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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 (trauma)’ 는 우리말로 표현하면 외상성 상해라고 부른다. 암과 같은 질환으로 우리 몸의 내부에서 발생해서 생기는 병이 아닌 주로 그 원인이 외부에 존재하는 것을 뜻한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는 단어가 되어서 통상적으로 사용되지만 트라우마는 일반적 의학 용어의 뜻과 의학의 한 분야이지만 정신의학의 뜻은 조금 다르다. 의학적 뜻은 ‘외부의 강제 혹은 사고에 의해서 발생하는 몸의 상해나 충격을 뜻한다. 즉, 원인은 외부에 존재하지만 실제 그 피해가 우리 몸에 가해지는 모든 것을 트라우마라고 부르며 교통사고나 상해, 총상 등을 포함해서 모든 사건 사고에 의한 총괄적인 내용을 트라우마라고 부른다. 이때는 우리말로 ‘외상’이라는 표현이 적절하다.
그러나 정신의학은 개인의 정신적 발달 과정에서 어떤한 외부적 충격 (물리적 및 무형적) 에 의해서 지속적인 영향을 주는 모든 상황 및 조건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삶에 영향을 주는 과민증세를 동반할 수 있는 정신적 노이로제를 발생하게 된다. 물론 의학적 정의에 의한 외상적 상해 (외상)이 정신의학의 트라우마 원인이 되기도 하겠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그 영향의 지속성과 정상적 범위를 벗어나는 결과를 통해 정신의학의 트라우마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대학교 1학년 시절 인천의 어느 지역을 찾아갔다가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 보행자 길에 서서 차도를 바라본 적이 있었다. 왕복 8차선의 넓은 차도였지만 차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차들은 빠른 속도로 지나다녔다. 그리고 횡단보도의 파란불이 켜지고 상당 시간이 지난 후 중년의 보행자 한분이 길을 건너고 있는데 감속할 생각도 없이 그냥 지나가려는 트럭이 멀리서 보였고 불길한 느낌이 적중하듯 그 트럭은 멀쩡하게 파란불에 건너는 보행자를 영화에서 보는 장면처럼 치고 말았다.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때 그 트럭이 보행자를 치는 장면은 너무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보행자는 상당히 큰 충격을 받아 공중으로 날라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멀리 떨어져 버렸다. 아직도 그때의 상황을 어떤 동사와 형용사로 표현해야 할지 지금도 고민과 갈등이 생긴다. 왜냐하면 그냥 단순히 날라버렸다는 표현을 쓰기에는 너무 적절하지 않은 표현같은데 마땅히 그 장면을 묘사할 적절한 단어도 생각이 안나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지만 놀라고 다급해진 트럭 운전사의 모습과 횡단보도에서 상당히 멀리 누워있는 보행자 그리고 그보다 더 멀리 날라 가버린 보행자의 신발, 그리고 보행자가 가지고 있던 비닐봉지가 터져버린 상황, 그리고 그 순간 그 비닐봉지에서 터져 나온 사과 몇 개가 마치 그날 밤 가족들을 위해 과일을 사가는 한 가정의 모습까지 상상하게 될 정도로 그때의 장면, 당시 연상된 기억들까지도 명확하게 기억이 난다. 그리고 목격자로 계속 반복되는 내용을 진술하는 것은 그때의 기억을 더욱 더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별로 큰 충격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때의 사건이 나에게 생각보다 상당히 큰 충격이었음을 알게 된 것은 운전면허를 따기 위해 아버지 차의 운전석에 앉아 자동차 핸들을 잡는 순간 느끼게 되었다. 그냥 운전면허 딸 시간이 없다고 핑계를 댔지만 사실 우연히 핸들을 잡는 순간 목격했던 사고의 가해자가 되어서 내가 운전하는 상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지 못한 상황에서 내가 아무리 운전을 잘해도 상대방이 나에게 돌진하거나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수많은 경우에 대한 상상이 시작되었다. 예를 들어 아내의 생일에 멀리서 준비한 케익과 선물을 사서 집에 들어가는데 중앙선을 침범해 어떤 차가 나에게 돌진해 결국 내가 사고로 죽는 상상이나 내가 보행자로 잘 건너가고 있는데 나에게 달려오는 자동차가 있어 그 자동차를 피하려다가 산길의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상상과 같이, 어떻게 상상이 구체적이고 자극적이고 충격적인지 그런 존재하지도 않는 상상의 모습들이 나를 괴롭혔고 대부분이 운전은 기본이라는 생각으로 이야기해도 나는 의연하게 운전을 거부했었다.
나에게 직접 가해진 상해도 아니지만 그날 보았던 그 모습은 목격한 모습이 아닌 마치 내가 직접 그 피해자 혹은 가해자가 되어 떠오르게 하는 기억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사실 운전하지 않고 살아가는데 별 불편도 없었고 오히려 운전하지 않는 것이 더 편한 시간들이 계속되면서 특별히 운전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면서 자연스럽게 그 기억은 사라지는 것 같았다. 평생 운전하지 않아도 된다는 마음은 먹게 되지만 어느 순간 운전이 필요하게 되는 순간이 오면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주변의 사람들을 보면 생각보다 외부의 충격에 의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개인적으로 운전을 하지 않고 싶어하는 모습과 비슷하게 어떤 사람은 차도나 차도 가까이 근접한 인도를 지나가는 것을 싫어해 인도 깊숙히 다니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상당히 자주 어떤 특정 음식에 대한 거부를 하거나 남들에게는 징크스처럼 거부하는 행동 혹은 어색하지만 일부러 하려고 하는 행동 등 트라우마에 의해 발생하는 행동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가끔은 다른 이들에게 이해하지 못하는 행동들이나 판단때문에 다른 이들이 불편함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트라우마에 의해 어떤 행동을 회피하려고 하는 순간 가장 불편한 사람은 본인이라는 점이다. 즉, 최소한 본인은 불편한 상태가 유지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트라우마는 우리의 기억에 농도에 관계없이 직접적인 행동의 변화는 현재에 영향을 준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미 트라우마의 요소는 제거되거 과거의 일이지만 해당 트라우마는 마치 현재 존재하는 것처럼 영향을 주고 그 영향을 주는 모습은 스스로도 불편해 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불편을 주기도 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단순히 목격한 교통 사고의 현장을 목격한 그 사실만으로 교통사고가 가지는 모든 가능성과 위험이 현재 나에게 다가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각시키기 되고 그 부각된 현실에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운전을 하지 않는 선택을 하게 되지만 그만큼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발생하는 스트레스는 크게 두가지 종류이다. 첫번째는 트라우마에 의해 발생하는 반복적인 회피에 대한 스트레스와 이 때문에 부가적으로 발생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스트레스다. 전자의 경우 스스로 적절하게 대처하고 수긍하면 되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매번 반복되는 상황에 대해서는 상황을 이해시키고 설명해야하는 스트레스가 부가되기도 한다.
트라우마는 치료할 수 있는가?
조금은 좁은 범위에서 정신 의학에서 다루는 트라우마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트라우마는 치료할 수 있는가? 즉, 본인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과거의 트라우마는 치료할 수 있는 것인가? 이 질문은 상당히 근본적이고 우리가 트라우마를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질문이 된다.
만약 트라우마가 치료할 수 있는 대상이라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치료될 수 있는 대상이라고 믿고 치료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치료에 집중한다면 우리가 트라우마 때문에 발생하는 스트레스와 관계의 부자연스러운 모습들도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치료될 수 없고 완화될 수 있는 대상이라면 문제의 본질은 다르게 생각해야 한다. 즉, 우리가 한번 과거에 경험한 그 우연의 과정은 우리가 어떻게 제어할 수 없고 이미 경험한 트라우마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존재하며 우리를 괴롭히게 될 것이기 때문에 트라우마에 의해 발생하는 스트레스를 완화하는 대처방법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영화 Paycheck / 프로젝트 완료 후 부분적 기억을 제거한다.
공상과학 소설을 보면 미래의 기술이 발달해서 지우고 싶은 기억만 선택적으로 지울 수 있는 기술을 소개하기도 한다. 전혀 기억하지 못하게 되는 과거의 기억들 때문에 인간은 새로운 갈등이 발생하지만 그래도 그 기억을 지우는 그 순간의 장면은 과거의 트라우마에 의해 고생하는 사람들에게는 부러운 내용이 될 수 밖에 없다. 여기에서 또다시 질문을 할 수밖에 없다. 트라우마는 우리의 기억에 의한 것인가? 단지 기억만 제거한다면 (가능하다면) 트라우마는 깔끔하게 사라질 수 있는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 많은 신경과학자들은 연구하지만 인간의 기억이 우리가 편의상 기억하는 방식처럼 시간순 혹은 특정 사건에 따라서 특정 기억을 저장하는 물리적인 구분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즉, 어떤 특정 지역의 기억 중추에 충격을 주면 원하는 기억만 제거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다시 설명하면 우리의 기억은 물리적인 구획으로 구별이 가능한가이다. 인간의 저장방법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선택적 기억 삭제'는 상당히 비현실적이지만 충분히 트라우마를 '완치'할 수 있는 이상적인 해결책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선택적 기억 삭제를 통해 과거의 기억을 삭제한 주인공들은 우여곡절 끝에 과거의 기억을 찾아내고 결국 자신의 기억의 주체는 기술로 제거할 수 없다는 어떤 공통의 메세지를 전해준다. 물론 기억을 제거한다는 것은 자아를 상실한다는 주인공에게 가해지는 하나의 고난으로 설정되기도 하지만 우리의 기억이 정말 그렇게 선택적으로 지워질 만큼 간단한 대상이었다면 현재 트라우마의 치료도 더 쉽지 않았을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하게 된다. 이제는 상식처럼 쓰이는 PTSD (정신적 후 스트레스 장애;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는 이처럼 트라우마 이후 스트레스로 자신의 행동에 영향을 받아서 이런 행동의 형태가 일반인들이 납득하기 어려운 상태 혹은 비정상적 형태로 보여지는 경우를 이야기한다.
정신의학은 스트레스에 의한 장애의 형태를 크게 세가지로 구분한다. 과민반응 (hyperalertness, hyperarousal)과 충격의 재경험(Re-experience or intrusion), 감정 회피 또는 마비(avoidance or emotional numbness)로 나타난다[각주:1] 그러나 세가지 모두 자신의 불안, 공포를 표현하는 방법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과거의 트라우마가 현재의 자신에게 주는 공포와 불안은 논리적 판단이나 이성적 분석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즉시 일어나는 반응적 행동이라는 점이다.
트라우마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누구나 트라우마는 존재한다. 그 트라우마의 강약에 따라서 실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는 달라질 수 있고 개인의 감수성에 따라서 그 트라우마에 반응하는 정도도 달라질 수 있지만 누구나 크고 작은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문제는 다른이의 트라우마는 내가 경험하지 않는다면, 심지어 같은 경험을 해도 그 받아들이는 충격의 정도는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그 트라우마가 현재의 장애로 이어지는 부분은 개인의 경험과 기억에 따라서 천차만별 달라질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 어떤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고 그 트라우마가 현재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에 대해서 이해하려고 트라우마 소지자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것은 단지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작업이 될수밖에 없다.
우리의 스트레스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상태를 바꾸려고 하거나 근본적 원인이 통제할 수 없는 상태에 있다고 낙담하는 순간 우리는 포기하기 쉬워진다. PTSD 를 다시 한번 분해해서 살펴보자.
과거의 트라우마 → 현재의 상황 → 스트레스 → 장애
과거의 트라우마는 이미 지나간 과거이고 앞서 설명한 것처럼 과거의 기억을 지울 수 없다면 어떻게 통제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그리고 그 과거의 트라우마가 스트레스로 만들어지는 현재의 상황도 방금 전의 지나간 과거가 되어버렸다. 따라서 우리는 더이상 통제할 수도 없고 변경할 수도 없다. 그리고 그 스트레스에 의한 반응은 즉각적이고 앞서 설명한대로 과민반응 / 충격의 재경험 / 감정 회피 (마비) 의 어떤 증세가 오더라도 분명 생리학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단계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방법은 약물이나 응급 처치를 통해서 진정시키거나 현재의 상황이 더이상 위협적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인지시켜주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반응의 정도가 심하게 나타난다면 의학적 응급 처지를 해야하지만 사실 우리가 더 주목해야 할 것은 본인은 스트레스 상태인데도 제대로 표현은 못하거나 상대방이 다소 불쾌함을 줄 수 있는 상황의 반응을 보이는 상태이다. 즉, 과민반응이지만 극도의 히스테리적 발작이 아닌 불쾌한 표정이나 거부감을 표현하여 같이 있는 사람에게 그 감정을 전이시키는 정도의 스트레스이다.
일상적인 대인 관계에서 트라우마에 의한 스트레스는 상당히 많이 목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특정 물건에 손을 대기도 싫어하거나 누군가와 신체적 접촉을 거부한다거나 특별한 상호 이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평범하지 않은 행동으로 보여질 수 있는 이런 행동들은 대부분 상대방에게는 불쾌감으로 전달되기도 한다.
이유는 알수 없지만 특별히 내키지 않는 내성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과거의 교통사고 목격 이후 운전에 대한 회피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가 해외에 나가 일을 하면서 운전을 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단지 내가 하기 싫어서라고 생각했던 그 운전을 억지로라도 해볼까 극복해볼까 마음먹었지만 운전을 하는 동안의 긴장은 그 어느때보다 극도로 심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운전하며 1시간을 연습하고 나서 거의 몇일동안 열병 앓듯 아팠었다. 그리고 이상하게 뾰족한 물건이나 총을 보면 극도로 불안하고 심한 공포감을 느끼게 된다. 특히 송곳이나 끝이 뾰족한 식칼 심지어 금속으로 만들어진 거친 막대기를 보면 불안해 하고 그 물건이 가까이 오면 얼굴이 심하게 찡그러진다. 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총을 처음으로 경험한 것은 사실 대학 시절 미국에서 보았지만 거리의 경찰 허리에 있는 총을 보기만 해도 혼자서 끔찍한 상상이 떠오른다. 과거에 뾰족한 물건이나 총에 대한 특별한 트라우마가 기억나는 것도 아닌데 내가 피하고 싶어하는 대상이 존재한다.
자신이 어떤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고민해보는 것도 좋은 과정이 될 것이다. 단순히 자신이 가지는 문제를 다른 이들에게 이해시켜주려는 과정이 아니라 과거의 트라우마가 현재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에 대한 정량적인 평가를 해보는 것이다. 즉, 나도 모르게 행동하는 많은 부분들은 과거의 트라우마에 의해서 영향을 받고 있는 것, 그리고 자신은 눈치채지 못하고 별 불편이 없지만, 주위 사람들에게 불편을 만드는 요소가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현재 자신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요소를 찾는 것이 우선 목표가 아니다. 과거의 트라우마가 어떻게 현재에 영향을 주고 그 영향이 현재의 행동에 얼마나 많은 부분 변화를 만드는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될 때 우리는 크게 두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우선은 과거가 현재에 충분히 영향을 주고 있다는 점과 우리가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과거의 기억과 트라우마로 우리는 알게 모르게 현재의 내가 만들어져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렇게 오랜 시간 자신도 모르게 만들어진 자신의 행동을 완벽하게 이해해주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가깝게 지내는 가족들이라고 해도 내가 충분히 이야기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그런 부분까지도 충분히 이해하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조금은 불합리한 특징이 있다. 자신에 대한 내용은 자신의 논리 안에서 이미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충분히 과거의 사건 (트라우마)와 현재의 행동을 잘 설명해내고 연결하지만, 다른 이에 대해서는 자신의 논리로 납득이 되지 않으면 이해하지 않으려는 성향이 있다는 것이다. 더 풀어 설명하면 다른 이가 사건 A 를 겪고, 현재의 행동 B 를 취하고 있다면 A → B로 연결되는 그 과정은 항상 논리적이고 보편적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가 이해하고자 하는 상대방에 대해서는 자신의 논리로 설명 가능한 상황을 요구하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전쟁에 참전하여 아이들이 폭격 당하는 모습을 목격하여 현재에도 주변에 아이들만 보면 심하게 피하거나 겁먹는 행동을 취한다면 그 트라우마의 강도나 개연성에 대해서 이해하려고 하지만 어떤 사람이 어린 시절 칼에 베어 핑크색만 보면 무서워 한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트라우마가 그렇게 심하지 않기 때문에 혹은 핑크색만 보면 무서워할 논리적 연결이 이해가 안간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자신의 트라우마가 무엇인지 사소한 것, 자신이 이유없이 피하려고 하는 대상들을 살펴보면 그 이유가 너무도 사소하거나 알수 없는 것들도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자신의 트라우마가 무엇인지 살펴보는 과정은 자신의 트라우마를 찾는 목적이 아니라 얼마나 사소한 것도 우리를 보잘 것없이 만들 수 있는지, 그리고 트라우마에는 객관적 강도가 존재할 수 있지만, 주관적 강도가 더 중요하다는 점이다. 즉, 자신이 얼마나 크게 느끼냐에 따라서 트라우마의 강도는 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트라우마가 현재의 스트레스로 연결되는 상황도 상당히 사소하거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시할만한 것이라고 해도 개인에게는 아주 큰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즉, 우리는 단순히 상대방을 이해한다는 점에 주목해서 상대방의 상처와 트라우마를 듣거나 알게 되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지만 우리 자신에 대해서 살펴보면 우리 스스로도 얼마나 사소한 것들에 트라우마를 가지며 현재의 행동들이 영향을 받는지에 대해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단순히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과정을 통해서 상대방에 대해서 집중했지만 트라우마가 현재의 반응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은 아주 사소하고 무척이나 쉽게 이루어진다는 그 기본적인 이해조차 하지 않은 체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 머리의 논리로 이해되지 않는 상대방의 모습은 무시하거나 심한 경우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가는 경우도 종종 존재하는 것이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내가 이해하는 트라우마만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나와 거의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만이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의 영역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이런 쉬운 실수들은 인간은 쉽게 해버리고 그 실수의 과정으로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다가오는 트라우마의 과정과 그 트라우마가 현재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사소한 고리들로 연결되는지 이해한다면 상대방의 모습은 머리로 이해하는 대상이 아닌 가슴으로 공감하는 대상이 될 것이다. 수용이란 누군가를 억지로 나의 논리에 끼워 맞춰 받아들이는 작업이 아니다. 오히려 나조차도 내 논리와 경험 밖의 과정으로 만들어지고 형성되는 무척이나 사소한 연속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과정을 통해서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그런 과정은 단순히 상대방을 위한 배려가 아니라 나 또한 공감의 대상이 되기 위한 마음의 준비이다.
그렇기 때문에 트라우마에 대한 자세는 아주 명확할 수 있다. "그럴 수도 있다..." 라는 그 단순한 명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트라우마는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대상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나에게 존재하는 트라우마와 불편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을 이해하는 과정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앞서 질문한 트라우마는 치료할 수 있는가? 에 대한 지금 당장의 대답은 슬프지만 "아니오"라고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내 스스로가 트라우마에 대해서 이해하고 트라우마가 우리의 삶에 주는 영향의 사소한 과정들을 섬세하게 관찰하며 살아간다면, 트라우마는 우리를 계속 일깨워주고 다양성을 인정하게 해주는 하나의 조언자로 역할을 할 것이다.
미국의 조연 배우인 Mark Ruffalo 가 2002년 뇌종양의 일종인 청신경종(acoustic neuroma)을 극복하고 이야기했던 말이 기억난다.
My Brain Tumor Was a Blessing in Disguise. (내 뇌종양은 변장한 체 찾아온 은총이었다.)
피하고 싶고 더이상 경험하고 싶지 않은 수많은 치료하기 힘든 트라우마는 두가지의 길을 보여준다. 첫번째는 그 기억과 과거 때문에 자신에게만 집중해서 항상 회피하고 싶은 공포로 만들어 갈 수 있고 두번째는 자신을 버리고 자신에게 다가온 트라우마를 객관적으로 살펴보려고 하는 노력 속에서 오히려 타인에 대한 배려와 공감을 만드는 것이다. 오히려 자신의 고난과 아픔에 집중할 때 공동체 안에 자신이 공감할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은 새로운 도전이 되어줄 것이다.
그래서 좁게는 트라우마는 나와 비슷한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들을 연결시켜주는 연결고리이기도 하지만 트라우마를 통해 많은 사람들을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되어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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