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 생명ㆍ정치 ㆍ환경>
♤<유물론과 생명윤리>
쉐퍼의 생명윤리 사상은 그의 전집 5권 3부, <낙태, 영아살해, 안락사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 Whatever Happened to the Human Race?에 집중되어 있다. 이 책은 생명의 시작과 관련된 문제로서 낙태와 영아살해, 그리고 생명의 마지막에 관련된 문제로서 안락사 문제를 다룬다.
서구문화는 인간 생명의 신성함을 특별히 중요시해 온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 서구 의료계는 2000년이 넘는 오랜 역사를 가진 히포크라테스서약을 골간으로 하여 인간 생명의 신성함을 강조해 왔다. 히포크라테스서약은 의술의 신 아폴로, 건강과 만병통치의 신 아에스클레피우스, 그리고 기타, 다른 신들 앞에서 의료준칙들을 준수할 것을 서약한 문서다. 이 문서가 생명윤리의 차원에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안락사와 낙태를 거부하는 결의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히포크라테스 서약서는 당시 가장 평범한 자살의 수단으로 사용됐던 독약을 누구에게도 주지 않을 것을 밝힘으로써 안락사를 시행하지 않을 것을 서약하고 있으며, 동시에 여성에게 자궁 전을 주지 않겠다고 밝힘으로써 낙태를 하지 않을 것을 서약했다.
2차 대전이 끝난 후인 1948년, 2차 대전 중에 의료인들이 나치 정권과 야합하여 유태인의 가스실 학살과 안락사 그리고 잔인한 생체 실험을 주도한 것을 반성하고 히포크라테스 서약의 정신을 재확인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제네바에서 모여 회의를 했는데, 그 결과물이 "제네바 선언"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제네바 선언은 기획의 의도와는 달리 현대 의료계를 반생명적인 흐름 속으로 밀어 넣는 실마리를 제공했다. 그 단초는 두 가지였다.
첫째로, 제네바 선언은 서약이라는 단어를 선언으로 대체했다. 서약은 신 앞에서 맹세하는 것이고, 선언은 자기 견해를 밝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선언은 의료행위를 신 앞에서 책임 있게 수행해야 할 작업으로부터 인간이 자율적으로 수행하는 작업으로 세속화시켰다. 둘째로, 1971년 제네바 선언을 개정할 때 생명의 시작점을 가리키는 표현인 "잉태의 순간부터"를 삭제함으로써 생명의 시작점을 고무줄처럼 자유롭게 정하는 문을 열어 놓았다.
인간의 생명을 고귀하게 여기는 태도가 히포크라테스서약과 관련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태도가 활짝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은 유대-기독교적 세계관이 서구를 지배하면서부터였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인간의 생명을 독특한 것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낙태와 유아살해를 살인으로 간주했는데, 이와 같은 기독교인들의 태도는 낙태와 유아살해를 시행했던 로마의 문화와는 대조적이었다.
서구사회에서 인간의 생명이 소음이 취급하기 시작한 계기는 서구사회가 유대-기독교적 토대를 떠나서 인간을 만물의 척도로 삼는 인본주의를 받아들이면서부터였다. 인본주의는 인간을 비인격적인 우주 안에서 우연히 생겨난 결과물로 파악한다. 인간의 두뇌는 어마어마하게 복잡한 컴퓨터보다 나을 것이 없는 존재다. 따라서 인간의 두뇌가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설명하기 위하여 구대여 형이상학이 동원될 필요가 없다. 유물론적인 인간관은 인간 자신뿐만 아니라, 동료 인간들의 가치를 극적으로 떨어뜨린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독특한 존재임을 강조하는 성경의 가르침을 포기하면 인간을 잘 대해 줄 수 있는 근거가 상실되고 온갖 형태의 비인간적인 행위와 태도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게 된다.
이 변화가 제일 먼저 감지된 곳이 법의 영역이다. 법의 토대 역할을 담당했던 기독교적인 합의가 사라지고 나면 남는 것은 자의적이고 사회학적인 법뿐이다. 역사의 어느 순간에 다수의 시민이 원하는 것이 바로 법이 된다. 그런데 다수 시민의 의견은 현재의 사회학적이고 경제적인 선을 증진하고자 하는 정부의 소수 엘리트에 의하여 지배당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다수의 법은 사실은 소수의 엘리트 관료들에 의하여 자의적으로 제정된다.
또 하나의 변화는 생명공학의 이름으로 나타났다. 인간이 만일 우연히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유전자 형태들 가운데 하나로 간주한다면 사회경제적으로 더 우월한 자질을 갖춘 존재로 변화시키기 위한 유전자조작실험 대상으로 인간을 이용하지 말아야 할 아무런 이유를 발견할 수 없게 된다. 인류는 일부 정부 엘리트들이 원하는 모습대로 자의적으로 개조될 위험에 노출된다. 다시 말해서 인류는 이른바 사회생물학의 조종을 받게 되는 것이다. 사회생물학은 인간은 유전자의 구성에 따라서 행동한다고 주장한다. 유전자는 번성하는 종의 유전자 풀을 유지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인간은 유전자가 유전자 구조를 살아 있게 하고 미래에도 번성할 수 있게 하려고 최선이라고 알고 있는 그 일을 행한다.
사회생물학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환원주의적인 유전자 결정론을 낳는다. 곧, 모성애, 우정, 법, 도덕이 모두 유전자 작용의 산물로 해명되어 버린다. 따라서 유전자만 조작하면 생물학의 영역의 문제들뿐만 아니라 사회적이고 윤리적인 모든 문제까지도 해결될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된다.
일단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서의 인간관을 포기하면 온갖 유형의 비인간적인 관행을 통제할 근거를 상실하게 된다. 낙태, 유아살해, 안락사, 아동학대, 포르노, 정치범 고문, 범죄율의 폭발적인 증가, 무차별 폭력 등을 묶어놓았던 고삐가 풀려 버리게 된다.
~ 이상원, 《프란시스 쉐퍼의 기독교 변증》, p.149~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