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한국에 뮤지컬 '그리스(Grease)' 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개인적으로 '캣츠' 나 '레미제라블', '오페라의 유령' 같은 유명 공연들보다 더 대중적이고 익숙한 코드를 지녔다고 생각하는 뮤지컬이라 조금 의아하지만, 사실 나도 불과 몇년전에야 알게 된 작품이니 할 말은 없다. 예전에 '그리스' 에 쇼걸로 참여했던 미국인 친구는 내가 공연이름을 듣고 멍해지자 의아해 했다. 한국에서의 인지도와 다르게 '그리스' 의 탄생지인 미국에서는 그 유명세나 인기가 상당한가 보다.
오늘 동숭아트홀에서 감상한 뮤지컬 '그리스' 에는 난해함이나 가식, 배알꼴리는 '멋진 척' 따위는 없었다. 대신에 타오르는 젊음과 열정, 흥겨움만이 있었을 뿐. 배우들의 '연기같지 않은' 실감나는 연기와 귀에 착착 감기는 흥겨운 음악은, 관객과 공연장 전체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무뚝뚝한 나마저도 그 흥겨운 분위기에 절로 어깨가 들썩거릴 정도였으니까.
'청춘' 이라는 게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자유와 열정, 우정과 사랑' 이라는 게 그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매력적일 수 있는지 새삼 깨달은 기분이다. 1950년대 미국 고교생들의 이야기를 다룬만큼, '그리스' 는 역시 그 분위기부터 여타 뮤지컬이나 오페라들과 차별성을 띤다. 엘비스 프레슬리를 필두로 한 로큰롤 열풍에서 묻어나는 흥겨움, 차후 비틀즈의 탄생을 예고하며 젊음과 자유가 표면으로 떠올랐던 미국의 50년대, 그리고 그 시대를 사는 청춘들... 대체로 신화나 전설에서 모티프를 따오거나 이미 '고전' 으로 추앙되는 문학작품들을 각색한 대부분의 오페라/뮤지컬 작품들과 구별되는 이 점이 또한 '그리스' 의 매력이다.
'그리스' 의 줄거리나 드라마 자체는 사실 정교함이나 치밀함과는 거리가 멀다. '청소년들의 사랑과 우정, 방황과 그 극복' 이라는 주제는 그야말로 인류 만국공통의 주제이고, 그 보편성만큼이나 진부함의 덫에 걸리기 쉬우니까. 하지만 '그리스' 에서 주목할 것은 배우들이 그것을 표현해내는 방법, 관객들과의 교감을 시도해내는 방식이다. 고민많고 꿈많던 10대를 겪은 사람이라면, '그리스' 의 젊은이들에게 공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내게 있어 1950년대는 실질적 체감지수상 거의 '호랑이 담배먹던 시절' 이고, 미국의 공립 고등학교 또한 이질감으로 가득찬 묘한 세계이지만, 그들의 고민과 방황은 나에게도 하나하나 팍팍 필이 꽂혔다.
'그리스' 의 배우들이 이따금 툭툭 뱉어내는 말들은 이게 도대체 애드립인지 실제 대사인지 구분이 안 간다. 하지만 그러한 무(無)형식은 도리어 배우와 관객 사이의 거리감을 상쇄시키는 동시에 극의 유연성을 돋보이게 만드는 미덕이 된다. 가끔씩 튀어나오는 거친 욕설도 젊음의 혈기를 염두에 두면 얼마간 용서가 된다. 시퀀스마다 '흥겨움 --> 울적함 --> 다시 흥겨움' 등의 분위기 변화가 심하지만, 그 또한 스피디하고 생동감넘치는 극의 전개를 뒷받침해주는 힘이 되어준다. 개성적이고 명랑한 캐릭터들은 굳이 주연, 조연 가릴 것 없이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며, 이들의 심각한 고민마저도 종국엔 쿨~하게 해결되며 극은 더없는 해피엔드로 마무리된다.
아~ 이러니까 소위 '뻔하디 뻔한 작품홍보성 찬사' 만 늘어놓은 것 같은데, 그만큼 뮤지컬 '그리스' 는 매력만점인 공연이었다. 난 전문 문화 평론가도 아니고, 오페라나 뮤지컬을 위시한 공연예술들을 자주 접해보지도 못했기에 깊이있는 평론이나 분석은 내놓지 못한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가슴깊이 공감하고, 공연이 이루어지는 두 시간동안 순도 100%의 행복감에 가득 취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 아닐까. 비록 음악은 실제 연주가 아닌 컴퓨터 믹싱이었고, 뒷자리에 앉은 터라 앞사람 머리통 때문에 시야 확보에 고생은 했지만(흑), 오늘 공연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동숭아트홀의 지하공연장도 한 역할 톡톡히 했다. 내가 주로 접한 예술의 전당 오페라 하우스나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공연들은 그 규모 때문에 배우와 관객들과의 상호교감이 어려웠던 게 사실이다. (물론 자금사정 딸리는 내가 늘 가장 싸구려 좌석에 앉았던 게 가장 큰 문제지만-) 하지만 동숭아트홀의 소극장 성격을 띤 무대는, 2층 끝좌석에서도 배우들의 표정과 동작 하나하나를 관찰할 수 있을 정도로 무대와의 거리감이 적었다. 아~ 사람들이 무리해서라도 비싼 돈 내고 VIP석에 앉는 것을 이제야 진심으로 이해할 것 같다(흑흑).
한가지 덧붙인다면, 내게 미국의 1950년대는 심리적으로 상당히 친근하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위에서 나는 미국의 1950년대를 대략 몇 억 광년은 떨어진 미스테리한 세계쯤으로 묘사했지만, 실제적인 괴리감은 무척이나 희미하다는 것이다. 1950년대 미국 공립고교를 무대로 한 '그리스' 를 보고, 나는 숱하게 봐온 90년대 배경의 미국 하이틴 드라마를 본 기분이었다. '베버리힐스 90210' 이나 '캘리포니아 드림', '버피' 같은 시트콤들과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할리우드 틴에이저 영화들 말이다.
흠~~~~ 이럴 때는 참 복잡한 기분이 든다. 미국의 하이틴 드라마를 보면 그 배경이 1950년대이든, 2000년대이든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보인다. 1950년대 배경의 '그리스' 나 1960년대를 배경으로 한 'Wonder Years(케빈은 열두살)', 1970년대 배경의 '캐리(스티븐 킹의 원작 소설과 영화)' 등에서는, 그 기본틀과 문화에서 지금의 미국 학교들과 큰 차이가 발견되지 않는다. 미국에는 그만큼 일찍부터 얼마간 '선진적' 인 공교육 제도가 자리잡아 왔다는 뜻 아닐까. 반면 한국의 학교들은 어떨까? 내가 듣기로는 90, 2000년대의 한국 학교들 역시 50, 60년대의 학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들었다. 물론 에어컨과 스팀같은 냉난방 시설들은 개선되었고 얼마간 교칙도 완화됐으며, 학교 분위기도 조금은 민주적이 됐겠지. 하지만 그 큰 틀은 어떨까. 입시위주의 교육풍토와 그 안에서 고통받는 학생과 교사들의 고민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유효하다. 미국과 한국의 공교육을 단순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이쯤되면 2000년대 한국의 학교 교육이 50, 60년대 미국의 구닥다리 그것에도 미치지 못하다는 말이 신빙성을 얻는다. 한마디로 기막힌 현실이지. 마침 대학로에서 '고딩만의 세상' 이라는 연극이 상연 중이라고 들었는데, 문득 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현재의 한국 고교생들은 과연 '그리스' 의 학생들과 어떻게 같으며, 또 어떻게 다를까...? 흐흐흐~
아~ 어쨌거나 '그리스', 정말 멋지다...!! 그 열정적이고 생기넘치는 무대가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린다. 존 트라볼타와 올리비아 뉴튼존이 참여했다는 그리스 ost도 계속 듣고 있다. 한마디로 완전히 빠져버렸다~ (감동의 눈물~) 여건이 되면 다음에는 브로드웨이나 웨스트 엔드에서 오리지널 영어 공연도 보고 싶다. 청춘과 열정, 사랑과 우정은 그 가치만큼이나 언제 어디에서건 가공할 흡인력을 자랑한다.
첫댓글후후, 일반 오페라나 뮤지컬들이 블랙 커피나 오래된 포도주처럼 깊은 맛(?)이라면, '그리스' 는 톡 쏘는 탄산음료 맛이라고 할 수 있죠. 섹시한 망사스타킹에 가죽옷을 쫙 빼입고 사랑하는 남자에게 다가가 '남자가 필요해~' 이렇게 말하는 샌디가 얼마나 귀여운지... ㅋㅋ
첫댓글 후후, 일반 오페라나 뮤지컬들이 블랙 커피나 오래된 포도주처럼 깊은 맛(?)이라면, '그리스' 는 톡 쏘는 탄산음료 맛이라고 할 수 있죠. 섹시한 망사스타킹에 가죽옷을 쫙 빼입고 사랑하는 남자에게 다가가 '남자가 필요해~' 이렇게 말하는 샌디가 얼마나 귀여운지... ㅋㅋ
다음 달에 친구랑 보러가기루 했는데... 님의 글 읽고 나니까 장면들이 머릿속에 그려지면서 저절로 흥분이 되네요. 빨리 보고싶어서 그때까지 기다리기 힘들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