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하촌에서 겨울을 나다
류시화
1
결린 옆구리께 돌무더기만 남은 폐사지에
한 칸 암자를 짓고
겨울을 나고 싶다
뒤꼍 대나무 싸락눈 맞으며 산경 외는 소리 듣고 싶다
고염나무 마른 열매로 서 있는 묵은밭에
일박하고 떠난 새들
발자국의 내력 세어 보고 싶다
절 아랫마을로 내려가는 길목에서
반가사유하고 있는 햇무덤
그 번뇌를 들여다보고 싶다
병 깊어 물길 쪽으로 돌아눕는 밤
며칠째 눈 오고
마음이 오랜 변방에서 젖었다
누가 어디 먼 데서 걸어온다
아무 슬픈 일 없는데 이 무명의 슬픔은 어디서 오는가
아무 울 일 없는데 이 무음의 울음은 어디서 오는가
눈송이처럼 세상 속으로 내리더라도
세상과 무연한 곳에 내리고 싶다
결린 옆구리께 꽃들이 기침하는 폐사지로
2
내 사랑은 언제나 과적이었다
빙판길에 자주 갓길로 미끄러졌다
눈 내린 사하촌에서였을 것이다
사바의 눈 덮인 이불 밑에서
너를 모색하였다
그리고 우리를 감각 속에 유폐시켰었다
날마다 출가하는 부도탑 위 별들을 따라
멀고 추운 길을 걸어 그곳에 이르렀을 것이다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적설
피안 못 미쳐 당도한 남루한 여인숙
창가에 알몸으로 세워 둔 촛불 글썽거리고
울음 운 것은 문풍지였나
그때 잠 못 이루고 너는 무슨 생을 헤아렸나
너는 나의 화두
너로 인해 경계가 사라지는 것을 알았다
화엄의 세계가 그곳에 있는 듯했다
이 생에 다시 너와 절 아랫마을 여인숙에 들를 수 있을까
폭설에 이 생에서조차 소식 끊긴 사랑을 내생에 어찌 만나겠는가
전생의 기억을 잊어버리고
모로 눕는 밤
눈송이들도
둘씩 짝지어 내릴 것이다
사하촌 그 여인숙 맞배지붕 위로
만났다 헤어졌다 하면서
3
겨울 멀구슬 열매는 직박구리 차지다
잔설에 각이 깍여 눈이 부시다
물웅덩이에 비친 자작나무 그림자
너무 오래 서 있어서 다리가 아픈가
무릎을 약간 구부리고 있다
여기 불생불멸 주문 외며
소멸로 깊어지는 것들이 있다
세월 지나 이곳에 처음 와 본다
그 절 아랫마을에
일찍 도착한들 꽃이 한 걸음 먼저 와 있겠는가마는
49재 지내고 노란띠좀잠자리 날아가던 윗녘
축문 읽던 골짜기 물은 목이 잠겼다
한 열흘 지나면
산문 밖으로 만행 나갔던 봄이
소맷자락 흔들며 돌아올 것이다
이 사하촌에서
색色을 탐하던 꽃
덧없는 몸에 화인火印을 찍던
아직 불어 끄지 못하고
눈 녹자 만다라 같은 지붕들 드러난다
이 세상 마을이 다 사하촌 아니던가
여기서 며칠 누군가 기다렸다가
꽃의 뿌리 근처에 누우리
아주 아픈 기억은 옆구리께 사리탑에 묻으리
기척 들려 뒤돌아보면
어느새 큰 눈 내려 길 지워지고
눈 덮힌 사하촌
절보다 먼저 적멸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