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0월 2일 남한의 노무현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남북대화를 하기 위해 만났다. 제1차 회담 때의 김대중 대통령과 달리 노무현 대통령은 군사분계선을 직접 두 발로 건넜다. 이웃집 북한을 한 번 두 발로 찾아가는데 6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는 것은 제국을 거느리는 미국의 헤게모니가 그만큼 강했다는 뜻이다. 사실 이번 회담을 하나의 텍스트라고 본다면 미국이 주도하는 6자회담은 그 텍스트를 둘러싸고 있는 컨텍스트다.
한반도도 마찬가지다. 한반도라는 텍스트를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라는 컨텍스트가 에워싸고 있다. 남한이 자주 사용하는 북한의 개혁 개방이란 단어는 직접화법이 아니라 간접화법의 소산이다. 다시 말해 남한이 주체적으로 선택한 단어가 아니라 미국이 선택한 단어를 빌려 쓰고 있는 것이다. 컨텍스트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한 남한이 과연 동북아 중심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을까? 북한도 압도적인 군사력을 가진 미국이라는 컨텍스트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다,
텍스트 자체도 전혀 이질적이다. 북한의 인권 문제가 왕왕 논란을 일으키듯이 북한이 가부장적이고 국가주의적인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면 남한은 사회적인 폭력이 한창 진행 중인 곳이다. 국가주의적인 폭력의 핵심이었던 국가보안법도 두 눈 뜨고 살아 있다. 북한이 미국과 자존심 지키는 외교를 펼친다면 남한에는 국가적인 자존심이 실종해 버렸다.
노무현정부는 애초에 미국에 대해 어느 정도는 비판적인 듯했으나 이내 한미자유무역협정을 통해 국가적인 자존심을 완전히 구겨버렸다. 북한의 인권 문제, 장군님으로 호칭되는 가부장적 국가주의 등과 같은 북한이라는 텍스트의 구성 요소와, 남한의 국가보안법 등과 같은 남한이라는 텍스트의 구성 요소를 서로 대조시켜 보면 두 텍스트는 동질적으로 보인다.
북한이 국가 주도의 전체주의 사회라면 남한은 자본 주도의 전체주의 사회다. 두 텍스트의 구성 요소들이 이렇게 서로 대응하는 것처럼 보이기에 두 텍스트는 동질적으로 보일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인민문화궁전 방명록에 ‘인민’이라는 단어를 두 번 사용했다는 것을 두고 약간의 논란이 있다. 인민이 사회주의적인 단어라면 국민이라는 글자는 황국신민의 약자로서 일제 식민주의의 아픈 기억이 담겨 있는 단어다.
개성공단 안에 있는 현대아산 건물 주위의 기후는 자연경관이 오염되어 있지 않아서 쨍쨍하긴 하지만 남한처럼 푹푹 찌는 더위는 아니다. 남한의 부패한 자본주의가 낳은 환경오염의 수준은 북한 지역을 가본 사람이면 금방 알 수 있다. 이러한 기후의 완연한 차이처럼 남북이라는 두 가지 텍스트는 사뭇 이질적이다. 이번 회담에서 북한은 남한에게 통 큰 투자를 원하고 있다. 개성공단의 속도에도 불만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남한과 달리 신자유주의의 폭풍은커녕 미풍도 북한에는 불지 않고 있다. 북한은 남한의 자본을 원하지만 자본‘주의’, 그것도 자본주의의 변태인 신자유주의까지 원하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개성공단 안의 우리은행 북한 직원에게 이성계 능이 개성 시내에 있느냐는 질문에 알고 있으면서도 철저하게 함구하는 북한 직원을 보면서 이질감이 거의 없어졌다는 현대 이산 담당자의 자화자찬과 달리 표현할 길 없는 이질감을 느낀 적이 있다.
북한은 남한의 광폭한 개발주의에서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다. 개성을 넘어서서 해주 신의주 등이 경제특구로 지정된다 해도, 남한의 불도저식 개발주의는 아직까지는 북한에 너무도 낮선 단어다. 남한의 자본이 북한의 개발을 한창 벼르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전면적인 개발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남한의 생태주의는 거의 소진상태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지만 북한은 생태주의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개발주의, 부패한 자본주의에 너무도 익숙한 남한의 자본에게 북한은 글로벌 소싱의 대상일 뿐이다. 저임금으로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북한의 인력은 남한의 자본에게 큰 매력덩어리의 ‘그린 존’이다.
이번 회담에서도 ‘남북경제공동체’ 구상이 좀 더 높은 단계로 발전될 전망이다. 하지만 남한의 자본이 신자유주의적인 자본주의를 벗어던지지 못하는 한 남북경제공동체 구상은 진정한 면모를 갖추기 어렵다. 남북한이라는 텍스트, 미국이라는 컨텍스트로부터 받는 영향의 정도가 서로 이질적이기 때문이다. 특히 자본주의라는 입장에서 보면 더욱 그렇다.
몇 달 후면 남한의 정권이 바뀐다. 이명박 후보가 다음 정권을 잡게 된다면 남한의 부패한 자본주의는 상승 가도를 달리게 될 것이다. 대통령 선거 전에 부시 면담을 추진하는 행태를 보면 과거보다도 지금보다도 더욱 더 미국이라는 컨텍스트에 끌려 다니게 될 것이다.
남한과 북한은 구태의연한 ‘남북경제공동체’ 구상이 아니라 차라리 남미의 공동체 모델을 수용해 보면 어떨까? 북한을 시혜 베풀 듯 지원할 것이 아니라 북한의 자원과 남한의 자본을 명실상부하게 교환하고 그 교환수준을 교육 의료 시스템으로 확장시켜야 한다. 하지만, 남한은 부패한 자본주의의 수렁으로 너무 깊이 빠져 들어가 있다. 신자유주의적인 자본주의로 너무 앞질러 가고 있고 북한은 자본의 필요를 넘어 자본주의로 발돋움하고 있다. 남한의 텍스트는 북한이라는 텍스트에 비해 너무 멀리 나가 있다.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두 텍스트 사이의 차이는 너무도 이질적이고 비동시적이다. 통일은 두 텍스트의 대응 관계 즉 동일성을 바탕으로 해서 진행시킬 수 없다. 서로의 이질성을 인정하고 그 이질성에 개입하는 컨텍스트의 힘을 무력화시킬 수 있으려면 남한이라는 텍스트의 구성 요소 중 남한의 부패한 자본주의를 북한이라는 텍스트에 무조건 이식시키고자 머리를 굴려서는 안 된다. 북한이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데 도움을 줘야 한다. 남한은 너무 질러 나간 신자유주의적인 자본주의를 폐기해야 한다.
개성공단 주변에 북한 주민이 사는 황량한 아파트의 모습이 기억에 새롭다. 그 황량한 삶의 질이 향상되어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질은 남한의 현재 자본주의 방식으로는 제 방향을 찾지 못한다. 남한과 북한이라는 두 텍스트 사이의 경제적인 ‘비동시성’에 대한 사고를 하면서, 남한의 신자유주의적인 자본주의와 북한의 가부장적인 자본주의와 전혀 다른 곳에 위치한 ‘제3의 지대’에서, 북한의 ‘국가’주의와 남한의 ‘자본’주의를 동시에 뛰어넘는 ‘새로운 형태의 통일’을 꿈꿀 수는 없을까?
첫댓글 북한의 ‘국가’주의와 남한의 ‘자본’주의를 동시에 뛰어넘는 ‘새로운 형태의 통일’을 꿈꿀 수는 없을까? ... 분명 생각해 볼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