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없었던 일이라고 한사코 부인하는 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BBC 필름이 2016년 제작한 영화 '나는 부정한다'(Denial)를 넷플릭스에서 찾아 보며 곰곰이 생각했다. 한두 번 본 영화인데도 돌려 보며 꼼꼼히 관람했다.
1994년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 에모리 대학의 한 강의실. 유대계 역사학자 데보라 립스타트(레이첼 와이즈) 교수가 학생들에게 홀로코스트를 어떻게 증명하는지를 놓고 강연하는데 홀로코스트 부인론자인 히틀러와 나치 전문가 데이빗 어빙(티모시 스폴)이 찾아와 히틀러가 대량 학살을 지시한 문건을 제시하는 사람에게 1000 파운드를 주겠다며 훼방을 놓는다. 2년 뒤 데보라는 어빙이 펭귄 북스와 함께 자신을 중상(libel) 혐의로 고소해 런던 고등법원에 피고로 선다. 미국과 달리 영국에서는 무죄 추정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으며, 어빙의 주장이 거짓임을 피고 측이 증명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낙담한다.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부정하는 자들이 입증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긍정하는 자들이 왜곡된 주장의 진위를 드러내야 한다는 점이 오늘 대한민국에서도 되풀이된다는 점이 아프고 또 아프다. 하지만 데보라 측에는 변호사 앤서니 줄리어스(앤드류 스콧, '더 리플리' 주인공이다)와 노련한 변호사 리처드 램프턴(톰 윌킨슨)을 비롯한 수많은 인재들이 합류해 골리앗 군단을 이루고, 이미 여러 차례 소송 과정에 본인이 직접 변론해 재미를 본 어빙은 홀로 변론에 나서 이른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이룬다.
그런데 줄리어스도 그렇고, 소송에 잔뼈가 굵은 램프턴도 데보라가 증언대에 서면 안 된다고 한사코 뜯어말린다. 뿐만 아니라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찾아와 증언대에 서겠다고 용기를 드러내는데도 두 변호사는 안 된다고 고집한다. 어빙이 무자비하고 잔인한 공격을 퍼부어 데보라나 생존자들을 가해하고, 재판을 엉망으로 만들 것이라고 걱정한 것이었다.
초반 어빙이 승기를 잡는 듯해 피고 측은 분열 조짐을 보이지만 중반 램프턴이 만회하는 데 성공한다. 나는 과거 영화를 봤을 때 중반 이후 법정 공방이 영화의 핵심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다시 보니 램프턴이 승부를 원점으로 돌린 뒤 그가 데보라의 숙소를 찾아와 와인을 마시며 나눈 대화가 감동적이었다. 그리고 영화의 메시지를 압축한다고 느끼게 됐다. 러닝 타임 1시간 12분 23초 무렵에 시작한다.
램프턴 "이런 일에는 호사를 부리는 편입니다. 왜 나쁜 사람들만 호사를 누린답니끼?"(실은 1995년산 포도주라 별로 귀하거나 비싼 와인도 아니었다)
데보라는 그의 신문 기술(어빙에게 눈길도 주지 않아 역사학자로서 늘 권위를 인정받는 것에 굶주림을 느꼈던 어빙을 자극했다)을 칭찬한 뒤 "사과드릴 게 있어요 아우슈비츠 갔을 때요. 무례하다고 생각했고 늦게 오셨다 생각했죠.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시려던 건데"
"네 그랬죠."(실제로 램프턴은 아우슈비츠 수용소 철조망 조각을 들고 와 보며 변론 의지를 되새겼다)
"오늘 이해가 됐어요. 범죄 현장이니까 방문했던 거죠. 재판을 준비하던 거고 확신이 필요했던 거죠. 무례하고 비정하게 보이더라도,"
"그게 제 일이죠. 어떻게 될지 짐작도 못했어요. 그냥 의견서만 제출하게 될지, 저번 의견서는 맥도날드에서 작성해 보냈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우슈비츠를 그렇게 대하겠습니까? 날 다르게 보셨다면 안타까울 뿐이지만, 의뢰인이 괴로우면 저도 괴로워져요. (당신을) 힘들게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알아요. 하지만 어릴 때부터 날 대신하는 사람을 믿어본 적이 없어요. 내 목소리와 양심을 믿을 뿐이며 그걸 따르며 살아왔어요."
"양심을?"
"네"
"그렇군요. 양심이란 건 이상한 존재죠. 하지만 최선으로 느껴지는 게 반드시 최선의 결과를 낳진 않아요 하긴 마음은 편하죠. 악마를 노려보면서 감정을 쏟아내면 마음도 편하고 만족스러울 거예요. 그리고 패배를 각오해야 하죠. 혼자만이 아니라 모든 이들의 영원한 패배"
"그렇지 않으면요?"
"잘 알잖아요 가만히 앉아서 입을 닫고 이기세요. 따라서 self-denial이 필요하단 겁니다."
"양심을 남에게 맡기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아세요? 평생 상상도 못한 일이에요. 좋아요. 내 양심은 낚시 좋아하고 와인 애호가인 스코틀랜드인에게 맡기죠."
원제를 옮기면서 '나는 부정한다'로 정한 것은 이 대화가 근거가 됐음이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영어사전을 들추니 self-denial은 1. 자제 2. 극기 3. 무사(無私) 4. 무욕으로 옮겨진다. 원제는 비교적 명확한데 '나는 부정한다'란 우리말 제목은 어빙이 주어인지, 데보라가 주어인지, 아니면 둘을 바라보는 우리가 주어인지 헷갈리게 하는데 의도된 혼동으로도 읽힌다.
당연히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데보라는 1947년생으로 2022년 5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반유대주의 모니터링 및 근절 특별대사로 임명됐다. 2014년 '홀로코스트 부인하기, 진실과 기억에 대한 점증하는 공격'을 썼다. 그리고 어빙과 32차례 공판을 하는 동안 증언대에 서지 않고도 300쪽이 넘는 판결문을 낳은 2000년 4월 11일 승소 판결을 얻어낸다. 이 일을 2015년 '재판에 관한 역사, 홀로코스트 부인론자와 법정에 선 날'로 출간했는데 믹 잭슨 감독이 연출해 다음해 국내 개봉했다.
최후 진술을 마친 뒤 느닷없이 어빙이 정말로 그렇게(허황되게) 믿고 있는 사람일 수 있지 않느냐고 요상한 발언을 해 피고 측을 긴장시켰던 고등법원 재판장은 어빙을 반유대주의자, 고의적인 역사왜곡자로 규정하며 15만 파운드를 피고 측에 지급하라고 판시해 완벽하게 피고의 손을 들어줬다. 어빙은 항소했지만 기각 당했고, 그는 이듬해 파산 선고를 받았다.
1938년에 태어난 어빙은 2006년 2월 오스트리아 법원으로부터 아우슈비츠 가스실이 실재하지 않았다는 등의 어처구니없는 발언을 일삼은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같은 해 12월에 13개월로 감형받은 뒤 풀려나 영국으로 추방됐다. 종합하면 데보라에게 패소하는 등 여러 소송에서 져 경제적으로 궁핍했고 유럽 여러 나라에서 입국을 금지당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지만 소신을 바꾸지는 않았다. 지난 2월 가족들은 지난해 10월 미국 플로리다주에서 넘어진 뒤 급격히 건강이 나빠져 두 달 동안 입원한 뒤 영국으로 돌아와 "24시간 돌봄을 받아 슬프게도 일생의 연구에 매달릴 수 없게 됐다"고 전했다.
영국 중상 및 명예훼손 소송 역사에 가장 뛰어난 변호사로 평가받는 램프턴은 지난해 12월 23일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 대목에서 지만원 같은 이들이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북한군이 개입했다느니 하는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는데도 우리 사회 일부에 이들을 비호하는 이들이 적지 않고, 법률적 단죄도 미미하기 그지 없어 독버섯처럼 건전한 역사 인식을 좀먹고 있다. 그릇된 얘기를 늘어놓을수록 정치적 이해 관계 등 때문에 별풍선을 날려 후원하는 등의 추잡한 면모도 개선되지 않고 있다. 사법부가 이런 역사 왜곡에 단호한 자세를 보이는 것이 긴요하다는 점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