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閔妃暗殺>(23)-2
아다치는 신문사로 돌아왔다. 오후 10시경부터, 일동은 뿔뿔이 흩어져서 회사 문을 나갔으며, 남쪽으로 4km쯤 되는 용산으로 갔다. 인천에서 오는 쿠스기(楠瀨) 중좌와 오카모토 유우노스케(岡本 柳之助)와 합류하여 공덕리의 아소정으로 대원군을 모시려 가기 위해서이다. 그 밖에, 무라사키 시로(紫 四郞)의 숙소인 파성관(巴城館)에도 10여명이 모여 있었다. 이 조의 몇 사람은 쿠니토모 시게아키(國友重章)를 대장으로 하여 왕궁으로 직행하며, 광화문 부근을 정찰하는 사전 준비였다.
이날 밤, 음력 20일 달빛이 밝고, 하늘은 물처럼 맑았다고 한다. 양복에 집신을 신고, 어깨에서 대각선으로 일본도를 멘 코바야카와와 나란히 걷는 히라야마가 「한수 생겼다」는 화가(和歌/역자 주:일본 고유형식의 시)를 들려줬다. 코바야카와도 또한 애써 지은 명구 한 수를 정리하여 히라야마에게 보이고, 서로 파트너의 노래를 기억해 두자고 몇 번이나 되풀이 읊조렸다. “사세(辭世)의 시가”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코바야카와의 수기에는 「마치 소설 중의 인물과 같은 기분」, 「무대 위에 있는 듯한 상상」 같은 것이라고 몇 번이나 쓰여 있으나, 흥분된 마음으로 “자기 자신”은 이미 “평소의 자기”가 아니라, 각광을 받는 모습으로 하늘에 떠 있는 듯 하였다.
후에 코바야카와는 민비 암살 결행 이유를 다음과 같이 썼다.
「조선과 러시아의 관계를 이대로 방치해 둔다면, 일본의 세력은 완전히 반도의 천지에서 배척되어, 조선의 운명은 러시아가 잡게 되고.... 이것은 단순히 반도의 위기에 그치지 않고, 실로 동양의 위기이며, 또 일본제국의 일대 위기라고 하지 않을 수 덦다, 이 형세의 변동을 눈앞에 보는 자는, 어찌 분연하여 궐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코바야가와 히데오(小早川 秀雄)와 쿠니토모 시게아키(國友 重章)는 이 해 초의 『한성신보』 창간에 즈음하여, 아다치 겐소(安達 謙藏)에게 설득 되어 신문편집 중심에 앉은 청년들이다. 코바야카와는 사범학교 출신으로, 그때까지는 쿠마모토현(熊本縣)의 한 초등학교 교단에 서 있었다.
코바야카와는 「일본의 온건한 대 조선 외교로서는. 도저히 러시아에 대항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렇다면, 이에 대처하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 단지 비상한 수단을 써서 러시아와 조선의 관계를 단절하고, 러시아가 의지하는 것을 없애는 것 밖에는 달리 길은 없는 것이다. (중략) 다시 말하면, 궁중의 중심이고, 대표자인 민후(閔后)를 제거하여 러시아와 결탁하는 당사자를 없앨 수밖에 좋은 계책은 없다. 만일 민후를 궁중에서 제거할 수 있다면, 러시아 공사 베벨이라도, 또다시 누구에 의하여 조선의 상하를 조종할 수 있을까」
이것은 코바야카와가 쓴 수기의 일부이지만, 다른 사람들도 같은 생각이었다는 것을 재판기록 같은 것으로 알 수 있다. 또 사건 후 미우라의 수기같은 대서도, 거의 다르지 않다.
이와 같이 전원이 「민비 암살은, 일본의 장래에 크게 공헌하는 쾌거」라고 믿고, 한 점의 의혹도 품지 않았다. <역효과가 일어나지는 않을까. 일본을 궁지로 몰아넣는 결과가 되지는 않을까> 하고 괴로워하거나, 망설이는 사람은 없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은 살인은 형법상의 중대범죄이며, 특히 이웃나라의 왕비 암살은 국제범죄라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일본제국을 위하여”라면, 감히 하지 않으면 안 될 행위라고 망설임 없이 마음을 정한 것이다. “나라를 위해서”라면 무엇을 해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그 일을 하는 것이 참된 용기라는 착각 속에서, 살인행위는 쾌거가 되고, 미거(美擧)로 바뀌었다.
그들은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어떤 각오를 가지고 있었던가. 이것도 코바야카와의 수기에 의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공사의 쾌거를 도와 일어설 결심을 했다. 이 계획은 본시 공사 한 사람의 독단에 의한 것으로, 정부의 훈령을 받거나, 혹은 묵인된 허락을 받은 것이 아니다. 완전히 그 책임을 한 몸에 지고, 비상한 결심으로 비상안 일을 하려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코바야카와는, 민비 암살계획이 일본 정부와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이 사건은 본시 평범한 수단은 아니다. 그 결과, 밖으로는 국제간의 큰 문제를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고, 안으로는 이토 후(伊藤 侯/역자 주:후작의 준말)」를 총리재신으로 하고, 사이온지 후(西園寺 侯)를 외무대신으로 하여 외교에 유연(柔軟)하다는 비난을 받고 있는 내각이, 과연 미우라 공사의 방침을 승인하고 그것을 관철할 수 있을까 없을까. (중략)
사정(私情)으로 생각하면, 비상수단의 단행은, 확실히 형법상의 중대한 사건이기 때문에 우리 정부가 만일의 경우 이것을 엄중하게 처분하려고 하면, 나는 한 몸을 희생하여 후회 없는 각오를 해야 한다. 특히 열국의 경고라든지 항의가 있는 경우에는, 유약한 우리 정부가 우리들의 우국충정을 이해하고, 관대한 수단을 취할 수 있을지는 커다란 의문이다. (중략)
만약에 정부가 우리들의 우국지성을 양해하지 않고, 이것을 법에 따라 처분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민후를 제거하는 목적만 달성한다면, 일본의 대 조선관계에 전기를 가져올 것이며, 새로운 경지를 열어 전도에 광명을 기대할 수가 있다. 우리가 지닌 보국의 뜻은, 이미 그 일단을 달성하고, 시국에 공헌한 것이 아닌가. 과연 그렇다면, 우리들은 기꺼이 일신을 희생하자. 법에 저촉되는지 어떤지는, 이미 물을 것도 없다. 성패여하는, 당국자의 사후처분에 맡길 뿐이다. 실로 우리들 동지들의 당연한 괴로운 마음이었다.」
기꺼이 한 몸을 희생한다고 쓰여 있으나, 엄숙한 자문자답 끝에, 어떤 처벌을 받아도 좋다고 각오한 것은 아니다. 「우리 정부가 만일의 경우 엄중한 처분」이라는 문장의 “만일의 경우”에 그들의 응석이 보이고 있다. 일본정부는 “우리들의 우국충정”을 이어받아 높이 평가하여, 관대하게 다루어 줄 것--- 이라는 것이 그들의 “각오”의 전제였다고 생각한다. 이 예측의 응석이, 사건 후에 공사관측과 그들과의 결속을 무너뜨리게 된다.
용산에 도착한 아다치 겐소(安達 謙藏) 등 일행은 여기에서 몇 사람의 동지와 합류하여, 40명을 넘는 무리가 되었다. 그들은 일본인이 경영하는 회조점(回漕店/역자 주:해상운송 대리점)이나 경찰서에 분산하여, 인천에서 오게 되어 있는 오카모토 유우노스케(岡本 柳之助)를 기다렸다. 영사관 보 호리모토 구마이치(堀口 九万一) 등 일행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호리모토는 오기와라 슈우지로(荻原 秀次郞) 경부가, 통역인 스즈키 즈미(鈴木 順見)나 6사람의 사복 순사와 같이 서울에서 용산으로 간 것은, 7일 저녁때 였다. 이때 호리구치는 미우라 공사로부터 「용산에서 오카모토에게 “방략서”를 주라」는 명령을 받았다.
인천에서 미우라 공사로부터의 전보를 받은 쿠스노키 유키히코(楠瀨 幸彦) 중좌는, 밤 10시경에 용산에 도착했다. 그러나 대원군을 모시는데 없어서는 안 될 오카모토 유우노스케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일동은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으나,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용산에 대하여 코바야카와는 다음과 같이 썼다.
용산은 경성(京城/역자 주:서울)의 남쪽 1리(역자 주:한국 이수 10리) 남짓 되는 곳이며, 한강 북안에 면한 한가로운 마을이었다. 뒤에 만리창(万里倉/역자 주:현 용산구 효창동) 마을을 지나, 아득히 공덕리의 언덕과 마주보고 있다. 용산은 왕래하는 기선을 정박시켜, 인천으로 연결하는 유일한 요항이었기 때문에, 병참부를 두고, 일본 경찰서를 두었으며, (중략) 경성 근처의 요지로서 조금은 번화한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다시 코바야카와는 「민비암살사건」으로부터 11년 후인 1906년(명치39년) 여름, 용산을 찾았을 때의 인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한강 언저리에 자리 잡은 언덕 위의 요리집에서 시원한 바람을 쏘이고, 그 부근을 서성거려 봤는데, 당시의 한가한 마을도 지금은 번화한 시가지로 바뀌었고, 어디가 어디인지 얼른 알 수가 없으며....」
1906년이란, 일∙러 전쟁이 끝난 다음 해다. 1905년 말에, 일본은 조선통감부와 이사청(理事廳) 관제를 공포하고,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가 초대 통감으로 임명되었다. 「일한합방조약」이 조인된 것은 1910년(명치43년)이었지만, 이토가 통감이 된 1905년부터 조선은 실질적으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코바야카와가 다시 방문한 용산이나 서울은, 갑자기 일본색이 짙어진 때였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1984년(소화59년) 12월에 찾은 용산에는, 도쿄(동경)의 타케바시(竹橋)에 남은 구 근위사단 사령부를 생각하게 하는 벽돌로 된 구 일본군 병사(兵舍)가 즐비하고, 많은 미국 군인이 담소하면서 활보하고 있었다. 「아리랑」멜로디도 그들의 휘파람을 타자 서양바람으로 활기차게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