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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한글)은 누가 만들었는가? 세종대왕이 새로 만들었다.
훈민정음(한글)은 누가 만들었나? 두 말할 거 없이 세종대왕이 손수 처음 만든 것이다. 그 만드는 과정에서 아들딸인 문종이나 세조, 안평대군, 정의공주 같은 왕자와 공주가 도왔고, 글자를 다 만든 뒤에 널리 펴고 쓰게 하는 일을 몇 학자들이 도와드렸지만 세종대왕이 머리를 쓰고 하라고 챙겨서 한 일이다. 그 때 옛 책이나 글 어디에도 세종대왕이 아닌 다른 사람이 만들었다는 증거나 이야기는 없고 왕자와 공주가 도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한글을 만드는 데 가장 많이 힘썼다는 신숙주나 성삼문 들이 쓴 글에도 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이 친히 만들었다고 쓰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한글을 세종대왕이 새로 만든 게 아니고 옛날부터 있던 가림토 글자를 본 딴 글자라는 이도 있고, 일본의 신대문자란 글자를 본 딴 글자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또 교과서에도 세종대왕이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만들었다고 가르치고 있다. 모두 잘못된 말이다. 한글을 세종대왕이 만든 글자가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은 한글과 세종대왕을 우습게 본 사람이거나 아니면 제대로 알 지 못하고 하는 말이다. 이들의 주장엔 세종대왕이라는 전제군주가 만든 걸 마땅치 않게 여기거나, 한글 쓰기를 싫어하고 가로막으려는 이들이거나, 종교와 일본과 관련이 있는 이들로 보인다. 하나씩 따져보자
1. 학교 교과서에서 “훈민정음은 세종 시대 성삼문과 신숙주 같은 집현전 학자들과 만들었다.”고 써있고 가르치고 있다. 책방에 있는 ‘세종대왕’이라는 위인전에도 그렇게 써 있다. 큰 잘못이다. 모두 쓰레기통에 버리고 다시 써야 한다. 젊은 집현전 학자들은 한글이 다 만들어진 뒤에 널리 알리고 펴서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도록 세종대왕을 도왔을 뿐이다. 나이 든
집현전 학자들은 훈민정음을 만드는 것과 쓰는 걸 막았다.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와 학자들이 반대 상소문을 낸 것만 봐도 분명하다.
최만리와 여러 집현전 학자들이 낸 상소문에 "굳이 언문을 만들어야 한다 하더라도 마땅히 재상에서 신하들까지 널리 상의한 후 행해야 할 것인데 갑자기 널리 펴려 하시니 그 옳음을 알지 못 하겠나이다."라는 말이 있다. 세종이 집현전 학자는 말할 거 없고 다른 신하들과도 미리 의논하지 않고 혼자 만들었다는 말이 된다. 또한 최만리와 집현전 학자들도 훈민정음이 다 만들어질 때까지 몰랐다는 말이 된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여러 해 동안 애써 다 만든 것을 실제로 쓰기 위해 신숙주 들 젊은 학자들로 하여금 딴 나라의 말을 적을 수 있는 연구를 하고 증명하게 했을 뿐이다. 지금도 나이 든 사람들이 일제 한자혼용에 길들어서 새 글자인 한글만 쓰는 걸 싫어하듯이 그 때도 중국 한문에 찌든 원로학자들이 말썽이었다.
집현전 학자들이 훈민정음 연구와 활용에 애쓴 학자들 가운데 신숙주가 가장 일을 많이 했다. 그가 한일 가운데 중국 요동 땅으로 중국의 황찬이란 학자를 여러 번 만나러 간 일이 있다. 그런데 신숙주가 처음 요동에 간 해가 한글이 완성 된 4년 뒤인 1447년 1월이라고 한다. 또 신숙주가 과거에 급제한 게 1441년이고 그 이듬해에 일본에 갔다고 하며, 20대 젊은 사람이었다고 하니, 1443년에 완성된 한글 만드는 일을 할 시간이 없다. 성삼문도 신숙주와 비슷한 나이로 마찬가지다.
또 하나 정인지가 쓴 훈민정음 해례본에 “전하 창제(殿下創制) - 전하가 지으셨다”는 기록이 분명하게 있으나 그 때 어느 책에도 집현전 학자들이 만들었다는 기록은 없고, 오히려 창제와 반포를 반대하는 상소문을 집현전 학자들이 냈을 때 세종이 “너희가 운서를 아느냐? 또 너희가 사성 칠음과 자모가 몇인 줄 아느냐?”고 크게 꾸짖은 기록은 있다. 집현전 학자들보다 세종대왕이 더 말글에 관한 학식이 높았다는 말이다. 다른 학문도 마찬가지였을 줄 짐작된다. 그러니 꼼짝못한 것이다.
그러나 왕자와 공주가 도와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대왕의 딸인 정의공주가 출가한 죽산 안씨 족보에 “한글의 변음과 토착을 세종이 대군들에게 풀어보라고 하니 대군들이 못 풀어서 세종이 정의공주에게 하명하였는데 정의공주가 변음과 토착을 풀어 올리니 세종이 극찬하시고 상으로 노비 수백 구를 하사하셨다.”는 기록이 있다. 정의공주 묘소가 서울 수유리에 있다. 나는 2002년 한국어정보학회 임원들과 함께 그 무덤을 찾아가 “한글을 지키고 빛내겠다.”는 다짐을 한 일이 있다.
또 한글을 다 만든 뒤 그 활용을 위해 운회를 번역하는 일의 책임자로 세자와 왕자들을 임명했다는 걸 봐도 알 수 있다. 그 뿐 아니라 여러 곳에 세종과 문종이 함께 한글을 만들었다는 기록도 있고 세종과 왕자들이 식사를 하면서 한글 만드는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기록도 있다고 한다. 성삼문이 쓴 ‘직해동자습’이라는 책의 서문에 “한글을 만든 것이 세종과 문종이다.”라고 적고 있다고 한다. “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이 왕자와 공주들과 함께 만든 것이다. 집현전 학자들은 만든 훈민정음을 널리 펴고 쓸 수 있도록 세종을 도왔다.”로 바로 잡아야 한다.
2. 일본의 신대문자를 본 따서 만들었다는 말을 살펴보자. 이 주장을 하는 이들은 “일본 곳곳에 있는 신사(일본 신을 모신 곳)에 이 글씨로 쓴 부적이나 글이 있으며 일본인들이 신의 글자라고 부르고 있다.”는 이유를 내세운다. 일본 남쪽 시코쿠의 한 작은 마음 입구에 ‘가무나가라’라는 비석이 있는 데 마치 한글 자모를 풀어 쓴 것과 같다고 한다. 이 글씨를 일본인들은 신대문자라고 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 글자를 처음 소개한 책이 1800년대에 출판된 ‘신자일문전’이라는 책이란다. 그렇다면 한글은 1400년대에 태어났으니 그 400년 뒤에 쓴 것이다. 임진왜란 때인 1500년대에 한글을 많이 썼는데 그 때 우리 훈민정음이 매우 훌륭한 글자란 걸 안 어느 일본인이 신기한 한글을 보고 가서 부적으로 썼고 400년 뒤에 자기 글자인 거처럼 조작한 것일 수 있다고 본다.
또 이 신대문자가 비석뿐 아니라 청동 거울, 청동 검, 부적 등에 많이 써 있는데 한글이 태어나기 이전에 있던 것이라는 게 명확하지 않다고 한다. 더욱이 우리나라에도 옛 부적에 한글 자모와 비슷한 글자 모양이 있다며 고조선 때 쓰던 글자라고 한다지만 그 만든 연대가 한글이 만든 뒤라고 한다. 어쩌면 그 부적을 일본에 흘러갔을 수도 있다. 신대문자를 소개한 책보다 훨씬 앞에 만든 훈민정음은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어떤 글자인지 자세하게 쓴 조선왕조실록이나 훈민정음 해례본 등 분명하고 자세한 기록이 있는 데 어찌 뒤늦게 다른 나라 사람이 꾸며낸 책과 부적을 더 믿는지 모르겠다.
3. ‘가림토’ 글자에 대해 알아보자. 우리 옛 조상들이 가림토 글자를 만들어 썼으며 그 증거가 만주에 있다는 말을 하고 있다. 가림토 글자가 있었다는 말은 한단고기라는 책에 써있다고 한다. 그런데 한단고기라는 책 또한 근래에 쓴 책이고 만주에 있는 비석에 있는 글씨도 만주족인 쿠르트족의 글씨란다.
만주에 있는 가림토 글자라는 비석의 글을 1930년대 일제 때 탁본 한 것을 이상백 교수가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 탁본에 우리 한글과 비슷한 글자가 더러 보여서 한글의 어머니 글이라고 이 교수는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탁본을 동아시아 옛 글자를 연구하는 송기중 교수의 도움을 받아 이 글자에 대해 확인해 보니 가림토가 아니었다고 2년 전 한국방송이 방영한 일이 있다. 이미 해석까지 어느 정도 완료된 투르크 글자였단다. 그런데 이 투르크 글자는 동북아시아 지역의 소리글자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이 투르크 글자는 투르크족들이 쓰던 글을 12세기말에 몽고족들이 받아들여 썼고, 그걸 16세기 말에 만주족이 써서 만주글이 되었다고 한다.
다음에 가림토 글자 이야기가 나온 한단고기란 책에 대해 알아보자. 누리통신에 “ 한단고기는 평안북도 선천 출신의 계연수(桂延壽)가 1911년 초기에 편집하였다. 계연수로부터 1980년에 공개하라는 말을 들었다는 제자 이유립이 1979년에 영인하였다. 이 책을 처음 번역한 사람은 일본인 카시마 노보루[鹿島昇]이다.”고 써있다.
그런데 계연수라는 이가 어떤 사람인지도 불명확하고 이 책을 일제 시대에 한문으로 편집했는데 이 책을 처음 번역한 이가 일본인이며, 이 책의 내용을 근거로 특정 집단과 종교에서 신봉하고 퍼트리고 있다. 이 책 내용에 중국 땅도 우리 조상이 지배했다는 등 여러 이야기가 우리 마음에 꼭 들어 최근에 일본과 중국이 우리 역사를 짓밟는 짓이 일어나면서 젊은이들의 민족 자긍심을 자극해 관심과 인기가 매우 높다고 한다. 꽤 똑똑하다는 사람들도 이 말이 진리인 거처럼 떠드는 걸 보면서 답답해 한 일이 있다.
그러나 이 책이 나온 때나, 쓴 사람이나, 내용이 한글을 세종이 만들었다는 기록이 분명한 조선왕조실록이나, 훈민정음 해례본에 비해 훨씬 뒤에 나온 것이며, 꾸며서 편집한 것이고, 일제시대에 나온 것이라는 데 그 믿음이 떨어진다. 나 개인은 일본 냄새가 심하게 나서 더 불신한다.
아주 옛날에 중국에 뜻글자인 한문이 있고, 그 주변 민족인 만주족이나 몽골족이 자기네 소리글자를 만들어 쓴 건 사실이나 한글은 아니었다. 더욱이 특정 무리가 일본의 신대문자나 만주의 가림토 비석, 한단고기의 가림토 글자를 짜집기해서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든 게 아니라고 퍼트리는 것을 우리 젊은이들이 무조건 믿고 따르는 건 참으로 위험스런 일이다.
내가 2002년 몽골 초원에서 터키의 말갈족이 1800년 전에 몽골을 지배하고 세웠다는 비석의 글씨를 보니 영문도 한문도 아닌 데, 보는 사람의 생각에 따라서 로마자나 한글과 비슷한 글자를 찾을 수 있었다. 나는 그 때 만주에 있는 비석에 한글의 원조인 가림토 글자가 있다고 말하는 생각이 떠오르며, 내가 “한글의 원래 글자가 몽골에 있는 옛 비석에 있다.”고 말하면 그 말이 세상에 퍼질 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몽골 초원에 있는 비석 글 사진)
세계가 인정하는 조선왕조실록과 훈민정음 해례본에 뚜렷하고 확실한 기록이 있는 ‘훈민정음 세종대왕 창제 사실’을 미신과 같은 부적이나 비석, 소설 같은 꾸민 책을 근거로 부인하면 안 된다. 세종대왕은 능히 새말을 만들만한 학식과 머리를 갖춘 분이고 뜻과 마음이 있는 분이었다. 스스로 만들고 쓰게 한 역사 기록이 있다. 세종 때 측우기, 해시계, 화약, 법전, 아악책 들, 새로 만들고 발명한 게 많은 데, 이 모두 세종이 지시하고 감독해 만들었지만 세종이 만들었다고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만들었음을 기록하고 있으나 한글만은 분명히 세종대왕이 만들었다고 쓰고 있다.
그렇다면 세종은 왜 한글을 만들려고 했던 것일까?
이것에 대한 분명하고 자세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세종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단서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삼강행실도다. 이 책이 만들어진 동기는 세종 10년에 있었던 일 때문이다. 진주사람 ‘김 화’가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에 충격을 받은 세종은 모두 자신의 잘못이라고 자책하며 효자 충신 등의 사례를 담은 행실도의 간행을 지시한 것이다. 그러나 세종은, 글자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들이 그림만으로는 제대로 된 뜻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며 백성들이 글을 모르는걸 안타까워한다. “한문은 백성들이 배우고 읽기 힘드니 쉽게 읽을 수 있는 읽고 쓰기 쉬운 글자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한 일이 있다. 쉬운 글자 창제의 필요성을 생각하는 최초의 언급이다.
그리고 10년 뒤, 훈민정음 서문에서 “글을 모르는 어리석은 백성을 위해 새 글자를 만드니 잘 쓰기 바란다.”는 말이 나온다. 삼강행실도에 백성이 알 수 있는 글자를 붙이고 싶었던 세종대왕, 그러나 신하들의 반대로 사업은 중단되고 훗날 성종 때 이 책은 간행될 수 있었다. 한글 삼강행실도가 빛을 보게 되는 것은 성종 대에 이르러서다. 삼강행실도를 만들려는 것도 신하들이 반대했으니 새 글자인 한글을 만드는 일은 신하들이 더 가로막았을 것이다.
세종이 불쌍한 백성들을 끔찍하게 생각한 것을 알 수 있는 일이 또 있다. 허술한 감옥에서 노인과 어린 죄수들이 추위에 고생이 많은 것을 보고 감옥소를 새로 짓게 한 것이다. 또 법을 몰라 죄를 짓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 법전을 만들고 다듬은 일이다. 권위와 강압으로 정치를 한 게 아니라 법과 사랑으로 백성을 가르치며 다스린 것이다. 한글 창제는 세종이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신하들 몰래 비밀을 지킬 수 있는 자식들을 데리고 10여 년 동안 애써서 만든 글자로 보인다.
궁궐 안에 불당을 짓는 일, 한글 삼강행실도는 신하들에 눌려 뜻대로 하지 못했지만, 훈민정음만은 백성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마음과 뜻이 너무 강해서 신하들이 안 된다고 해도 굽히지 않고 널리 알리고 쓰게 할 수 있었다. 옳은 일엔 뜻을 굽히지 않고 밀고 나가는 지도자의 용기와 자세는 국민을 끔찍하게 사랑하는 마음과 함께 오늘날 정치인이 본받을 일이다.
왜 글자의 이름을 훈민정음이라고 했을까?
새로 만든 글자 이름을 왜 ‘조선글’이나 ‘우리글’이라고 하지 않고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했을까 의문이 생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짐작이 간다. 왜 그렇게 이름을 지었는지 말하지 않았으니 짐작할 수밖에 없다.
먼저 ‘훈민’이라고 한 것을 짐작해보자. 앞에 쓴 한글을 만든 까닭을 살피면서 세종대왕이 ‘백성을 사랑하고 마음’을 알 수 있었다. 글자를 몰라 법을 읽지 못해 죄를 짓는 것까지 안타까워하면서 백성들에게 글자를 가르치고 싶어하는 마음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새 글자를 만들고 그 이름을 ‘조선글자’라 하지 않고 “백성을 가르친다”는 뜻을 담은 ‘훈민정음’이라 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음에 왜 ‘글자’ 나 ‘문자’라 하지 않고 ‘정음(正音)’이라고 했을까? 난 여기에 중국과 중국의 한자(漢字), 한자를 섬기는 신하와 학자를 의식해서 정음이라고 했을 거로 본다. 중국 글자에 상대하는 새로운 글자라고 하지 않고 “말소리와 새 소리까지 적을 수 있고, 중국말과 한자까지 적는 소리글자”라는 뜻이 담겼다고 본다. 세종대왕의 지혜와 슬기가 담긴 이름이다.
또 세종대왕은 소리에 보통이 넘는 지식과 능력을 가진 분이었다. 옛 악보에 소리의 높낮이를 적은 서양 악보와 소리의 길이를 적은 세종대왕 악보가 있다고 한다. 또 세종대왕이 훌륭한 정치를 한 것은 귀가 밝고 백성의 소리를 잘 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소리를 잘 듣고, 잘 알고, 중요시한 세종대왕의 남다른 지식과 생각이 관련된 것으로도 짐작된다.
글자를 모르는 백성들도 효도가 무엇인지, 어떤 짓을 하면 죄가 되고 어떤 처벌을 받는지 알고 법을 어기지 말고 바르게 살라고 지금 만화책 같은 책인 ‘삼강행실도’를 펴냈다. 그런 일이 있은 10년 뒤에 백성을 위한 새 글자를 만들었고 그 글자의 이름을 ‘훈민정음’이라 했다, 아마 백성을 생각해 삼강행실도를 만들 생각을 할 때부터 쉬운 우리 글자를 만들 생각을 하고 그 책을 펴내면서 10여 년 동안 우리 글자를 만들고 이름을 그렇게 지은 거로 보인다.
‘정음(正音)’이란 “우리말을 바르고 옳게 적는 글”이라고 훈민정음언해에 풀어 쓰고 있다. 그러니 백성들이 우리말을 바르고 옳게 쓸 수 있게 하려고 새 글자를 만들었다는 말이고 백성들이 이 글자를 가지고 우리말을 바르고 옳게 적어 공부하라는 뜻이 담긴 멋진 글자 이름이다. 모든 국민이 나라말을 우리 글자로 바르고 옳게 적을 때 지식과 정보를 쉽고 빠르게 주고받을 수 있으니 잘 부려쓰라는 큰 뜻이 담긴 이름이다. 세종대왕은 후손들이 이 글자를 배워 많이 쓰길 바라셨는데 오늘날 최만리를 닮은 일제 지식인들이 그걸 훼방놓고 있다.
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이 혼자 숨어서 만들었다.
그런데 훈민정음은 어떤 글자요 세종이 새로 만들었다는 기록은 있는데 왜, 언제부터 어떻게 만들었는지 기록이 없다. 그래서 한글은 고조선 때 있던 가림토나 일본의 신대문자를 본 떠 만든 것이지 세종대왕이 새로 만든 게 아니라는 등 꾸밈말이 성행하는 이유다.
만들 때까지 집현전 학자나 신하들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세종이 왕자와 공주와 그 글자에 대해 의논한 기록은 있으나 학자나 신하와 의논했다는 말이 없다. 만들 때 어떤 기관이나 관청도 없었다. 다 만든 뒤 그것을 쓰게 하려고 정음청과 언문청을 만든 일은 있었다. 다 만든 뒤 그걸 알리고 잘 쓰게 하려고 일에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 들이 참여한 기록만 있다.
그렇다면 세종대왕이 궁궐에서 그 아들딸하고만 의논하며 혼자 숨어서 만들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왜 그랬을까? 우리 글자를 만든다고 하면 중국과 중국 한문을 숭배하는 신하들이 못 만들게 막았을 것이니 혼자 만든 것으로 보인다. 세종대왕이 궁궐 안에 불교 법당을 지으려다가 신하들이 반대해서 못 지은 일이 그 증거다. 그 때 세종대왕은 중국 유교를 숭배하던 신하들이 출근도 안 하며 법당을 못 짓게 하니 그에 굴복하고 황희 정승에게 눈물을 흘리며 서운해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니 우리 글자를 만든다면 유학자들이 그대로 두지 않았을 것이다. 다 만든 뒤에도 집현전 학자들이 발벗고 우리 글자를 만들고 쓰는 게 잘못이라며 막아서 그들을 감옥에 가두기까지 한 일이 있다.
그러니 이름도 ‘글자’라 하지 않고 ‘백성을 가르치는 소리’라고 한 것이다. 기가 막힌 일이다.
그런데 오늘날 이 나라를 이끌고 지배한 대통령이나 재벌들은 이 한글을 헌신짝 보듯 하고 있다. 영종도에 외국인이 이 땅에 들어오는 공항을 지으면서 온 국민이 ‘세종 공항’이라고 하자고 하는 데 김영삼 대통령은 자기를 따르는 인천시장이 ‘인천공항’이라고 하자고 하니 국민에게 광고까지 내고 공모해 최종 선정된 ‘세종 공항’은 내버렸다. 그 한글을 만든 날을 공휴일에서 빼고 짓밟는 어리석은 대통령과 재벌이 있다. 한글만 쓰지 말고 일본처럼 혼용하자는 대통령과 총리가 있다.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는 장관이 있다.
세종대왕에 견주면 참으로 못나고 바보 같은 이들이다. 내가 권력을 가진 대통령이고 돈이 많은 재벌이라면 세계인에서 가장 큰 세종대왕 기념관과 한글 박물관을 짓고 온 세계인에게 자랑하고 보게 하겠다. 우리를 자랑하고 국민들이 자긍심을 갖고 살게 하고, 세계인을 상대로 큰 돈벌이도 되고 가르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강대국과 그 숭배자들 눈을 피하려고 숨어서 우리 글자를 만든 세종대왕 같은 노력은 없더라도 만든 글자도 안 쓰는 오늘날 정치인과 학자가 한심하다.
이 땅의 조상들이 그림문자, 울산 반구대 암각화 [蔚山盤龜臺岩刻畵]
우리 조상들이 문자를 사용한 흔적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일 것이다.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이 문자가 생기기 전, 문자를 사용하기 전인 신석기에서 청동기에 그림으로 자신들의 생각과 바람을 동물 모양과 함께 삶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울산 언양읍 태화강 가 바위에 새긴 육지 동물과 바다고기 모양 그림이지만 많은 이들이 문자의 조상인, 그림 문자로 보고 있다. 이 시대를 지나서 글자가 나왔을 것이고, 그림 대신 문자로 생각과 삶을 표현했을 것이다.
반반하고 매끈거리는 병풍 같은 바위면에 고래․개․늑대․호랑이․사슴․멧돼지․곰․토끼․여우․거북․물고기․사람 등의 형상과 고래잡이 모습, 배와 어부의 모습, 사냥하는 광경 등을 표현하였다. 이곳에 표현된 동물들이 주로 사냥 대상 동물이고, 이 동물 가운데에는 교미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과 배가 불룩하여 새끼를 가진 것으로 보이는 동물의 모습이 보인다. 이 암각화는 당시 사람들이, 동물들이 많이 번식하고 그로 인해 사냥거리가 많게 되기를 기원하면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2005. 05. 15 한겨레 제2창간 운동 추진
2005. 03. 28 서울방송(주)와 DMB 사업권 획득
2004. 07. 12 시민의방송(RTV)<한겨레 뉴스 브리핑> 방송 시작
2004. 05. 31 제1회 참언론상 수상
2004. 03. 04 한겨레 지령 5,000호 발행
2003. 11. 19 여성월간지 <허스토리> 창간
2003. 11. 09 한국신문제작(주)에서 한겨레 인쇄 시작
2003. 11. 03 공동배달회사 한국신문서비스(주) 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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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04. 28 공동인쇄법인 한국신문제작(주) 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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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05. 15 청암 송건호선생 흉상 제막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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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03. 02 영남 현지인쇄 시작(매일경제 왜관 공장에서 인쇄)
2002. 02. 23 위성방송가이드 <스카이라이프> 제작 및 판매 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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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01. 29 관계회사인 <한겨레아이티>가 <한겨레커뮤니케이션스>로 회사 상호 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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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12. 21 초대 대표이사 송건호선생 별세/사회장 거행
2001. 09. 29 사창간외보 <열린사람들>
2001. 01. 15 한국통신과 IMT2000컨소시엄 구성을 위한 계약 체결
2000. 05. 29 dot21 창간
1999. 12. 22 <인터넷한겨레>독립법인 설립
1998. 07. 01 <케이블 TV가이드>사업 개시
1997. 06. 09 한겨레 통일문화재단 설립
1996. 10. 14 <한겨레신문>에서 <한겨레>로 제호 변경
1996. 09. 10 독일 케바우사 신형 고속윤전기 1호기 설치
컴퓨터 신문제작 시스템 도입 가동
1995. 07. 11 <한겨레21>인터넷 웹서비스 시작
1995. 04. 24 영화, 영상 주간지 <씨네21>창간
1995. 03. 13 한겨레 문화센터 개관
1994. 12. 06 새 윤전기 발주
1994. 03. 16 시사주간지 <한겨레21>창간
1992. 09. 01 PC통신망에 <한겨레신문> 기사 제공 서비스 시작
1991. 12. 14 공덕동 사옥 입주
1989. 04. 14 북한방문 취재기획 관련, 리영희 논설고문 구속
1988. 05. 15 <한겨레신문>창간호 (32면, 50만부) 발행
우리는 지금 나라와 민족의 역사를 새로이 열어야 할 중대한 전환점에 서 있습니다. 인간의 자유와 기본권을 유린해온 오랜 독재체제를 청산하고 사회 구석구석에 만연되어 있는 비민주적인 요소들을 제거하여 국민이 주인되는 진정한 민주화를 실현시키고, 분단을 극복하여 민족의 생존권을 확보하여 생활의 향상을 이룩하는 한편, 사회정의를 실현하고 민족정기를 바로 잡
아 이 병든 사회를 건강한 사회로 바꾸어 놓아야 할 시급한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표현의 자유 속에서 참다운 민족문화를 꽃피게 하는 한편 비뚤어진 교육을 바로잡아 인간의 자주성과 창조성을 발휘케할 수 있는 교육을 실현시키는 것 역시 우리가 성취해야 할 주요과제입니다.
이러한 우리사회와 민족의 광범위한 과제는 국민 모두의 힘과 뜻과 지혜를 남김없이 발휘케하고 동원해 냄으로써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의 가장 강력한 수단의 하나가 누구나 자기의 현실과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민족적 언론임을 우리 모두가 다 아는 일입니다.
우리가 한세기에 가까운 언론의 역사를 두고서도 이제 새 신문을 창간하고자 하는 것은 이같은 민족적 역사적 과제가 참된 새로운 언론을 어느 때보다도 시급히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돌이켜보면 1896년 이 땅에 '독립신문'이 창간된 지 근 백년의 세월이 흘렀으나, 그동안 우리의 언론은 외세 아니면 독재권력의 억압으로 고난의 길을 걸어왔고, 진정 민족을 위한 자주적 언론을 갖지 못함으로써 오늘에 이르기까지 민주 민족언론의 숙원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새 신문의 창간을 결심하게 된 것은 이 땅에 언론매체가 부족한 때문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우리 사회는 백만의 부수를 주장하는 여러 신문, 97%의 보급률을 자랑하는 텔레비전을 포함하여 전국 방방곡곡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방송망과 수십만 부를 넘는다는 월간지와 주간지 등 수많은 언론매체를 갖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굳이 새 신문을 창간하고자 하는 것은 국민의 목소리와 민족의 양심을 대변하는 바르고 용기있는 언론이 없기 때문입니다.
일제 통치 밑에서 이땅의 언론은 외세의 억압으로 민족언론으로서의 구실을 못하다가 8.15해방을 맞았으나, 민족의 분단상황 속에서 온갖 탄압과 간섭 때문에 제 구실을 못해왔습니다.
특히, 5.16 군사쿠테타 이후 20여년 동안 이 땅의 언론은 이른바 근대화 바람 속에서 사실과 진실을 은폐, 왜곡하고 상업주의적인 보도에 급급함으로써 독재권력의 지탱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언론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독재에 항거한 양심적인 언론인들이 1975년과 1980년 언론현장에서 무더기로 추방당하고 투옥되는 시련이 계속되는 가운데 이 땅의 언론은 국민으로부터 '제도언론'이라는 불신을 받고 있습니다.
80년대 언론은 언론기본법이라는 법적 구제도 부족해, '보도지침'을 통한 권력의 일상적인 제작 지시로 거의 제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개탄할 일은 오늘의 언론은 이러한 통제 속에서도 이미 지난 날 보여준 바와 같이 언론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용기있는 저항정신을 보여주질 못하고 오히려 유유낙낙 권력측의 부단한 간섭과 규제에 순응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의 언론현실은 탄압의 결과라기 보다는 많은 경우 자진 협조의 결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언론다운 언론의 부재는 오늘의 언론인들의 도덕적 차원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권력의 정책적 의도하에 언론기업이 구조적으로 예속당해 이미 자주성을 획득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며, 한 둘 양심있는 언론인이 남아있다 해서 언론이 제 기능을 되찾을 수는 없습니다.
오늘과 같은 통제와 억압의 틀 속에서 언론이 저항다운 저항을 못하는 이유는 바로 그 원인이 여기에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오늘의 제도언론은 그 기업구조로 보아 비록 이 땅에 민주화의 꽃이 핀다해도 정치적 경제적 자주성을 견지하지 못한 채 필경은 권력의 입장에서 국민에게 진실을 전달하지 못하고 그들을 오도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새 언론의 창간을 통해 지금의 제도언론이 갖는 이같은 구조적 결함을 극복하고자 합니다. 이것을 위한 첫째 요건은 기존의 언론처럼 몇사람의 사유물이 되거나 권력에 예속되지 않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책정한 창간기금 50억원을 나라의 민주화를 염원하는 모든 사람의 참여로써 이룩하여 문자 그대로 국민이 주인되는 신문을 만들고자 합니다.
새 신문은 나라의 민주적 기본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며 민족적 고통에 동참하는 가운데 책임있는 편집을 다 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이런 근거로 해서 새 신문은 국민에 바탕을 둔 언론으로 성장할 것이며 따라서 민주적 가치와 사회정의를 지향하면서 사회의 정치, 경제, 문화 등 각 방면에 걸친 온갖 사실들을 언제나 일반 국민의 입장에서 숨김없이 공정하게 보도할 것입니다.
오늘의 제도언론이 보여주듯이 사소한 일은 크게 선정적으로 보도하고 정작 크고 중요한 정치, 경제, 사회의 문제들은 은폐하거나 왜곡 보도하여 국민들을 오도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노동자, 농민, 여성 등 기존언론이 소홀히 다루는 부분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보도할 것입니다.
신문이 걸어야할 정도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권력이 요구해 올지도 모를 부당한 간섭을 거부하고 '국민의 신문이며 신문인의 신문'이라는 주인의식을 가지고 공정하고 신중하고 그러나 용기있게 진실을 보도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한겨레신문이야말로 민주주의 사회에서 언론의 정도를 걷는 참된 신문임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우리는 앞으로 있을지도 모를 어떠한 장애도 극복하고 진실을 알리기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신문을 키워갈 것입니다.
우리의 이러한 굳은 결의는 국민 여러분의 적극적인 참여와 협조로써만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하며 오늘의 이 발기 선언대회가 역사적으로 길이 남게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3344 황희연 문화예술 서울
3343 황호영 교육 서울
3342 황현기 교수 서울
3341 황헌식 언론인 서울 1987 10
3340 황해순 시민 부산/경남
3339 황한식 교수 부산/경남
3338 황필호 교수 서울
3337 황패강 교수 서울
3336 황태갑
국민이 만든 국민의 한글신문, 한겨레신문 새로 나옴
1896년 대한제국 때에 서재필과 주시경선생 들이 만든 한글신문과 같은 한글신문이 1988년 5월 15일에 2723명의 국민이 돈을 내어 만들어졌다. 1975년 군사독재시절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자유언론수호 투쟁을 하다가 해직된 기자들과 1980년 전두환정권의 언론통페합 조지로 강제해직된 기자들 송건호(宋建鎬)를 대표로 하여 창간하였다. 1975년 동아, 조선일보 자유언론수호 투쟁 해직기자들과 1980년 정부의 언론통폐합 조치로 강제해직된 기자들을 중심으로 창간 주주를 모집해서 50억원을 모아 창간호를 50만부를 발행했다.
나도 한글만으로 신문을 만들고 민주와 통일을 목표로 바른 신문을 만들겠다고 해서 적은 돈이지만 창간주주로 참여했다. 그리고 내 그 때 국민학교에 다니는 세 자녀가 있었는데 그들도 다음에 한겨레를 보고 사랑하라는 뜻으로 주주에 참여시켰다. 한글만으로 가로짜기 신문을 만든 것은 혁명과 같은 언론개혁이었고 말글살이 발전이었다. 그 때 나는 주주 등록을 하면서 “한겨레 신문아! 빨리 네 모습이 보고 싶다!!”고 벅찬 마음으로 한글신문이 나오길 빌었고 창간호가 나온 뒤 신문에 입을 맞추기도 했다.
한겨레신문이 나오고 7년만에 중앙일보가 가로짜기로 신문을 만들고 10년 만에 거의 모든 일간신문이 가로짜기로 했으며 15년 쯤 되어선 거의 한글만으로 신문을 만들고 있다. 이제 머지 않아 모든 신문이 한글만으로 신문을 만들게 될 것이다. 한겨레신문은 언론 선구자요 개척자였다. 나와 함께 한글운동을 하던 공병우박사님도 적지 않은 돈을 내고 주주가 되었다. 그 기쁨과 고마움을 글로 쓴 일이 있다.
언론이 ,창사 기운이 일어나, 1987년 10월 발기인 3,342명을 대표하는 56명으로 창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1988년 2월 2만 7223명이 출연(出捐)한 50억 원의 기금으로 그해 5월, 8면의 창간호 50만 부를 발행함으로써 출범하였다.
'나라의 민주적 기본질서 확립과 민족의 통일을 목표로 국민에 바탕을 둔 자유롭고 책임있는 언론정립'을 설립목적으로 하고 '대중적 정론지'임을 자처한 이 신문은 그 후 16면으로 증면하였다. 종합일간지로는 최초로 한글전용과 가로쓰기를 실시하였다. 그해 9월 목표액 100억 원의 '한겨레발전기금 국민모금'에 착수, 1989년 5월 119억 원을 모금함으로써, 시설확장과 사옥신축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주식회사의 형태로 납입자본금은 198억 8000만 원이다. 2004년 현재 일 발행면수는 40면, 발행부수는 60만 부이며 대표이사는 고희범이다. 주재지역은 인천, 수원, 의정부 등 16개 지역이고 프랑크푸르트, 뉴욕, 도쿄, 오사카에 해외지사가 있다. 사옥은 서울시 마포구 공덕동에 있다.
제목 : 경총, 한글날 국경일 승격 반대
- 노사정위원회에서 휴일․휴가 제도와 함께 논의되어야
28일 경총(회장 金昌星)은 조선호텔에서 제128회 이사회를 개최하고, 국경일 에 관한 법률 개정(안)에 대한 경영계 입장 등 주요 안건에 대해 심의․의결(추인) 했다.
경총 등 경제5단체는 한글날 국경일 승격을 내용으로 국회에 계류중인「국경일에 관한 법률」개정(안)에 대해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히고, 동 경제계 입장을 21일에 국회에 전달한바 있다.
경총은 공휴일 1일 증가에 따른 추가적인 기업 부담액은 7463억 정도로 추정된다고 밝히면서, 특히 운영자금 조달마저 어려운 중소기업들에게는 엄청난 타격을 줄 것이라고 우려했다.
경총은 노사정위원회에서 주 5일 근로제 도입과 함께 휴일․휴가일수 관련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이와 별도로 공휴일 수를 늘리는 또 다른 법개정을 추진하는 것은 근로시간 논의구조에 큰 파장을 일으킬 것이라고 밝혔다.
경총은 한글날을 국경일로 승격시켜 민족문화를 개화시키는데 이바지하고 국민의 자긍심을 높이려는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IMF이후 국가 경쟁력 제고를 위해 형성된 일하는 분위기를 저해시킬 수 있고 또한 근로시간 감소에 따른 인건비 증가 등으로 인해 수출원가 부담이 가중되는 등 우리 경제여건에 비추어 볼 때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이 기업들의 공통된 의견이라고 밝혔다.
따라서 경총은 한글날을 국경일로 승격시키기보다는, 현행대로 한글날을 법정기념일로 유지하면서 한글날이 속한 한 주간을 가칭 '한글주간'으로 지정하여 한글날의 뜻을 기리는 다양한 행사를 통해서 그 의의를 되새기는 기회로 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 첨부 : 국경일에 관한 법률 개정(안)에 대한 경제계 의견(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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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일에 관한 법률 개정(안)에 대한 경제계 의견> - 한글날의 국경일 승격에 대하여 -
지난 2000년 10월 2일 신기남 의원외 32명이 발의한『국경일에 관한 법률』중 개정법률(안)이 현재 국회에 계류중입니다.
동 개정법률(안)의 취지가 한글날을 국경일로 승격시켜 우리 민족사에 가장 빛나는 날로 승화시킴으로써 민족문화를 개화시키는데 이바지하고 국민의 자긍심을 드높이고자 하는 것임에 충분히 공감합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 경제가 본격적인 회복기에 접어들지 않았고, 수출마저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열심히 일하는 분위기를 더욱 확산시킬 필요가 있음에도 공휴일수를 하루 더 늘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기업들의 문제 제기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에 경제5단체는 동 개정법률(안)과 관련된 기업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다음과 같이 제출하오니 적극 반영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다 음 -
○ 한글날을 국경일로 승격하는 규정은 현재 우리 나라 경제사정을 고려할 때 삭제하여『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현행대로 유지해야 함.
개정(안)
경제계(안)
제2조 국경일은 다음 각호와 같다.
1. 3․1절 3월 1일
2. 제헌절 7월 17일
3. 광복절 8월 15일
4. 개천절 10월 3일
5. 한글날 10월 9일
제2조 국경일은 다음 각호와 같다.
1. 3․1절 3월 1일
2. 제헌절 7월 17일
3. 광복절 8월 15일
4. 개천절 10월 3일
5. <삭 제>
< 이 유 >
○ 한글날을 국경일로 할 경우 산업현장에는 휴무일로 생산이 중단되는 시간이 24시간 더 늘어남으로써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된 '일하는 분위기'를 다시 저해시키고, 정상 근로시간 감소에 따른 인건비 등 수출원가 부담 가중등 우리
주시경의 한글만 쓰기를 반대한 자산 안확
문화관과부는 국학자 자산 안확(安廓.1886-1946)을 2003년 1월 ‘문화의 인물’로 정해 한자혼용을 주장하는 한국어문교육연구회(회장 강신항) 주최로 학술 강연회를 열고 그를 기리는 행사를 성대하게 열었다. 그런데 주시경은 나라에서 온 국민에게 본 받고 받들라고 내세우는 데는 문제점이 많은 인물이다.
그는 일제가 이 땅을 넘보던 1886년에 서울에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독학하다가 일제 때인 1914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日本大學(일본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 그는 말글문제엔 주시경과, 역사 관점에선 신채호와 반대 주장을 했는데 그 바탕이 일제 교육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주시경과 신채호는 민족주체학문인 반면 안확은 식민교육에 의한 사대주의 언어관과 식민역사관에서 그런 서로 다른 주장을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안확이 훈민정음이 소리, 음악정리에 기초를 둔 것이라고 하는 악리기원설(樂理起源說)을 제시하면서 일본인들이 악의으로 주장한 범자(梵字)모방설이나 몽골 글자 모방설 등을 부정한 것은 잘 한 일이다. 그러나 한글은 세종대왕이 백성들을 위해서 만든 게 아니고 한자를 적는 보조수단에서 만든 것이고. 입말을 적는 언문이라면서, ‘한글’이라 하지 말고 ‘언문’이라고 하자고 하고, 일본식 한자혼용과 한자말을 그대로 써야한다고 주장하고 조선어학회의 한글맞춤법을 반대한 것은 큰잘못이다. 더욱이 그는 주시경의 한글만 쓰기와 한글사랑 태도를 언어학을 모르는 자라고 비판했고 그의 주시경 비판이 경성제국 대학 출신인 이희승과 그 제자들에 이어져서 오늘날까지 한글전용을 반대하는 학풍으로 이어진 것은 비극이다.
그는 또 토박이 역사학자인 신채호(申采浩)가 “역사는 우리(我)와 우리가 아닌자(非我)의 투쟁이라고 하고, 남의 것을 멀리하고 우리 것을 키우는 게 역사 발전의 다땅한 길이다. 민족 고유의 문화는 우리(我)이고, 중국 문화는 남(非我)여서, 서로 싸워 승패를 나눌 수밖에 없다. 고대 시대에 '독립당 묘청'을 '사대당 김부식'이 제압해서 '국풍파' 대신에 '한학파가 득세한 것이 비아의 승리를 가져온 우리 역사의 가장 큰 비극이다. 그런 비극을 역전시켜 한학을 배격하고 국풍을 되살려, 사대에서 벗어나 독립을 이룩하는 것이 민족사의 마땅한 방향이다.”는 주장에 반대해서
안확은 “고유한 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필요했기 때문에 한문을 받아들였으며, 한문을 수입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불교와 한학을 수입한 이래로 조선 특유의 문화도 자체로 발달의 기운을 나타냈다. 그러므로 한학의 전통을 계승해서 민족 문학을 발전시키는 데 더욱 힘써야 하고, 한학을 받아들여 우리 것으로 만든 경험을 살려 외래 문화의 주체적 수용을 위한 지침으로 삼아야 한다.”면서 한자혼용과 외래어 배격을 반대했다.
안확의 이런 학설과 주장은 일제 때엔 일제 지식인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광복 뒤에는 민족 자주정신이 살아나면서 민족주체학문인 주시경 학문과 신채호 역사관이 우세했는데 최근 국어분야에서 일제 한자혼용파가 득세하면서 다시 고개를 들고 문화인물로까지 뽑혀 다시 살아나려한다. 안확의 학문 정신은 한글창제를 반대한 최만리와 같고 오늘날 경성제국대학출신인 이희승과 그 제자들에 의해 이어지고 있다. 우리 글자인 한글만으로는 학문이 되지 않고 한문과 한자말이어야 한다는 게 똑 같다. 거기다가 오늘날 한자파들은 일제가 한문을 섞어 써서 강국이 되었다며 한글이 쓰이는 걸 가로막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