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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교수는 지난 40년간 우리나라 가야의 김수로왕능에서 나온 쌍어문(두 마리 물고기 문양)을 연구하여
왔다고 하면서 이 쌍어문은 한반도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중국, 네팔, 인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등 아시아 전역에서 발견되는 데 유독 이란에서는 발견된 바가 없다고 하였다.
출처: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90917 오마이 뉴스에서 발췌
출처:https://blog.naver.com/ttabong/40098871801
가야가 과연 어디에서 출발하였는가?
허왕후는 육로로 페르시아에서 인도 그리고 중국을 거쳐 배를 타고 다시 한반도로 왔다.
허왕후를 주체로 볼 것이 아니라 김수로를 주체로 본다면
가야는 페르시아에서 온 것인가? 한반도에서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오래전 인도가까이에 있던 가야에서 만나서 와야 말이 되지.
그 멀리 머나먼 이국에서 무슨 이유로 오겠는가?
게다가 오늘날처럼 비행기도 없고 휴대폰도 없던 시대인데..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는 것이다.
오랜 시간차를 두고 가야는 나라위치를 조금씩 이동했다고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서기48년 7월 27일(아마도 음력일것이다). 붉은돛을 단 배가 오늘날 김해를 중심으로 일어난 가락국(駕洛國·후에 가라, 가야로 변함)에 도착했다. 배에서 여러명이 내렸다.
그중 한 여인이 수로왕 앞에 나아가 자기를 소개했다.
“저는 아유타국 공주입니다. 성은 허씨, 이름은 황옥이고, 나이는 16세입니다(妾時 阿踰陀國 公主也, 姓許 名黃玉 年 二八矣).”
아유타국(阿踰陀國). 『삼국유사』 ‘가락국기 ’에 기록된 아유타국은 갠지스 강변의 아요디아(Ayodhia)를 뜻한다. 아요디아는 힌두교의 중흥시조인 라마(Ram)왕의 탄생지로 세계적인 명성을 갖고 있다. 석가모니가 출가하여 설법을 시작한 지역으로도 유명하고, 인도 전국시대의 맹주국인 코살(Kosala)국의 중심지로서도 역사적인 무게가 남아 있는 곳이다.
그런데 그런 고대 인도의 중심 도시 출신 공주가 한국에 시집을 왔다.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예물을 내놓고 수로왕과 결혼해 왕비가 됐다. 두 사람 사이에서 왕자 10명과 공주 2명이 태어났다.
그들이 오늘날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의 조상이 됐다.후손들은 그런 이야기를 굳게 믿어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는 지금도 통혼하지 않는 강한 전통이 있다. 매우 흥미 있는 인류학적 현상이다.
사학계 일부에서는 인도에서 한국까지의 먼 거리를 2000년 전에 어떻게 배를 타고 여행할 수 있었을까 하여 ‘가락국기’ 자체를 의심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인도와 한국, 아유타국과 가락국을 연결하는 확실한 문화코드가 있다. 바로 쌍어문(雙魚文)이다. 쌍어문이란 물고기 두 마리가 마주 보고 있는 도안(圖案)이다. 김해 수로왕릉 앞에 서 있는 삼문(三門)에 그려진 쌍둥이 물고기 그림들이 그것이다. 수로왕릉뿐만 아니라, 김해시 소재 신어산의 은하사에도 그려져 있고, 합천 영암사지 돌비석 등 옛 가락국 영역 안에 있는 고대 사찰에 무수하게 남아 있다.
반면 한반도 내의 다른 지역, 즉 당시의 고구려나 백제·신라의 영토 내에서는 거의 발견된 예가 없다. 그래서 필자는 혹시 쌍어문이 가락국의 국장(國章)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고 있다.
사실 필자는 김해 김가다. 유년시절엔 남다른 검은 피부로 콤플렉스가 있었다. 그런데 수로왕의 국제결혼 상대가 인도 여인이라는 이야기를 학교에서 배우고 나서 필자의 고민은 말끔히 없어졌다. 피부가 검을수록 인도 공주의 유전인자가 많이 남아 있는 왕족의 후손임을 믿으며 살게 되었기 때문이다.
1975년 필자는 평생의 은인을 만났다. 소설가 이종기씨다. 그는 나에게 김해 수로왕릉에 그려져 있는 쌍어문이 인도 아요디아에도 무수하게 새겨져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아요디아에 도착한 순간부터 이 나라가 물고기의 나라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수백 개의 힌두교 사원 정문에, 학교 정문에, 관청 대문에, 군인 계급장에, 경찰 모자에, 택시 번호판에 쌍어문이 새겨져 있었다. 쌍어문은 아요디아를 중심으로 하는 우타르프라데시주의 주장(州章)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쌍어문의 상징적 의미를 연구하는 사람을 만날 수 없었다. 분명 매우 중요한 상징이기 때문에 입는 옷이나 건물, 타는 차에 그리고 다닐 텐데 의미를 명쾌하게 설명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박물관장도 설명을 하지 못했다. 이 무슨 해괴한 일인가.
필자의 쌍어문 추적은 계속됐다. 쌍어 상징은 인도와 한국 사이의 넓은 내륙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방글라데시의 다카, 미얀마와 중국의 국경지대인 등충, 운남의 곤명, 사천의 안악, 그리고 양자강을 따라 무수하게 발견됐다. 아유타국 사람들이 걸어오며 남긴 흔적일 것이다. 더 서쪽으로는 아프카니스탄의 스키타이 유적에서, 이란 페르시아 시대의 파살가드 유적에서, 터키 바빌로니아 시대의 페르가몬에서 궁전의 조각으로, 시리아와 튀니지에서 민속품으로 사용되고 있음도 확인하였다. 그 장소들을 지도에 찍으며 수십 년간 현장을 답사했다.
내가 찾아낸 결론은 쌍어가 페르시아 신화에 등장하는 카라어(Kara Fish)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카라는 바다에 사는 물고기였다. 바다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는 ‘코케레나’라는 나무를 지키는 수호신이었다. 코케레나의 잎사귀는 인간의 만병을 치료하는 영약이다. 그런 믿음이 바빌로니아로 이어지고, 그 시대에 노예생활을 하던 유대인에게 스며들어 구약성서(느헤미아 기 등)에 기록으로 남고, 예수님의 이적(異蹟)인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중생을 구휼한 이야기(五餠二魚)로 전해지고 있다.
국내에서 쌍어문은 김수로왕의 무덤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전승돼 왔다. 그렇다면 쌍어가 무덤을 지키고, 사원을 지키고, 집을 지키고, 사람을 지켜준다는 생각은 누가 가야에 전했을까. 아유타국 출신 공주 허황옥이 처음으로 전파한 것은 아닐까.
그녀의 이동 경로를 좀 더 알아보도록 하자. 우선 인도와 중국을 연결하는 길은 히말라야 산맥의 남쪽 기슭을 통과하는 산악도로인 차마고도(車馬古道)가 알려져 있다. 또 있다. 더 남쪽의 구륭산맥을 넘어 미얀마를 통과하는 길이다. 오척로(五尺路)라고 부르는 산악도로다. 산비탈을 깎아 만든 폭이 1m 남짓한 좁은 길로, 말이나 당나귀들만 짐을 싣고 갈 수 있는 험로다. 이런 길을 통해 오가던 상인들은 무겁지 않은 차(茶), 보석, 비단 같은 고부가 상품을 거래했다.
그 길은 인도~미얀마~중국의 운남~사천~양자강 일대를 잇는 고대 무역로였다. 이 루트에는 사당 벽돌 조각으로, 제기(祭器) 무늬로 무수한 쌍어문이 남아 있다.
사천에 도착한 인도인들은 보주(普州·오늘날 安岳)에 잠시 정착했다. 보주는 후한 때 남군으로 편입되지만, 그때까지 소수민족이 독립세력을 형성하던 곳이었다. 이들은 이곳에 아유타국의 분국(分國) 같은 것을 세우고 지내다 중국의 한나라와 충돌했다.
남군에서는 한나라의 통치에 대항하는 민족 봉기가 두 번 일어났다. 『후한서』에 따르면 서기 47년 첫 번째 봉기 후 소수민족 7000명이 보주를 떠나 강하(江夏·오늘날 武漢)로 강제 이주당했다. 그리고 다음해허황옥 일행은 황해를 건너 김해에 도착했다. 김해에 있는 허황옥의 능비에는 시호가 보주태후(普州太后)라고 명기돼 있다. 그녀의 실제 성장지가 중국 보주일 것으로 추정되는 이유다.
101년 두 번째 봉기 끝에 주동자가 항복했다. 그의 이름이 허성(許聖)이다. 옛날 사천지방에 허씨 세력이 대단하였음을 암시하는 기록이다. 사실 그때까지 사천·운남 지방은 낙양을 중심으로 하는 한나라 세력이 크게 힘을 미치지 못했다.
필자가 안악(보주) 지역을 답사해 보니 그곳에 보주 허씨들이 15만 명이나 살고 있었다. 그들은 사당에 중국 수학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허창수(許昌洙)라는 인물을 모시고 있었다.
허황옥과 그의 선조가 거쳐온 길은 중국·인도를 거쳐 지중해까지 연결되는 내륙 도로다. 차와 소금, 비단과 보석, 어쩌면 약재들까지 이 길을 통해 동서양을 넘나들었을 것이다. 인도와 한국은 먼 나라가 아니었다. 아주 옛날부터 무역을 하고 사돈을 맺던 이웃나라였다. 고대 인도와 한국이 왕족들 간에 국제결혼을 한 사건도 불교가 한국에 공식적으로 소개되기 훨씬 전의 일이다.
허황옥이 가져온 결혼 예물 중에는 인도와 미얀마 특산품 중 하나인 경(瓊·옥의 일종)과 구(玖·루비의 일종)가 포함돼 있었다. 허황옥을 배에 태워다 준 사람들은 결국 차마고도를 통해 인도와 한국을 오가던 상단(商團)들이었다. 그렇게 광대한 지역에 관한 지식과 경험이 허황옥 일행을 통해 고대 한반도에 전달됐다. 2000년 전에도 글로벌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이미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김병모 한양대 명예교수·고고학
고대왕국 가야의 건국과정을 다루고 있는 MBC 드라마 <김수로>. 현재 이 드라마에서는, 출세에 대한 의욕을 상실한 채 건달 생활을 하고 있는 젊은 김수로(지성 분)의 삶을 다루고 있다.
그런 김수로를 사랑하는 두 명의 여인이 있다. 하나는 인도 여인인 허황옥(서지혜 분). 상인인 아버지 허장상을 따라 김해 땅에 온 허황옥은 우연히 알게 된 김수로를 남몰래 짝사랑하고 있다. 또 하나는 신라 여인인 아효(강별 분). 신라 공주인 아효는 김해 땅에 첩보활동을 하러 왔다가 우연한 기회에 김수로와 사귀게 되었다.
<김수로> 드라마는 픽션이지만, 허황옥은 실존인물
이 같은 드라마 속의 내용은 거의 다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김수로가 가야를 건국하기 이전에 허황옥이 이미 이 땅에 왔다는 이야기나, 김수로가 신라 공주 아효와 사랑을 나누었다는 이야기는 모두 다 픽션이다.
단, 한 가지는 사실이다. 허황옥이란 인도 여인이 있었고 그 여인이 김수로의 왕후가 되었다는 이야기만큼은 역사적 사실에 부합한다. 이 부분은, 가야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가락국기>의 내용과 일치한다. 고려시대에 편찬된 이 책에는 허황옥이 아유타(阿踰陁)의 공주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허황옥의 출신지인 아유타는 어디에 있었을까? 가야인들은 그곳이 남천축국(인도의 고대왕국)이나 서역(중국 서쪽)의 어느 나라에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야인들이 그렇게 생각했다는 점은, 1646년에 허목이 쓴 '보주태후릉 비음기'에 기록되어 있다. 보주태후릉이란 보주태후(普州太后)라고 불린 허황옥의 무덤을 가리킨다. 이 무덤은 현재 김해시 구산동의 수로왕비릉에 있다.
또 비음기(碑陰記)란 무덤에 있는 비석의 뒷면에 쓰인 글귀를 가리킨다. 이처럼 이미 오래 전부터 한국인의 조상들은 가야의 초대 왕후인 허황옥이 인도 여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놀라운 것은 허황옥이 인도와 가야를 연결하는 매개체였음을 보여주는 물증이 오늘날 아시아 곳곳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대체 어떤 증거일까?
이 문제에 관한 한, 고고인류학자인 김병모의 견해가 현재로서는 가장 유력하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학설이 대립할 경우에는 김병모의 주장을 채택하여 스토리를 완성하도록 하겠다.
납릉심문 쌍어문, 인도반도 등지에도 있네?
김해여객터미널에서 출발해 해반천(海畔川)이란 개천을 건너 동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도로 왼쪽에 사적 제73호 수로왕릉(김해시 서상동 소재)이 보인다. 숭화문(崇化門)이라고 쓰인 수로왕릉의 정문을 지나 가락루(駕洛樓)라는 망루를 통과하면 납릉심문(納陵心門)이라고 쓰인 문이 나온다. 그 문을 통과하면 김수로의 무덤이다.
그런데 납릉심문에는 좀 희한한 무늬가 있다. 제단 같은 것을 중앙에 두고 물고기 두 마리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무늬다. 쌍어문(雙魚文)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납릉심문의 우측에 있는 숭인문(崇仁門)에도 동일한 무늬가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쌍어문이 인도반도의 인도·파키스탄·방글라데시·네팔 등지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된다는 점이다. 허황옥의 출신지인 아유타 즉 아요디야에서도 마찬가지다. 또 인도 북부의 유피주(州)에서는 쌍어문이 주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자동차 번호판이나 경찰의 배지에까지 새겨져 있다. 쌍어가 인간을 보호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이런 현상의 근저에 깔려 있다고 한다.
고대로부터 이 지역에 존재한 쌍어 숭배사상이 그런 형태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쌍어문이 가야시대의 유물이 되었지만, 인도반도에서는 아직도 그것이 현지인들의 의식을 일정 정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가야 유적과 인도반도에서 동일한 쌍어문이 발견되는 것은 이 무늬가 허황옥 집단에 의해 가야에 전파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것이 김병모의 견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허황옥 가문이 인도반도에서 가야 땅까지 이동하면서 경유한 것으로 보이는 지역들에서도 쌍어문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그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허황옥은 왜 가야에 왔을까
가야가 건국된 서기 42년으로부터 얼마 전인 기원전 1세기에, 인도 서북쪽에 살던 중앙아시아 쿠샨족이 인도로 밀고 내려왔다. 이에 따라 아요디야(아유타)란 도시의 지배층 중에는 동쪽에 있는 중국을 향해 망명을 떠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가야에 당도한 서기 48년에 허황옥이 스스로를 나이 16세의 아유타 공주라고 소개한 점을 볼 때에, 그는 아요디야란 도시를 지배하는 군장(君長)의 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가문이 아요디야에 있었을 때만 해도 허황옥은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허황옥은 서기 48년에 16세였고, 그의 가문은 이미 그 이전인 기원전 1세기에 아요디야를 떠났기 때문이다. 중국으로 망명을 떠난 후에도 이 가문이 아유타 출신의 유민들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허황옥이 자신을 아유타 공주라고 소개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으로 망명을 떠난 허씨 가문이 정착한 곳은 오늘날의 중국 사천성 안악현에 해당하는 보주(普州) 땅이었을 거라는 게 김병모의 추정이다. 중국 후한(後漢)의 역사를 기록한 <후한서>에서 서기 1세기에 보주 땅에 소수민족들이 살았다고 기술한 점, 오래 전에 보주 땅에 형성된 허씨 집성촌이 오늘날까지 존속하고 있는 점, 보주 땅의 암벽에서 "후한 초에 허씨의 딸 황옥이 용모가 아름답고 지혜가 남들보다 나았다"라는 글귀가 발견된 점, 김해의 수로왕비릉에 있는 비문에서 허황옥을 보주태후라고 칭한 점 등이 김병모가 제시한 근거들이다.
한나라를 계승한 후한(後漢)은 서기 25년에 건국되었고 가야는 서기 42년에 건국되었으므로, 허황옥이 보주 땅에 살았다는 '후한 초'라는 시점은 가야 건국 직전과 거의 일치한다. 서기 48년에 허황옥이 16세였다는 <가락국기>의 기록에 신빙성을 더해주는 대목이다.
이런 사실로부터 우리는 허황옥이 보주태후라고 불린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가야에 오기 전에 보주에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불린 것이다. 제주에서 서울로 시집온 여인을 제주댁이라고 부르듯이 말이다.
그럼, 보주 땅에 살던 허황옥 가문이 그곳을 떠나 동쪽의 가야 땅을 향해 이동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후한서> '광무제 본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후한의 초대 황제인 광무제의 역사를 기록한 '광무제 본기'에 따르면, 허황옥이 가야에 출현하기 1년 전인 서기 47년에 보주를 비롯한 사천성 지역에서 소수민족들의 반란이 일어났고, 반란이 진압된 후에 사건 연루자들이 양자강 연변의 무한(武漢)으로 강제이주를 당한 일이 있다.
이런 점을 볼 때, 허황옥 가문도 이 반란에 가담했다가 무한 땅으로 강제이주를 당했고 그 뒤에 배를 타고 양자강을 지나 바다를 거쳐 가야 땅까지 당도했을 것이라는 게 김병모의 추정이다. 이런 추정이 가능한 것은 그들이 지나간 것으로 보이는 지역마다 쌍어문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인도반도의 쌍어 숭배사상을 반영하는 쌍어문이 허황옥 집단의 이동루트를 따라 김해의 수로왕릉에까지 도달하게 되었다는 게 김병모의 견해다.
김수로 무덤에 쌍어문 새긴 깊은 뜻
그런데 여기서 이런 의문을 고려해볼 수 있다. 가야인들이 김수로의 무덤 앞에 쌍어문을 새긴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들의 초대 왕후가 인도인이었음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그렇게 했을까? 그렇지는 않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일까?
인도반도에서 사용된 고대 언어인 드라비다어에서는 '가야' 혹은 '가라'라는 발음이 '물고기'를 뜻했다고 한다. 가야라는 국호가 고대 인도어에서 나온 것이라면, 이 국호에는 인도반도의 쌍어 숭배사상이 반영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고기를 뜻하는 가야라는 발음을 국호로 선택했기 때문에, 가야인들에게는 물고기란 것이 어류뿐만 아니라 국호도 의미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수로왕릉에 있는 물고기 무늬는 가야의 국호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가야라는 발음이 고대 인도어에서 나왔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에만 유효한 설명이다.
물고기 무늬에 얽힌 위와 같은 역사를 기념하기 위해 오늘날 김해시에서는 시내 곳곳에 쌍어문 조각물을 만들어 놓았다. 특히 주요 교량에서 쌍어문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또 인도의 아요디야시(市)에서도 허황옥과 가야의 인연을 기념하기 위해 지난 2000년에 가락공원을 조성해놓았다. 2천 년 전의 허황옥이 한국과 인도의 두 도시를 연결해주고 있는 것이다.
출처:https://blog.naver.com/toogoo12/100108548902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고대 인도인들이 가야 땅에 정착해서 왕후 자리를 차지했다는 사실은 한민족이 단일한 혈통이 아닌 복수의 혈통으로 이루어진 민족임을 보여준다. 북방 유목민족 출신의 김수로 집단과 남방 인도 출신의 허황옥 집단이 현지 토착세력과 힘을 합해 가야라는 나라를 운영한 것이다. 이 같은 가야의 역사는, 한국인들이 협소한 단일민족 관념을 떨쳐버리고 세계를 내 형제처럼 포용하도록 하는 데에 기여할 것이다.
출처 : 김수로의 삼각관계는 뻥이지만, 허황옥은 실존했다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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