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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허존자전(淸虛尊者傳) - 동사열전(東師列傳)/불교기록문화유산아카이브
선사先師의 법명은 휴정休靜이고 호는 청허淸虛이며, 또는 서산西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자는 현응玄應이고 부친의 시조는 본래는 완산完山 최씨이고, 모친의 시조는 본래는 한남漢南 김씨이다.
태종太宗조에 이르러 친가와 외가의 현고조께서 각각 용호방龍虎榜에 올라 창화昌化로 이사를 가서 살았으므로 부모가 모두 창화를 고향으로 삼게 되었다. 그 뒤 현윤縣尹으로 있던 외할아버지 김우金禹가 연산군 때 죄를 지어 안릉安陵(평안도 안주군)에 귀양 가서 살게 되자 스님의 부모도 외할아버지의 가문과 연관이 된다 하여 집안 식구 모두가 관리舘吏가 되었다. 8년이 지난 뒤에 외할아버지의 죄가 다시 논의되어 특별히 은혜를 입어 사면되어 본래의 직책에 복직이 허용되었으나 마침내 관서關西의 백성으로 살고 말았으니 운명이 아니겠는가?
아버지의 이름은 세창世昌이고 나이 30세에 어떤 사람의 천거로 기성箕城 영전影殿의 작은 관직을 맡게 되었다. 관청의 사람이 와서 같이 떠날 것을 간청하며 부임할 날짜를 말해 주자 스님의 아버지가 웃으며 말하였다.
“정든 땅 노을과 달 그리고 한 병의 막걸리에 처자식을 거느리고 사는 즐거움이면 그 또한 족하지 않겠는가?”
그러고는 곧 허리띠를 풀고 남쪽으로 머리를 향해 누워서 길게 휘파람을 몇 차례 불자 관청 사람은 곧 물러갔다. 세창은 향읍鄕邑에서 의문이 나는 것을 가지고 와서 물으면 의문을 풀어 주고 송사를 벌이려는 자가 있으면 만류하여 그만두게 하였으므로 향관鄕官으로 일을 한 13년 동안 그 고을 주민들로부터 ‘덕 있는 노인(德老)’이라는 호칭을 얻게 되었다.
정덕正德 기묘년(1519) 여름에 모친 김씨가 신기神氣가 고르지 못하였는데, 하루는 작은 창가에서 한가롭게 잠시 잠이 들었다. 이때 어떤 노파가 와서 예를 올리며 말하였다.
“아무 근심도 하지 말고 아무 염려도 하지 마시오. 한 장부 사내아이를 잉태할 것이기 때문에 이 늙은 할미가 와서 축하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고는 다시 예를 올리고 떠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놀라 깨어 보니 꿈이었다. 혼자 중얼거리며 말했다.
“참 이상도 하여라. 우리 부부는 동갑으로 나이 50이 가까운데 어찌 오늘 꾼 꿈과 같은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김씨 부인은 의아하기도 하고 한편 민망하고 두려웠다.
이듬해 경진(1520) 3월 김씨는 과연 아이를 낳았다.
스님의 부모는 서로 희롱하며 말하였다.
“늙은 조개에서 손바닥 안에 진주를 생산하니 이 또한 하늘의 뜻이로다.”
아이가 3세 되던 해 임오년(1522) 4월 8일에 아버지가 술에 취해 누각 위에 누워 잠이 들었다. 꿈을 꾸었는데 어떤 한 노인이 와서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기 스님을 뵈러 왔습니다.”
그러고는 노인이 두 손으로 어린 아기를 번쩍 안아 들고 몇 마디 주문을 외우는데 그 소리가 마치 범어梵語와 같아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노인은 주문을 외워 마친뒤 아기를 내려놓고 이마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 아이의 이름을 운학雲鶴이라 하고 잘 기르기 바랍니다.”
아버지가 운학의 의미를 묻자 노인이 대답하였다.
“이 아이는 일생 동안 행지行止가 정녕 구름과 학鶴 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마치고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이 사라졌다. 그런 까닭으로 부모는 그때부터 아이를 부를 때에 ‘아기 스님’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운학雲鶴’이라 부르기도 했다.
아이는 어릴 적부터 여러 아이들과 어울려 소꿉장난을 하면서도 모래를 모아 탑을 만들고 혹은 기왓장을 가져다가 절을 짓는 등 늘 하는 짓이 무릇 이와 같았다.
그의 나이 아홉 살에 어머니가 갑자기 먼저 세상을 떠나시고, 그 이듬해엔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셨다. 그러니 백 년의 생계가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만 셈이다. 그때 그 고을의 원님(邑倅)으로 있던 이李공 사증思曾이 그 소식을 듣고 겨울에 그를 불러 눈 덮인 소나무를 가리키며 말하였다.
“운자韻字를 부를 터이니 한 구 지어 보겠느냐?”
소년이 대답하였다. “제가 감히…….”
원님이 사斜 자 운을 불렀다. 소년이 운자 부르는 소리를 듣자 즉석에서 답하였다.
“향기 어린 높은 누각에 해가 저물어 가니”
다음에 다시 화花 자 운을 불렀다. 소년이 또 글을 지었다. “천 리 강산을 덮은 눈 마치 꽃과 같구나.”
그러자 원님이 소년의 손을 잡고 등을 어루만지며 말하였다. “너는 나의 아들이니라.”
이때 소년의 나이는 열 살이었다. 원님은 소년의 손을 잡고 서울로 올라가 반궁泮宮(성균관)에 나아가도록 주선해 소년의 이름을 여러 유생儒生들의 끝부분에 기록하게 해 주었는데, 그때 소년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하루는 어느 늙은 학사學士가 소년 휴정을 보고 말하였다.
“나를 알아보겠느냐? 너의 고향이 여기서 그리 멀지 않다. 너의 선군先君(아버지)은 나와 절친한 사이였다. 그러므로 내가 너를 멀리할 수 없구나.”
그러고는 소년을 인도하여 흥인문興仁門(동대문) 밖으로 나가서 오래된 버드나무가 서 있는 사천沙川 언덕을 가리키면서 말하였다. “저곳이 바로 네 선군이 살았던 옛 집터이다.”
늙은 학사는 두어 간 서당을 짓고 자제들 대여섯 명을 모아 모두에게 훈계하여 말했다.
“너희들이 서로 형제가 되기를 언약하고 여기에서 공부를 하되 방일放逸한 행동을 하지 말라.”
그러고는 3년이 될 때까지 스승을 초빙하여 공부를 가르치게 하였다. 소년 운학은 한 번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하자 더욱 분발하였으니 그때 나이 열다섯 살이었다. 때마침 공부를 가르치던 스승이 호남 지방에 내려가 있었는데 같이 공부하던 학생 여러 명과 함께 따라 내려갔다. 그러나 그 스승은 호남으로 내려간 지 몇 달 안 되어 갑자기 예측하지 못한 우환(不天之憂, 喪親)을 만나 이미 서울로 돌아간 뒤였다. 소년들은 머리를 맞대고 답답해하다가 동학同學 중에 한 사람이 말하였다.
“스승을 찾아 천 리를 왔는데 일은 비록 어긋났지만 이러한 명승지에 와서 빈손으로 돌아가느니보다는 남녘의 산천이나 두루 구경을 하는 것이 좋겠다.”
그리하여 소년들은 두류산頭流山·화엄동華嚴洞·연곡동燕谷洞·칠불암七佛庵·의신동義神洞·청학동靑鶴洞의 크고 작은 사찰을 찾아다니며 자고 걷고 하면서 반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노숙老宿(덕이 높은 스님. 崇仁 대사)이 청허를 보고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대를 보니 기골이 맑고 빼어나다. 결정코 보통 사람은 아니니라. 마음을 돌이켜 심공급제心空及第만 한다면 영원히 세간의 명리名利는 끊게 될 것이다. 서생書生들이 하는 업이란 아무리 종일토록 수고롭게 노력해도 백 년의 소득은 다만 하나의 헛된 이름일 따름이다. 실로 애석한 일이로다.”
청허가 말하였다. “어떤 것을 심공급제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숭인 노숙이 눈을 깜박이며 말하였다. “알겠는가?”
청허가 대답하였다. “모르겠습니다.”
노숙이 말하였다.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니라.”
그러더니 『전등록』·『선문염송』·『화엄경』·『원각경』·『능엄경』·『법화경』·『유마경』·『반야경』 등 수십 가지 경론經論을 내어 보이며 말하였다.
“이 책들을 부지런히 읽고 깊이 생각하면 점점 그 문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이 일을 계기로 하여 그 후 영관靈觀 대사에게 부촉하게 된다. 영관 대사는 운학을 한번 보고 기이하게 여겼다. 그에게 3년 동안 수업하였는데 일찍이 열심히 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경전의 심오한 이치를 문답하였는데 한결같이 가려운 곳을 긁어 주는 것 같았다.
그때 함께 떠났던 동학 여러 명은 각각 서울로 돌아가고 스님만 홀로 선방에 머물면서 여러 경전을 탐구하였다. 경전을 읽고 탐구하면 할수록 명상名相에 더욱 얽매이고 해탈의 경지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날이 갈수록 스님의 마음은 더욱 답답하기만 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밤에 홀연히 그는 문자를 떠나서 오묘한 이치가 있음을 터득하고 마침내 시 한 수를 지어 읊었다.
忽聞杜宇啼窓外 창 밖에서 우는 소쩍새 소리를 들으니
滿眼春山盡故鄕 눈 안에 가득한 봄 산이 모두 고향이로구나
하루는 또 이런 시를 지어 읊었다.
汲水歸來忽回首 물 길어 돌아가다 언뜻 머리 돌려 보니
靑山無數白雲中 흰 구름 사이로 무수한 청산이 솟아 있네
이튿날 아침 손에 은도銀刀를 들어 직접 푸른 머리칼을 자르면서 말하였다.
“차라리 어리석은 바보로 평생을 살지언정 맹세코 문자나 독송하는 사내는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는 일선一禪 대사를 수계사授戒師로, 석희釋熙 법사와 육공六空 장로, 각원覺圓 상좌를 증계사證戒師로, 영관靈觀 대사를 전법사傳法師로 삼고, 숭인崇仁 장로를 양육사養育師로 하여 스님이 되는 의식을 올렸다.
스님이 된 휴정은 도솔산으로 가서 학묵學默 대사를 찾아뵈니 학묵 선사는 그를 쓰다듬어 주면서 인가해 주었다. 다시 두류산 삼철굴三鐵窟에 들어가 세 여름을 지내고, 대승암大乘庵에 들어가 두 여름을 지냈으며, 의신암義神庵·원통암圓通庵·원적암圓寂庵·은신암隱神庵 등 여러 암자에서 수삼 년 가을을 보냈다.
하루는 용성龍城(지금의 남원) 역성촌歷星村 별원에서 낮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두 개의 게송을 읊었다. 서천 제3조인 상나화수商那和修가 제4조인 우바국다優婆毱多 존자에게 물었다. “네 나이 몇 살인고?” 대답하였다. “제 나이 열일곱입니다.” 스승이 다시 물었다. “네 몸뚱이가 열일곱 개인가, 네 성품이 열일곱 개인가?” 제자가 대답하였다. “스승님의 머리가 하얗게 되었는데, 머리카락이 하얀 것입니까, 마음이 하얀 것입니까?” 스승이 대답하였다. “나는 다만 머리카락이 하얄 뿐 마음이 하얀 것은 아니니라.” 우바국다가 말했다. “저도 몸이 열일곱이지 성품은 열일곱이 아닙니다.” 상나화수가 곧 법의 그릇임을 알았다.
髮白非心白 머리칼은 하얘도 마음은 하얗지 않은 거라고
古人會漏洩 옛 사람(상나화수)이 일찍이 누설漏泄하셨지
今聽一聲鷄 오늘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나서
丈夫能事畢 대장부가 해야 할 일을 이미 마쳤네
또 읊었다.
忽得自家底 홀연히 제집을 찾고 보니
頭頭只此爾 온갖 것이 다 이것뿐이어라
萬千金寶藏 만 마디 천 마디 부처님 말씀 적은 경전도
元是一空紙 원래는 모두 다 텅 비어 있던 종이였다네
그러고는 곧바로 산으로 돌아갔다.
병오년(1553) 가을에 갑자기 사방을 두루 돌아다니고 싶은 마음이 생겨 표주박 하나와 누더기 한 벌로 오대산에 들어가 반년을 지내고, 다시 풍악산에 들어가 미륵봉彌勒峰을 찾아 구연동九淵洞에서 한 여름을 보냈으며, 향로봉에서 한 여름을 보냈고, 성불암成佛庵·영은암靈隱庵·영대암靈臺庵 등의 암자에서 각각 한 여름씩을 보냈으며, 함일각含日閣에서 한 해 가을을 머물렀는데 그때의 나이가 서른세 살이었다.
그때 성조聖朝께서 (연산군 때에 폐지되었던) 양종兩宗(선종과 교종)을 다시 복원시켰는데, 마지못해 외인外人의 간청을 따라 1년 동안 대선大選이라는 직책을 역임하고, 주지 직책을 맡은 지 두 해, 전법傳法이라는 이름을 얻은 지 세 달, 교판敎判(敎宗判事)의 직책에 세 달, 선판禪判(禪宗判事)의 직책에 3년을 있었으니, 그때 휴정의 나이 서른일곱 살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처음 발심했던 때의 마음으로 돌아가 관직을 내려놓고(解綬) 하나의 청려장靑藜杖만 짚고 금강산 천석泉石 사이로 들어가 반년 동안 지내다가 두류산 내은적암內隱寂庵으로 들어가 3년을 지냈다. 그러고는 다시 황령암黃嶺庵·능인암能仁庵·칠불암七佛庵 등 여러 암자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3년을 지내고는 태백산·오대산·풍악산 등 다시 이 세 산을 답산하고 묘향산으로 가서 보현사普賢寺 관음전과 내원암內院庵·영운암靈雲庵·백운암白雲庵·심경암心鏡庵·금선암金仙庵·법왕암法王庵 등을 돌아다니며 마치 기러기 털이 날리듯 정처 없이 바람과 구름 같은 생활을 하였다. 그가 지은 〈삼몽사三夢詞〉는 이러하다.
主人夢說客 주인은 손님에게 꿈 이야기를 하고
客夢說主人 손님도 주인에게 꿈 이야기를 한다
今說二夢客 지금 꿈 이야기를 하는 두 사람
亦是夢中人 둘 다 역시 꿈속의 사람이로구나
향로봉에 올라 지은 시는 이러하다.
萬國都城如蟻垤 온 나라 도성들 마치 개미집 같고
千家憂傑若▣鷄 일천 집 호걸들도 흡사 하루살이 같구나
一窓明月淸虛枕 창가 밝은 달 베고 맑고 텅 빈 속에 누웠으니
無限松風韵不齊 솔바람 끝없는데 그 소리 고르지 않네
이로부터 빛을 감추고 채색을 갈무리한 채 산문 밖을 나오지 않았으나 도를 물으러 찾아오는 이가 날로 늘어만 갔다. 기축년 옥사獄事에 요망한 승려 무업無業이 대사가 향로봉에서 지은 시를 인용하여 무고誣告한 까닭에 체포되어 의금부에 잡혀갔으나 의금부에서 문초하는 답변이 분명하고 조리가 있었다. 선묘宣廟(선조)는 휴정이 억울하게 무고 당함을 알고 즉시 방면하게 하고, 그의 시고詩稿를 구해 읽어 보고는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자신이 직접 그린 그림 묵죽墨竹 한 폭과 시 한 수를 곁들여 휴정 상인上人에게 하사하였는데, 그 시는 이러하다.
葉自毫端出 댓잎은 붓끝에서 나왔고
根非地面生 뿌리는 땅에서 나온 것 아니라네
月來難見影 달이 떠올라도 그림자 볼 수 없고
風動未聞聲 바람 불어 흔들어도 소리 들리지 않네
휴정은 이에 그 은혜를 감사하며 시 한 수를 지어 올리니 그 시는 이러하다.
瀟湘一相枝竹 소상강의 한 가지 대나무가
聖主筆頭生 임금님 붓끝에서 나왔구나
山僧香爇處 산승이 향불을 사르는 곳에서
葉葉帶秋聲 잎새마다 가을바람에 서걱거리네
선조는 또 직접 시를 지어 휴정에게 하사하였으니, 그 시는 이러하다.
東海有金剛 동쪽 바닷가 금강산이 있으니
䧺賢幾種胎 거기서 얼마나 많은 인재가 나왔던가?
高名山斗仰 태산과 북두北斗처럼 높은 명성
今世是如來 지금 세상의 여래로구나
휴정은 임금이 직접 지어 하사한 시에 답하는 시를 지어 올리니, 그 시는 이러하다.
寂照非千世 고요히 비추어 세상일 간섭 않거니
虛靈豈入胎 허령虛靈이 어찌 세속의 태胎에 들겠는가?
金剛山下石 금강산 아래의 돌들은
大小自如來 크건 작건 다 여래인 것을
선조 대왕이 후한 상과 재물을 내려 산으로 돌아가는 휴정을 위로해 보냈다.
임진년(1592)에 임금이 탄 수레(大駕)가 서쪽으로 용만龍灣에 행차하자 대사는 칼을 뽑아 분연히 일어나 알현하니 선조가 말하였다.
“세상이 혼란하니 네가 중생들을 널리 구제할 수 있느냐?”
대사가 눈물을 흘리며 절을 하고 온 나라에 명을 내렸다.
“온 나라의 모든 승려들 중에 늙고 병이 들어 전쟁터에 나갈 수 없는 이들은 각자 머물고 있는 절에서 향을 사르고 기도를 올려 불보살님의 가피를 구하도록 하고, 그 나머지 승려들은 내가 직접 통솔할 터이니 모두들 군문 앞에 이르러 충성스런 백성들을 본받도록 하라.”
선조는 이를 의롭게 여겨 휴정을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에 임명하였다. 대사는 여러 상족上足(제자)들에게 명을 내려 의병을 모아 규합하게 하였다. 그러자 유정惟政은 관동關東에서 기병起兵하고, 처영處英은 호남에서 기병해 권율權慄의 군대와 합병合兵하여 행주산성에서 적을 방어했다. 휴정 대사는 직접 문도 1,500명을 거느리고 천병天兵(명나라의 원병)을 따라 진군하여 평양을 탈환하였다.
천조天朝(명나라)의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과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 그리고 삼협통병三協統兵이하 여러 장수들은 문첩文帖을 다투어 보내 전공을 치하하였다. 어떤 이는 “나라를 위하여 적을 무찌르는 그 충성이 해를 꿰뚫었으니 경앙敬仰하여 존경함을 이기지 못하겠다.”는 말을 하기도 하고, 또 시를 지어 대사에게 보내기도 하였으니, 그 시는 이러하다.
無意圖功利 공리功利에 아무 관심이 없어
全心學道仙 도 닦는 일에만 전념하더니
今聞王事急 나라가 위급하다는 말을 듣고는
揔攝下山巓 총섭摠攝 되어 산문을 내려왔네
적이 물러가자 대사는 임금에게 아뢰었다.
“신의 나이 80이라 근력이 쇠진하였으니, 청컨대 군사의 일을 제자 유정과 처영에게 부탁하고, 신은 총섭인摠攝印을 반납하고 묘향산 예전에 살았던 곳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선조는 그 뜻을 아름답게 여기고 그의 늙음을 안타깝게 여겨 그에게 ‘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 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라는 호를 내렸다. 대사는 이윽고 묘향산으로 돌아와 또다시 유유자적한 한가로운 한 도인이 되었다.
갑진년(1604) 정월 23일 원적암에서 조용히 열반을 준비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휴정은 견여肩輿를 타고 눈 속을 뚫고서 가까운 산내의 여러 암자들을 골고루 찾아다니면서 부처님께 참배하고 설법을 한 뒤에 방장실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목욕재계하고 위의를 갖춘 다음 부처님 앞에 향을 사르고 붓을 가져오게 하여 자신의 영정에 시 한 수를 써 넣었다.
八十年前渠是我 80년 전에는 저것이 나였더니
八十年後我是渠 80년 뒤에는 내가 저것이로구나
그러고는 유정과 처영 두 문인에게 보낼 편지를 써서 마친 다음 가부좌를 한 채 입적하니, 세속의 나이는 85세였고 선랍禪臘은 67년이었다. 기이한 향내가 방안에 가득하더니 삼칠일(21일)이 지나서야 비로소 사라졌다.
제자 원준圓俊과 인영印英 등이 사유闍維를 마치고 난 뒤에 영골靈骨 한 조각과 사리 두 매를 받들어 보현사普賢寺와 안심사安心寺 두 곳에 부도를 세워 봉안하였다. 또 한 조각은 제자 유정과 자체自體등이 봉래산蓬萊山으로 받들고 가서 거기에서 신비한 구슬(神珠.사리) 몇 매를 얻어 유점사楡岾寺 북쪽 산언덕 폄석窆石에 봉안하였다.
그의 제자는 1천여 명이나 되었으며, 후학을 양성한 일방종주一方宗主 (대종사)만도 네다섯 명을 밑돌지 않았으니 성대하다고 말할 만하다.
그의 저술로는 『선가귀감禪家龜鑑』·『선교석禪敎釋』·『운수단가사雲水壇歌辭』·『삼가일지三家一指』 각 1권과 『청허당집淸虛堂集』 8권이 있으며, 「회심곡回心曲」 1편이 세상에 유행한다.
문인 언기彦機·의경儀冏·쌍흘雙屹 등이 상국相國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에게 비명碑銘을 받아 금강산 백화암白華庵에 비석을 세웠다.
숭정崇禎 4년 신미(1631) 봄에 문인 태능太能·원철圓徹·해안海眼 등이 상국인 계곡谿谷 장유張維에게 비명을 지어 달라고 청하여 두륜산 대둔사大芚寺에 세웠으며, 숭정 5년 임신(1632) 가을에 『금자보장록金字寶藏錄』 1권을 해남 두륜산 대둔사에 보관하였으니, 그것은 대사가 임종할 때 유언의 말을 따른 것이다.
또 해남 두륜산 대둔사에 의승대장義僧大將 황금가사黃錦袈裟 1벌, 홍금가사紅錦袈裟 1벌, 백금장삼白金長衫 1벌, 벽옥碧玉으로 만든 발우 3좌座, 당혜唐鞋 2쌍, 검은 거문고(烏瑟)와 염주 3건件, 옥사자玉獅子 연적硯滴 1좌, 중덕대선中德大禪인 승과에 합격하였다는 합격증 홍패紅牌 1장, 낙산사洛山寺 주지 임명장인 차첩差帖 1장, 유점사 주지 차첩 1장 등 휴정의 유품이 보관되어 있다.
이것은 제자 영잠靈岑 대사가 휴정 대사가 입적한 뒤에 3년 동안 복服을 입고 난 뒤에 짊어지고 와서 보관한 것이다. 대사께서 입적한 뒤 185년이 지난 건륭乾隆 무신년, 우리나라 정조대왕 12년(1788)에 대둔사 스님인 계홍戒洪과 천묵天默이 임금께 글을 올려 탄원하였다.
이에 임금이 대둔사에 사당을 건립하라 명하고 ‘표충表忠’이라는 편액을 하사하였으며, 사명당四溟堂과 뇌묵당雷默堂을 좌우에 철향腏享하게 하였다.
홍문관 제학提學 서유린徐有鄰이 「표충기적비명表忠紀蹟碑銘」을 지었다.
갑인(1794)에 임금이 지은 「서산대사화상당명西山大師畫像堂銘」 2벌을 하나는 두륜산 표충사에 내려보내고, 다른 하나는 묘향산 수충사酬忠祠로 내려보냈다.
그것은 그 당시 묘향산의 스님들이 대둔사의 소식을 듣고 와서 허락해 주기를 간청하였기 때문이었다. 연담 유일蓮潭有一이 휴정의 송덕비頌德碑 비문을 지을 때 서공徐公(徐有隣)이 곁에서 도와준 공이 있기 때문이다.
5결結의 복호復戶가 있었고, 보솔保率 30명을 주어 제향을 올리는 비용으로 쓰게 했다.
동치同治 10년 신미(1871)에 복호와 보솔을 모두 환수하였다. 그리하여 본사本寺(대둔사)에서 자체적으로 제향을 봉행하게 되었다. 자체에서 지낼 때 사용하는 제문은 구계九階(覺岸) 상인上人이 지은 것이다.
대둔사에는 안평대군安平大君 용瑢이 손수 쓴 『연화경蓮華經』 1권과 일본의 관백關白이 바친 황금 병풍 1좌가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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