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도 채 깨지 않은 이에게 칼날을 쥐어주는 것처럼 위험한 일이 어디 있을까?
부족한 수면으로 인한 몽롱한 의식 속에서 남자는 매일 자신의 얼굴에 예리한 칼날을 겨눠야 한다.
높은 확률로 아침부터 피를 구경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거울을 바라보고 욕지거리를 하며 대체 왜 매일 이 짓을 해야 하는지, 왜 면도라는 문화가 생겨났는지, 인간이 달에 로켓을 보낸 지도 한참 되었는데 왜 지금도 면도기는 진화하지 못하고 얼굴에 상처를 내는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된다.
남자는 어째서 면도를 해야 하는가?
인체의 여타 부분과 달리 머리칼과 수염은 방치할 경우 계속해서 자라난다.
그렇기 때문에 꽤 성가신 존재다.
사냥을 할 때도 방해가 되고 벌레들이 기생하기도 하는 등 그대로 둘 경우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면도는 미관을 위해서가 아닌 기능적 필요로 시작되었다.
인간이 제모와 면도를 했다는 증거는 유물로 남아 있다.
우선 선사시대에는 조개껍질, 상어 이빨, 돌조각 등 갖가지 재료들이 면도에 동원됐다.
그러나 이러한 도구의 예리함은 보잘것없어서 수염을 깔끔하게 깎아낼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수염은 같은 굵기의 동으로 만든 철사와 비슷한 경도와 강도를 지녔다.
조잡한 도구로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너무 긴 털을 짧게 자르는 정도였을 것이다.
원전 3세기의 수메르인들은 그런 식의 불완전한 면도를 탐탁치 않아 했다.
위생이나 기능상의 필요 외에도 미용적으로 깔끔한 얼굴을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깔끔한 면도를 할 만큼 정교한 칼날 제작은 불가능했고 다른 방식을 찾아야만 했다.
필요가 발명을 낳는다고 했던가?
그들은 한 가지 아이디어를 냈다.
'자르지 못한다면 뽑는다!'
수메르인들은 족집게를 개발해 수염과 체모를 뽑아냈다.
수염을 하나하나 모두 뽑아내는 데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 고통이 수반되었지만 고대에도 아름다움을 위해서는 고통도 자금도 아끼지 않았던 모양이다.
수메르 유적에서는 수없이 많은 족집게가 발굴되었다.
면도에 대한 반항, 수염
로마인들은 머리털과 눈썹을 제외한 모든 체모를 혐오했으며 수염을 기르는 이들(하층민이나 이민족)을 경멸했다. 깨끗하게 밀어낸 수염은 계급과 자본의 상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에는 변변한 거울과 충분히 예리한 칼날이 귀했기에 스스로 수염을 깎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깔끔한 턱은 노예를 지녔으며 정기적으로 이발사에게 돈을 지불할 자금력이 있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노예나 이발사에게 면도를 맡긴다 하더라도 면도 크림은커녕 비누도 없던 시절에 얼굴 이곳저곳을 베이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숙련된 면도 기술을 보유한 이발사는 장인으로 여겨져 후한 대우를 받았지만 그래도 피를 보지 않고 면도를 끝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덕분에 면도에 베인 상처를 치료하기 위한 연고 제작 기술이 로마 시대에 급격히 발전했고, 이발사들은 상처 치료부터 시작해 의학 기술 또한 터득해야 했다. 그래서 당시의 이발사 중에는 의사 영업까지 겸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시작된 이발사의 의사 겸직은 이후 중세 시대 의학에 대한 탄압과 맞물려 이발사들이 의사의 역할을 대체하게 되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공중목욕탕 문화가 흥했던 로마에서는 수염 외의 다른 체모들도 제거하는 유행이 있었는데 그런 무딘 칼날로 음모 등을 제거하기에는 무리가 따랐는지 수메르인들처럼 족집게를 사용해 뽑아내고는 했다. 그리스, 로마의 희곡에서는 목욕탕에서 서로 대화를 하며 상대의 음모를 뽑아주는 장면이 종종 묘사된다. 로마의 유명한 철학자이자 웅변가였던 세네카는 자신의 문헌 속에서 공중목욕탕에서 체모를 뽑느라 울려 퍼지는 신음소리가 시끄럽다고 언급한 바 있다.
로마 제국에서 목욕탕은 귀족의 여가시설이자 빵(식량 배급), 서커스(재미있는 묘기)와 더불어 평민이 정치에 관심을 갖지 못하게 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부끄러움 없이 제모를 했다.
면도와 제모의 고통에 시달리던 것은 시민뿐만 아니라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주기적으로 견뎌야 하는 고통이 지긋지긋했는지 로마 황제 네로는 면도를 포기하고 수염을 길렀다.
사람들은 품위가 없다고 비난했지만 그런 비난 정도로 면도하는 고통을 면제받을 수 있다면 상관없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쭉 수염을 기른다.
그 이후의 황제들도 점차 면도하는 것을 피했고 결국 로마 전체가 면도를 포기하고 수염을 기르는 것이 대세가 되었다.
이것이 서기 1세기 이후로 로마 황제의 동상에 수염이 묘사된 이유다.
안전한 면도기의 탄생
중세 시대에도 면도는 계속되었다.
수염을 기르는 것이 유행이 된 순간도 있었지만 이는 면도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산신령처럼 자연스럽게 기르는 것이 아닌 깔끔하게 관리된 수염을 위해서 면도는 계속 필요했다.
남성들은 자신의 수염을 강조하기 위해 볼 주위를 면도했고 여성들은 피부의 깨끗함을 강조하기 위해 얼굴과 팔다리의 잔털뿐 아니라 눈썹까지 밀어버렸다.
이것은 면도를 하지 않던 아랍인들과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십자군 전쟁 당시에는 이슬람 측 보급선이 프랑크 측 군함에 발각될 것을 대비해 선원들을 모두 면도시켰더니 아군으로 착각하고 돌려보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칼날의 예리함은 문명의 발전과 함께 점차 나아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스스로 면도를 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로마 시대처럼 여성도 남성과 함께 이발소에서 면도를 했다.
영어로 이발사를 의미하는 바버(barber)는 라틴어의 바르바(barba)에서 유래한 것인데 이것은 수염을 뜻한다.
현대의 이발소는 주로 머리카락을 손질하는 일을 하지만 중세까지 이발소는 제모와 면도가 주된 업무였다.
중세 이후에도 이발사들이 의료 행위를 해왔던 것으로 미루어봤을 때, 몇 세기가 지나도 면도에는 유혈 사태가 뒤따랐고 사람들은 늘 고통을 겪어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쯤 되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겠다.
"인간의 역사는 '털과의 투쟁'의 역사다."
1762년이 되어서야 안전하게 면도를 하기 위한 초석이 마련되었다.
프랑스의 장인이었던 자크 페레가 안전면도기의 초석이 될 보호막을 개발한 것이다.
면도를 하는 동안 피부를 보호할 수 있도록 칼날 주변에 나무 슬리브를 부착한 단순한 장치였지만 면도의 역사에서는 혁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는 1769년에 〈혼자서 면도하는 법(Pogonotomie, au L'Art D'Apprende a se Raser Sol-Meme)〉이라는 책을 써서 자신의 발명품과 함께 개인이 스스로 면도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했다. 물론 이발사들은 밥통을 빼앗기는 것에 반발해 그를 비난했으나 사람들은 솜씨 좋은 이발사에 의존하기보다 성능 좋은 면도기를 택하게 되었다.
자크 페레는 목수의 설계에서 영감을 얻어 좀 더 안전한 면도기를 만들었다.
이후 면도기에 대한 아이디어는 점점 발전돼 1880년 독일인 캄페 형제에 의한 스타(star) 면도기가 나타나게 되었다.
그전까지의 면도기가 수직의 칼날 모양을 하고 있었다면 스타 면도기는 현대적인 모습을 하고 있어서 '괭이형 면도기'라고 불렸다.
칼날이 쉽게 무뎌진다는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톱니모양의 칼날을 도입한 덕분에 좀 더 안전한 면도가 가능해졌다.
면도 솜씨보다는 면도기의 성능을 통해 안전한 면도가 확실하게 가능하다는 것을 사람들이 인식하자 개발자들은 일제히 특허 출원에 나섰다.
스타 면도기 이후 1880~1901년 사이에 미국에서는 80여 개가 넘는 안전면도기의 특허가 출원되었다.
지금은 익숙한 이름인 질레트(Gillette) 사의 창업자이던 질레트는 스타 면도기의 팬이었다. 당시 스타 면도기는 꽤나 고가였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칼날이 무뎌져 자꾸 베이게 되는 단점이 있었다. 질레트는 자신이 애용하던 스타 면도기를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된다. 칼날을 갈아서 재사용하던 기존의 방식은 번거롭고 비용도 많이 들었기에 많은 사람들은 상처를 감수하며 오래도록 면도기를 사용하고는 했기 때문이다. 본인과 주변인들의 불편함을 보던 질레트는 하나의 아이디어를 낸다.
'손잡이 말고 칼날만 바꿀 수 있다면 어떨까?'
그랬다. 세계 면도기 시장의 점유율 70%가 넘는 대기업의 탄생은 이런 단순한 발상의 전환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면도날이 닳으면 교체할 수 있는 탈착형 면도기로 질레트는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고 전 세계의 남자들도 면도를 하면서 유혈 사태를 좀 덜 겪을 수 있었다. 단순히 면도의 고통을 줄여주는 것뿐만 아니라 주기적인 칼날 교체로 파상풍이나 면도 독의 위험을 줄여준 것도 획기적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인류에게 내려진 축복 아닐까?
첫댓글 개인적으로 이런글좋아합니다
우리나라 사극에서 젊은 남자들 수염 하나없이 깔끔한 얼굴로 나오는거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봐요..
이렇게 발달된 면도기가 잇는데도 뻑하면 유혈사태를 보는 난 바보인가...
예전에 날 면도기 썼는데 맨날 트러블에 피보는 사태를 보다가 우연한 계기로 전기 면도기로 바꾸고 신세계를 보았다죠!!ㅋㅋ @.@//
저두요 개인적으로 혁명이었습니다
저도 질레트에서 필립스 RQ 1260으로 바꿨는데 좋네요ㅎㅎㅇㅎ
좋은 전기면도기를 써서 날 만큼의 디테일한 것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요즘 면도때문에 고민이네요 ㅜㅜ 트러블....
매직월드// 그 디테일이라는게 맨들맨들함 이라면 아무래도 전기가 날에 비해서는 떨어집니다. 그런데 그러한 디테일이 조금 떨어지더라도 전기는 피부 트러블과 모닝 유혈을 보지 않는다는 장점이 더 크더라고요.ㅋ 그리고 전기도 같은곳 여러번 문대주면 나름 맨들맨들 해져요.ㅋㅋ
유익한글 재밌게 잘보고갑니다^^
마지막에 제가 쓰는 면도기네요^^
전 아직도 군대때 쓰던 도루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