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그리워도 땅에 묻지 마세요
한보경
『밀린다왕문경』에는 알면서도 짓는 죄와 몰라서 짓는 죄의 경중에 대해 묻고 답하는 부분이 있다. 모르고 짓는 과보는 용서받을 수 있는 여지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겠지만 ‘알면서도 그럼에도~’보다 ‘전혀 몰랐기 때문에 그래서~’가 더 큰 과보라는 것이다. 몰랐다는 무지함의 죄를 보태는 것이고 모르는 동안 같은 죄를 반복하는 탓이다.
오래 키우던 강아지를 보내고 함께 산책하던 집 근처 소나무 아래 유골을 묻어 준 적이 있다. 현행법은 동물의 사체를 폐기물로 본다고 한다. 그래서 사체 처리는 쓰레기 종량제 봉투에 넣어 배출하거나, 동물 병원에 위탁하거나, 동물 전용 장묘시설을 이용해야 한다. 매립이나 무단투기는 불법이다. 환경이 오염되거나 전염병이 번지는 일을 막는다는 취지에서다.
아직도 동물 사체를 땅에 묻거나 유기하는 것이 불법인 것을 모르는 이가 꽤 많다. 나 역시 법을 모르고 저지른 일이라고 쉽게 넘어갈 수 없는 행동을 한 것이니 나의 무지가 과보를 보탠 듯하다.
죽어 까칠하게 오므라든 동물의 주검은 애잔한 죽음의 실체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어제까지 함께 지내던 반려동물을 일반 쓰레기처럼 종량제 봉투에 넣어 버린다? 너무 참담하고 무책임한 행동이다. 반려동물을 키워 본 사람이라면 상실의 슬픔이 얼마나 큰지 알고 있다. 죽음에 대한 애도는 대상과 형식이 다를지라도 슬픔을 추스를 최소한의 의식과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풀어내지 못한 애도는 더 엉킨 상심을 불러온다.
더불어 사는 것이 마냥 즐겁고 행복하지만 않은 것은 더불어 사는 일에는 최소한의 봉사와 책임이 따른다는 걸 간과하는 탓이다. 반려동물 천만 시대다. 반려동물과의 삶 못지않게 그들의 죽음에 대해서도 진지한 접근이 필요할 때다. 동물을 가축의 개념으로 보던 때와 반려의 의미를 갖는 지금은 사뭇 달라져야 할 것이 많아졌다. 반려인으로서 보살피고 지켜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고 그것은 오롯이 사람에게 주어진 몫이다. 무엇보다 처음부터 끝까지 지속되어야 하기에 쉬운 일도 아니다.
그러함에도 반려동물이 사람에게 주는 행복은 크고 깊어서 반려동물과의 삶을 주저 없이 택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들은 기꺼이 ‘집사’가 되기를 자청한다. 반려동물을 키우든 아니든 반려동물과 더불어 사는 사회에서 동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합리적이고 공감이 가는 대안이 절실하다.
로맹가리의 소설 『흰 개』는 회색 털을 가지고 ‘흰 개’로 불리던 개가 주요 모티브이다. 흑인과 백인, 개인과 집단, 남성과 여성,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등의 대립으로 사회 갈등이 한창 고조되었던 격변기의 미국이 배경이다. 소설에서 로맹가리는 무지한 인간이 만든 ‘흰 개’를 통해 그릇된 판단이 불러온 폭력과 부패를 고발한다. 불온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인간에게 전부를 거는 개의 본성을 이용하는 한, 개는 반려나 친구가 아닌 위협적이고 위험한 야생동물일 뿐이다. 회색 독일셰퍼드인 ‘흰 개’는 피부색이 검은 사람만 보면 본능적으로 달려들도록 길들인 개다. 소설은 백인들이 길들인 경비견인 ‘흰 개’를 통해 인종 갈등, 부부 갈등, 이념 갈등 등 여러 인간의 문제를 그리고 있다. 동물을 소모품처럼 함부로 대하는 인간의 개짓거리는 무척 충격적이다. 그런데 인간이 도구로 이용한 ‘개의 충직함’이 과연 개의 죄라고 할 수 있을까.
준비도 없이 쉽게 사들이고 더 쉽게 버린 유기견이 된 동물들. 덩치가 커서, 크게 짖어서, 병이 들어서, 비용이 많이 들어서 함부로 버린 개들은 야생으로 방치되어 문제견이 된다. 심지어 인간을 공격한다. 죽을 때까지 뜬 장에 갇혀 사는 식육용 개, 끝없이 새끼만 낳는 번식용 개, 수혈을 위해 기르는 공혈견, 싸움판에서 공격에 길들여진 투견, 인간의 기호에 맞추느라 비정상적으로 작게 만든 컵독들. 여전히 생각 없는 인간의 욕구에 길들여진 또 다른 ‘흰 개’들이 많다 .
우리 바라미는 착하고 어질었지만 소심하고 겁이 많았다. 식구가 아닌 이들에게 심하게 짖어대는 바람에 바라미를 키우는 내내 힘들고 편치 못한 적이 많았다. 개는 원래 무리 생활을 해서 외로움에 약하고 무리에서 동떨어졌을 때 마음의 고통을 느끼는 분리불안을 겪는다고 한다. 아무 준비도 없이 시작한 반려견 길들이기는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나는 너무 무심하고 무지했다. 낯가림이 심하여 사회성이 부족한 ‘흰 개’로 길들인 것은 내 탓이 크다.
‘집사’를 자청하는 사람들은 개가 사람의 감정을 읽는다는 걸 믿는다. 이름을 부를 때마다 오롯이 세운 바라미의 두 귓속에는 나를 향한 무조건적인 수긍이 그득하다. 어떠한 불손의 의도는 찾기 힘들다. 순하디순한 두 귀는 누군가에게 쉽게 귀 기울이지 못하는 내가 쉽게 가질 수 없는 완전한 진심이다.
바라미를 땅에 묻고 온 날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평온했다. 화장 후 오로지 나만의 의식이 절실했다. 49일 동안 유골단지를 내 책상 위에 두고 아침마다 깨끗한 물을 올렸다. 쉬 삭지 않던 슬픔과 미안함이 바라미가 깨끗이 거두어 간 것인지 바라미를 묻은 자리에는 이미 아무것도 남지 않은 듯했다.
반려동물 이야기 중에 내가 무척 좋아하는 이야기가 있다. 나중에 사람이 죽으면 먼저 가 있던 반려동물이 마중 나온다는 것. 상상이겠지만 넉넉한 위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리움은 굳이 땅에 묻지 않아도 될 것이다. 먼저 간 그리움이 나머지 그리움을 마중 나올 때까지 다음의 일로 남겨두는 것. 그리움이 그리움을 기다리는 시간도 어쩌면 행복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