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44-45 믿는 자들이 한 장소 위에 모여서 모든 것을 함께 공유하며 가진 사람들은 자신들의 재산으로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전 말씀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권능을 귀로 들은 모든 영혼들에게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이어서 사도들을 통하여 많은 놀라운 일들과 표징들도 일어나서 선포한 말씀의 권능을 눈으로도 보게 되었다. 이어지는 말씀은 날마다 모두가 같은 장소에 모여 말씀 배우고 하나님을 예배하게 되자 물질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들의 물질을 가지고 필요한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새번역은 그렇게 믿게 된 사람들은 모두가 함께 지냈다는 의미로 번역했다. 함께 지냈다는 말은 계속해서 “같은 장소 위에”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스어의 epi 라는 전치사는 주로 땅의 표면 위에 있다는 뜻으로 대부분 쓰인 말이다. 여기서는 땅 대신 같은 하지만 같은 장소라는 말이 이어 나오는 것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같은 건물 안에서 함께 거했다고 해석할 수 없다. 이는 단순히 교회로 모인 사람들이 함께 같은 장소에 모여있었다는 의미이다.
같은 말이 2:47절에도 나오는데 대부분 번역하지 않았다. 원어에는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들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는 말 끝에 “같은 장소 위에” 라는 말이 붙어있다. 4:26절에서도 똑 같은 말이 나오는데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통치자들이 같은 장소 위에 모여” 라고 할 때도 나왔다. 고린도전서 14:23절에서도 전체 교회가 “같은 장소 위에” 모여 라는 말이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말씀 배우고 예배하고 교제하며 있었다는 뜻이지 절대로 한 건물에서 공동생활을 했다는 뜻이 아니다.
따라서 함께 지냈다는 말을 어떤 넓은 장소에 함께 모여 공동생활 한 것으로 이해하면 안된다. 120명이 한 집에서 공동생활을 할 수도 없는 일인데 이제 삼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 집에 모여 공동 생활했다고 볼 수는 없다. 더구나 2:47절에서는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들을 같은 장소 위에 더하게 하셨다고 했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모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는데 한 건물 안에서 모일 수가 없는 것이다. 이는 계속해서 같은 장소 위에 모여있었다는 뜻이다. 모두가 같은 장소에 모여서 계속 함께 머물면서 말씀 배우고 나누고 빵을 떼고 기도했다는 뜻이다.
또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했다고 했다. 같은 장소에 계속 함께 머물러 있었는데 이번에는 모든 것을 계속해서 함께 소유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을 가지고 원시 공산주의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본문을 잘못 읽은 것이다. 사실 원시 공산주의는 초대교회가 아니라 쿰란 공동체였다. 당시 쿰란 공동체는 공동체의 규칙에 따라 모든 재산을 다 헌납하고 모두 함께 공동체 생활을 했었다. 쿰란 공동체는 모든 재산을 의무적으로 함께 나눈 것이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루살렘 교회는 그러한 규칙이 없었다. 모두가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나누어 준 것이다. 46절에 보면 각자 자기 집을 갖고 있었다는 것도 분명하다.
45절을 보면 이러한 사실이 분명히 나온다. 45절 앞부분에서는 "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라고 되어있다. 재산이란 땅이나 집과 같은 부동산을 뜻한다. 소유물이란 귀금속 같은 것을 뜻하는 말이다. 팔았다는 말은 계속해서 팔았다는 뜻이기에 한 번에 전 재산을 다 내놓은 것이 아니다. 재산과 소유가 있는 사람들이 필요할 때마다 계속해서 팔았다는 것이다. 고대 사회는 오늘날 처럼 현금 사용이 활성화된 사회가 아니었다. 동전들이 쓰이기는 했지만 대부분 재산은 금이나 은 같은 것으로 만들어진 귀금속들로 보관을 했다. 소유와 재산을 계속해서 팔았다는 말은 물질을 나누어야 할 일이 생길 때마다 계속해서 헌금을 했다는 뜻이다. 한꺼번에 전재산을 다 내놓았다는 뜻은 아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식으로 말하면 날마다 은행에서 돈을 인출하거나 카드로 긁어서 물건을 구입해서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다는 뜻이다.
사도행전 4:37절에서 바나바가 자기 소유의 밭을 팔아서 그 돈을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다라고 한 것은 밭 하나를 판 것이지 자신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 내놓은 것은 아니다. 바나바가 그렇게 헌금한 것은 당시 성도들이 깜짝 놀랄만한 일이었기에 성경에 기록된 것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바나바를 칭송했던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헌금을 하고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 바나바를 보고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자신의 소유를 팔았다고 했다. 소유란 말은 오늘 말씀에 나오는 땅이나 집 같은 부동산이다. 이 부부도 자신들이 가진 밭 하나를 팔아서 헌금한 것이다. 자신들도 그러한 칭송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문제는 성령님을 속인 것이지 헌금을 적게 한 것이 아니다.
소유를 판 뒤에는 그것을 모두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했다. 그러나 모든 믿는 자들이 재산을 똑같이 나누어 가졌다는 뜻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어서 "필요한 대로" 라는 말이 붙어있기 때문이다. 함께 모여 말씀 배우고 나누며 기도하다가 먹을 것을 나누어야 할 필요가 생겼을 때 마다 가진 자들이 서로 앞다투어 자신들의 가진 것으로 먹을 것을 사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함께 모여서 말씀 배우고 예배를 드리면서도 먹을 것을 구할 걱정없이 지냈다는 뜻이다. 오늘날 미국에서는 현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고 카드를 쓰기에 있는 사람들이 카드를 긁어 먹을 것을 사서 먹을 것을 살 수 없는 사람들에게 제공했다는 뜻이다. 그러한 자발적인 헌금이 계속해서 이어졌다는 뜻이지 집과 토지와 재산을 다 팔아 바치고 모두가 똑같이 공동체 생활을 했다는 뜻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종말이 임박했다고 보고 한꺼번에 모든 재산을 다 내놓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필요가 생길 때마다 계속해서 팔아서 나누어 주었다고 했기 때문에 그렇게 해석할 수 없다. 소유와 재산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 공동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진 소유를 때때로 팔아서 공동체를 위해 내 놓았다는 뜻이다. 이러한 헌금이 계속해서 이어져갔다는 뜻이다. 모두가 한 가족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누가는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서 소유를 나누는 것을 다른 복음서 기록자보다 특별히 강조해서 증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가복음 10:30-37절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도 누가복음에만 나온다. 또 누가복음 12:16-21절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가 창고를 더 크게 짓자고 하는 비유도 누가복음에만 나온다. 어리석은 부자가 자신만을 위해 물질을 축적하는 행위는 자살행위였던 것이다.
John Piper는 사도행전 2:44-45절에 나온 물질 나누는 모습이 바로 어리석은 부자에 의해 행해진 자살하는 물질주의를 치료하는 해독제라고 말했다.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서 어려운 처지에 있는 형제 자매를 보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는 것은 하나님 보다 물질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물질을 사랑하는 마음은 독약을 조금씩 마시는 셈이고 결국은 물질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고 멸망에 이르기 때문에 자살행위인 것이다. 그 해독제는 오늘 말씀에 나온 사람들처럼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실 때 기쁨으로 헌금을 하는 것이다. 가진 재산을 다 내놓으라는 것은 성경적인 가르침이 아니다. 성령께서 감동을 주실 때마다 가진 것을 내놓으면 이미 그러한 물질에 중독이 되어 죽어가고 있을 때 치료제가 되는 것이다.
말씀을 배우고 성령님께서 깨닫게 하셔서 감동을 주셨다면 우리도 하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 위에 군림하며 선심을 쓰듯이 나누어 주고 그들을 간섭하고 통제하려고 하면 안된다. 예수께서 목자없는 양 같은 무리들을 보고 창자가 끊어질 듯 아파하셨던 그러한 긍휼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오늘 말씀에 나온 초대교회 성도들은 모두가 한 몸이라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에 자기 몸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공동체를 사랑한 것이다. 그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이고 예수님의 마음이다.
만약 그러한 마음이 없이 물질을 나누는 사람이 있다면 분명히 명예나 다른 것을 얻을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좀 더 나은 위치에 있다 생각하고 그런 우월한 위치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가 위해 노숙자 구제하듯 하는 것이다. 그런 믿음은 거짓이고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자살행위인 것이다. 그러한 마음이 들긴 하는데도 베풀지 못한다면 야고보서 2:26절에서 말한 것처럼 죽은 믿음이다. 야고보서 1:22절에서 말씀을 듣기만 하는 사람은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라고 했다. 성령께서 감동을 주실 때 오늘 말씀에 나온 사람들처럼 함께 나누며 기뻐하는 것이 없다면 자기 몸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세상 물질주의 라는 독약을 먹고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