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가구史, 저녁정물 속에 스며들다
임희선
대구 가구사 간판은 사라졌다
공장 간판을 기준으로 웅크려 앉은 아홉 집은 나란했다
키 작은 함석지붕 아래 일사불란했다
아무 집에나 들어가 놀던 볕이 축축한 긴장을 걷어 돌아가고
모래시계 속 반 쯤 묻힌 타이어가 긴 그림자를 꺼내 놓는 시간
식은 찻잔에 눌러 앉은 수다를 마시고 자리를 뜨는 여자
동그랗게 말린 등에 슬그머니 낮 이울 때
하늘에서 어른어른 귀에 익은 이야기를 내려놓는다
콧물 찍어 바르던 양철 벽 도린곁 해바라기
고무줄놀이 하는 아이들 노래 몽구리 담을 넘고
이 빠진 그릇, 터진 이불보따리, 버려둔 살림살이가
돋보기에 덴 실밥처럼 오그라지던 시절
고개 숙여 오르던 천장 낮은 난쟁이 계단 위
지붕처럼 앉아있던 가게, 50원짜리 깐돌이 팔던 점방
앉은뱅이걸음 오르며 맡던 쥐오줌 지린내 여전하다고
짐자전거 그림자 능청스런 너스레 평상마루에 떨어놓는다
부부싸움에 동그란 알루미늄 밥상 비행접시처럼 날던 시멘트 마당
오래전 떨어뜨린 오렌지 맛 하드 얼룩져 기다리고
나일론 줄에 입 꼭 다문 빨래집게 나른한 보풀이 달려 있는 옆
가랑이를 추스르지 못하는 옥수수자루 나들나들 웃는다
헹궈도 지지 않는 햇살이 그루잠 자는 곳이었다
혼자 자는 밤 아이는 벽에 걸어 둔 작업복,
미닫이 유리문 올록 문양 도깨비와 밤새 씨름을 했다
동전모양 비늘 엎드려 있던 해치 그림자 달려들어
왁저지 가슴을 통통쳤다
새들의 숲에 뜸 들다만 노을이 뒤꿈치를 들고 온다
놀이터 그네에 앉은 낮 거스러미를 땅거미가 물고 가는 것은
공기 원근법에 갇힌 희미한 사물이
불분명한 하루를 지우는 방식
가구(家口) 만들던 그 집은 아직 돌풍이 들고난다
훌쩍훌쩍 발을 바꾸는 노을 끝에
마흔 해 등고선을 띄운다
* 왁저지 : 급작스러운 일을 당하여 깜짝 놀라는 모양
브레이크 타임
임희선
오후 3시
여자는 리톱스, 살아있는 돌이 된다
갈라진 발굽사이로 안개를 머금고
땅속에서 광합성을 시작하는
남아프리카 나미비아
발에 치여 숨을 참는 자갈풀처럼
‘그만 둔다’는 말은 설거지통에서만 출렁인다
움푹 패어버린 자리에 움직이지 않는 불신
말 많은 숟가락들이 뜨거운 김에 절어
핼쑥한 체 소쿠리에 담겨 나오는 브레이크 타임
급정거를 해도 제동거리가 없다
잘 나가던 시절의 친구 고객은 사절입니다
옆 골목 경쟁업체를 이용해 주십시오
돌돌 말아 망 속에 집어넣은 자존심을 풀고 일어서는
유니폼에 그린 간간한 마블링은 1등급 소금 등이다
CCTV가 한 눈 파는 사이
때 이른 끼니는 메뉴판에 없는 것으로
낮의 흔적을 한 입씩 베어 문다
고객이 남긴 음식은 KS마크가 찍힌 음식물 수거함에
브랜드 없는 뱃속은 스티커를 붙여도 수거불가
접시는 음식이 돋보이게, 사람은 접시가 돋보이게
해감하는 말들이 싱크대 바닥에 지근거린다
거울 속에 두었던 마우스피스를 꺼내 넣는다
치즈, 오렌지, 위스키, 스키, 와이키키
‘당첨된다면’ 선언하는 가정법에 방점을 놓는
그녀의 눈은 머리무게의 15%
뼈를 비운 금눈쇠올빼미
늘 준비중인 날개짓이 오늘에 걸릴 확률은 50%다
의태(擬態)하는 그녀는 경계인
종종걸음 치는 오후 5시, 브레이크 타임이 깨진다
< 월간 우리 시 10월호 > - 대구가구史, 저녁정물 속에 스며들다 외 1 편 / 임희선 2014년 <애지> 봄호 등단
첫댓글 아~ 탄탄한 계간지 <애지>의 신인상 수상자 다운 내공과 저력이 돋보이는 글 두편 잘 감상했습니다. 글이 맛깔스럽게 잘 버무려져 눈과 입에 군침이 도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