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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사키 원폭 사망자 7만명 중 1만명이 징용으로 끌려온 조선인 노무자다.
후쿠오카 하카타역에서 나가사키역까지는 JR특급인 가모메열차를 이용하면 2시간이면 갈 수 있다. 나가사키행 기차는 새벽 6시부터 22시까지 30분 간격으로 있으니 숙소는 되도록 하카타역 근처에 구하는 것이 좋다. 나가사키는 당일 코스도 가능하지만 1박을 꼭 권한다. 근세 유적지가 가득하고 또 일본 3대 야경중에 하나로 손꼽히고 있어 하루를 머무는 것이 좋다. 후쿠오카에서 2시간밖에 걸리지 않아 당일로 왔다가는 사람이 많은 가보다. 호텔에 1박을 하면 주요관광지 50% 할인권을 준다.
참 JR패스만 있다면 규슈 전역을 편하게 다닐 수 있으니 효율적으로 사용하라. 3일권은 6만원 5일권은 8만원정도. 교통비가 비싼 일본에서 이 패스가 요긴하다.
신간센이 KTX라면 이 특급기차는 우리네 새마을호 쯤 된다. 시설은 훨씬 깔끔하고 부대시설을 잘 갖추었다. 바닥은 나무판넬이 깔려 있어 느낌이 좋고 의자도 아주 편하다. 시속 150km로 달린는데 출근시간때는 사람이 많지만 공업도시 사가를 지나면 한산하다.
일본의 기차가 참 맘에 드는 것은 완행이든 급행이든 조종석을 휜히 볼 수 있도록 유리로 막아 놓았다. 승객이 승무원의 일거수 일투족을 다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감히 있을 수 없는 일. 기차의 정면을 바라보니 시야가 탁 트여 좋다.
칸 중간에는 이런 쉼터를 갖추고 있다. 창밖을 보며 경치감사하기에 좋다. 특히 나가사키행 본선은 해안선을 따라 가기 때문에 16:9 창문에서 바라본 경치가 그만이다.
저 책자를 꺼내면 JR규슈 철도 노선도가 있으니 그 지도를 참조하면 도움이 된다. 역을 짚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름 모를 역을 지날 때 '여정'이라고 쓰인 석비를 만났다. 혼자 여행해서 그런지 이 글씨를 보니 괜히 외로움이 밀려온다. 같은 한자 문화권이어서 그런지 참 편하다. 만약 한글로 써있다면 일본인과 중국인들이 의미를 알겠는가?우리가 한문을 배워야 할 이유다.
비전녹도를 지나면 기차는 해안선을 따라간다. 안쪽 깊숙히 자리잡은 有明海가 호주처럼 잔잔하다. 해안선을 휘감으며 기차는 내 달린다. 바다 풍경이 끝내주니 차창 보다는 복도에 나와서 경관을 감상하길 바란다.
해안선과 도로 그리고 철로가 나란히 놓여 있다. 잠을 자기에는 풍경이 곱다.
차창 풍경을 놓치지 마라. 인터넷에 등장했던 과일 정류장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기차에서 바라본 과일 버스정류장. 코나가이 마을 해안도로변 버스정류장은 딸기, 토마토, 멜론, 수박, 오렌지 모양을 하고 있는데 코나가이 마을의 특산물이란다.
후쿠오카 출발한지 2시간만에 나가사키역에 도착했다. 다음에는 해안을 달리는 SEA SIDE LINER를 타고 천천히 해안선을 더듬고 싶어졌다.
국제선 비행기까지 있는 나가사키역이지만 역사는 의외로 작고 소박했다. 우리나라 조치원 역인줄 알았다.
기차를 기다리며 책을 읽고 있는 중년여인. 기차를 기다리며 독서에 열중하는 장면을 참 오랜 만에 본 것 같다.스마트 폰이 문제야.
철로가 끊어진 곳 뒤쪽이 나가사키역이다.. 그 뒤로 출구. 오른쪽이 관광안내소 겸 대합실이다.
예전에 이곳에 다리가 있었던 모양이다.
역 대합실은 철로를 바라보게 했다. 플랫홈으로 걸어오는 사람을 볼 수 있도록 방향은 철로를 향했다.
그 뒤쪽에 관광안내소. 여기서 한국어로 된 관광 지도를 꼭 챙겨라. 상세한 추천코스, 여행지 소개, 전차노선표 등 알짜배기 정보가 가득 담겨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 전차 1일 승차권(500엔)을 구매하라. 하루종일 무제한으로 탈 수 있는데 관광지 대부분은 전차로 갈 수 있다.
작고 아담한 나가사키역을 나왔다. 처음에는 방향감각을 잃었지만 전차를 보고 대충 파악이 되었다.
육교를 건너면 전차. 나가사키의 소소한 재미는 전차. 다양한 전차를 볼 수 있는데 가격도 저렴하고 시내 구석구석을 누비기 때문에 나가사키 여행의 발 역할을 한다.
운 좋으면 1910년대 전차까지 탈 수 있어 그야말로 전차박물관이라 해도 좋을 듯 싶다. 구간에 관계없이 1회 120엔
내부는 우리네 전철을 닮았다. 일본의 보통사람들의 표정을 볼 수 있어 좋다.
나가사키는 치안도 좋고 한글 안내판이 있어 혼자 자유여행해도 걱정은 없다. 우선 노면전차를 타고 차이나타운 근처 나가사키 워싱턴호텔에 짐을 풀었다. 일본호텔은 싱글룸이 많기 때문에 저렴하게 호텔을 구할 수 있다.
어디부터 갈까 고민하다가 나가사키 하면 떠오르는 것이 뭘까 생각했다. 기껏 생각해 낸 것이 나가사키 짬뽕. 호텔이 차이나타운 근처에 있어 식당을 찾았지만 줄은 선 사람이 많아 포기했다. 첫 여행지부터 식당에서 줄을 설 수 없는 노릇. 그다음 나가사키 하면 떠오른 것이 원폭. 원폭이 투하된 세계평화 공원을 찾았다. 나가사키역에서 전차로 20여분 떨어져 있으니 가장 먼 여행지가 아닐까 싶다.
나가사키 원폭사망자 7만명중에서 1만명이 징용으로 끌려간 조선노무자 1945년 8월 6일 사이판 옆 티니안 섬에서 출발한 B-29기 한 대는 히로시마 상공을 날아 리틀보이를 투하해 600미터 상공에서 폭발했다. 폭발을 바라본 사람들은 눈이 멀었고 3천도의 폭열이 발생했다. 엄청난 폭풍으로 인해 히로시마 시민 14만명이 사망했고 건물은 흔적없이 사라졌다.
일본이 즉각 백기를 들 줄 알았지만 일본 군부는 그 심각성을 파악하지 못한 것 같다. 어느 누구도 일본이 항복해야 한다고 의견을 내는 사람이 없었다. 무시무시한 핵폭탄이라고 여기지 않고 고성능 폭탄으로만 생각해 두꺼운 면옷만 입으면 피해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일본이 즉각 항복하지 않자 미국은 또 한 방의 원자탄을 준비했다. 그로부터 3일 뒤인 8월 9일. 남태평양 티니안 기지를 출발한 B-29기는 후쿠오카시 서쪽에 위치한 공업도시 고쿠라(小倉)를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구름이 많아 시계가 확보되지 않자 기수를 2번째 후보인 나가사키로 돌린다. 날씨 때문에 고쿠라와 나가사키의 운명은 뒤 바뀌게 된다. 만약 그날 나가사키에 비가 내렸다면 역사는 또 어떻게 바뀌었을까? 나가사키 역시 구름이 많았지만 한순간 구름이 거치자 공장지대가 나타났고 미쓰비시 나가사키 병기 제작소가 내려다 보였다.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2분. 고도 9천미터 상공을 지난 B-29기는 2번째 원자폭탄인 뚱보(fat man)를 투하했다. 마쓰야마 마치 상공 500미터에서 하늘을 찢는 듯산 섬광이 터지자 이 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나가사키 시민 24만명 중 30%인 7만 4천명 여명이 죽었고 시내 건물 34%가 전소되었다.
본토 사수를 외치며 끝까지 항쟁 하겠다는 일본천황은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포했다. 15년 동안 수천 만명의 인명 피해를 입혔던 태평양 전쟁은 이렇게 종식되었으며 그 덕에 우리는 해방의 기쁨을 맛보았다.
그렇다면 일찍이 태평양에서 승기를 잡은 미국이 왜 원자 폭탄을 사용했을까? 남태평양의 주력군이 있는 기지에서 일본 본토까지는 5000 km거리다. 가는 길목에 자리한 섬들은 모두 일본군들이 점령하고 마지막 항전을 치르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이걸 무시하고 본토를 진격하다가는 뒤에서 역공을 당할 수 있기때문아. 할수 없니 섬에 상륙해 각개격파를 하며 본토로 진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미군이 섬 상륙을 하면 최후의 1인까지 죽음으로 싸우겠다는 옥쇄작전은 연합군에게 엄청난 타격을 주었다. 천황을 위해서 옥처럼 아름답게 부서지겠다." 죽기를 각오하며 달려드는 모습은 공포 그 자체였다. 거기다 항공모함을 향해 직접 돌격하는 가미가재가 있었고 섬 곳곳에 어뢰를 숨겨 미군을 괴롭히고 있었다.
또한 2차 대전과 태평양 전쟁을 치르면서 미군 사망자가 워낙 많아 전쟁을 계속 이어나가기에는 부담이 컸다. 만약 미군이 일본 본토로 상륙했다면 또다시 수십 만명의 미군의 희생을 치뤄야 했고 세균전과 독가스전까지 벌어진다면 일본 본토는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으로 바뀔 것이다.
때마침 1945년 7월 16일 원자폭탄 실험이 성공리에 끝냈다는 소식을 접한 투르먼 대통령은 전쟁 종식을 위해 결심을 한다. 이때 원폭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미군 수십만명과 일본인 수백만명이 희생되었을 것이며 일본 본토는 사람이 살 수 없는 불모지로 바뀔 것이다.
일본 역시 본토의 결사항전에 승산이 없게되면 한반도로 넘어와 항전을 이어나갔을지도 모른다. 우선 제주도부터 박살이 날 것이다. 그렇다면 한반도는 역시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비켜갈 수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두 도시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전쟁은 빨리 끝날 수 있었고 일본인들도 살아남지 않았나 싶다. 당시 일본의 국가예산보다 더 많은 돈을 투자해 원폭을 개발한 맨하탄 계획. 그 성과를 과시할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훗날 투르먼은 또한번의 핵을 사용할 기회가 있었다.한국전쟁 종식을 위해 한반도에 핵무기를 사용했다면 대한민국의 운명은 또 어떻게 바뀌었을까? 상상하기도 싫은 역사적 가정이다.
어쨌든 그후 미국과 소련은 전 인류를 수십번 멸망시킬 핵무기를 가지고 있고 북한의 김정은의 손아귀에도 이 무시무시한 것을 쥐고 있으니 결코 남의 일이 아닌 것 같다.
원폭 투하의 희생은 비단 남의 나라 문제가 아니었다. 나가사키에 강제 징용으로 끌려온 조선인 노무자가 7만명인데 이 중 1만명의 조선인이 원폭으로 희생되었다고 하니 통탄할 노릇이다.
나가사키 원폭의 아픔을 담은 평화공원은 이렇게 에스컬레이터가 놓여있다.청소년들이 반핵 공부를 우해 단체로 찾는다. 57년동안 초목이 나지 않는다는 이 땅에도 꽃이 만발한다
평화의 샘이 반긴다. 하늘에서 보면 비둘기의 날개짓 모양을 하고 있다. 온몸이 타 틀어갈 때 피폭자들이 외친 말이 "물을. 물을~" 라고 외치며 울부짖으며 죽어갔다고 한다. 그 애통한 영혼들의 목을 축이기 위해 분수를 만든 것이다.
원폭의 참상을 담은 조각물이 서 있다.
원폭피해자 위령비 앞 조형물이다. 원폭피해자들이 하늘에서 평화의 종을 잡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들을 위해 꽃과 생수 그리고 종이학이 놓여 있다.
나가사키 형무소인 우라카미 형무서터. 평화공원은 우라카미 형무소 터에 지었다. 건물만 13,000평방 미터로 원폭이 떨어진 곳에서 불과 100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아 이곳의 수형자와 직원들 134명 전원이 즉사했다. 안타깝게도 수감자중 13명의 조선인과 32명이 중국인도 함께 폭사했다.
높이 9.7m 평화기념상 하늘을 가리키는 오른손은 원폭의 두려움을, 왼손은 평화를 , 눈을 지긋이 감은 얼굴은 원폭피해자의 명복을 비는 마음을 나타내고 있다. 나가사키 출신 조각가인 기타무라 세이보의 1955년 설치된 작품이다.
평화기념상 양옆은 추념탑이 서 있는데 아 안에는 평화를 상징하는 종이학이 수천 마리가 들어있다.
평화기념상 앞 마당에는 세계각국에서 보내온 조각상. 당시 참상을 보여주고 있다.
11월 말임에도 근사한 단풍을 만났다. 희생자의 피눈물처럼 보여 가슴을 여미게 한다.
원폭낙하중심지 바로 이곳이 원폭이 떨어진 장소. 원폭투하 중심지를 기준으로 동심원을 그려놓았다. 그 한가운데 위령탑을 세웠다. 이 탑의 상공 500미터 위에서 원자폭탄이 폭발했다.
일본 청소년들의 방문이 줄을 잇는다.
원폭중심지 바로 옆에는 우라카미 성당 기둥이 서 있다..1925년 완공된 성당은 동양에서 가장 큰 성당이었지만 원폭투하로 이 기둥 남긴채 사라졌다.
모자상의 제목은 ' 1945.8.9 11:02' 죽은 아이의 시신을 내려다보는 어머니의 표정은 세상의 모든 고통을 지고 있는 것 같다. 현대판 피에타
전기통신 노동자 원폭 위령비. 위령비 앞에는 이렇게 생수가 놓여 있다.
나가사미원폭 조선 인희생자 위령비 원폭 투하의 고통은 비단 이웃 나라 문제가 아니었다. 나가사키에 강제 징용으로 끌려온 조선인 노무자가 7만명인데 이 중 1만명의 조선인이 원폭으로 희생되었다.
강제연행된 징용, 노동자 피폭사망 조선인...한자를 봐도 그 비극은 알 수 있겠다. 사망자 7만명 중에 1만명이 조선인이란다. 남의 나라에 끌려온 것도 억울한데 원폭으로 죽어야만 했다. 세상에 이럴수가~~
그 옆에 놓여진 북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귀국기념 식재. 1959년 12월 8일. 북한에서도 이곳에 와서 나무를 심은 모양이다. 남과 북이 따로 위령비가 놓여 있다. 또다른 분단을 보는 것 같아 가슴 아프다.
조선 위령비에 대한 일본인의 글이 적여 있다.
패전당시 징용으로 끌려온 조선인이 230만명. 나가사키현에만 7만명이 거주했고 이들은 미쓰비시의 조선소, 제강소, 전기, 병기공장에서 강제 노동을 당했다고 한다. 원폭 투하당지 2만여 명이 피폭당했고 그중에서 1만명이 폭사했다고 한다.
"지난 시기 일본이 조선을 무력으로 위협하여, 식민지로 만들고 그 민족을 강제로 끌고ㅘ, 학대 혹사하며, 강제 노동 끝에 비참하게도 원폭에 맞아 죽게한 전쟁책임을 그들에게 사과함과 동시에 이 세상에서 핵부기의 완전철폐와 조선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염원한다."
일본인이 통절한 마음으로 사죄하는 글 같다. 오늘날에도 대다수의 일본인들이 이런 마음이길 바랄 뿐이다.
나가사키 원폭 자료관은 원폭의 참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전시관은 나선형을 따라 지하로 내려가게 된다.
폭심지에서 800미터 떨어진 민가에서 발견된 시계라는데 당시의 참상을 말해주득 종이장차럼 구겨졌는데 11시 2분에 시간이 멈춰 있다. 11시 2분 딱 순간에 7만명이 한꺼번에 죽었으니 이 찰나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희생될 수 있을까
박살이 난 우라카미 성당의 남측벽면으로 무너져 내린 돌을 모아 복원해 놓은 것이다.
성당의 천사상이 더 슬프게 만든다. . 성당에 대피한 7천명도 함께 죽었다.
전시실은 나가사키에 투하된 fat man의 실제크기 모형을 볼 수 있다. 플루토늄탄으로 그 위력이 대단했다. 인류가 실제 전쟁에서 사용했던 마지막 핵폭탄이다. 전시실에는 폭발당시의 상황과 그 아픔을 볼 수 있다.
폭심지에서 700미터 떨어진 곳에서 발견된 숯덩어리 도시락. 도시락 뚜껑에는 여중생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반 아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가슴 아프게 해준다.
녹아 버린 사이다 병, 당시 고열을 말해준다. 숯덩어리가 되어 버린 시신 사진도 불 수 있다.
유리가 녹아 버렸는데 직접 만져볼 수 있다.
마지막 관은 현재 전세계 핵무기 보유현황을 볼 수 있다.
다른 비극이 재현되면 안되겠다.
세계각지에서 온 종이학
미당에서 평화모자상을 볼 수 있다.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 공포이 질린 얼굴을 볼 수 있다.
평화기원 소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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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인간의 잔악한 야욕으로 인해 벌어지는 전쟁이 더이상 일어나질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집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