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의 소극적인 선포에도 니네베 사람들은 회개하였으나,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보고서도 군중은 새로운 표징을 요구한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표징에 앞서 회개하는 마음을 요구하신다.
군중은 표징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렇게 해 주시면 믿겠다고 합니다. 흥정입니다.
그런 모습은 지금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기적이 있다는 곳’에 사람들은 모여듭니다.
기적을 확인하면 삶이 달라지지 않을까 기대를 걸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요나의 표징’을 이야기하십니다.
그가 연출한 니네베 사람들의 회개를 ‘기적적인 일’로 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회개가 먼저입니다.
새 마음으로 기도와 성사 생활을 하면 기적은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호기심으로는 결코 만날 수 없습니다.
기적은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나 예언자는 특이한 분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도망치려 합니다.
예언자가 싫다며 먼 곳으로 달아나려 합니다.
그는 죽음을 체험합니다.
바다 한가운데서 폭풍우를 만나자
태풍의 원인이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더구나 자기 때문에 무모한 사람들이 죽는 것을 알게 되자
그들에게 말합니다.
“나를 들어 바다에 내던지시오.
그러면 바다가 잔잔해질 것이오.
이 큰 폭풍이 나 때문이라는 것을 나도 알고 있소”(요나 1,12).
요나는 마음을 비웠던 것입니다.
니네베 사람들 역시 죽음의 위협을 느꼈기에 회개했습니다.
요나의 목소리에는 죽음의 힘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힘을 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죽을 뻔했던 사건들’은 모두가 은총입니다.
온갖 이유를 들이대며 그렇지 않다고 말해도
‘살아 있음’은 분명 축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요구하는 청중들에게 요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자신 안에서 ‘하늘의 표징’을 찾아보라는 말씀입니다.
남방 여왕은 부와 권세를 가졌음에도
앉아서 표징을 내놓으라 요구하지 않고
지혜를 듣기 위해 먼 길을 떠납니다.
요나는 니네베 사람들이 말을 듣지 않으리라 생각했기에
내키지 않은 상태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했는데,
그들이 너나없이 악한 길에서 돌아섰습니다.
모자람 없이 풍족했을 여왕이 안주하지 않고 지혜를 찾아 떠났기에,
죄가 넘치던 니네베 사람들이 설교를 흘려 듣지 않고 회개하였기에,
그들은 스스로 증언과 표징이 되었습니다.
귀감이 될 사제나 수도자에게 없음을 탓하며 내놓으라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표징이 되어야 합니다.
좋은 말 한마디 때문에
공연히 웃음이 나오고 만나는 이에게 마다
장난을 걸고싶은 기분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도 어제와 다를 것 없는 날인데도 이토록 기분 좋은 건
동료들에게 들었던 격려의 말 때문입니다.
‘잘 했던데’. ‘아주 근사해’, ‘밤 잠도 제대로 못 잤을 거야’
한마디 한 마디 감사로움을 표하는 그들의 목소리에
한 달의 고생이 말끔히 씻겨 갔습니다.
가끔 저는 모든 것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게 주어지는 것들을 무심코 받습니다.
고마운 말을 고마워하고 작은 친절들에
감사하는 것을 잊고 삽니다.
세상이 각박하다고 하면서
제가 세상을 메마르게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저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하고 있는데
잘못되는 것은 남들의 책임이라고
아무 생각 없이 결론을 내립니다.
주님, 착하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당신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며
꾸준히 선을 행하게 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