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전국에는 비상 계엄령이 떨어졌다.
비상 계엄, 군 병력이 경찰을 대신해 치안을 장악했다. 계엄군 사령관이 행정권과 사법권을 틀어쥐었다.
몇몇 사람들이 계엄령을 해제하고 유신 체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거사를 준비한다.
하지만 계엄령 아래에서 모임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들은 결혼식을 생각해 낸다.
“신랑 홍성엽, 신부 윤정민의 결혼식을 다음과 같이 거행하오니...”
청첩장에 1979년 11월 24일 명동 YMCA 강당이라는 것까지 주먹만하게 박혔다.
신랑 홍성엽은 진짜였지만 신부 윤정민은 민정(民政)을 비튼 가상의 인물이었다.
윤보선 전 대통령부터 젊은 학생과 노동자들까지 만장한 가운데 결혼식이 열렸다.
그러나 결혼식에서 울려 퍼진 건 행진곡이 아니라 뒤늦게 사실을 알아챈 계엄군의 군홧발 소리였다.
체포된 사람들은 악독한 고문을 받아야 했다.
신랑 홍성엽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특별 취급을 받은 또 한 사람이 있었다.
백기완이었다.
몇 년 뒤 체중 82Kg 체구였던 그가 40Kg대의 말라깽이가 되었다. 냉혹한 계엄 당국조차 이러다 죽이겠다 싶어 병보석으로 그를 내보냈다.
그 참혹한 시간을 백기완은 자신이 지은 시(詩)를 주문처럼 읊조리고 버텼다.
“시멘트 바닥에 누워 천장에 매달린 15촉 전구를 보고 있노라면 이대로 죽는구나하는 절망에 몸부림칠 때가 많았다.
극한 상황에서 자꾸만 약해지는 정신을 달구질하기 위해 '묏비나리'를 주문처럼 외우고 또 외웠다.”
1983년 2월 대구. 기독교 예장(예수교 장로회) 청년 대회.
백기완이 등장하자 청년들 모두가 일어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 노래 가사는 <묏비나리>의 일부였다.
백기완은 노래를 듣고 펑펑 울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사실 이 노래는 백기완을 만나기 1년 전에 지어졌다.
광주항쟁의 마지막 날, 도청에서 끝까지 계엄군 총에 맞선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
그리고 고된 노동에도 야학을 함께 했던 박기순, 이 두 사람의 죽음 앞에 사람들은 영혼 결혼식을 올려 주기로 한다.
그 때 만들어진 노래가 <임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가사는 '묏비나리' 의 일부를 작가 황석영이 다듬은 것이었다.
이 노래 테이프를 만든 사람들은 녹음한 테이프를 가슴에 품고서 꼭 혼자서만 다녔다고 한다.
혹여 경찰에 잡히더라도 자기 혼자만 잡히고, 누군가는 꼭 다른 사람들에게 이 노래를 전파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이 노래는 독재에 맞선 민주주의의 깃발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에 대한 찬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