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의 역사가 어느 지역보다도 길었던 전주교구의 제2 성지
전주교구의 제2 성지라고 불리는 여산(礪山)은 천주교 전래가 다른 지역보다 앞섰고 또한 박해의 역사가 어느 지역보다도 길었다. 1868년에 무진년에 여산군의 속읍인 고산, 진산, 금산 등에서 체포되어 수많은 신자들이 감옥과 형장인 숲정이와 장터에서 처형되었다.
여산의 순교 사적지로는 순교자들이 신앙을 증거하던 ‘여산 동헌’, 동헌 옆의 ‘옥터’와 신자들이 백지사 형을 받았다고 전해지는 동헌 앞마당의 ‘백지사터’, ‘배다리’, ‘뒷말 교수형터’, 순교자들이 참수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북서쪽 맞은편에 있는 ‘숲정이 형장’ 등이 있는데, 백지사터와 숲정이 형장이 사적지로 조성되어 있다.
병인박해는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고 평화롭게 살았던 교우들을 혹독한 박해의 칼날 아래로 내몰았다. 비록 조그마한 고을이었지만 여산에는 박해 당시 도호부사(都護府使, 종3품)와 진영(鎭營, 營將은 여산 도호부사가 겸임)이 있었기 때문에 천주교 신자들을 마구잡이로 처형시킬 수 있었다.
《치명일기》에 기록된 순교자만도 26명에 이르는 여산은 특히 다른 어느 지역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없었던 가혹한 처형 방법으로 유명하다. 여산 동헌에 잡혀 온 신자들은 장살(杖殺, 매맞아 죽음)과 교수(絞首, 목메어 죽음), 백지사(白紙死)에 의해 치명하였다.
이곳 순교의 특징은 공동체적 성격을 지녔다는 점이다. 잡혀 온 교우들은 옥중에서도 항상 쉬지 않고 공동으로 기도를 바치면서 서로를 격려하며, 무수한 고문과 매질의 고통과 굶주림을 견디어 내다 마침내 차례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갔다. 그중에서도 동헌은 당시 사법권을 비롯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며 고을을 다스리던 곳으로 지금은 경로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특히 동헌 마당에는 옛 부사들의 선정비(善政碑)나 물망비(勿忘碑)들과 함께 대원군의 척화비(斥和碑)가 서 있다.
여산 동헌은 현재 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93호로 지정돼 있다. 옛날의 동헌 자리인 지금의 경로당 마당에는 신미양요(1871년)를 계기로 만들어 1871년부터 세웠다가 1882년 임오군란이 지나 철거한 천주교 탄압의 척화비가 옛말을 전해 주고 있다.
맞은편 여산초등학교 종합 학습장으로 변해 버린 여산 옥터는 옥에 갇혀 있던 신자들이 굶주림에 못 이겨 옷 속에 있는 솜을 뽑아 먹다가 처형지로 끌려 나오자 풀까지 뜯어 먹었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오는 곳이다. 백지사터는 동헌 아래쪽에 있는데 순교비와 백지사 기념비가 대형 십자가 곁에 우뚝 서 있어 그날의 아픔을 조용히 증언해 주고 있다. 일설에는 옥터는 배다리 옆에 있었다고도 한다.
이곳의 구전에 따르면, 장날이 되면 공개 처형장으로 변했던 배다리에서 참수된 시신은 배다리 옆 미나리꽝에 버려졌고 뒷말 치명터에서는 신자들을 정자나무에 목을 매달아 죽였다고 한다.
■ 여산의 순교터들
○ 동헌 백지사터 성지
동헌은 부사의 행정 집무실이고 백지사 터는 부사의 집터이다. 현재 동헌은 경로당으로 쓰고 있고 백지사 터는 천주교회에서 매입하여 순교 성지로 보존해 오고 있다.
백지사형이란 동헌 마당에 나무 말뚝을 박고 교우를 평좌시킨 다음 말뚝에 묶은 후 교우들의 손을 뒤로 결박하고 상투를 풀어서 결박된 손에 묶어 얼굴을 하늘로 향하게 한 다음 얼굴에 물을 품고 그 위에 백지를 여러 겹 붙여 질식시키는 사형 방법이다.
백지사형은 얼굴에 종이를 여러 겹 바르니 죽고 사는 것이 캄캄하다는 뜻의 도모지 사형(途毛紙死刑)이라고도 불리는데 현대 표기 '도무지'도 여기서 유래한다는 설도 있다. 전하는 목격담에 의하면 교우의 얼굴에 물을 뿜고 백지를 붙이고 또 물을 뿜으니 질식하여 죽는데 아주 편안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 기금터
연못과 누각이 있어 원님이 놀이하던 곳이다, 지금은 연못자리에 집이 있다. 현재 주차장 옆이다. 이곳에서는 화살로 쏘아 맞히는 사형법을 썼으며 여자들은 연못에 넣어서 죽였다고 한다.
○ 옥터
현재 여산초등학교가 있다. 이곳에서 옥사를 했고, 옥에서도 신덕 높은 교우들은 배교하려는 교우들을 권면하여 참회시키는 기도 장소였다고 한다. 옥에 갇혀 있던 신자들이 굶주림에 못 이겨 옷 속에 있는 솜을 뽑아 먹다가 처형지로 끌려 나오자 풀까지 뜯어 먹었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오는 곳이다. 일설에는 옥터는 배다리 옆에 있었다고 한다.
○ 배다리
우시장, 현재 군인 아파트 앞 정자나무 있는 곳과 시장 안이다. 배다리에서 참수된 시신은 배다리 옆 미나리 꽝에 던져졌다. 그런데 신도들이 야음을 틈타 순교자들의 시신을 건져내어 순교자들의 옷을 벗겨보니 솜을 두텁게 넣어 입었던 옷 속에 솜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배가 하도 고파서 솜을 다 뽑아 먹었던 것이다.
○ 뒷말 치명터
뒷말 치명 터에서는 장날을 골라 신자들을 정자나무 가지를 늘어 뜨려 목에 건 다음 가지를 놓아서 교우들을 목 졸라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참혹하게 죽였다. 그 당시 신도들의 처형 일을 장날로 삼은 것은 천주교를 믿으면 이렇게 참혹하게 죽게 된다는 것을 장꾼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 순교 일화
어느 날인가 8명이 체포되어 사형판결을 받게 되었는데 그 중 한명이 배교하는 일이 있었다. 사형이 집행되기 전 날 밤이었다. 옥사장이 단 꿈을 꾸는데 하늘에서 배교하지 않는 일곱 사람에게는 화관을 씌워주고 한 사람에게는 화관을 씌웠다 벗겼다 했다.
그래서 옥사장이 그 까닭을 물었더니 배교자가 있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꿈에서 깬 옥사장은 배교자 대신 자기가 치명하겠다고 자청하고 나서서 일곱 사람과 함께 치명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은 입전의 사실 여부가 어찌 되었건 이 입전을 소중히 간직하여 전해주려는 신도들의 숨은 뜻은 이렇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옥사장이 결단을 내리게 된 동기는 신도들이 옥중에서 보여준 금석같은 신앙과 표양을 보고 순교자들이 죽음 앞에서 보여준 초연한 행동에는 무엇인지 모를 깊은 뜻과 고귀한 가치가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옥사장은 천주 신앙을 갖게 되고 신앙을 고백하기에 이르렀을 것이다. 입전자들의 내심에는 순교만큼 인간을 감동시키는 일도 없으며 순교는 큰 전교였다는 것을 꼭 전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 마음에 촛불 끄지 않으면 (백지사터에서) <김영수> ▒
기도로 창을 열면
형벌이라도 축복일 수 있는 것입니까
하늘 향한 얼굴들이
겹겹 물 묻은 창호지 속에서
숨 막히며 새 숨 틔운 자리
가을 벌레들이 저마다 목숨 기울이며
애끓게도 땅을 울어댑니다
상쾌히도 하늘을 노래합니다
마음에 촛불 끄지 않으면
티없는 사랑 타오르는 것입니까
나는 언제 죽는 소망으로
간절히 숨 막히며 새 숨에 닿을까요
놀빛에 타고 있는 십자가 아래
작은 풀들도 석양 마시며
그윽이 목마름에 젖습니다
■ 순교자
「치명일기」의 기록에 나타난 순교자
◆ 김성첨(토마스)
본디 함양 사람으로 고산 넓은 바위(넙바위, 廣岩)에 와서 살 때, 병인 군난(1866년)에 그의 사촌 프란치스코 대신으로 잡혔다가 놓였더니, 무진(1868년) 9월에 다시 여산 포교에게 잡혀 목이 졸려 치명하니 나이는 62세요, 때는 무진 10월 10일이었다.
◆ 김 안드레아
김 프란치스코의 큰 아들이다. 무진 9월에 여산 포교에게 부자가 함께 잡혀 목이 졸려 치명하니 나이는 62세 였다.
◆ 김 야고보
김 프란치스코의 둘째 아들이다. 다른 교우와 함께 옥문 밖에서 교(絞)하여 치명하니 때는 무진 10월 10일이요, 나이는 47세 였다.
◆ 손마리아, 혹은 막달레나
금산 개죽리 사는 한 첨지의 며느리이다. 그 장부와 함께 잡혀, 장부는 매에 못 이겨 배교 하였더니, 그 아내의 설득으로 다시 참회하고 내외 함께 목이 졸려 치명하니 나이는 27세요 때는 무진 10월이었다.
◆ 전 루치아
진산 사람이요, 공주 진밭에서 살던 문서방의 아내이다. 자원하여 전주에 들어가 옥에 갇히었더니 후에 여산으로 이송되어 목이 졸려 치명하니 나이는 35세요, 때는 정묘년이었다.
■ 찾아가는 길
■ 순례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