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월의 책을 이틀 늦게 선정해 올리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읽을 책은 그리스 비극작가인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인『메데이아』입니다.
이미 눈치 챈 몇몇 분들도 있겠지만, 라캉은 에우리피데스의 여성 주인공 메데이아에서 윤리적 행위(act)의 한 가지 사례를 꼽습니다. 그리스 비극에 한정해 말하자면, 그 다른 하나는 오빠의 장례식을 고집하다가 두 죽음 사이, 아테(até)에 거하게 되는 안티고네의 행위일 것입니다(『안티고네』에 대해서는 헤겔과 하이데거의 고전적인 독해가 있지만, 라캉은 이를 비틀면서 이른바 ‘정신분석의 윤리’를 재정초하게 됩니다). 메데이아는 그리스 장군 이아손의 조강지처였지만, 그가 그녀를 배반하고 다른 여자와 혼약을 맺자, 메데이아는 자신과 이아손에게 가장 귀중한 것(agalma)이었던 두 자식을 죽이고 맙니다. 경악한 이아손은 메데이아에게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이아손: 아아, 아이들. 얼마나 혹독한 어미를 가졌던가.
메데이아: 그 아이들은 아비의 죄에 걸려 죽음을 당한 것이에요.
이아손: 무슨 소리. 그 아이들을 죽인 것은 내 손이 아니야.
메데이아: 하지만 당신의 그 오만, 그리고 새 장가.
이아손: 바로 그게 미워서 아이들을 해치기로 작정했단 말이로구나.
메데이아: 그 고통을 아무렇게나 생각할 여자가 어디 있을까.
이아손은 메데이아의 증오나 복수심을 하찮게 생각하지만('바로 그게 미워서'), 바로 그 하찮은 것이 메디아에게는 그토록 소중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이아손의 대답을 질문으로 되던짐으로써 이아손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을 고유하게 되돌려줍니다. 그리고 이아손으로부터 배신당한 메데이아는 자신이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이아손으로부터 되찾으려고 하기 보다는, 이아손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파괴함으로써 복수를 완성함과 동시에 이아손에 대한 그녀의 욕망(미련)과도 철저히 단절합니다. 그 단절이 어느 정도의 수준이냐 하면 메데이아는 죽은 아이들에 대한 이아손의 상징적 애도조차도 허락하지 않고 그로 하여금 평생 동안 자책감 속에서 살도록 만듭니다.
이 작품은 한편으로『안티고네』와 함께, 장례와 애도에 관한 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안티고네』와는 상이한 차원에서(장례식이라는 상징적 차원을 끝까지 고집하면서 더 이상 상징적 현실 속에 거주하지 않게 되는 안티고네의 광기어린 행위에 대해서는 또 다른 사고가 필요합니다) 저는『메데이아』를, 서둘러 애도함으로써 긴급 사태를 재정상화 하려는 오늘날의 장례식에서와 같은 문화적-상징적 반응, 필립 아리에스가 ‘타인의 죽음’이라고 정의내리는 것에 대해 재사고 하도록 강요하는 텍스트로 간주하고 싶습니다. 저는 최근에 국민행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파병반대 집회를 보면서, 상징적 대의의 차원에서 그에 동조함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경찰만큼이나 자발적인 봉사자들에 의해 ‘질서가 잡힌’ ‘문화 행사’이자 김선일 씨에 대한 애도(장례)를 겸하는 파병반대 집회조차도 김선일 씨의 죽음이 끼쳤던 현실의 파열, 상징적 질서를 비집고 불거져 나온 틈새, 이른바 실재의 차원을 서둘러 닫아버리는 것에만 집중, 결국 고(故) 김선일 씨에 대한 국가의 장례식과 하등의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는 데서 어떤 행위의 무능력을 드러낸 것은 아닌가하는. 저 역시 카페의 다른 분의 말마따나 그의 죽음에 애도할 어떠한 위치도 주어져 있지 않다는데서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저는 어떠한 입장(국민의 한사람으로서, 인간의 한 사람으로서, 혹은 그 무엇으로서)과의 동일시를 통해 그를 애도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확인한 것은 애도의 위치가 부재하다는 것, 혹은 애도의 자리와 동일시하는 노력이 자꾸만 실패한다는 바로 그 사실이었습니다.
이러한 인식을 공유하는지 어떤지는 몰라도 지금 ‘질서 잡힌’ ‘문화행사’로 전락한 파병반대의 집회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살인기계의 모습을 드러낸 국가에 대항하는 폭력과 급진적 행동을 요청하는 몇몇의 움직임이 있습니다. 그 움직임은 경찰의 저지선 라인 안에만 머무른 파병반대 집회는 차라리 ‘행사’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고 있으며,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만 바라는 ‘행사’를 주도하는 주최 측이 집회의 중심이 되는 것을 중지하기 위해 별도의 구상을 하고 있습니다(지금과 같은 상황 속에서 저는 그 ‘행위로의 이행’에 대한 절박한 요청에 자꾸만 손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진보넷 (http://cast.jinbo.net/news/view.php?board=news&id=30647)의 진중권과 김규항 등의 토론(보다 구체적인 정세파악을 위해서는 이 글이 도움이 됩니다)과 함께 알라딘 서평란의 balmas님의 서재(http://www.aladdin.co.kr/foryou/mypaper/mypaper.asp?CNO=734072103&UID=1752838615&page=7&CType=1)의 다음과 같은 제목의 글들을 참고하면 될 것입니다(balmas님의 글은 아닙니다). ‘촛불집회 유감, 저항을 조직화하자’(5번째 게시판 중에서), ‘일반시민’들의 촛불잔치(7번째 게시판 중에서). 저는 지금 7월 3일에 있을 대규모 시위에서 어떤 ‘기적’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물론, 그 시위대 안에서 함께 있는 한에서만 이러한 ‘기적’은 이제 만들어내는 일이 되겠죠.
그런데, 제가 보기에 지금 필요한 것은 두 가지이며 이것들은 현재 뜻있는 몇몇 좌파나 시민들의 이야기 속에 다른 형태로 숨어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는 애도와 장례를 통해 김선일 씨의 죽음에 대한 어떠한 동일시도 물리치면서 그의 죽음을 실재에 위치시키는 일이며(메데이아의 방법), 다른 한편으로는 현재 파병반대 집회와 같은 애도의 상징적 행위 그것을 과도하게 밀고나가 다른 것으로 전화(轉化)하는 것입니다(안티고네의 방법). 저는, 현재와 같은 (무능한) 국가와 (공식적인) 파병반대집회는 바로 자식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이아손과 같은 애도를 요청하는 차원에만 머무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한 ‘국민’의 죽음에 대한 국가의 애도의 제스처에도 그 나름대로의 진정한 이유가 있는 것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철저히 거부해야 합니다. 최근에 그러한 애도를 핑계로 테러방지법을 통과시키려고 하는 국가의 의도는 외설적인 초자아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며 그것은 현재의 미국처럼 복수의 악순환에 말려드는 길입니다. 국가가 외설적인 초자아와의 타협에 쉽사리 굴복할 경우가 허다하지만, 반드시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국가의 차원에서 스페인 정부(와 무엇보다도 용감한 시민들)는 남한정부와 정반대의 길을 갔으며, 우리는 그 점에서 스페인(정부와 시민)의 선택을 따라야 합니다. 또한 테러리스트에 의해 자식을 잃은 닉 버그의 아버지는 자식의 죽음을 테러리즘에 대한 공격의 빌미로 삼으려고 했던 부시 정권의 작태에 대해 정면으로 ‘아니오’, 라고 하면서 동시에 복수의 악순환의 매듭을 잘라냈습니다. 스페인과 닉 버그의 아버지의 이러한 ‘중지’, ‘아니오’는, 지금 이라크 전쟁이라는 현실의 증상적 매듭의 중요한 몇몇 고리를 내리쳤다는 의미에서, 지금 우리가 분명하게 목도할 수 있는 윤리적 행위라고 지칭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소중한 예일 것입니다.
애초에 책 한권을 소개하려는 의도였는데, 말이 길어지게 되었습니다. 얼핏 우리의 통상적인 도덕적 판단을 곤혹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한『메데이아』와 함께 현재 저는『메데이아』의 현대적 판본의 훌륭한 하나의 예로 간주되는 토니 모리슨의『빌러비드(Beloved)』도 읽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백인 농장 사냥꾼에 의해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미리 두 딸을 살해한 여주인공의 지난한 삶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한편으로『메데이아』는 복수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한데, 저는 근래(?)에 본 한국영화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이라는 제목이 구약성서의『신명기』에서 여호와가 한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된 다음, 신만이 유일하게 복수라는 행위의 담지자임을 재확인하게 됩니다. 신의 편에서 그 복수는, 어쩌면 우리 인간의 편에서 은총, 기적, 혹은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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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우리피데스의 비극은 천병희 선생의 그리스어 원전 번역인『에우리피데스 비극』(단국대출판부, 1999)으로 읽을 수 있으며, 본문에 제가 참고한 인용은 에우리피데스,「메디아」,『그리스 비극 2-에우리피데스 편』(여석기 외 옮김, 현암사, 1999, 개정판)입니다. (04. 7.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