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아름다워(555) - 제6회 조선통신사 옛길 한일우정긷기 일본기행록(13)
1. 명승 하코네(葙根)를 거쳐 아다미(熱海) 휴양지로
5월 19일(금), 맑고 약간 더운 날씨다. 오전 7시 반에 호텔 버스로 미시마 언덕에 있는 공민관으로 향하였다. 공민관에 이르니 당일 참가자 10여명이 먼저 와 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걸은 홋카이도의 이나가키 유기 씨와 부산 소맥회의 박홍규 회장도 이곳에서 합류하여 도쿄까지 간다. 날씨가 맑아 후지산을 볼 수 있을까 기대하며 공민관 뒤편으로 나아가니 구름 사이로 눈 덮인 산 정상부분이 시야에 들어온다.
수즙은듯 구름 위로 얼굴만 드러낸 후지산의 모습
코스리더는 전날의 오다케 씨, 800미터 정상까지 4개의 고개를 넘는다며 전날처럼 ‘하코네길, 우리가 함께 가고 있습니다. 열심히 걸읍시다.’는 한국어 녹음을 틀어준다.
가나이 씨가 소개하는 조선통신사 이야기, 하코네 코스는 옛 부터 가장 힘든 구간으로 알려졌다. 큰 고개 넘어 호수에 이르면 관소(검문소)가 있다. 통과가 까돕고 중요한 검문소, 그란 조선통신사는 가마에 탄 채로 무사통과하였다. 3사 외의 수행원은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하는데 제7회 통신사가 지날 때는 눈이 내렸다. 눈이 오면 미끄러워 통과가 어려운데 하룻밤에 이곳에서 자라는 대나무를 잘라 길에 깔았더니 어렵지 않게 통과할 수 있었다. 통신사 일행 왈, 막부의 힘이 대단하구나. 11회 때는 산불이 났다. 거센 바람에 불길이 번개 치듯 걷잡을 수 없이 번지더라는 기록이 있다.
8시 반에 공민관을 출발하여 30여분 걸으니 가파른 언덕길이 나온다. 숨을 몰아쉬며 한 시간여 힘겹게 올라 야마나카 성터(山中珹跡)에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가파른 고갯길에 접어든다. 혼자 걷기도 힘든데 가마꾼들은 어떻게 올랐을까. 스마트 폰을 배낭에 넣고 걷는 중 벨이 울린다. 전화 받기도 힘들어 신호음이 꺼질 때까지 방치, 슬그머니 무슨 전화일까 궁금해진다. 전날 백수를 앞둔 노모께서 딸들 이름을 연달아 부르신다는 소식을 접한 터라 은근히 신경이 쓰이기도. 그러면서 떠오른 생각, 통신사들은 여러 달 가족을 떠나 소식도 모르고 지내느라 얼마나 고심이 컸을까? 나중에 번호를 확인하니 동창회 임원의 전화, 연락사항이 있나본데 귀국 후 확인하리라.
11시 15분, 2시간 45분 만에 고개 마루 광장에 이르렀다. 함께 걸은 대원 모두 장하다. 특히 8순의 김승남, 한동기, 최형우 선배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만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는 시조로 소감을 가름, 힘든 일도 참고 견디면 이겨낸다는 교훈을 새기며 내리막 길로 접어들었다. 오를 때보다 더 좁은 오솔길이 반들반들한 돌로 덮인 급경사길, 조심조심 내려오니 하코네의 명소인 아시노카 호수가 있는 하코네 관소로 접어든다. 마침 12시, 우리를 환영하듯 종이 울린다. 관소에서 기다리던 이들이 손을 흔들며 아이스크림으로 땀을 식혀준다. 한 가지 아쉬움은 호수 위로 펼쳐지는 후지산의 아름다운 모습을 옅은 구름이 가려 보지 못한 것. 관소 앞에 이르러 코스리더의 교대식을 갖는다. 하코네 고개에서 시즈오카 현과 가나가와(神奈縣)으로 경계가 갈리듯 걷기협회도 행정구역 따라 관할이 다른가 보다. 코스 리더 외에 3,4명의 인원이 차도를 건너거나 위험지역을 지날 때 앞뒤로 따라 붙어서 신경을 써준 덕에 안전하게 걷는 편이다.
관소 주변에서 각기 마련한 점심을 들고 12시 45분에 오후 걷기에 나섰다. 높은 고개 오르느라 31km의 거리 중 오전에 걸은 거러ㅣ 12km, 오후에 갈 길이 바쁘다. 관광객이 많이 찾는 관소를 지나 도카이도 옛 길에 들어서니 수백 년 수령의 거목으로 자란 삼나무가 길 양편으로 웅자를 드러낸다. 한 대원이 말한다. 수십일 험한 길 걸었어도 격조 높은 이 길 지나노라면 힘들었던 모든 고통이 스르르 사라지는 기분이라고. 몸은 고단하지만 그런 마음 새기며 걷는 발걸음이 가볍다.
수백년 자라 거목으로 우뚝선 하코네 삼나무 숲
내려가는 길은 굽이굽이 급커브길, 나는 오르막이 힘겨운데 어떤 이는 내리막이 힘들다네. 지나는 길목에 녹음 짙은 산기슭, 하늘로 치솟은 삼나무 숲, 구도카이도 유적들이 많은 이 지역을 자연과 역사를 배우는 길이라고 적혀 있다. 지난주 가께가와 조약돌 길에도 같은 글귀가 있었는데 그때는 미끄러질까 조심하느라 주변을 살필 겨를이 없었는데 오늘은 여유가 생겼는지 자연이 친근하고 역사가 솔깃하다.
한참을 내려오니 온천지역의 湯本소학교 옆에 早雲寺가 있다. 그 문의 金湯山이라는 현판을 쓴 이가 조선국 雪峰이라 적혀 있다. 히코네 강국사(江國寺)의 현판을 썼던 인물(김의신)로 명필이었나 보다. 그가 이 절에 머문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인근의 宿에 머물 때 사찰의 스님이 찾아가서 현판 그리를 받아온 것 아닌가 하는 가나이 씨의 견해, 그런저런 역사의 흔적을 현장에서 살피는 묘미가 있다.
시간은 오후 4시인데 아직도 남은 길이 8km, 열심히 걸어 목적지를 2km 앞두고 마지막 휴식을 취하는 동안 큼직한 아이스크림으로 지친 몸을 충전한다. 목적지인 오다와라 역에 도착하니 5시 40분, 걷기를 마무리하고 아다미(熱海) 행 열차에 오르니 6시가 넘는다. 아다미는 유명한 휴양지, 큰 호텔에 여장을 풀고 온천수에 몸을 담그니 피로가 가신다. 8시부터의 저녁식사는 음식과 술을 무제한으로 제공하는 뷔페, 취향에 따라 마음껏 드는 식단이 다양하고 푸짐하다. 가장 어려운 코스 무사히 끝냈으니 사흘 남은 일정 끝까지 잘 마무리하자.
2. 우정과 평화를 다지며 걷는 발걸음
5월 20일(토), 맑고 더운 날씨다. 오전 7시 반, 전날 저녁처럼 풍성한 뷔페로 아침을 들고 가까이 있는 역으로 향하였다. 기차의 출발시간은 오전 7시 52분, 기록을 살피니 4년 전에도 같은 시간이다. 이다와라 역에 내려 출발장소에 이르니 여러 차례 함께 걸은 친구들이 먼저 와서 반긴다. 100번 이상 한국을 찾은 가와타 시게루 씨,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가미조 메이코 씨, 한국과 대만을 함께 일주한 오시마 도시하루 씨 등. 휴일을 맞아 당일 참가자들이 수십 명, 도쿄에서 이다와라 까지 열차로 두 시간 넘는 거리를 새벽부터 달려온 발걸음이다.
오전 8시 45분에 이다와라 역을 출발하여 후지사와로 향하였다. 걷는 거리는 37km, 도심으로 이어지는 먼 길이다. 코스 리더 등 봉사자는 나카무라 씨 등 4명, 나이 지긋한 베테랑들이다. 이들의 선도로 역 앞의 어느 식당을 지나노라니 한국어 메뉴 있다고 써 붙인 글씨가 반갑다. 아다미 호텔에서도 많은 한국인들을 접한 터, 동포들의 왕래가 잦은 곳인가 보다.
한 시간여 걸어 큰 강(사가아천)을 건너는 중 후지산의 모습이 선명하게 시야에 잡힌다. 전날 하코네 호수에서 접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려는 듯, 뜻밖의 선물에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한 시간 반 걸어 첫 번째 휴식은 사람들로 붐비는 역, 역무원의 양해를 얻어 내부화장실을 다녀오니 집행부에서 아이스 음료를 나눠준다. 더운 날씨에 꿀맛, 틈틈이 목을 축이는 물도 감로수처럼 달다.
큰 다리를 걷는 일행들,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산 넘고 물 건너 먼길 걸었는가?
두 번째 휴식도 역, 니노니아 역사 앞에 작은 소녀상이 세워졌다. 1945년 8월 5일에 미군 함재기가 이곳에 폭탄을 투하하였는데 희생자 중에는 1세 소녀가 들어 있다. 이를 교훈으로 새기려 평화와 우정을 영원히 기리는 기념비다. 우리들의 발걸음은 평화와 우정을 다지려함, 내 배낭 뒤에 적은 메시지도 우정과 평화다.
니노미아마치(二宮町)는 꽤 번화한 거리, 뒤이어 大磯町이 한참 이어진다. 二宮町, 大磯町 등의 행정구역이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어 주변에 물어도 아는 이가 없다. 점심장소는 大磯町의 숲이 울창한 공원, 그늘의 잔디밭에 앉아 편의점에서 산 도시락을 드는 모습이 야외의 소풍놀이 같다. 전날 합류한 박홍규 씨가 딸기와 토마토를 한아름 사와 감사하다. 어제는 홋카이도에 사는 유키 씨가 손수 만든 쿠키를 한 봉지 씩 나눠주어 고마웠고.
1시 10분에 오후 걷기에 나섰다. 갈 길은 먼데 28도를 웃도는 더운 날씨에 땀이 줄줄 흐른다. 잠시 후 히라츠카(平塚)시에 들어선다. ‘핵병기사용반대선언도시’라 내건 입간판에 눈길이 간다. 걷는 도중 환경, 인권, 평화를 모토로 내세운 여러 도시들을 만났다. 시민의 염원은 평화인데 세계 도처에 가시지 않은 전쟁과 폭력의 위협은 누구의 소행인가?
히라츠카(平塚)시를 지나 큰 강을 건너니 지카자키 시에 들어선다. 국도 1호와 도카이도를 따라 걷는 길, 신호등에 자주 걸려 속도가 늦다. 한참을 걸어 규모가 큰 몰에서 휴식을 취하고 일어서니 오후 4시 반, 아직도 목적지까지 8km 남았다. 속도를 내서 열심히 걸으니 드디어 후지사와 경내로 접어든다. 5시 40분에 수퍼센터에서 마지막 휴식을 취하고 30여분 걸어서 도착한 곳은 국제 교류관, 시청관계자들과 한일친선협회 임원 등 10여명이 박수로 일행을 맞는다. ‘어서 오십시오 후지사와’라고 쓴 플래카드를 내건 방의 벽에 조선통신사들의 행차를 묘사한 그림에 눈길이 간다.
후지사와 국제교류관에 걸린 조선통신사 행렬도
통역도 없이 일방적으로 진행하는 환영행사가 약간 어수룩한 느낌, 이미 다른 때보다 늦은 시간인데 다시 깃발을 든다. 최종도착지는 1km 더 걸어 후지사와 역이란다. 역에 도착하여 스트레칭 등 마무리를 하고 나니 7시가 넘었다. 숙소(도요코 인)까지 5분, 여장을 풀고 나니 8시가 가까운데 마지막 조별 식사모임이 남아 있다. 서둘러 저녁을 들고 호텔에 돌아오니 밤 10시가 가깝다. 더운 날씨에 먼 길 걷느라 모두들 수고하였습니다. 내일도 30여km 걸어야 하니 편히 자고 새 힘을 얻읍시다.
* 지난 일요일에 가께가와에서 후지에다를 걸은 우루시바라 마리 씨는 도쿄에 사는 직장인, 주말을 맞아 오늘 내일 함께 걷는다. 지난주 서툰 한국어를 구사하기에 ‘회상의 피란길 걷기‘ 내용이 담긴 자료(신문기사)를 주었더니 한국어 선생과 함께 이를 읽고 감동하였다고 말한다. 걷기를 마치고 숙소로 향하는데 낯선 여성들이 찾는다. 요코하마에 사는 동포 탁명숙 씨가 보낸 일행, 사정이 있어 마중 나오지 못하였는데 마지막 날 함께 걷겠다는 전갈이다. 4년 전 걷기 때 이곳에서 만나 친분이 있는 분, 예기치 않은 동행소식이 반갑다.
첫댓글 시민의 염원은 평화인데 세계 도처에 가시지 않은 전쟁과 폭력의 위협은 누구의 소행인가? 마음에 와 닿는 글입니다. 교수님 너무 그을려서 시커먼스로 돌아오시는건 아닌지...ㅋㅋㅋㅋ가끔 셀카도 찍어서 올려주셔요.
수고많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