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병원 장례식장 뒤편 소각장
함기석
불타고 있다
누군가 쓴 일기장
누군가 신던 기린 양말
누군가 선물 받은 아름다운 목도리
눈 속에서 불타고 있다
누군가 발이 되어준 지팡이
누군가 불면 속에서 쓰다듬던 장난감 펭귄
누군가 비운 빨간 약병
첫눈 속에서 모두 불타고 있다
누군가 잃어버린 벙어리장갑
누군가 아기를 안고 칸나처럼 웃던 창문
누군가 잃어버린 청춘
열쇠 없는 일요일 아침, 자물쇠 닮은 갑작스런 죽음
누군가 머물다 떠난 빈 벤치
누군가 죽은 숲
누군가 울면서 걸어간 눈길
모두 젖은 물고기처럼 불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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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당연한 의미를 믿지 않고 늘 다른 가능성을 타진하며 새로운 말과 논리를 꿈꾸는 사람이 시인이다. 언어 혹은 언어의 자율적 논리 자체를 중시하게 되면 명백한 현실을 표현하기 위해서 언어를 보조적 수단으로 동원하지 않게 된다. 오히려 언어를 정교하게 조직하여 현실을 재배열하고 시간이 정지된 유희의 세계를 그리게 된다.
따라서 이 계열의 작품들은 추상적이고 논리적이라는 인상이 강하고, 보편적 설득력을 얻기가 쉽지 않은데 함기석(49)은 드물게 자기 색깔을 인정받으며 이 계열을 대표해온 시인 중 한 명이다. 센스가 아니라 난센스, 2차원의 문장과 3차원의 현실을 뒤섞는 상상력, 기하학에서 대수학과 위상수학, 무한(∞)과 영(0) 등 수학의 다양한 개념과 공리를 시의 전위적 가능성으로 흡수하여 펼쳐내는 실험은 지금 한국 시단에서 거의 유일무이하고 그만큼 매력적이다.
그런 함기석의 시가 최근에는 조금 달라진 것 같다. 작품 곳곳에 ‘고통 받는 인간의 얼굴’이 드리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현실의 영향에서 자신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은 자의 인간적인 아픔이 짙다고 할까. 예심위원들은 이 변화에 주목했다. 어찌 보면 함기석은 그동안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수학문제를 풀듯이 언어논리의 발명에 몰두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죽음이 언어의 자율성을 현실에 붙들어 맬 때, 장례식장의 소각장에서 사물들은 비통하게 불탄다.
박상수(문학평론가)
◆함기석=1966년 충북 청주 출생. 1992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 『오렌지 기하학』 등. 박인환문학상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