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s://naver.me/5JpeV2Ik
https://naver.me/x9BOBL1i
멜랑콜리 미학: 사랑과 죽음 그리고 예술 | 김동규
멜랑콜리 미학
저자 김동규
출판 문학동네
발매 2010.04.27.
그냥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라 곱씹을수록 더 깊은 의미를 깨닫는 문장들이 많아서 읽는 동안 뇌가 조금 아픈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 책이다. 그 고통마저도 즐거운 책이었다.
사랑과 죽음, 삶에 대한 작가의 통찰에 놀라고, 이 통찰을 세련된 문체로 묘사하는 문장들에 놀랐다. 철학책이 이렇게 즐겁게 읽힌 것은 처음인 것 같다.
인간의 존엄성은 오직 인간이 타자를 받아들이며 자기를 파괴하는 자유를 가진다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서양의 사랑담론이 진정한 타자 사랑이 아닌, 자기 사랑에 가깝다고 하는데, 즉 서양의 사랑은 자신의 자유를 해치는 사랑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글루미 선데이'라는 영화의 안드라스와 라즐로처럼. 그들의 자살은 타자, 즉 그들이 사랑한다고 했던 일로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자기 사랑으로 비롯된 서양의 멜랑콜리로 인한 것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사랑이 초라해지는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위와 같은 저자의 통찰에 깊이 공감하는 바이다. 나 역시도 이 책을 읽기 전에는 간섭하지 않고 간섭받지 않는 어쩌면 세련되어 보이는 연애가 멋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진정한 타자 사랑은 사랑하기 이전과 같이 나 자신을 고유히 유지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깊이 사랑할수록, 자기 상실과 새로운 타자 생성으로부터 비롯되는 고통인 멜랑콜리는 당연한 것.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대로라면 비범한 예술가는 자신의 멜랑콜리를 에술작품으로 녹인다. 그 예술작품의 '푼크툼'을 통해 우리는 사랑을 새롭게 감상한다. 철학은 예술이 되고 예술은 철학을 낳고. 그래서 인간은 철학, 예술, 사랑을 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프롤로그
p.15 Q. 철학과 예술은 왜 서로 만날 수 밖에 없는 필연적 운명인가?
A. '사랑과 죽음.'
플라톤에 따르면 예술은 본질적으로 사랑의 결실이고 철학은 죽음의 연습이다.
예술 : 드브레 Regis Debray에 따르면 예술은 "죽음(철학과 연결)"에 직면한 인간의 탁월한 대응방식이다.
철학 : Philosopy : 지혜 Sophia를 "사랑 Philia(예술과 연결)" 하는 행위
⇒ 철학과 예술은 항상 마주보고 있다.
⇒ 하이데거.. 철학과 예술은 일상적인 삶의 밋밋한 평원에 우뚝 솟은 두 봉우리이다. 둘은 인간 존재의 가능성을 최고조로 드높인 영역이다.
<제1부 - 사랑의 면류관>
첫눈에...
p.20 사랑의 만남은 서로 다른 것들의 고통스러운 충돌이고 동시에 황홀한 뒤섞임이다.
이러한 사랑의 시작은 '눈맞춤'에 의해 시작된다. 눈은 '나', '자아'를 나타내는 공간이다. '눈'은 '자기 현시'의 힘을 가지고 있다.
눈에서 발산된 진정한 나의 모습 : 눈물
... 인간은 사랑할 때, 그래서 눈물을 흘릴 수 있을 때 비로소 인간이 된다. 사랑은 눈물의 원천이고 인간성의 원천이다.
눈은 자기의 발기벗은 모습이다
눈을통해 나는 상대에게 알몸으로 나아간다
나의 거짓 없는 모습이 눈을 통해 발산된다
이렇게 눈에서 빌산된 진장한 나의 모습이 눈물이다
눈은 자기 자신이고
그것의 결정체가 눈물이다
눈물까지 기만하는 자는 영원히 가망없는 인간이다
그는 한순간도 자기 자신이 될 수 없는 가면에 불과하다.
▷ 시선의 감촉
p.28 우리가 부모를 비롯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은 어떤식으로든지 먼저 그들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의 시선은 의식하기도 어렵고 굳이 의식할 필요도 없다.
누군가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내가 그를 바라보지 않고도 느낄 때가 있다. 내가 그러한 시선의 감촉을 느낀다는 것은 나의 신경이 그쪽으로 나를 이끌고 있다는 것이고 그것을 이끄는 주체는 사랑이다.
p.29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강도는 타인에 대한 사랑의 강도에 비례한다. 그리고 그 강도는 시선의 감촉으로 느껴진다.
선물
요컨대 사랑의 본질은 베풂이고 베풀어진 것이 선물이며, 선물은 사랑이란 파르마콘(약이면서 독)의 증여를 뜻한다.
거래
거래의 관계에서는 참과 거짓이 중요하지 않다. 거기에서 중요한 것은 거래하는 사람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타협과 균형점이다.
p.70 아무것도 없는 백지 위에서 티끌들이 잘 보이듯이, 조건 없음이 바탕에 깔려야만 어떤 조건들이 환대라는 미명 아래에 붙어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무조건적 환대 없이는, 타자에 대한 관념, 즉 초대받지 않고도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오는 그 혹은 그녀에 대한 관념을 갖지도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조건부 환대만 존재한다면, 조건에 따라 허락된 사람 이외의 타자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랑과 거래, 환대와 관용(선물과 뇌물도 마찬가지다)이라는 두 개의 쌍에서 전자는 현실에서 온전히 실현 불가능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자의 불가피한 조건으로 존재한다.
- 무조건적 사랑은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방향성으로서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작가는 이를 세련되고 세밀한 글로 표현한다. 이것이 철학자의 능력인가.
인간은 원래부터가 거래에 만족할 수 없는 존재다 ``` 거래는 우리에게 행복은 커녕 외로움을 가중시키기 때문이다. ```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타인과 함께하는 거래는 외로움을 가중시킨다. ``` 그것을 번번이 경험하면서도 사람들은 거래의 탁자를 박차고 일어서지 못한다. ``` 사랑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 자꾸만 사랑이 초라해지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해
참다운 이해는 이처럼 '나'를 낮춤으로써 새로운 '나'로 거듭날 수 있는 계기를 뜻한다.
거리, 간격, 차이가 이해의 선행조건 -> 자기이해, 자기와의 거리 조성 필요
타자이해의 선결조건 - 자기이해, 자기 무화되어야 타인이해 가능
p.86 불멸에의 욕망 -> 소멸하는 감각 < 지속가능한 지성 추구하게 됨
p.94 싱그러운 부드러움은 타자와의 접촉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없음을 뜻한다.
자기보호 장치 - 타자와의 소통을 가로막는 장애물
사랑할 수 있는 이가 바로 아름다운 젊은이
101p 칸트에 따르면, 판단력이란 "특수한 것을 보편적인 것 아래에 함유되어 있는 것으로 사고하는 능력이다.
102p 심미적 판단 - 반성적 판단력 (보편자가x, 그것을 추구하는)
110p 아름다움 느낌 -> 알고 싶은 마음 생김, 알게되면 -> 아름다움 느낌
121p '미학' 용어 - 바움가르텐이 처음 사용, "감각적 인식의 학문", 근대 - 감각/육체 중시하기 시작, 이전에는 천시
내기
무지속의 선택 상황 - 인간이 처할 수밖에 없는 근본상황
133p 결국 내기 행위란 미지의 불확실한 그 무엇인가의 관할 영역 속에 인간 자신이 귀속됨을 경험하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닐 것이다.
불멸의 사랑
사랑의 판단은 무지와 지 사이의 판단
플라토닉 러브의 요체 - "불멸하고자 하는 욕망"
욕망은 '풍요와 빈곤' '사이', 결핍으로부터 발생
인간욕망의 방향: 추, 악, 무 -> 미, 선 ,존재
150p 하지만 사랑에 빠진 모든 영혼이 잉태된 아이를 품을 수 있는 자궁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육체의 자궁은 여성의 전유물이라는 점에서, 영혼의 사랑은 기본적으로 여성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랑과 예술의 연결점 - '창조성', '불멸성'
영혼의 사랑 - 예술, 예술작품 - 사랑의 결실
155p 하여 진정한 플라토닉 러브의 요체는 한갓 정신적 사랑이 아닌 다른 곳, 즉 육체와 정신을 아우르는 '불멸을 동경하는 자기 사랑'이라는 점에 있다. 신적인 것에 대한 광기어린 열정을 빙자하지만, 결국 자기 자신의 아름다움에 대한 미친 사랑의 독백이라는 점, 바로 그것이 플라토닉 러브의 요체이다. ``` 사랑에서 사랑의 대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랑 자체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상실
사랑은 둘의 합일이 아니다. 완벽한 합일이란 불가능한 일이며, 설령 합일될 수 있다 하더라도, 합일의 순간 사랑은 사라진다. 더이상 사랑할 대상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제2부 - 죽음의 흔적들>
시체와 유령
시체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여 있는 표지다.
요리- 먹는 행위의 폭력성을 은폐하기 위해 발명해낸 문명의 산물
먹이살생부
결국 무엇인가를 소유하고자 하는 것은 지금보다 더 커지려는 욕망이고 자기를 확장하려는 욕망
삶은 희생을 요구
187p 소유란 어쩌면 무와의 싸움이다. 그것은 뒤틀리고 가망없는 싸움이고 오만하고 어리석은 싸움이다. 이 싸움에서 얻을 수 있는 전리품이라고는 죽음을 재촉하는 '비만'뿐이다.
이방인
타자화 이면 - 불멸에 대한 욕망, 죽음만큼 낯선 이방인 박멸
211p 스스로가 이방인인 사람은 이방인을 괴물이나 악마로 둔갑시키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가 서로 다른 존재라는 점에서 이방인)
선택
선택의 자유를 선고받음
225p 칸트는 그것이 당위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말했다. 때문에 자유롭기 위해서 처음에는 자연적인 성향을 거스르며 자유에 집착하는 과정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226p 자유로워야 한다. 기막힌 역설이다. 자유와 당위가 공존하는 역설이다.
226p 자유가 당위라는 말의 궁극적인 의미는 자유로워야 할 이유와 근거를 더이상 밝힐 수 '없다'는 점에 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목표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자유를 추구하는 과정 자체이다. **
자유는 그저 주어지는 것x, 얽매고 있는 것과의 투쟁
228p 인간이 살아 있는 한 결국 모든 욕망을 제거한다거나 욕망으로부터 완전히 떠날 수 없다. 그렇지만 하나의 욕망체계에서 벗어날 수는 있다. 벗어난다 하더라도 또다른 욕망의 체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지만, 어쨌든 지금과는 전혀 다른 욕망 시스템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 그러나 그것을 통해 인간은 존재의 진리에 한층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다. 보다 "객관적인" 세계에 다가설 수 있다. 보다 풍부하게 욕망할 수 있고 느낄 수 있다. ``` 결국 '욕망으로부터으 자유'란 특정 욕망으로부터의 자유, 정확히 말해서 '욕망체계들 '사이'에서 유랑할 수 있는 자유를 뜻한다. 자기에게 주어진 틀을 파괴하는 자유, 거기에 인간 자유의 본질이 있다. ``` 자유로 향한 끊임없는 선택의 길 위를 걷는 인간, 그에게는 그 길 자체가 자유다. **
존엄성
인간은 왜 존엄? 자유로워서
하이데거 :"죽음을 향한 자유"
238 p 자신의 목숨을 끊는 자살이란 의미가 아니라, '죽을 수 있는 자유'란 타자적 존재를 드러낼 수 있는 여지 마련을 위한 자기 파괴의 자유다. 이런 자유, 즉 타자적 존재가 창조적으로 등장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하는 자유가 인간의 존엄성의 근거다. **
숭고
오직 개별자이면서도 동시에 세계를 총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정신, 자유로운 정신, 어떤 자연적 경향성에 굴복하지 않는 우리 내면의 실천이성만이 이 표상(숭고의 표상)에 어울리는 것이다. 248p
남성적 자유
자유를 해치지 않는다는 조건하의 사랑만 허용
서양식 자유론에 바탕을 둔 인간의 존엄성이 자살의 구실이 되는 이유 - 사랑의 부재
검은 담즙
자기애적 사랑이 멜랑콜리를 낫는다
멜랑콜리의 주요 특징 : 1. 원인 불분명, 2. 묘사 어려움, 3. 불안, 4. 극적 반전, 급격한 전환, 5. 자기상실감, 6. 강한 자의식
자살
'보는 나'와 '보이는 나'사이에서 계속 변화하는 가능성을 제거하는 것 - 살인
자살은 생각이 몸을 살해하는 행위다. 280p
인간은 전적으로 필연의 법칙에 종속된 존재가 아니라 자유로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p.283
p284 마지막으로 죽음은 삶과 사랑 또는 윤리와 한패이지만, '죽임'은 그것들의 반역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기로 하자.
애도
상실의 슬픔은 오직 슬퍼함을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
슬픔을 슬픔으로 이겨내는 애도작업의 제도적 장치
제사는 근본적으로 죽음을 만나는 사랑의 애도의식
<제3부 - 멜랑콜리의 노래>
노래
노래, 곧 예술은 사랑에서 유래한다. 사랑하는 이를 부르고 그를 위해 불러주는 것이 노래의 근원이다. 그러나 지상의 사랑은 결국 이별을 만나고 죽음을 만난다. 사랑의 내부에는 이미 이별이, 죽음이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진솔한 사랑의 노래는 구슬플 수밖에 없고, 멜랑콜리할 수밖에 없다. 그 구슬픈 가락을 통해 노래는 사랑과 죽음을, 그리고 양자의 친근성을 들려주고 있다. 때문에 사랑에서 태어난 노래는 동시에 죽음을 부른다. 사랑을 위한 노래는 치명적인 파멸의 전주다. 뱃사공을 홀리는 세이렌의 노래처럼, 로렐라이의 노래처럼.
이미지
p305 존재하는 것들을 현상하게 하는 것, 그래서 보이게 하는 것이 이미지의 본질이다.
p308 이미지는 일종의 그림인데, 근본적으로 그림은 그리움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미지는 그리움이 그려낸 그림이다. ``` 결국 이미지는 사랑과 이별이 주조해낸 연인의 그림자다
진트플루트
p315 사랑은 단순한 욕망이 아니다 ``` (고착된) 자기를 버리는 사랑과 끝끝내 버릴 수 없는 욕망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일 수밖에 없다.
p314 오늘날의 이미지는 욕망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그런 욕망을 부단히 재생산하는 구조에서 탄생한다. ex) 광고 이미지
하이데거 - 서양의 역사를 이미지 제작 욕구의 역사로 이해
p319 현대 도시의 이미지 - 눈이x. 외롭게 한다. 진정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를 보아 주고 우리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이미지, 사랑과 이별 그리고 죽음에서 유래한 이미지 = 예술적 이미지
사진
시선(카메라 렌즈)의 객체(피사체)로 등장하는 나의 모습은 나도, 그렇다고 남도 아닌, 또는 있지도 그렇다고 없지도 않은 묘한 존재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그런 존재를 "유령"같은 존재라고 말해왔다. 사진 속의 나는 죽음을 통과하고 죽음의 흔적이 남아 있는 유령으로 현상한다. p330
p331 "영혼의 창"인 눈을 통해 일로나의 영혼은 안드라스를 향해 갔고, 그 뒤에 영혼 없는 육체, 즉 일로나의 시체인 사진에 남아있다.
아우라
p338 인생이 사랑하다 죽는 것인 한, 아우라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p338 이렇듯 살ㅇ과 죽음은 인간의 유일무이성과 본래성을 확인해준다. 인간의 유일무이성과 본래성은 벤야민이 고전적인 예술작품에서 발견한 아우라의 원천, 즉 일회성, 원본성, 진품성에 해당하는 것이다.
푼크툼
"화살처럼" 사진에서 떠나와 나를 관총할 수 있는 뾰족한 부분. 사진을 보는 사람에게 깊은 상처와 흔적을 남긴다.
바르트와 푼크툼 - 스투디움을 분산, 파괴하면서 발생/ 스투디움 - 사진 속에서 우리가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문화적, 교양적, 윤리적, 정치적, 교육적 지식
저자가 생각하는 영화의 푼크툼 - 일로나의 작은 어깨
서양예술의 멜랑꼴리
프로이트 : 슬픔과 멜랑콜리 - 공동기반: '사랑'과 사랑대상의 '상실'
슬픔 - 애도작업이 성공한 경우, 즉 상실을 긍정한 경우 / 멜랑콜리 - 애도작업에 실패한 경우
나르시시즘 => '~중심주의'
서양문명 - 자기애적 요소 많음
p357 미지근한 사랑이 아니라, 광적인 사랑에서 멜랑콜리는 탄생한다. ``` 모든 사랑이 거리를, 부재를, 차이를, 이별을, 결국 죽음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멜랑콜리는 죽음에서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다.
사랑을 통해 미래의 타자를 생성. 미래의 타자에게 자신의 피와 양분을 공급하면서 얻게 되는 고통, 흥분, 일렁임, 고독, 우울이 멜랑콜리 -> 타자 사랑에서 비롯.
서양의 멜랑콜리는 자기사랑에서 비롯
기억과 망각
p375 모든 것의 '정체성'은 '기억'하고 있는 동안에만 '존재'할 수 있다.
p381 감상이 주체험이고 재창작이라 할 수 있다면, 감상은 예술작품의 기억 내용을 재-기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83 기억과 망각은 우리 관할 영역 내부에 있지만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는 특별 자치구와 유사하다. 왜냐하면 그곳은 우리 안의 타자가 심어놓은, 반쯤은 타자의 의식민지이기 때문이다.
천재
아리스토텔레스 : 모든 비범한 예술가는 멜랑콜리커
- 그렇다면 예술가는 진정한 타자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인가?
비극
자신에 대한 무지가 인간을 배우로 만든다. 393 **
이별 후 얼마나 큰 상처와 빈자리를 남기느냐가 가장 분명한 사랑 크기 측정법이다.
p415 존재는 예술이다. ``` 이 말의 의미는 존재와 예술이 모두 무와 유의 상호교체, 창조, 소멸, 생성 등의 현상과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있는 것들의 있음은 인간의 경탄의 진원지이고, 그것을 퓌시스 또는 테크네라 불렀던 것이다. 예술은 이처럼 존재에의 경탄을 불러일으키는 것에 대한 이름에 다름아니다.
p417 하이데거에게 예술은 우리 삶에 좀더 가까이에 있는 소중한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 주위의 모든 것이 예술이라는 말은 아니다. ``` 근본적으로 예술은 '탁월하고 경이롭게 있음'을 찬미하는 막이다. ``` 다시 말해서 예술이란 낯익은 일상의 삶에서 낯섬의 충격을 경험케 하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예술은 낯선 타자와의 사랑의 만남, 그리고 타자와의 이별의 경험(죽음)을 고스란히 간직하여 어떤 새로운 것을 창작하는 일을 뜻한다. 그리고 철학은 그런 예술을 사유하고 기억하며 새로운 예술을 준비하는 활동이다. 이런 점에서 예술과 철학은 존재에 응대하는 인간 고유의 본성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미래의 멜랑콜리
자기의 바깥을 지향하는 사랑론과 죽음론
타자로 수렴되는 사랑의 멜랑콜리
https://naver.me/F0wAM5Lf
김동규 “멜랑콜리는 서양문화의 기본”
『멜랑콜리아』 김동규
사람들이 사랑의 반대를 증오가 아닌 무관심이라고 하는데, 사랑과 증오는 어쩌면 같이 가는 것 아닐까
지난 2월 10일, 서울 동교동의 출판문화공간 엑스플렉스에서 ‘삶, 그리고 우리 곁의 인문학’이라는 제목의 ‘2015 문학동네 봄방학 특강’의 두 번째 시간이 마련됐다. 『멜랑콜리아』의 김동규 저자가 강연자로 나서 ‘서양문화의 근원적 파토스’로서 멜랑콜리아에 대해 독자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저자에 의하면, 우울이나 애환 등으로 해석되는 멜랑콜리(melancholy)는 고대 그리스어이자 라틴어인 멜랑콜리아에서 나온 것으로, 이 단어 하나가 서양문화를 읽는 중요한 열쇠말이다.
멜랑콜리한 사람의 특징
멜랑콜리의 어원을 보면 ‘검은 담즙’(‘melas’(검은) ‘chole’(담즙))이라는 뜻이다. 이는 고대 그리스의 의학 용어로서 히포크라테스가 살았을 당시 인간의 몸은 혈액(공기), 점액(물), 노란 담즙(불), 검은 담즙(흙) 등 4가지 체액(4체액설)으로 이뤄져 있고 이들이 균형을 이룰 때 건강하다는 학설이 있었다. 만약 어느 하나의 체액이 많으면 특정한 체질이 형성되고 특정한 기분상태가 나타난다고 보았다. 4체액 가운데 검은 담즙에 의해 특정한 체질, 기분상태를 나타내는 말이 멜랑콜리아였다. 그것이 이후 우울한 기분 상태를 뜻하는 말이 된 것.
“4체액설은 의학용어로만 쓰이지 않고 다양한 담론과 결합해 매우 특이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4체액설은 의학적으로는 폐기된 이론이나, 서양의 민간에서 많은 사람들이 4체액설을 알고 있다. 우리나라에선 혈액형으로 성격을 분류하는데, 서양은 4체액설에 의거해 성격 분류를 하기도 한다. 4체액설은 자연철학과 만나 공기, 불, 땅, 물 4가지 원소로 이뤄져 있다. 인간의 성질로 들어가면 따뜻, 축축따뜻, 냉건조, 냉축축, 맛은 달콤, 쓴, 매운(신), 짠맛, 색깔로 보면 붉은색, 노란색, 검은색, 흰색이다. 기분은 쾌활, 대담, 반항, 비활동적이다. 서양에서는 4체액설이 연금술, 점성술, 문화, 예술 등과 연결돼 모든 것을 4체액설로 설명하기도 한다.”
멜랑콜리의 기질을 많이 가진 사람을 ‘멜랑콜리커(Melancholiker)’라고 한다. 우울과 슬픔을 자주 느끼고 민감한 사람인데, 멜랑콜리커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고 저자는 설명했다.
1. 이유 없는 슬픔 : 멜랑콜리를 일으킨 대상 또는 원인은 불분명
“의학자나 정신분석학자들도 이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는데, 프로이트에 의하면 무의식에 갇혀 있고, 무의식속에 억압돼 이유 없는 슬픔을 가진다.”
2. 부끄럼 없는 자기 비난 : 양가감정, 동일화
“가학적으로 자신을 학대하면 멜랑콜리커라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부끄럼 없는’이라는 수식어다. 멜랑콜리커는 남을 욕하듯 자신을 욕한다. ‘남을 욕하듯’은 프로이트가 멜랑콜리커를 분석한 지점이다.”
3. 검질긴 불안, 권태, 고독 : 죽음 의식
“죽음을 자주 떠올린다. 불안과 죽음은 긴밀한데, 많은 경우 미래에 대한 불안이 주를 이룬다. 파국적인 사건이 임박했다는 느낌을 가질 때 그렇다. 멜랑콜리커의 계절은 가을이다. 아주 추운 겨울에는 불안하지 않고 그 전에 불안해한다.”
4. 극적 반전 : 조울, 천재와 광기
“울증은 조증과 결합되기 마련이다. 조는 통제하지 못할 만큼 기분이 상승하는 상태로 미친 조(躁)자를 쓴다. 울(鬱)증은 반대지. 극단의 감정을 오락가락하는 경우가 많다. 재밌게도 서양의 멜랑콜리 담론사를 보면 사람들이 멜랑콜리를 바라보는 시선도 극과 극이다. 멜랑콜리가 천재나 위대한 사람, 영웅의 전조였을 때도 있었고, 어떨 때는 광인으로 취급했던 시기도 있었다. 그렇게 멜랑콜리아를 상반되게 평하기도 했다.”
5. 상실감, 총체적인 무력감, 종국에는 자기 상실
멜랑콜리는 어디에서 오는가
저자는 멜랑콜리의 원천과 관련, 프로이트의 의견을 기본으로 재구성했다. 그는 사랑의 상실을 멜랑콜리의 원천에 놓았다. 프로이트는 정상적인 슬픔과 병적인 멜랑콜리를 비교했는데, 둘의 가장 중요한 공통점으로 넓은 의미의 사랑의 상실로 봤다. 둘을 갈라놓는 것은 애도 작업의 성공 여부다. 성공하면 정상적인 슬픔, 실패하면 멜랑콜리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 프로이트의 생각이다.
저자는 멜랑콜리의 과정은 ‘상실→슬픔→애도 작업 실패’로 이뤄진다고 설명했다. 스스로 의학자라고 생각했던 프로이트는 사랑을 건조하게 설명했다. 이에 애도 작업은 한쪽으로 향해 있던 리비도를 자기에게 향하게 하거나 끊어내는 작업이다. 만약 애도가 실패할 경우, ‘애착 증폭→집착→자기집착’으로 가거나 상실된 대상에 대한 연민에서 자기 연민으로 빠지기도 한다.
“프로이트를 공부하면서 놀란 것은 고대로부터 멜랑콜리에 대한 이야기가 끊이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젝 등도 지금 멜랑콜리를 말한다. 역사 속에 멜랑콜리 담론이 격변하는 때가 있는데 프로이트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부끄럼 없는 자기 비난’을 기억해두라. 프로이트는 사랑하는 대상을 상실했을 때, 그 대상에게 투여되던 성적인 에너지를 끊어내는 것이 애도 작업의 핵심이라고 봤다. 그러나 그게 쉽지 않다.”
대개의 사람은 눈물 등을 통해 에너지를 쏟아낸다. 그것이 애도작업이다. 그러나 멜랑콜리커는 그것에 실패하고 정을 떨어뜨리지 못한다. 대신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으로 그 대상을 데리고 온다. 자기 마음속이다. 즉 자신과 대상을 동일화한다. 따라서 양가감정은 애증이 병행하는 감정이다.
“사람들이 사랑의 반대를 증오가 아닌 무관심이라고 하는데, 사랑과 증오는 어쩌면 같이 가는 것 아닐까. 어떤 면에서 사랑은 상당히 위험하다. 회화를 보면 근대 이후 사랑하는 연인들을 그릴 때 환희에 찬 모습으로 그렸고, 지금도 그렇다. 그전에는 달랐다. 사랑하는 연인들의 그림은 깊은 절망, 슬픔 등 멜랑콜리에 빠진 모습이다. 소크라테스는 사랑의 폐해에 대해 얘기했었는데, 사랑은 타자가 내게 들어와 병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바이러스가 면역체계를 뚫고 몸에 침투하는 것과 비슷하다. 사랑의 열병이라는 표현이 단순한 상징은 아니다. 사랑은 그렇게 나를 무너뜨릴 수 있으므로 증오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기미를 애써 감추다가 사랑의 대상을 상실했을 때 기미가 튀어나온다. 헤어지고서 사랑했던 대상을 욕하는 것은 애도의 일환이기도 하다.”
멜랑콜리의 향기
저자는 이 책에서 멜랑콜리라고 한 것은 크게 네 가지 의미가 있는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첫 번째는 몸의 향기. ‘우울증’이라고 변역해도 손색이 없다. 몸으로 상징되는 타자성에 대한 억압이다.
두 번째 의미는 사랑의 향기. 보편적인 차원의 멜랑콜리로 동서양 차이가 없다. 멜랑콜리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말 2개는 사랑과 죽음이다. 인간은 누구나 사랑하다 죽기 때문에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정조가 멜랑콜리다.
세 번째는 인문학적인 향기. 서양 인문학에서 멜랑콜리 담론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크다. 특히 인문학적 상상력과 창조성의 원천으로 멜랑콜리를 말한다.
네 번째는 서양문화의 향기. 앞의 세 개는 서양인들이 연구한 것으로 그들은 멜랑콜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저자는 다르게 본다. 서양문화의 기본 정조이자 서양문화의 특징을 폭로해주는 지점이 멜랑콜리다.
저자는 네 번째 멜랑콜리의 의미와 연계해 서양문화의 기본 얼개를 다음의 세 가지로 본다.
1. 자기의 존재론 : 자기-중심적 세계관
2. 동일성의 논리 : 저기 정당화의 논리
3. 나르시시즘
저자는 동서양의 ‘생각하는 사람’의 조각상을 비교했다. 금동반가사유상과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다. 전자를 놓고 아무도 우울을 떠올리지 않으나 후자를 보면 멜랑콜리의 분위기가 난다.
“로댕이 단테의 『신곡』을 강렬하게 읽고는 ‘생각하는 사람’을 조각했다. 그래서 작품의 원래 제목은 단테를 지칭하는 ‘시인’이었는데, 나중에 ‘생각하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자아의 사유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멜랑콜리커란 자기애에 사로잡힌 사람이다. 신화에서 나르키소스가 직접적인 자기애자라면 자신이 창작한 대상을 사랑하는 피그말리온은 간접적인 자기애자다. 나르키소스는 연못을 떠나지 못해 결국 굶어죽으나 피그말리온은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그런데 피그말리온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저자는 피그말리온의 후일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했다. 피그말리온의 딸 파포스가 태어나고, 파포스에게서 키니라스가, 키니라스에게서 미르라가 태어났다. 즉 미르라는 피그말리온의 증손녀인데, 문제는 미르라가 남자를 혐오하는데 유독 자기 아버지만 사랑했다. 아버지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미르라는 좌절하고 목매달아 죽으려고 하는데 이를 유모가 발견하고 이유를 묻고는 살아서 가지라고 말한다. 유모가 키니라스를 상대로 계략을 꾸미나 키니라스는 딸과 잠을 잤다는 것을 알고는 울면서 떠났다. 신은 미르라를 나무로 변하게 했고 임신을 한 미르라가 낳은 아이가 아도니스였다. 그리스신화 최고의 미남자이자 여성 혐오자인 아도니스는 나르키소스처럼 사냥만 하러 다니다가 멧돼지에 치여 죽는다. 피그말리온도 결국 직접적인 자기애의 이야기로 돌고 돌아온 셈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과 정치, 시 또는 예술 방면의 비범한 사람들이 왜 모두 명백히 멜랑콜리커 였는지를 물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이었다. 고대에서는 상식이었고 지금도 많은 서양인들이 그렇게 믿는다. 중세에는 멜랑콜리가 ‘아케디아(acedia)’라는 말로 바뀐다.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는 상태로 무의미와 권태, 무각각과 나태에 깊이 빠진 상태를 뜻한다.”
저자는 르네상스로 넘어가 멜랑콜리가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말했다. 천사가 턱을 괴고 있는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을 보여줬다. 그림에는 멜랑콜리 포즈를 취한 천사에 멜랑콜리에 대한 모든 소품이 있다. 도나토 브라만테, 살바토레 로사 등의 그림에서 자신을 단순한 장인이 아니라 기하학자라고 생각했던 르네상스 예술인들의 멜랑콜리가 드러났다. 근대와 현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뭉크나 호퍼 등도 멜랑콜리를 잘 드러낸 화가로 알려져 있다.
저자는 서양철학은 단일한 멜랑콜리 체질을 갖고 있으며 그 체질의 네 가지 역사적 양상을 가리키는 것이 4체론이라고 말했다. 서양철학사의 4체론과도 맥이 닿는다. 이 네 가지를 이해하면 서양철학사를 핵심적으로 요약할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1. 실체(고대) : 이것은 무엇일까?
2. 일체(중세) : 이 전체는 무엇인가?
3. 주체(근대) : 묻는 나는 누구인가?
4. 매체(현대) : 나를 부리는 것은 무엇인가?
Q&A
멜랑콜리아가 서양의 정서인데, 그들은 왜 멜랑콜리아를 잘 모를까?
내가 멜랑콜리를 공부하기 시작한 것이 2003년이었다. 공부를 하다 보니 재미있는 것이 무척 많아서 확실하게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해서 독일로 갔다. 1년 남짓 독일에서 생활하면서 예술가와 철학자를 많이 만났는데, 한국에 철학이 있느냐고 묻더라. 그들은 동양철학은 처세술이지 철학이 아니라는 입장을 보이더라. 예술가들은 그나마 나은데, 철학자들이 그런 얘기를 해서 싸우기도 했었는데, 사실 한국의 철학은 무엇이라고 확실하게 얘기를 못했다. 이들은 자기중심적인 세계관이 뼛속 깊이 체질화돼 있고, 멜랑콜리에 대해 많은 사람이 얘기하는데도 서양문화의 특수한 점이라고 말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 놀라웠다. 니체 이후 서양 현대 철학의 특징은 자기비판이다. 세계대전을 겪으며 문명에 큰 문제가 있다며 전통 철학을 비판한다. 들뢰즈, 데리다 등이 자기 전통을 비판하면서 자기 학대를 한 거지. 부끄럼 없는 자기 비난인데, 현대 서양철학자들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멜랑콜리는 모른다. 멜랑콜리와 연결해서 자기반성은 못한다. 내가 서양에서 찾은 유일하게 멜랑콜리를 연구한 철학자는 크리스테바이다. 그가 동유럽인 루마니아 태생이라서 그런 지도 모르겠다.
동양에서는 멜랑콜리를 드러낼 수 있는 개념이 없다면 혹시 종교적인 것과 연관이 있는 건 아닐까? 서양에서는 에덴동산에서 타자에게 쫓겨난 원형의 상실로 자기 자신에게 주목하고 상실감과 외로움을 느끼면서 자기 구원을 찾아야 했기에 멜랑콜리로 연결된 것이 아닐까?
핵심을 보셨다. 멜랑콜리를 이룬 여러 문화가 있다. 서양을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두 축으로 말하는데 멜랑콜리는 양 축 모두에 뿌리를 두고 있다. 헤브라이즘에서는 멜랑콜리를 부정적으로 봤지만 그것의 존재감이 크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서양인에게는 신과 절대자가 있는데, 인간은 절대자를 향하고자 하지만 미치지 못한다. 동경하지만 다다를 수 없는, 불가능한 그 대상을 끊임없이 추구한다. 낭만주의 시대에는 기독교적 감수성과 고대그리스 철학의 마인드, 이성이 결합해 그런 이야기를 많이 했다. 철학자 크리스테바도 재밌는 얘기를 했는데, 서양인들은 신을 명명하고 이름을 붙이려는 아주 무모한 도박을 한다고 했다. 이건 불가능한 일이잖나. 서양의 사조에 의하면 우리는 피조물인데, 창조주의 이름을 명명하려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이것이 다채로운 담론을 만들어냈다는 것이 크리스테바의 생각이다. 무모한 생각을 함으로써 다양한 담론을 만들어냈다. 절대적인 무엇이 부족하고 결핍된 인간은 도달할 수 없는 것에 도달하고 설명하려는 시도 속에서 다양한 서사를 만들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