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승기신론이 세우는 금강경 이론 12
금강경강의 12
제13의 여법수지분(如法受持分 법대로 받아 지니라)에서는 먼저 이 경의 이름을 묻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여기서도 역시 금강경의 이름이 금강반야바라밀경임을 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경전의 이름이 바로 금강경의 실상(實相)이 아님을 설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실상(實相)인 부처의 경지에 이르면 부처는 법을 설한 적도 없을 뿐만 아니라, 먼지라고 한다든가 32상이라고 한다든가 하는 형상도 모두가 실상이 아니고 이름일 뿐이라는 것을 여기서 다시 강조합니다.
또한 무수한 몸과 목숨으로 보시한다 하더라도 이 금강경의 사구게(四句偈)만도 못하다는 것을 또다시 여기에서도 강조합니다.
먼저 수보리는 지금까지 12분까지 설해온 바와 같은, 위대하고 얻기 어려운 희유(稀有)한 금강경에 대하여, ‘무엇이라 이름하며, 어떻게 받들어 지닐 것인가’를 불타에게 질문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동안 12분까지에서, 금강경에서 설하고자하는 근본사상 대부분이 모두 설하여졌기 때문에 이제까지 설한 법의 이름을 무엇이라 할 것인가를 여쭙는 것입니다. 사실상 앞으로 설하는 것들은 대부분이 지금까지 설해온 근본사상을 되풀이하여 우리 범부들의 마음에 계속 새겨질 수 있도록 중복하여 설해 나갑니다.
그래서 수보리는 불타에게 이 경의 이름을 무엇이라 할 것이며, 어떻게 받들어 지녀야할 것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불타는 금강경이라는 이름으로 이 경을 받들어 반야지혜를 완성하라는 대답하십니다. 금강경의 제목인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은 무엇이든지 끊을 수 있고 자를 수 있는 금강(金剛)과 같이, 일체의 번뇌와 집착망념을 차단하여 반야지혜를 완성함으로서, 영원불멸의 진여(眞如)본성을 현현(顯現)시키고, 그로서 실현된 반야지혜의 광명으로 온 법계(法界)를 두루 비추어, 진실을 있는 그대로 아는 자성청정심으로, 무념 속에서 중생을 제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타는 금강경을 받들어 지니는 이유로서 ‘부처가 설하는 금강반야바라밀은, 금강반야바라밀이 아니라고 수보리에게 설합니다.
금강반야바라밀이라 이름하고, 그 이름으로서 받들어 지녀야 한다고 해놓고, 그 이유가 금강경이 금강경이 아니라 하니, 우리 범부들은 그 논리의 모순에 어리둥절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부정의 논리는 간단합니다. 우리 범부들이 금강경이라는 그 이름에 집착하고 상을 지울까봐 이를 미리 차단하기 위한 것입니다. 금강경의 이름 그것이 바로 금강경의 실상(實相)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금강경의 이름일 뿐입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는 그동안 여러 차례 구체적으로 밝혀 설명한 바 있었습니다.
본래 진여(眞如)라는 이름도 말을 하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언설의 극(極)을 빌어 그 말로서 말을 버리는 것입니다. 금강경의 이름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체법은 본래부터, 언설의 상을 떠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금강경이라는 이름도 그 명자(名字)상을 떠나 있는 것이며, 마음으로 생각해 내는 심연상(心緣相)도 떠나 있는 것입니다.
원문, 한글역 및 영역문을 보겠습니다.
第13 如法受持分 : 법대로 받아 지니다 (Receiving and Keeping as Truth is)
爾時須菩提白佛言。世尊、當何名此經、我等云何奉持。佛吿須菩提、是經名爲金剛般若波羅蜜。以是名字汝當奉持。所以者何。須菩提、佛說般若波羅蜜、則非般若波羅蜜。
『그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마땅히 이 경을 무엇이라 이름 하오며, 저희들이 어떻게 받들어 지녀야 하겠나이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이 경은 이름하여 금강반야바라밀이라 하느니 이 이름으로써 너희는 마땅히 받들어 지녀야 하느니라.
왜 그러냐하면 수보리야, 부처님이 반야바라밀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반야바라밀이 아니라(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니라).
At that time, Subhuti said to the Buddha: "World-Honored Buddha! what should we call this sutra, and how should we respect and keep it in mind?
The Buddha said to Subhūti: "This sutra is called Vajra Prajnāpāramitā (the Diamond sutra). You should keep it as this name.
Because Subhuti! the Prajnāpāramitā which the Buddha has taught is not Prajnāpāramitā, (the name is Prajnāpāramitā.)
須菩提、於意云何。如來有所說法不。須菩提白佛言。世尊。如來無所說。須菩提、於意云何。三千大千世界所有微塵是爲多不。須菩提言。甚多世尊。須菩提、諸微塵如來說非微塵。是名微塵。如來說世界非世界。是名世界。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법을 설한 바가 있었겠느냐.”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설하신 바가 없었사옵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삼천대천세계에 있는바 미진(먼지)이 많다고 하겠느냐.” 수보리가 아뢰었다. “심히 많사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이 모든 먼지를 여래는 설하기를 먼지가 아니고 그 이름이 먼지라고 하느니라. 여래가 설하는 세계도 세계가 아니고, 그 이름이 세계이니라.
Subhūti! What do you think about it? Is there any Truth taught by the Buddha?
Subhūti said to the Buddha, "World-Honored Buddha! there is no taught Truth by the Buddha
"Subhūti! what do you think about it? Aren't all particles of dust in the unmeasurable great world numerous in number?
Subhūti said, "Extremely numerous in number, World-Honored Buddha!"
"Subhūti! all particles of dust explained by the Buddha are not dust particles. the name is dust particles, and the world explained by the Buddha is also not the world, the name is the world.
부처님은 수보리에게 다시 묻습니다. “여래가 법을 설한 바가 있었겠느냐.” 고요. 이 또한 우리 범부들이 들을 때는 이치에 맞지 않는 질문같이 들릴 것입니다. 불타는 지금도 법을 설하시고 계시고 그동안 8만4천의 법문을 설하시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불타는 설한 바 법도 없고, 법을 설하신 일도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불타가 설하신 법은 뗏목으로서의 법입니다. 우리 중생을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 실어 나르기 위하여 언설을 빌어 설하신 것입니다. 이미 뗏목의 법을 타고 피안에 도착하였으면 그 법은 버려진 것입니다. 그래서 불타는 설한 바 법이 없는 것입니다. 설한 바 법이 없으니, 그 언제 법을 설한 적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불타가 49년간을 온갖 방편을 써서 법을 설하셨지만 그 법은 단지 언설일 뿐, 실상(實相)을 설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그 법은 언설이고, 이름이고, 문자이지 실상(實相) 그대로가 아닌 것이어서, 불타는 설한 바 법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불타는 수보리와 법을 설하고 있고 또한 금강반야바라밀을 받들어 지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신론은 이를, 중생을 인도하기 위하여 ‘잠깐 그 언설을 빌어’ 절묘한 방편을 쓰고 있다고 설합니다.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불타의 설법은 차별 있는 현상의 세계, 즉 세속제(世俗諦)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말을 하지 않고는 그 가르침을 전달할 수 없는 것이므로 그 언설이 아무리 불완전 하더라도 그 언어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잠깐 언설을 빌어’ 절묘한 방편을 써서 중생을 피안의 세계에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타는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우리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언어를 써서 설법을 한다 하더라도, 항상 그 언어의 한계를 알고 행하기 때문에 가르침의 언어에 집착하는 일이 없습니다.
불타는 설법을 이어갑니다. 다시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의 비유를 들어 미진(먼지)의 다불(多不)을 수보리에게 질문하는 것입니다.
가장 큰 삼천대천세계와 가장 작은 미진(微塵)을 비유를 들어 극대(極大)와 극소(極小)의 이름을 세우고 앞으로 금강경은 그러한 양극을 부정하는 논리와 그것이 바로 가명(假名)이라는 논리를 세우기 위해서 입니다.
지금 불타와 수보리는 현상세계에서 질의응답하고 있습니다. 물론 많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현상세계의 인식으로는 많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불타는 같은 이치의 설법을 계속합니다. ‘삼천대천세계속에 가득 차 있는 먼지라고 말하는 것도 먼지의 실상(實相)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먼지가 아니라고 설하는 것입니다. 단지 그 먼지는 이름일 뿐입니다. 그 실상을 알기 위해서는 반야바라밀로 지혜가 완성되어 지혜광명이 온 누리를 가득 비추어 자성청정심으로 그 진실을 알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논리의 비유는 결국 반야바라밀을 들어내기 위한 방편적 언설일 뿐입니다. 이어서 설하는 말도 같은 이치입니다.
삼천대천세계라고 말하는 세계도 단지 이름일 뿐 그 세계의 실상을 설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이 세계는 우리의 인식을 위하여 ‘잠깐 언설을 빌어’ 쓰고 있을 뿐, 세계라는 말 한마디로 그 세계의 실상(實相)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불타가 되어야 만이 그 반야지혜로 그 세계의 실상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여기에서도 반야바라밀을 완성하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須菩提、於意云何。可以三十二相 見如來不。不也世尊。不可以三十二相得見如來。
何以故。如來說三十二相卽是非相。是名三十二相。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가히 삼십이상(三十二相)으로서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가히 삼십이상으로는 여래를 볼 수 없사옵니다. 왜 그러냐하면 여래께서 설하시는 삼십이상은 바로 그것이 상이 아니오라, 그 이름이 삼십이상이라 하시는 것이옵니다.”
"Subhūti! what do you think about it? Can the Buddha be seen by means of his thirty-two bodily characteristics?"
"No, it is impossible, World-Honored Buddha! Nobody can be seen by means of the thirty-two bodily characteristics. Because the thirty-two bodily characteristics taught by the Buddha are not bodily characteristics, the name is thirty-two bodily characteristics.
부처님은 다시 주제를 바꾸어 제5의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에서 설한 내용과 같은 것을 질문합니다. 거기에서는 “육신의 몸매(身相)로 여래를 볼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여기에서는 “삼십이상(三十二相)으로서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신상(身相)대신에 삼십이상(三十二相)이라는 언설을 쓰고 있습니다. 여래의 신상에는 32가지 상을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래가 갖추고 있는 32상의 몸매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원리에 따라 변해가는 허상(虛像)일 뿐 영원한 실상(實相)이 아니기 때문에 역시 32상으로는 여래를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래가 설하는 32상은 실상(實相)이 아니고 단지 그 이름이 32상이다’라고 설하는 것입니다. 역시 여래의 법신(法身)을 보라는 것입니다.
여래의 신상(身相)은 삼십이상(三十二相) 팔십종호(八十種好)를 갖추고 있다고 설해집니다. 그만큼 상호(相好)가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다시 몸과 생명의 보시(布施)보다도 법보시의 귀중함을 설합니다.
須菩提、若有善男子善女人、以恒河沙等身命布施。 若復有人於此經中乃至受持四句偈等。爲他人說其福甚多。
“수보리야, 만약 어떤 선남자나 선여인이 있어서 항하의 모래수와 같은 몸과 생명을 다 바쳐 보시했다 하더라도 또한 다시 어떤 사람이 있어서 이 경전 가운데 내지 사구게(四句偈) 등만이라도 받아 지녀서 남을 위해 설해 주었다면 그 복은 매우 많을지니라."
"Subhūti! Even If a good man or good woman dedicated their life as numerous as the sands in the Ganges river as an act of offering charity, if there is anyone who received and kept a four-line verse song from this sutra and taught it for others, the reward of virtues would be far greater."
금강경은 법보시(法布施)가 무수무량한 몸과 생명의 보시(布施)보다 더욱 많고 수승하다는 것을 설하는 것입니다. 반야바라밀을 완성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모든 중생을 피안의 세계로 인도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므로 이 분(分)에서는 여법수지(如法受持), 즉 금강경을 금강경으로서 잘 받아 지녀 반야바라밀을 완성하고 타인을 위해 법보시하라는 것을 다시 당부하는 것입니다.
대승기신론연구회장 전종식
chuncs33@hanmail.net
|
첫댓글 쪽지를 확인하셨던데 답장이 없어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좋은 글을 올리셨는데 방이 적절하지 않습니다.불편하시겠지만 좋은글 스크랩방으로 옮겨주셨으면 합니다. 혹시 저의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제가 옮겨드려도 되겠는 지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