번째는 한미간 국제협약, 마지막으로는 이민 및 동화정책(아마도 미국에 망명하는 한국인에 대한 문제인 듯합니다.)을 다룹니다.
Part D는 Special Problems in the Conduct of the Investigation으로 각국의 태도와 조사시 어려웠던 문제 그리고 박동선, 김형욱 등의 특별이슈를 다룹니다.
Part E는 Activities of Influence by Foreign Governments로 외국정부의 대미로비의 적법성 절차 등을 다룹니다.
Part F는 Additional Views와 Part G는 Glossary로 매듭을 짓습니다.
한미 관계 회고 중 일제시대
소개글에서 말씀드렸듯이 프레이저 보고서를 개관하는 part A를 과감히 건너뛰고 Part B Review of Korean-American Relations로 넘어갑니다. 해방 후부터 1978년까지의 한국정치사를 짧지만 주요 사건위주로 폭넓게 다루고 있습니다.
Introduction (p13)
소위는 한국이 민족정체성이 매우 높고 1000년 이상 단일민족 국가로 존속해와서 한국민들은 33년(45~78년)의 분단 상황을 인위적인 현상으로 보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중국, 일본, 소련과 인접해있어 지정학적으로 불안정한 위치에 있으며 근대에 들어서만 1894, 1904, 1950년에 전쟁이 있었다고 합니다.
미국과의 외교관계는 1882년 조선이 서구국가와의 외교관계 체결하는 시점에 같이 시작되었으며 1905년 조선이 일본의 보호령(protectorate)이 되면서 영사관계로 낮추게 되었다고 합니다. 외교관계의 변화는 가쓰라-태프트 밀약(보고서에는 이름 대신에 agreement의 내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The change was based upon an agreement by which Japan recognized American interests in Philippines and the United States recognized Japanese interests in Korea”) 때문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일본의 식민통치를 규정지으면 소위는 경제적 약탈(economic exploitation), 엄격한 차별(sharp discrimination), 그리고 민족주의의 조짐에 대한 가혹한 억압이었다고 정리합니다. 또한 중국침공과 태평양 전쟁 중 한국어를 말살하고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민족동화정책을 헛되게 시도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당시 한국인 대부분은 강제적으로 일본식 이름으로 개명했으며 한국 노동자들을 일본으로 데려가 비전략 산업에서 일하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한국인들은 일본군에 징집되어야 했다고 합니다.
소위는 기본적으로 일제의 경제개발은 식량, 원자재, 일본상품의 시장을 일본에게 제공하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비록 일제의 식민지배가 악랄했지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몇가지 점에서 긍정적인 요소(some positive elements)도 있었다고 소위는 적고 있습니다. 그 것은 효율적인 운송과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의 구축으로 78년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일제는 기간산업의 대부분을 원자재와 수력발전에 의해 전기가 풍부한 북쪽에 설립했으며 남쪽은 북쪽을 보조하는 곡창지대와 상업지역으로 남겨 두었다고 합니다. 또한 식민지배를 거치면서 숙련공과 소수지만 잘훈련된 화이트칼라 관리자들이 등장하게 되었으며 전후 이들의 기술을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미 관계 회고 중 해방후부터 한국전쟁 전까지
The Postwar Years: 1945-61 (p14)
일본의 항복으로 한국은 해방되었으며, 종전 직전 한반도의 38도 분할이 펜타곤에서 결정되었다고 합니다. 분할안은 미국과 소련이 공동으로 한반도 주둔 일본의 항복을 받는 수단으로 소련에게 제안되었으며, 임시적 분할안이 냉전체제로 이어지면서 영구적 분단이 되었다고 합니다.
해방 후 경제적으로 남한은 매우 엄혹한 상황이었는데, 오랫동안 일본에 의존적이었고 분단이 되면서 한마디로 난장판(in shambles)이었다고 합니다.
해방으로 수백만의 한국인들이 중국, 일본, 소련에서 고향(특히 인구밀도가 높은 남쪽)으로 귀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심각한 경제불황은 미군정이 전국적인 토지개혁, 살인적인 인플레통제, 농업과 공업 부양에 실패하면서 더 악화되었다고 소위는 기술하고 있습니다.
당시 미국의 경제지원은 주로 구호사업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식량과 기초 생필품 지원이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미군정이 일본인 소유의 자산(적산)을 둘러싼 분쟁을 해결하지 못하면서 대부분 식민지 시대 경제활동의 기초였던 자산들의 활용이 저조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정치적으로도 당시 대부분의 정치지도자들이 친일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해 신뢰성의 문제에 직면하였으며 민족주의 활동가의 대부분이 좌파로 분류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미군정이 고른 보수적 리더가 이승만이었다고 하는군요.
미군정은 특히 아시아에서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저지하는데 신경썼는데 그런 점에서 남한에 성공적인 반공정부를 세우는 것으로 달성될 수 있다고 봤답니다.
1947년 11월 14일 유엔은 미국의 한반도 전역에서 유엔 감시하의 총선요청을 승인했으나 유엔 감시단의 입북이 거절되면서 미군정은 남한만의 단독 총선을 결정하게 되었다는군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총선이 분단을 고착화할 것을 우려해 총선을 보이콧했답니다.
Establish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and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p15)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총선으로 제헌의회가 구성되었고 여기서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공식 출범하게 됩니다. 동년 10월 북한에서는 전직 항일유격대 전사이자 소련군 장교(a former anti-Japanese guerrilla figher and former officer in the Soviet Army)였던 김일성이가 통치하는 DPRK가 출범하였다고 소위는 기술하고 있습니다. 김일성은 78년 당시까지도 지도자이라고 부연하고 있습니다.
남한과 북한은 각각 자신들이 한반도 전체의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주장하면서 치열한 경쟁을 30년간 이어왔답니다.
1940년대 후반부터 남한에서는 경제적 상황과 이 상황에 책임이 있는 정치지도자에 대한 불만족으로 산발적인 사회불안 사건들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그 중에 한 사건이 48년 10월 여수지역에서 군요원들의 모의로 일어난 단기 군인 반란(a brief leftwing uprising)이었으며 그 중의 한명이 박정희 대령이었다고 소위는 기술하고 있습니다. 반란은 상당한 인명손실을 초래하면서 1주일후 진압되었지만 박정희의 참여는 61년 쿠데타 이후 한미관계에 문제를 일으키게 되었답니다.
대부분의 미군은 1949년 5월과 6월에 철수했으며 비슷한 시점에 소련군도 북한에서 철수했답니다.
첫댓글 프레이저 보고서
잘 읽었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박정희 보고서
박정희 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