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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2)
빼앗지 못할 기쁨
요 16:14-24 / 신성종 목사
오늘 가정의 달인 5월 첫 주일을 맞이하면서 모든 가정마다 기쁨이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기독교는 감사의 종교요 기쁨의 종교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의 영적 문제점은 불만과 불평의 바이러스 때문에 기쁨과 감사가 점점 살아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어떤 독감보다도 더 무서운 병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22절에 보면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이 말씀을 중심으로 [빼앗지 못할 기쁨]이라는 제목으로 감사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서 기쁨이 충만한 가정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1. 지금 우리들에게 시급한 것은 잃어버린 기쁨을 다시 회복하는 것입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보니까 최근에 와서 교회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처음의 드림]이 살아지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기쁨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수퍼마켓에 가면 산처럼 쌓아 놓은 과일들, 특별히 바나나와 오렌지, 고기들. 과거에 말로만 듣던 미제, 일제 차들. 한국에서 버스 타고 다니던 사람들이 좋은 차들을 타고 다니고. 영화에서만 보던 관상수들이 있는 집에 살게 되고, 미국에서는 생각 못할 그런 호화로운 아파트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좋은 환경에서 오랜 세월 살다가 보니 나중에는 [멍하니] 되었습니다. 환경이 과거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아졌는데 [행복의 지수]는 오히려 많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과거보다 잘 사는 데 기쁨은 상실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잃어버린 기쁨을 다시 회복하려면 먼저 우리는 지금 내가 얼마나 행복한 환경 속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보다 좋은 환경에 있는 사람만 보지 말고, 위만 보지 말고 내 밑에 있는 사람들이 몇 배나 더 많고, 우리의 위치를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세계에는 셀 수 없이 많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손자의 병법에 재미있는 [어미돼지와 새끼돼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새끼 돼지 몇 마리가 어미돼지를 따라서 늪에서 먹을 것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 때 가까운 길로 소 몇 마리가 관리들에게 이끌려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모두 깨끗이 목욕을 하고, 몸집이 좋았습니다. 뿔도 발톱도 구슬처럼 반짝입니다. 털도 부드럽고 비단 같이 윤기가 흘렀습니다. 흙탕 속에서 이것을 보면서 돼지 새끼 중에 하나가 불평을 합니다. 우리는 왜 돼지로 태어났을까? 저렇게 예쁜 소로 태어나지 못했을까? 그러자 다른 새끼들이 동조를 합니다. 그래, 그래 나는 엄마 돼지가 원망스러워. 그러나 이것이 돼지 팔자가 어쩔 수 없지 않아? 이 말을 듣고 있던 엄마 돼지가 말합니다. 꿀 꿀 꿀. 아무 것도 모르면 가만히 있어. 무슨 불평이 그렇게 많으냐? 아까 끌려간 소들은 지금 징발되어서 도읍으로 가는 것인데 머지않아 뿔은 금과 은으로 장식을 할 것이고, 몸에는 금실과 은실로 수놓은 아름다운 옷을 입게 된단다. 그리고서 제물로 바쳐진단다. 엄마 제물이 뭐예요? 죽는 거야. 그 때에는 아무리 울어도 소용이 없어. 그러자 새끼 돼지들은 조용해졌습니다. 그러자 엄마 돼지가 엄숙한 말로 말했습니다. 곱게 태어나서 잘 먹고 편하게 지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겠니? 그러므로 이제 불평하지 말고 돼지 팔자가 최고인줄 알고, 기쁨으로 살아라.
우화입니다만 이 이야기 속에는 큰 교훈이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행복한 환경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사람을 꼭 같은 기준으로 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각기 다른 환경을 주셨지만 다 서로 다른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남과 비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나는 나대로의 환경이 있고, 나는 나대로의 기쁨과 감사가 있는 것입니다.
과연 감사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바로 기쁨과 감사의 회복에 있습니다.
항상 구원의 기쁨을 가지고 살았던 다윗이 범죄한 후에부터는 기쁨이 살아졌습니다. 그래서 시편 51:12절에서 “주의 구원의 기쁨을 내게 회복시켜”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지금 구원의 기쁨이 있습니까? 있다면 감사하면서 계속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에 하나 우리들에게 구원의 기쁨이 없고, 감사가 없다면 우리에게는 영적인 병이 깊은 것을 알아야 합니다. 독감에 걸리면 음식이 다 쓰듯이 지금 우리가 영적 독감인 감사불감증에 걸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들은 잃어버린 기쁨과 감사를 찾아야 합니다. 왜 잃어버렸습니까? 귀한 줄 모르고, 있다가 방임 상태에서 잃었습니다. 오늘날 도시화, 산업화, 기계화로 인해서 잃은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양심을 잃었고, 또 신앙을 잃었고, 기쁨을 잃었고, 감사를 잃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2. 두 가지 종류의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는 빼앗길 기쁨이고, 다른 하나는 빼앗지 못할 기쁨입니다. 세상에는 누구나 기쁨이 있지만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빼앗길 기쁨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뻐하는가 싶었는데 얼마 안 가서 그 기쁨은 사라집니다.
계속해서 그 기쁨을 구하지만 빼앗지 못할 기쁨이 아니라 잠정적인 기쁨, 살아지는 기쁨이기 때문에 금방 다시 사라집니다. 처음부터 그 기쁨은 사라질 기쁨인데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잘못입니다.
예를 들어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에 기쁨이 있지만 화장실에 한번 갔다 오면 그 음식을 먹었던 기억만 남아있을 뿐 음식을 먹을 때의 그 기쁨은 더 이상 존재하지를 않습니다. 세상의 기쁨은 나누면 줄어들고, 없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돈이나 재물은 나누면 없어집니다. 그러나 천국의 기쁨은 나눌수록 커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빼앗지 못할 기쁨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3. 빼앗지 못할 기쁨을 소유하려면?
(1)탕자가 아버지를 찾아가듯이 우리의 본향의 집으로 돌아가야 기쁨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찬송 : “나 집에 돌아갑니다, 어머님 기도 못 잊어.” 집을 떠난 사람은 참 기쁨이 없습니다. 여행 중에 있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것 보아도 다 그림의 떡입니다. 다윗이 기쁨을 상실한 것은 하나님과 담을 쌓게된 그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집에 있지를 못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2)[주안에서] 기쁨을 구해야 합니다.
주안에서 기쁨을 구한다는 말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을 본다는 뜻입니다. 롬8: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믿습니까?
빌립보서에는 18번에 걸쳐 [기뻐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거기서 바울은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기쁨의 방향을 말해줍니다. 당시 바울은 감옥에 갇혀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위로부터 주시는 기쁨, 주님과 함께 하고, 동행하는 기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이었기 때문입니다.
(3) 남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천국의 기쁨이어야 합니다.
기쁨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기쁨이 하나님의 뜻이란 말은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기쁨의 생활을 요청하신다는 말입니다. 우리들이 기뻐하는 것을 흠향하시고, 그 기쁨 속에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남들과 함께 나누는 기쁨 중에는 거짓된 기쁨도 있습니다.
단5장에 보면 벨사살 왕이 일 천명의 귀빈들과 함께 흥겨웁게 주흥에 취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벽에 쓴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란 경고 한 마디로 그 웃음과 기쁨은 금방 슬픔으로 변했습니다.
왜냐하면 [메네]란 말은 세어보니 끝났구나란 뜻이고, [데겔]이란 말은 저울에 달아보니 부족하구나란 뜻이고, [우바르신]이란 말은 이제 나라가 조각나게 될 것이란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그 날 밤에 벨사살 왕은 죽고 다리오가 페르샤 제국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벨사살의 기쁨은 꿈 같은 기쁨이요 육적인 기쁨이요 거짓 기쁨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나는 가진 것도 없고, 잘난 것도 없어서 남들과 나눌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남들과 나눌 복음은 누구에게나 있지 않습니까?
더구나 잃은 양 한 마리가 돌아올 때 하나님께서 그처럼 기뻐하시는데, 또 우리들에게 최소한 미소는 누구나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사실 미소를 대하는 사람은 참으로 기분이 좋습니다. 금방 친구가 되고, 남을 행복하게 해줄 수가 있습니다.
우리 문화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기뻐도 그 기쁨을 경솔하게 표현해서도 안 되고, 슬퍼도 그 슬픔을 표현해서도 안 되는 유교적 체면문화가 문제입니다.
(4) [구원의 기쁨, 소망의 기쁨]이 있어야 아무도 빼앗지 못합니다(빌1:21-26).
하늘의 소망은 나누면 커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환경에 관계없이 기뻐할 수 있는 기쁨입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기쁨과 감사.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 원망하고 항의한 선지자입니다. 내가 어느 때까지 부르짖어도, 외쳐도 응답이 없습니까?
첫째로 왜 공의로운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악인들을 징계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응답했습니다. 내가 사납고 무서운 갈대아 사람들을 일으킬 것이다.
둘째로 그러자 그는 왜 하필이면 더 악한 바벨론 사람들입니까? 그러자 하나님께서 응답했습니다. 정한 때가 있다. 정녕 응하리라.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유명한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후에 바울의 신학의 핵심이 된 구절입니다.
그 후 3장에 가서 그는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5) [이미 받은 것을 귀한 줄로 알고, 잘 간직해야] 그 기쁨을 아무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귀한 은혜를 받고도 귀한 줄 모르고 함부로 간직하다가 잃어버린 사람이 많습니다.
에서는 장자권을 가볍게 여기고 팥죽 한 그릇에 야곱에게 팔아 장자권을 빼앗겼고, 르우벤은 도덕적으로 작은어머니(빌하)를 간통함으로 동생 유다에게 장자권을 빼앗겼고, 사울 왕은 교만하여 다윗에게 왕권을 빼앗겼고, 셉나는 불충성하다가 엘리아김에게 국고의 책임을 빼앗겼고, 요압 장군과 아비아달 제사장은 불충성하다가 브나야와 사독에게 직분을 빼앗겼고, 가룟 유다는 주님을 배신하여 맛디아에게 사도 직을 빼앗겼습니다.
맺는 말
이제 바라기는 가정의 달을 맞아서 불만, 불평 바이러스의 영적 병은 다 살아지고,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우리의 가정이되기를 축원합니다.
성령이 오셔서 하시는 일
요 16:13-14 / 박찬길 목사
예수 믿으면 누리는 혜택이 참 많습니다. 육신의 생명이 끝나면 천국에 가게 되고, 이 땅에서는 성령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성령은 보혜사라고 하잖아요. 보혜사는 helper라는 뜻입니다. 성령은 돕는 영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변호하고 중재하고 위로하는 역할을 하십니다. 성령은 처음부터 끝까지 성도를 돕는 역할을 하십니다. 예수를 믿으면 누구나 이러한 혜택을 받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성령께서 주시는 놀라운 축복을 마음껏 누리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성령이 오셔서 하시는 일은 무엇인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6장을 통하여 성령께서 어떻게 도와주시는지 자세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신비로운 영이시기 때문에 사람의 지혜로 깨닫는 것이 쉽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령한 지혜로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했습니다.
13절,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여기에서 진리는 누구를 뜻하지요? 예수님입니다. 요한복음 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성령이 오시면 제자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신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제자들이 깨닫도록 도와주신다는 말입니다.
일반적인 시각으로는 이 부분이 잘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녔잖아요. 제자들은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면서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전도하시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내쫓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았어요. 현장체험을 했어요. 그러니 예수님이 누구인지 모를 리가 없지요. 그런데 성령이 오시면 제자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한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좀처럼 이해되지 않을 수가 있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실 때에 보드로가 근사한 대답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메시아, 구원자,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이라는 뜻이잖아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구세주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대답을 들이시고 극찬하시지요. “너는 복이 있다. 너에게 이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시다.” 그러면서 너는 베드로다. 나는 이 반석 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 죽음의 세력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베드로와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 위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누구인지 깨달은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26장에 가면 다릅니다. 예수님이 붙잡히기 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다.” 이 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말합니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아니야. 오늘 밤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할거야.” 베드로가 뭐라고 대답합니까?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어떻게 되었어요? 주님을 부인합니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합니다. 저주하며 맹세까지 하면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베드로나 제자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따라다니면서 함께 있었지만,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자기의 생각으로 예수님을 정의하고 있는 거예요. 결국 예수님이 붙잡히시던 밤에 뿔뿔이 흩어지고 맙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베드로와 도마, 나다나엘, 세배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 다른 두 제자들 일곱 명이 고향으로 돌아가서 물고기를 잡습니다. 다른 두 제자는 낙심해서 엠마오로 내려갑니다.
자, 제자들이 이런 신앙을 가지고 있어요. 예수님이 이것을 아시고 성령이 오셔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깨닫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기사와 이적을 일으키시는 수준의 분이 아니라, 예수님이 구원자라는 진리를 알도록 성령께서 인도하신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하신다는 거예요. 제자들이 전도할 때에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모를 때에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다는 거예요. 성령이 제자들을 인도하시고, 성령이 우리들을 인도하신다는 거예요. 이 놀라운 역사를 여러분이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보세요. 제자들은 성령이 오시고 나서야 예수님이 누구인지 깨닫게 됩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드로의 설교를 보세요. 여러분이 무법자의 손을 빌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는데, 하나님께서 살리셨습니다. 우리가 이 일에 증인입니다.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님이 주님이요 그리스도이십니다. 여러분은 회개하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용서를 받으세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던 베드로가 성령을 받고 엄청난 설교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일어납니까? 베드로의 실력인가요? 베드로의 능력인가요? 성령이 오셔서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근심하고 낙심하여 각자의 길로 향하던 제자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인생에도 성령의 인도하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사람은 양과 같다고 했어요. 양은 자신의 고집대로 살아갑니다. 한치 앞을 보지 못합니다. 우리가 그렇잖아요. 우리는 언제나 자기의 가치관과 경험에 의존하여 살아갑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 예수님을 바르게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성인 중에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요. 역사적 예수에 그치는 사람도 있어요. 2천 년 전에 유대 땅에 왔다가 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셔서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주라고 고백하도록 인도하십니다.
고전 12:3,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로마서 8:15,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여러분이 예수님을 부를 때에 주님이라고 고백하십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말하게 됩니까? 성령께서 여러분을 진리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입에서 주님이라는 소리가 나오는 것은 연습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반복했기 때문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하나님 아버지” 이 고백은 철저하게 성령께서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진리라는 사실을 모르는데 성령이 오셔서 가르쳐 주셨기 때문에 주님이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시나요? 기사와 이적을 베푸시는 분으로 생각하시나요? 질병을 치료하시고 귀신을 내쫓는 분으로 받아드리십니까? 예, 맞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능력과 권세가 있으셔서 기사와 이적을 베푸시는 분이에요. 질병을 치료하시고 귀신을 내쫓는 분입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구세주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이것을 깨닫도록 인도하십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저와 여러분은 성령의 인도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것을 알게 하실 때에 받아드리세요.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삽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신앙생활을 잘할 수가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자기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갈 수가 있습니다. 성령이 인도하는 대로 순종하여 따라가기만 하면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게 됩니다.
찬송가에도 있잖아요.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하리라.”♪ 성령의 인도를 받으셔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시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승리하는 근사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장래 일을 알려주신다고 했습니다.
13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장래 일은 “앞으로 다가오는 일”을 말합니다. 흔히 예언이라고 하지요. 요엘서 2:28에 성령이 오시면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늙은이들은 꿈을 꾼다.”고 했는데, 성령이 오시면 앞으로 다가오는 일을 예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어요. 성경에 나오는 예언은 세상에서 말하는 예언과 전혀 다르다는 겁니다. ‘어느 동네로 이사 가면 좋은 일이 많을 거야. 언제 사업을 시작하면 돈을 많이 벌게 될 거야. 누구와 결혼하면 일찍 죽는다.’ 무당이 점치는 예언이 아니라는 겁니다.
성경의 예언은 하나님의 역사관을 말하는 거예요. 앞으로 하나님의 역사가 이렇게 저렇게 펼쳐질 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역사가 진행될 것이다. 그러니까 예언은 예수님과 관련된 것을 말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성취될 일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대표적인 예언이 이사야 53장이잖아요.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구약시대의 예언은 예수님이 메시야로 오실 것이다.
신약시대의 예언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지요.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여러 차례에 걸쳐서 예언하시잖아요. 요한복음 2장에서 성전을 정화하시면서 사십육 년 동안에 지은 성전을 헐라고 하시지요. 사흘 동안에 일으키신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지요. 삼일 뒤에 부활하실 것이라는 거예요.
마태복음 16장에서는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삼일에 살아난다고 예언하시지요. 누가복음 24장에도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사도행전에서 예언은 예수님을 통해서 성취될 일들을 말합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 구원을 주실 것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예언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것이 예언입니다. 구원은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이 예언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예언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이라는 겁니다. 어린 양의 피로 씻어서 깨끗하게 된 사람이 천국에 들어간다는 겁니다. 환란 때에 신부의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야 하나님 보좌에 들어간다는 겁니다. 모든 천사와 장로들과 네 생물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엎드려서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 것이라는 것이 예언입니다.(계 7:12)
여러분, 성령이 오시면 이와 같은 장래의 일을 말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성취될 일들을 말하게 하십니다. 요한복음 16:8에서는 세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첫째는 죄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9절,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죄가 무엇인가요?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죄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셔서 깨닫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보내주셨구나.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구나. 삼일 만에 부활하셨구나. 내가 그 분을 박대했구나. 내가 큰 죄를 범했구나. 성령께서 오셔서 깨닫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의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10절,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의가 무엇입니까? 세상에서는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선한 일을 해야 의롭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는 사실을 믿을 때에 의롭다고 인정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에서 아무리 선한 일을 많이 행했다고 해도 의롭다고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그런 의는 쓰레기통에 들어갈 휴지 조작 정도밖에 여기지 않으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의로워지는 비결은 하나님이 이루신 것을 그대로 받아드리고 믿을 때에 가능한 것이지요. 네가 구원 받기를 원하느냐? 예수를 믿어라. 그러면 내가 의롭다고 인정하마.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하나님께서 의의 옷을 입혀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가르쳐 주신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심판에 대하여 가책을 받게 하십니다.
11절,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 벌써 세상은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 육신의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지만, 영적으로는 이미 심판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오셔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회개의 복음을 공포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법이 공포가 되면 모든 사람이 법의 지배 아래에 있게 됩니다. 공포된 법을 알든 모르든 법의 효력은 생기는 것입니다. 캘리포니아 의회에서 자전거 전용도로를 만들면서 모든 자동차는 2피트 이상 떨어져서 운행해야 한다는 법을 만들었어요. 어떤 사람이 운전하고 가는데 폴리스가 차를 세워요. 무슨 일인가요? 당신은 티켓입니다. 나는 법대로 운전했는데요? 당신은 자전거 전용도로에서 2피트 이상 떨어지지 않아서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이 위협을 느꼈어요. 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요? 받아드려지나요? 티켓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선포하시면 그것이 하나님의 법입니다. 사람들이 알든 모르든 그 법에서 1차적으로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중에 모르고 심판받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주님이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셔서 심판하셔서 단지 집행유예를 받고 있을 뿐이지, 하나님의 심판은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을 안 믿은 사람들이 죄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 가책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세요.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받는다고 외치니까 사람들의 반응이 어떻게 나옵니까?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그 사람들이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사실을 모르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어요. 그런데 성령께서 오셔서 예수님이 주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셔서 가책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어이쿠, 내가 구세주를 죽였구나.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 가책을 받고 돌아오잖아요. 성령이 오시면 이러한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께서 장래 일을 알게 하신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오셔서 우리가 장래 일을 알고 있잖아요.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앞으로도 예수님을 통해서 성취될 많은 일들을 알게 하실 때에, 여러분에게 예언을 하게 하실 때에 성령에 이끌려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앞으로 예수님이 재림하실 거예요. 마지막에 심판하실 거예요. 그 때를 기억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여러분의 신앙을 잘 관리해서 예수 잘 믿는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신다고 했습니다.
14절,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성령이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신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영광이 무엇인가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인류의 죄를 위하여 돌아가셨고, 부활하셨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시고, 재림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알고 깨닫게 되는 것이 주님의 영광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알고, 그 목적대로 신앙 생활하는 것이 주님께는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 주세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 알게 해 주시는 거예요. 믿음을 크게 만들어 주시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우리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서 믿음이 커지는 겁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믿음을 공급해 주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믿음이 커질수록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겁니다.
■ 찬송가를 보면 ‘페니 크로스비’라는 분이 지은 찬양이 많이 나옵니다. 이 분은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소경이 되어 시력을 잃었어요. 비록 시력을 잃기는 했지만 뛰어난 달란트와 재능을 가졌어요. 그런데 앞을 보지 못하니까 무엇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무력해졌고 삶의 회의를 갖게 되는 겁니다. 자신을 자학하는 세월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30세가 되었을 때에 교회에 나오게 되었는데, 어느 날 뉴욕의 어떤 전도 집회에 참석해서 찬송가를 듣게 되었어요.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찬양을 듣다가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겁니다. 이 찬양의 가사가 이 여인의 가슴을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아니 이것이 사실인가?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돌아가셨나? 마음에 깨달아지는 겁니다. 전에는 안 믿어졌는데 이제는 믿어지는 거예요. 전에는 찬송가이니까 불렀는데 이제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드리니까 믿음의 눈이 열리는 거예요. 영적인 눈이 열리는 겁니다.
그 순간 영적인 감동에 젖어서 눈물이 흐르는 겁니다. 과거의 어둠 속에서 예수님을 모르고 지내던 시절을 생각하니까 회개하는 눈물이 나오는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 절을 듣는데, “이 몸밖에 바칠 것 없어 이 몸 드립니다.” 이 가사를 듣는데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맙니다. 그 순간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돌아가셨다면 내가 주님을 위하여 할 수 있는 것이 있지 않겠는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하나님이 자기에게 시상을 주셨어요. 시를 쓸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거예요. 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합니다. 주님이 나를 위하여 생명을 주셨으니 나도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니까 성령께서 지혜를 주셔서 시상이 자꾸 떠오르는 겁니다. 그 뒤로부터 찬송을 작사하기 시작합니다. 그가 처음에 작사했던 것이 531장입니다.
“자비한 주께서 부르시네 부르시네 부르시네
사랑의 햇빛을 왜 버리고 점점 더 멀리가나
지금 오라 지금 오라 자비한 주께로 지금 곧 나아오라”
이 분은 95세까지 살면서 무려 8000곡의 찬송가를 작사합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찬송가에는 많은 곡이 들어 있어요.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예수께로 가면”(565장), 여러분이 좋아하시는 “나의 갈 길 다가도록”(384장), “기도하는 이 시간”(361장) “나의 영원하신 기업”(435장) 그 외에도 많은 찬송가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저마다의 목표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목표가 우리의 삶을 잘못된 방향으로 인도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늘 예수 믿는 사람들은 삶의 목표가 내 의가 되어서도 안 되고, 내 야망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우리 삶의 목적은 예수님의 영광이어야 합니다. 우리 삶의 초점을 예수님께 맞추어야 합니다. 나의 모든 삶을 통하여 예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성령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제부터는 여러분의 삶이 모두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 되도록 믿음으로 첫출발하시기를 바랍니다. 공부를 왜 하게 하셨습니까?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 일을 왜 하십니까?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 돈을 왜 버십니까?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 자녀들을 왜 양육하십니까?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 우리 삶의 모든 목적은 주께 영광,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성령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들에게 하시는 일을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장래 일을 알게 하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 놀라운 축복의 삶을 날마다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령이 오셔서 우리에게 엄청난 일을 하시는 것을 깨닫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실 때마다 순종하며 기쁨으로 나아가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성령님의 사역
요 16:13-14 / 이종윤 목사
지난주에는 성령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 말씀을 배웠습니다. 삼위일체시며 하나님되시는 분이기도 하고, 힘이 아니라 인격을 가지신 분이라고 배웠습니다. 의에 대해, 진리에 대해, 세상에 대해 책망을 하시는 그런 분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은 성령님께서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 배우기를 원합니다.
1. 성경을 믿음으로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
교회에서 성령님이 하시는 특별한 일은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이 세상에 내려오신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그 분이 오셔서 하실려고 준비하신 일은 바로 예수님을 높이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이 충만한 사람은 예수님을 높이게 됩니다. 그렇다면 성령님은 어떻게 예수님을 높이셨을까요?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면 우리는 성경을 믿게 됩니다. 이러한 믿음을 갖게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신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오실 예수님을 말해주며 신약 성경은 오신 예수님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에 대한 기록을 하게 하신 분이 성령님이며 그 분을 믿게 하시는 분도 성령님이신 것입니다.
2. 교회를 사랑하므로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였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머리이고 교회가 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떠나서는 교회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아니고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주라고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성령님이 나로 하여금 예수님이 주라고 고백하게 하신 것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함으로써 천국을 보게 하시고 천국의 지소인 교회를 사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베드로에게 자신을 믿는지 따를 것인지 순종할 것인지를 묻지 아니하고 사랑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렇게 물으신 이유는 바로 사랑하면 믿게 되고 따르게 되며 순종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자신이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하는지 주님이 아신다고 하였고 이때 베드로의 고백은 자신의 의지로 나온 것이 아니라 성령님에 의해 고백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3. 우리 속에서 예수님을 재현하므로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
인간은 예수님을 흉내내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임하시면 예수님의 마음이 터져 나오고 예수님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보혜사라고 하였습니다. 나의 옆에 오셔서 도와주시는 자인 것입니다. 라틴어로는 대변자라고 하였습니다. 즉 나를 돕고 나의 대변자 되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을 입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깎아 내리고 욕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돕고 칭찬해주고 자랑스럽게 여기게 됩니다. 성령님이 오시면 성령님처럼 행동하게 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증거하게 됩니다. 예수님처럼 섬기는 도리를 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지금 오시고 계십니다.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항상 함께 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함으로서 우리는 성경을 믿게 되고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려 하게 되고 교회를 사랑하게 되며 죄인된 몸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나타낼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며 사는 하나님의 복된 자녀 되실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요 16:13-15 / 허태성 목사
1.오늘날 우리들의 삶에는 많은 문제들이 있다. 그 문제들은 다 신앙의 문제와 관련이 있는데 그 신앙의 문제의 핵심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들의 연약함을 아시고 도와주시기 위해서 오셨다. 그런데도 우리는 도움을 받지 않고 우리 힘으로 살려고 하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지 않고 있다. 우리는 오늘 성령의 책망을 다시 들어야 한다. 그리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한다.
2.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게 될까?
1)성령님은 우리의 사고방식을 바꾸어 주신다. 성령은 우리들로 하나님의 사고를 하게 하신다. 인간의 사고는 부정적이며 제한적이다. 예를 들면 구약에서 가나안 땅을 정탐할 때 10명은 인간적 사고로 판단하다가 망하였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의 사고를 하게 되면서 약속의 성취를 보게 되었다. 신중한 것도 필요하지만 그래서 결론을 안하는 쪽으로 가져가는 것이 더 큰 문제일 수도 있다.
2)성령님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을 주신다. 인간의 가장 큰 본분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좋은 인생을 사는 길이다. 왜 사는지에 대한 궁극적인 목적을 제대로 발견하면 나머지 문제는 저절로 해결된다. 오직 성령께서만이 인생의 궁극적 목적을 알게 하고 그것을 위해 살게 하신다.
3)성령님은 우리들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간절히 사모하게 만드신다. 하나님을 알면 인생을 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면 구원을 안다. 호세아 선지자는 말하기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내 백성이 망한다고 했다. 아모스 선지자는 말하기를 하나님을 찾으면 산다고 했다. 성령님은 신자 안에 계시면서 계속해서 하나님에 대한 사모함을 불러 일으키신다.
4)성령님은 언제나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자신의 사랑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죄를 더욱 깊이 깨닫게 만드신다. 성령은 우리를 죄악에 대하여 더욱 민감하게 만드신다. 우리는 너무도 죄를 법, 도덕, 윤리를 위반한 것으로만 국한하여 생각한다. 회개는 흉악한 죄를 지은 사람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성령께서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도 죄라는 것을 지적하신다. 그래서 더욱 회개하게 만들고 더욱 주님과 이웃과 가까워지게 만드신다.
5)성령님은 우리들을 하나님의 성품에 동참하게 만들며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성품이 하나님을 계속 닮아가고 있는지를 확인해 보아야 한다. 갈5장의 성령의 열매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 신앙의 연조가 늘어남에 따라 당연히 열매를 맺어야 한다.
3.어떻게 인도함을 받을 수 있을까?
①성령은 말씀과 함께 일하신다. 말씀을 떠나지 않도록 하자. ②성령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역사하신다. 늘 기도하기를 힘쓰자. ③성령은 순종하는 자와 함께 하신다. 더욱 순종하자. ④성령은 거룩한 영이시다. 즉시 회개하자. ⑤성령은 교통하는 영이시다. 교제를 힘쓰자.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
요 16:13-15 / 지용수 목사
사람을 처음 만날 때, 특별히 한국에서는 “당신 고향이 어디입니까?” 하고 물으면 안 됩니다. 이 작은 땅에서 고향을 물으면 좋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고향은 대한민국입니다. 참 고향은 대한민국도 아닙니다. 우리의 참 고향, 우리가 돌아갈 고향은 다 같은 곳으로 하늘나라입니다. 그리고 나이를, 특별히 여인에게는 나이를 물으면 실례입니다. 물어서 좋지 않은 것은 묻지 않아야 됩니다. 그러나 직업은 물을 수 있습니다.
은행원은 은행에서 일합니다. 선생님은 학교에서 가르칩니다. 의사는 환자를 고칩니다. 학생은 공부하는 것이 직업입니다. 그러니 열심히 공부해야 됩니다. 가정주부의 직장은 가정입니다. 가정은 가정주부의 낮잠 자는 자리가 아닙니다. 가정주부는 가정을 천국처럼 꾸며야 하는 것입니다. 커튼도 새롭게 바꾸고 꽃 한 송이라도 예쁘게 꽂아 놓고, 가정을 가꾸어야 되는 것입니다. 맞벌이 부부는 남편과 아내가 함께 가정을 꾸며야 하지만, 남편은 직장에 나가고 아내는 집에 있다면 아내의 직장은 가정이라는 것을 아내들은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자기의 일이 있어야 됩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 말씀대로 도적의 일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집에 도적이 오는 일이 없기를 축원합니다. 도적이 오면 망합니다. 강도가 오면 망합니다. 귀신이 오면 안 됩니다. 귀신은 이혼하게 하고 부부 싸움하게 하고 가출하게 하고 자살하게 하고 욕하게 하고 미워하게 합니다. 이것이 다 마귀가 하는 일입니다. 여러분이 누구를 미워하고 누군가에게 감정이 좋지 않고 욕을 퍼붓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은 성령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마귀에 의한 것입니다. 마귀는 파괴하게 하고 싸움을 붙이고 이혼시키고 가출하게 하고 자살하게 하고 바르게 살지 못하게 합니다. 마귀가 여러분에게 접근하는 일이 없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성령님의 일은 무엇입니까?
낮에 말씀드린 대로 성령님의 가장 큰 일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시고 천국 백성으로 삼아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성령을 받으면 천국 백성, 천국의 시민권자가 됩니다. 아무리 교회에 오래 다니고 신학 교수가 되고 목사가 되어도 성령을 받지 않으면 천국에 가지 못합니다. 성령을 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이 없으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교회에 처음 나오셨어도 성령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것을 자기가 압니다. 로마서 8장 16절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라는 말씀대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압니다. 할렐루야! 바람을 손으로 잡을 수 없고 눈으로 볼 수 없고 사진으로 찍을 수는 없어도 꽃잎이나 나뭇잎이나 머리카락이 나부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우리 피부가 바람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성령을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어도 우리 영이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 친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우리는 ‘아, 나 같은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구나.’하며 그저 감격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런 기쁨과 감격이 항상 우리 가슴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한 번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하나님께서 끝까지 지켜 주십니다. 낮에 말씀드린 대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는 10년, 20년 거하시다가 떠나가시는 분이 아니라 언제까지나 영원히 우리에게 거하십니다.
출애굽기 13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까지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그들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태풍이 아무리 세게 불어도 구름기둥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구름은 바람 따라 흘러가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구름기둥, 불기둥은 폭풍이 불어도 까딱 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까지 그들을 지켜 줍니다.
우리 성령님은 그 이상입니다. 천국에서도 영원히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땅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땅에 들어갈 때까지만 인도했지만 우리 성령님께서는 영원히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은 구원, 우리가 받은 하나님 자녀의 특권은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대 성령을 꺾고 이것을 파괴할 자가 없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로마서 8장 37절에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21절, 22절에도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를 흔들 자가 없는 것입니다.
제가 유럽에 가기 몇 주 전, 서울의 한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했습니다. 그때 제가 유명한 호텔 14층에 묵었습니다. 하루는 그 방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이상한 느낌이 왔습니다. 그래서 뒤를 돌아보니 세상에! 한 남자가 외줄을 타고 제 방의 창으로 내려오는 것이었습니다. ‘한낮에웬 강도?’ 무서웠습니다. 그러나 강도가 아니라 호텔 벽을 보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책상 위에 호텔 벽을 보수하니 놀라지 말라는 안내문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읽어야 되는데 읽지 않아서 그렇게 놀랐던 것입니다. 밖에서 일하고 있는 분이 계시니 제 일이 잘 되지 않아서 커튼을 쳤습니다. 한 5분 정도 작업을 한 후 그분이 아래층으로 내려갔습니다. 한순간 제 마음이 불안해졌습니다. 그분이 몇 시간 동안 계속해서 외줄을 타고 일을 하시는데, 만일 그분의 원수가 있어서 옥상에 올라가 그 줄을 풀든지 미친 사람이 칼로 그 줄을 자른다면 그분의 생명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분의 생명이 그 밧줄, 외줄 하나에 걸려 있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 인생이 그런 것입니다. 외줄을 타는 그 기술자처럼 우리 모두도 외줄을 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약한지 교통사고가 나도 죽고, 강도의 칼에 찔려도 죽고 병이 와도 죽습니다. 마귀가 우리의 줄을 잘라도 우리는 뚝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어떤 집사님이 울산에 다녀오는 길에 있었던 일이랍니다. 집사님이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는데 한 부인이 팔을 막 흔들며 차를 세우라는 표시를 해서 차를 세웠답니다. 그 부인이 다급한 목소리로 “내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해 저기에 처박혀 있으니 좀 도와주세요.”라고 하더랍니다. 그 부인을 따라가 보니 아주 좋은 벤츠 자동차가 처박혀 있고 그 안에 피투성이가 된 사람이 있더랍니다. 차 문을 억지로 열고 꺼내 그 사람을 집사님의 자동차에 태우고 그 부인이 가자고 하는 병원으로 갔답니다. 병원에 도착하자 그 부인이 지갑을 열어서 손에 잡히는 대로 돈을 집어 집사님에게 주며 고맙다고, 잘 가라고 하더랍니다. 그런데 그 돈이 몇 백만 원이나 되더랍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사고를 당한 사람이 그 병원의 원장이더랍니다. 병원 원장님이 울산에 갔다 오다가 사고를 당해 그렇게 된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모릅니다. 불안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하나님의 생명 줄입니다. 하나님의 영생 줄을 끊을 자가 없습니다. 마귀도 끊을 수 없고 그 누구도 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완전합니다. 우리의 생명이 끝나는 날까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는 그대로 우리는 사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성령 받은 사람은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러나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인간의 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가 마귀가 그 줄을 자를 때 뚝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때 영원히 죽으면 좋은데, 천길 만길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고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을 받은 사람은 얼마나 감사하며 살아야 하는지 모릅니다. 성령님은 참으로 고마운 분이십니다. 할렐루야!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구원하신 다음에도 영원히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의 영생 줄이 되어 주십니다.
그러나 교회에 다녀도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교회에서 악한 짓도 하고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일도 합니다. 그러다 교회를 떠나 중이 되기도 합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사건이 있습니다. 제가 기숙사에서 공부하다가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어서 집에 왔습니다. 집에 도착해서 바로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4km 거리에 있는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때 제가 성경을 하루에 구약 10장, 신약 10장씩 읽을 때라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집에 와서도 성경을 읽고 있는데, 스님 한 분이 저희 집으로 들어와서 염불을 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스님, 우리는 시주하지 않으니 헛수고 마시고 가세요.”
“어르신네, 왜 시주를 안 하십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러자 스님이 “나도 10년간 예수를 믿었습니다. 나도 모세도 알고 아담도 압니다.” 하며 집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제가 뛰어나가서 스님을 붙잡았습니다.
“스님, 이야기 좀 합시다. 정말 교회에 10년간 다녔습니까?”
“그럼요. 열심히 다녔지요.”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스님이 되셨습니까?”
스님이 난처한 얼굴로 “밥 먹고 살다 보니 이렇게 되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이 분명했습니다.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스님은 밥 먹을 걱정하며 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보통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아주 똑똑해 보이고 유능해 보였습니다. 제가 그분에게 말했습니다.
“바른 대로 말씀하세요. 성신이 계신다는 말씀을 들어 보셨나요?”
“들었지요.”
“성신을 받으셨나요?”
“성신을 받았으면 내가 이러고 다니겠소?”
제가 “스님, 성신은 계십니다. 제 가슴에도 계십니다. 지금 여기에서 기도하여 스님도 성신을 받아 구원받읍시다.”하며 망태를 벗겼더니 스님이 망태를 확 낚아챘습니다. 제가 또 망태를 벗기려 하니 “미안하오, 청년. 미안하오.”하며 망태를 꽉 붙잡고 나갔습니다. 제가 “스님, 하나님의 성령은 살아 계십니다. 어서 교회로 돌아오셔서 성신 받으시고 구원받으세요.”라고 소리치니 “알았어요. 청년 미안해요.”라고 하며 도망치듯 갔습니다.
그때 제가 그분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 영혼을 불쌍히 여겨 주세요. 한두 달 교회에 다닌 것이 아니고 일이 년 다닌 것이 아니고 십년 간 교회에 다닌 사람이 어떻게 중이 됩니까? 저 영혼을 불쌍히 여겨 주세요. 그리고 앞으로 제가 목회할 교회에서는 중이 되는 사람이 없게 해 주세요.”
그분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성신을 받았는지, 중으로 그대로 멸망했는지 저는 모릅니다.
아무리 교회에 오래 다녀도 성령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언젠가는 교회를 떠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 받은 사람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교회를 떠나지 않습니다. 믿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할렐루야!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영생 줄로 지켜 주시고 영원히 살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을 받은 사람은 만복을 다 받은 사람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러나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허공을 잡은 사람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다음, 성령께서는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본문에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진리를 자꾸 생각하게 하십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7장 17절에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 합시다.
“하나님 말씀은 진리니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여러분, 성령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꾸 읽고 싶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은 사람은 주간지도 보고 싶고 세상의 잡지도 보고 싶고 음란한 비디오도 보고 싶고 세상의 것이 자꾸 보고 싶지만,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자고 일어나면 신문을 보기 전에 성경을 읽고 싶은 것입니다. 먼저 성경을 읽고 다른 것을 읽지, 성경을 읽기 전에는 다른 것을 읽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진리를 보도록 그렇게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젖을 원하는 것처럼,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면 진리인 말씀을 자꾸 당기게 되는 것입니다. 신비롭습니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자연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태어나면 아기의 탯줄을 자르고 그 자른 탯줄을 두루루 말아 놓으면 그것이 배꼽이 됩니다. 그런데 탯줄은 잘라도 아프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기도 울지 않고 엄마도 울지 않습니다. 참 희한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아기와 엄마가 연결된 탯줄을 자를 때 아파서 엄마도 비명을 지르고 아기도 비명을 지른다면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가 얼마나 부담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탯줄 자른 줄을 아기도 모르고, 엄마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기가 태어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초등학교 3,4학년이 되어서 고추 끝을 자르는 아이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 아이들이 아파서 며칠 동안 펭귄처럼 뒤뚱거립니다. 그런데 태어난 지 팔일 만에 자르면 아프지 않답니다. 살을 자르는데 아프지 않으니 얼마나 신비롭습니까?
그런데 탯줄을 자르고 나서 엄마가 아기에게 젖먹이는 법을 가르칩니까?
“아기야, 세상에 태어난 것을 축하한다. 이제는 엄마가 아무리 많이 먹어도 네게 영양분이 전달되지 않는단다. 그러니 네가 직접 먹어야 해. 그러나 아직 피자는 먹으면 안 돼. 라면도 먹으면 안 되고 젖만 먹어야 된단다. 그런데 젖은 포크로 먹으면 안 되고 입으로 빨아 먹어야 해. 입으로 빨아 먹을 때도 풍선을 불듯이 불면 안 되고 쪽쪽 빨아야 된다. 한 번도 해 보지 않았으니 엄마가 가르쳐 줄게. 엄마 손가락을 젖꼭지라고 생각하고 한 번 빨아 먹어봐라.”
이렇게 가르쳐서 젖을 먹인 엄마가 있습니까? 아기에게 그런 교육을 시킨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아기는 태어나면 젖을 찾습니다. 그리고 젖꼭지를 물려주면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는지 빨아 먹기 챔피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은 아기는 젖을 먹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면 영적으로 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먼저 찾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젖입니다. 할렐루야! 말씀을 먹고 싶어서 자꾸 말씀을 찾고, 성경을 갖고 다니며 어디에 가서도 펴서 읽습니다. 그저 말씀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무엇을 보고 사느냐가 참 중합니다.
일본의 한 청년이 유치원생 여러 명을 잡아다가 토막 살인했습니다. 나중에 그 청년이 잡혔습니다. 청년의 집을 조사하니 그 집에 음란한 비디오와 폭력 비디오가 2300개나 나왔답니다. 매일 음란 비디오나 보고 폭력 영화나 보니 악해져 천사 같은 아이들을 잡아다가 토막 살인을 한 것입니다.
무엇을 보느냐가 얼마나 중한지 모릅니다. 거룩한 것을 보면 거룩한 사람이 됩니다. 음란한 것을 보면 음란한 짓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폭력 행하는 것을 보면 폭력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폭력 비디오를 본 손자는 할아버지도 치게 되는 것입니다. 보고 배운 대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라봄의 법칙은 무섭습니다.
제가 아는 한 부인은 아기를 가졌을 때 남편이 멀리 가 있으니 외로워서 못난이 삼형제 인형을 바라보곤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아기를 낳고 보니 그 아기가 못난이 삼형제를 닮았습니다.
창세기 30장 25절 이하에 보면, 라반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는 야곱 때문에 라반의 집이 크게 일어났습니다. 그러면 라반이 ‘아, 야곱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 집에 복을 주시는구나.’라고 생각하며 야곱에게 월급을 넉넉하게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라반은 품삯을 열 번이나 변경합니다. 그러니 야곱이 ‘계속해서 이 집에 있으면 내 길이 없겠구나.’라고 생각하고 그 집을 떠나려 합니다. 그러자 라반이 “너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 집에 복을 주셨는데, 네가 떠나다니. 너는 우리 집에 있어야 돼.”라고 합니다. 라반은 참 나쁜 사람입니다. 야곱 때문에 자기 집이 잘 되면 그만큼 대가를 치러 주어야 합니다. 우리 나라 어떤 회사의 이사는 수십억 원의 연봉을 받는답니다. 그만큼 회사를 일으키는 유능한 사람이니 많은 연봉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 유능한 사람은 그렇게 좋은 대접을 해주지 않으면 다른 회사에서 데리고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유능한 사람에게는 그만한 대가를 받을 수 있게 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라반은 야곱에게 그만한 대가를 주지 않으니 야곱이 떠나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라반이 야곱에게 말합니다.
“야곱, 네가 떠나면 안 돼. 이제 품삯을 네가 정하는 대로 줄 테니 떠나지 말아라.”
“그러면 이렇게 해 주세요. 앞으로 염소나 양이 아롱지거나 점 있는 새끼를 낳거든 저를 주시고, 점이 없고 아롱지지 않은 좋은 새끼를 낳거든 그것은 외삼촌이 하세요.”
염소나 양이 새끼를 낳으면 열 마리 중에 점이 있거나 아롱진 것은 한두 마리 나오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니 라반이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서 버드나무와 살구나무, 신풍나무를 꺾어다 껍질을 벗겨 무늬를 만든 다음 양과 염소들이 냇가에서 물을 마시며 사랑을 할 때 그 나뭇가지를 그 양과 염소들의 눈에 갖다 댔습니다. 그러니 모든 새끼가 아롱지고 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야곱이 실한 양이나 염소가 새끼를 밸 때는 나뭇가지를 보여주고 비실비실한 양이나 염소가 새끼를 밸 때는 나뭇가지를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비실비실한 새끼들은 주인의 것이 되고 건강한 새끼들은 야곱의 것이 되었습니다.
이브가 선악과를 바라보다가 그것을 따먹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복 있는 것을 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거룩한 것을 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면 진리의 말씀을 자꾸 보게 되니 어떻게 되겠습니까?
로마서 10장 17절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으니라』라는 말씀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니 말씀을 자꾸 보면 믿음이 강해집니다. 또 말씀을 들으며 사니 신명기 28장 1절에서 14절 말씀대로 우리에게 복이 넘치는 줄로 믿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진리의 말씀을 읽으니 거룩해지고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성령께서 이렇게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 다음, 성령께서는 우리를 진리의 기둥과 터인 교회로 인도하십니다.
디모데전서 3장 15절에 보면, 교회, 예배당은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성령 받기 전에는, 교회를 주일에나 한 번 갔다 오면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령 받은 사람은 주일에 한 번 교회에 오는 것으로는 안 됩니다. 주일 낮에 교회에 갔다 왔어도 또 가고 싶고, 또 가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새벽에 나와도 또 나오고 싶고……. 진리의 성령께서 우리를 진리의 기둥인 교회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 받은 사람에게는 자기 집보다 교회가 더 중한 것입니다. 내 일터, 내 사무실보다 교회가 더 중하고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니 자꾸 교회에 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떠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일하고 있어도 마음은 교회에 와 있는 것입니다. 내가 병원에 있어도 마음은 교회에 와 있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어도 마음은 교회에 와 있는 것입니다.
또 교회에 오면 얼마나 좋습니까?
시편 84편 10절에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면, 교회는 좋은 식당입니다. 하늘나라 진수성찬을 먹습니다. 또 교회는 좋은 목욕탕입니다. 우리의 죄를 씻음 받습니다. 또 교회는 노래방입니다. 교회에서 찬양을 합니다. 또 교회는 술집입니다. 교회에서 하늘의 술을 마십니다. 또 교회는 좋은 대학입니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교회에서 공부를 합니다. 그리고 교회에 있으면 즐겁습니다.
시편 16편 11절에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라는 말은 교회에 기쁨이 충만하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쁨을 채워 주신다(you will fill me with joy)는 것입니다.
교회에 오면 우리가 기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에베소서 1장 23절에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축복하시니 성령님께서 우리를 교회로 자꾸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장래의 일을 알려 주기도 하십니다.
사람은 장래 일을 모릅니다.
예레미야애가 1장에 보면, 공주 같은 자가 세를 바치는 자가 되고, 높은 자가 천한 자가 되고, 원수가 형통함은 죄 값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죄가 치마에 있는데 그 결국을 알지 못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저의 더러움이 그 치마에 있으나 결국을 생각지 아니함이여』(예레미야애가 1:9)
삼손이 간음하면 자기 눈이 뽑히는 결국을 알았다면 간음하지 않았습니다. 들릴라의 사랑을 차지하려고 신앙을 벗어났다가 눈이 뽑히고 나서야 가슴을 치지만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아간이 도둑질하면 부자가 될 줄 알았지, 자기 아내와 자식이 돌에 맞아 죽을 줄 알았겠습니까? 그것을 알았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롯의 처가 뒤를 돌아보면 소금 기둥이 될 줄을 몰랐습니다. ‘뒤를 돌아본다고 설마 소금 기둥이 되겠나?’하며 뒤를 돌아보았다가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결국을 모르고 장래 일을 모릅니다.
9.11 테러 때 그 똑똑한 사람들이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났는데, 그들이 30분 앞의 일, 1시간 앞의 일만 알아도 그 빌딩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은 장래 일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장래 일도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좋지 않은 길로 가면 우리 마음을 불안하게 만드셔서 그 길로 가지 않게 하십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꿈으로 알려 주실 때가 많습니다. 운전해 갈 때도 성령님께서 미리 알려 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 번은 봉암다리를 건너고 있는데 ‘얘, 너 왜 그리 속력을 내니? 조금 천천히 가라. 앞차와 안전거리를 유지해야지.’하는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여!’ 하며 브레이크를 밟았습니다. 그 순간 제 앞에 가던 트럭이 빗길에 미끄러져 뱅글뱅글 돌았습니다. 만일 제가 속력을 내어 달렸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명성교회 수양관에서 말씀을 전하고 올 때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터널을 통과하는데 속력을 줄이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속력을 줄였습니다. 그때 맞은편에서 오던 자동차 한 대가 갑자기 앞차를 추월하려고 제 차선 쪽으로 달려왔습니다. 그러다 제 차를 보고는 급히 핸들을 꺾었습니다. 그래서 아슬아슬하게 박지 않았습니다. 그때도 제가 천천히 달려서 괜찮았지, 그렇지 않았으면 큰 사고를 당했을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장래 일을 아시고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6.25 직후 수색대원 세 명이 최전방을 수색하고 부대로 돌아가는 길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세 군인 중 그리스도인인 한 군인이 왔던 길로 가지 말고 다른 길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두 군인이 왔던 길로 가야 안전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군인은 어쩐지 왔던 길로 가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자꾸 들어서 제발 그 길로 가지 말고 다른 길로 가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두 군인은 끝까지 그 길로만 가자고 했습니다. 결국 두 군인은 왔던 길로 가고, 한 군인만 다른 길로 갔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뻥 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왔던 길로 가던 두 군인이 지뢰를 밟아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인 군인만 무사했습니다. 성령께서 그의 마음에 그런 마음을 주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성령님께 늘 예민해 있으면 성령님께서 장래 일을 알려 주십니다. 때로는 꿈으로나 느낌으로도 알려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환난을 당하지 않고 실패하지 않고 승리의 길로 가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인도하십니다.
본문 14절에 말씀하십니다.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딸은 결혼을 하면 변합니다. 부모님을 그렇게 사랑하던 딸이 나중에 남자를 만나서 사귀다가 시집을 가면 부모님 생각을 별로 하지 않습니다. 헷가닥 합니다. 이상합니다. 이십 수년간 부모는 제대로 입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며 입혀 주고 먹여 주며 사랑을 다 바쳐 길러주고 공부시켜 주었는데도 딸은 결혼을 하면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남편과 짝짜꿍이 되어서 부모는 괄호 밖이 됩니다. 아무리 착한 딸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여동생 중 하나가 시집가기 전에는 아버지께도 잘하고 부모님 얼마나 끔찍이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시집을 가더니 변해서 친정에 오면 하나라도 더 가져갈 생각만 하고 맛있는 음식만 보면 자기 남편 생각만 했습니다. 한 번은 제 여동생이 자기 남편이 외국으로 출장을 간 사이에 저희 집을 방문했습니다. 시누이가 왔다고 제 아내가 요리 솜씨를 발휘하여 맛있는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기도를 하고 온 가족이 식사를 하는데 제 동생은 먹지 않고 그냥 앉아 있었습니다. “왜 안 먹니?”하며 쳐다보았더니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했습니다. 그리고는 말했습니다.
“오빠, 맛있는 것 보니 신랑 생각난다.”
여자는 참 묘합니다. 결혼을 하면 어찌 그리 바뀌는지 모르겠습니다.
성령을 받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을 받는 것은 영적인 결혼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으면 영적인 결혼 생활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래서 헷가닥 하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 자기 꿈, 자기 인생의 계획이 없어집니다. 살든지 죽든지 주님 뜻대로 살려고 합니다. 그래서 돈도 주님을 위해 쓰고, 시간도 주님을 위해 쓰고 무엇을 하든 주님을 위해 하게 됩니다. ‘사랑을 하면 누구나 바보가 되지요’하는 유행가 가사처럼 완전히 바보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은 없어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죽게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1장 20절에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야 어떻게 되든 주님께서 높아지기를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리석은 생각입니까?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널뛰기와 같은 것입니다. 널뛰기는 이쪽에서 굴려주면 저쪽에서도 굴려주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 영광 받으세요.’하고 주님을 높여 드리면, 주님께서 ‘너도 귀해져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아닙니다. 주님만 영광을 받으세요.‘라고 하면, 주님께서는 ’너도 귀해져라.‘라고 하십니다.
잠언 4장 8절에 말씀하십니다.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시편 37편 4절에도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할렐루야!
정말 놀라운 것은, 성령을 받으면 나는 ‘주님만 위해 살리라’하는데 그렇게 살고 나면 내가 잘되어 있는 것입니다. 나는 ‘주님만 높이리라’ 하는데 어느 날 내가 높아져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을 따라 살면 후회할 일이 없습니다. 난처한 일이 없습니다. 가슴 칠 일이 없습니다. 안전하고 잘되고 찬송하게 되고 두고두고 좋아할 일, 감사할 일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의 인도를 잘 따르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