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hief's Diary2 : 양치기소년-
1.당신은 누구신가요?
짹 짹
꽁꽁 잠가두었던 귀로부터 활기찬 새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밝은 빛이 쏟아졌다. 활짝 열린 창문으로 새소리와 태양빛이 쏟아지자 소녀는 살포시 눈을 떴다,
제일 먼저 본 것은 천장을 장식하는 통나무. 그리고 창문에서 쏟아지는 밝은 태양빛이었다. 차츰 햇빛에 익숙해지자 소녀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주변을 바라보았다. 아예 이 집 하나가 통나무로 지어진 듯 암갈색의 통나무들을 차곡차곡 쌓아올린 벽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고, 그 다음으로 보인 것은 누군가가 직접 짠 듯 투박한, 그러나 집과는 더없이 잘 어울리는 가구들이었다. 그리고 방 안을 가득 채우는 맛있는 냄새.
달칵
“응? 일어났어?”
그때 방문이 열리면서 한 소년이 등장했다. 그는 소녀를 향해 빙긋 웃으며 쟁반을 하나 가져왔다. 소녀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갈색 얌전한 머리에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키……. 아니, 자세히 보니까 자기보다 작아 보인다.
소년은 소녀가 앉은 침대 옆 탁자에 쟁반을 내려놓고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보기 드문 검은색 머리는 어깨까지 치렁치렁 내려와 귀를 덮었고, 산속보다 깊고 호수보다 넓은 눈동자에는 신비로운 갈색 빛이 드리워져 있었다. 전체적으로 귀엽다고나 할까……. 어제는 갑작스러워서 잘 몰랐지만 이제 보니 사춘기도 지나지 못한 듯 귀여운 여자아이였다.
“자, 이거 먹어.”
소년은 소녀에게 쟁반을 건네주었다. 쟁반 안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스프와 빵 몇 조각이 놓여 있었다. 어제 점심때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한 소녀는 그제야 마구 달려드는 배고픔을 느끼며 냉큼 쟁반을 받아들곤 숟가락을 집었다. 그리고 스프를 한 숟갈 떠 입술로 가져대었다.
“아, 지금 스프 뜨거운데…….”
“앗, 뜨거.”
소녀는 입 안으로 후끈 달아오르는 열기에 서둘러 숟가락을 놓고 입을 가렸다. 소년은 물이 든 나무잔을 재빨리 집어 건넸고, 소녀는 잔을 받아 물을 입으로 들이키기 시작했다. 꼴깍 꼴깍 물 넘어가는 소리를 들으며 소년은 소녀의 목소리도 앙증맞다고 생각했다. 소녀는 입을 대일 뻔한 그 스프를 조심스레 떠먹으며 소년이 갓 구운 듯한 말랑말랑한 빵을 집어삼켰다.
곧 식사를 끝낸 소녀는 깨끗해진 스프 그릇 위에 숟가락을 놓았다.
달그락.
……그리고 다시 한 번 통나무집에 침묵이 찾아왔다.
소녀가 잘 먹었다는 이야길 하면 대충 통성명이라도 하려던 소년은 그녀가 아무 말이 없자 우물쭈물했다. 소년이 자리에서 일어서면 이름이라도 알려주며 고맙단 말을 하려던 소녀 역시 어색한 침묵에 고개만 수그렸다. 새의 목소리가 유달리 크게 들린 건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하지만 먼저 입을 연 것은 역시 소녀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은 소년이었다.
“아, 저, 좀 늦었지만 먼저 말할게. 내 이름은 데르크 칼 크라이시스. 너는?”
소녀는 수줍게 대답했다.
“나, 나는 이라……. 그냥 이라라고 부르면 돼.”
“이라? 특이한 이름이네. 무슨 이유 있어?”
“그냥, 여러 사람들이 부르기 쉬우니까…….”
“그렇구나. 난 16살인데, 넌 몇 살이야?”
순간 소녀는 잠시 주저거렸다. 그러다 천천히 대답했다.
“그게, 실제로 내가 얼마나 살았는지 잘 몰라……. 엄청 오래 산 것 같은데……. 그냥 또래처럼 편안히 불러줘.”
자신을 이라라고 소개한 소녀는 그를 향해 대꾸했다. 그리고 흘끗 그의 얼굴을 살폈다. 소년, 아니 데르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의 나이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었다. 역시……. 매번 느끼는 거지만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의 나이를 그냥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뭐, 상관없겠지. 그나저나 어제 왜 쫓긴 거야?”
데르크의 물음에 이라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잠시 뭘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태양은 안온히 그녀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자세한 건 나도 잘 모르겠어. 사실 난 정처 없이 떠돌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제 그 아저씨가 날 죽이려 해서……. 네가 사라지면 모두가 즐거워질 거라고 그러던데…….”
데르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흘끗 쳐다본 그녀의 얼굴에는 왜 자신이 죽음의 위협을 느껴야 하는지 알고 있는 듯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래, 그럼 쉬고 있어.”
쟁반을 들고 있던 그는 이라에게 한 마디를 남기며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때였다.
“저기……!”
데르크는 고개를 돌렸다. 이라는 이불을 꼬옥 붙들며 우물쭈물하더니 입을 열었다.
“나……. 여기 좀 남아 있어도 될까?”
“얼마나?”
“상처가 아물, 아니, 하루만이라도…….”
“…….”
“…….”
“……얼마든지 남아 있어도 좋아.”
그는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아함~.”
침대 반대쪽에 있는 책장에서 책을 꺼내 읽던 이라는 졸음이 밀려오는지 하품을 했다. 동화나 소설 같은 부류의 이야기책이었지만 그것을 한참 지루하게 들춰보던 이라는 책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듯 기지개를 켜며 창 밖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완연히 제 빛을 드러낸 오전의 태양은 푸른 하늘 아래 찬란히 빛나고 있었으나, 창문의 높이가 생각보다 높아 먼 산의 끄트머리만 있을 뿐 다른 풍경은 볼 수 없었다.
“밖은 지금 어떨라나?”
문득 이라는 바깥 풍경이 궁금해진 모양인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러나 침대에서 일어나 발돋움까지 하며 창문을 바라보았음에도 아까와 다른 점이라곤 산꼭대기 대신 나무 꼭대기가 보인다는 것뿐이었다. 이라는 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리고 탄성을 터뜨렸다.
“와아.”
통나무집의 문을 나서자 제일 먼저 눈앞에 들어온 것은 탁 트인 들판과 숲, 그리고 저 멀리 우뚝 솟은 산과 그 아래 희끗희끗 보이는 마을이었다. 들판은 태양을 따라 파도처럼 아름다운 빛을 뿌렸으며, 짙은 녹색 빛으로 빛나는 숲에는 은근한 활기가 묻어나왔고, 산에는 푸른 안온함이, 마을에는 반짝이는 따스함이 바람을 타고 그녀의 머리칼을 간질였다.
그리고 들 한편에는 이삼십 마리의 조그만 양떼가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복슬복슬 하얀 털의 양떼들의 한가로운 식사 장소 옆에는 양치기 개가 가만히 엎드려 양들을 주시하고 있었고, 그 위 먼 곳에는…….
“데르크~!”
이라가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에 앉아있는 데르크를 부르자 그는 힐끗 이라를 바라보았다. 이라는 양떼들을 한 차례 돌아보면서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왔다. 곧 그녀가 느티나무에 기대어 앉자 그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안에서 쉬지 그랬어?”
“안에 있기가 답답해서 나왔어. 그나저나 여기 무척 좋구나.”
따스한 태양 아래서 양떼와 숲의 평화로운 풍경을 바라보는 이라, 그리고 그런 그녀를 따라 데르크는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매일같이 봐 온 모습이라 지루할 만도 했지만 오히려 매일같이 달라지는 풍경은 그로 하여금 또 다른 감회를 선물해 주었다
“근데 너 혼자 살아?”
별안간 묻는 말에 데르크는 두 눈을 깜박이며 대답했다.
“지금은 보다시피 혼자 살아. 전에는 할아버지랑 같이 살았지만 몇 달 전에 돌아가셨어.”
“그럼 목동 일은 너 혼자 하는 거야?”
“응. 사실 목동 일도 그리 복잡하진 않아. 우유 짜고 털 깎고 양이 사라지는 것과 늑대 혹은 몬스터에게서 지켜내는 것이 힘들 뿐이지.”
“듣기에는 되게 힘들어 보이는데.”
“하하, 그래?”
데르크는 넉살좋게 대답했다. 그러던 그의 시선이 이라의 얼굴에서부터 어깨, 허리, 다리 순으로 내려갔다. 그러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살짝 얼굴을 붉혔다. 사실 이라가 입고 있는 흰색 원피스는 몸의 굴곡이 확연히 드러나 있어 조금 야한 느낌도 없지 않았다.
“그런데 너, 옷이 그것밖에 없어?”
이라는 자신이 옷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대답했다.
“지금은 이것밖에 없어. 돈주머니도 어제 쫓기는 길에 잃어버렸는걸…….”
“그것밖에 없다는 소리군.”
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데르크는 멀뚱히 하늘을 바라보더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러면서 이라에게 말을 걸었다.
“마을로 내려갔다 오지 않을래?”
“마을?”
“응, 네 옷도 살 겸해서 말이야. 마침 마을에 볼 일이 있거든.” “그럼 저 양들은 어쩌고?”
“우리에다 다시 몰아넣으면 돼. 잠깐만 기다려.”
데르크는 휘파람을 불어 양치기 개들이 양들을 우리로 몰도록 했고, 자신도 그 일을 도와 양들을 우리로 몰아넣었다. 그것을 신기하단 듯 쳐다보던 이라는 곧 데르크가 집에서 돈주머니와 가방 하나를 갖고 나와 자신에게 손을 흔드는 것을 보고 그에게 달려갔다.
싱그러운 숲길을 걸어 내려가던 그들은 곧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은 평상시처럼 잔뜩 활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잠에서 깨어난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거리를 따라 쪼르륵 달려 나가 골목으로 사라졌고, 마을 사람들은 그 웃음의 향기와 함께 제 갈 길을 향했다. 하늘을 살짝 덮은 마을 건물들도 태양빛을 받아 하얗게 반짝였다.
“와, 좋은 마을이네.”
지금까지 여러 마을을 전전해 온 이라였지만 데르크가 소개한 마을은 제법 규모도 있고 깔끔하면서도 밝은 마을이었다. 일전에 한 번 본 적이 있는 오크 마을 같은 곳이 아니라는 사실에 이라는 기뻐하면서도 안심이라는 듯 밝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여기는 사람도 많은데다가 상점도 다양해서 일 보기엔 제일 편한 곳이야.”
데르크는 그렇게 말하며 잡화점 문을 열고 들어갔다. 깔끔한 하얀색 벽을 바탕으로 여러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여아, 데르크. 오늘은 뭘 갖고 왔어?”
“우유예요, 형. 그리 기대하진 마요.”
금발 머리의 잡화점 주인에게 친근하게 말을 건 데르크는 가방에서 우유 몇 병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사내는 우유를 받아들며 그 값을 탁자에 놓았다. 그러다 데르크의 뒤에서 이리저리 주변을 기웃거리는 이라를 발견하고 그를 톡톡 건드리며 물었다.
“야, 야. 저 애 누구냐? 귀엽게 생겼는데.”
“이라라는 앤데, 저도 어제 만나서 자세한 건 몰라요.”
데르크가 그렇게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뭔가 작업이라도 걸고 싶었는지 데르크에게 이것저것을 물어보며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나 데르크는 그의 말에 건성건성 대답하다가 몸을 돌리며 한 마디로 요약했다.
“신경 딱 끄세요. 저 애는 형에게 ‘전혀’ 안 어울리니까요.”
순간 금발 사내는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그러나 이라를 신기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한두 명이 아니었다. 이 마을에 대해선 이방인과 다름없는 그녀는 지나가는 사람들과 한번쯤 눈을 마주쳤고, 그 사람들 중에서도 데르크를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번쯤 그녀에 대해 물어왔다. 데르크는 이리저리 둘러대느라 여념이 없었고.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둘은 옷가게에 도착했다.
“어서 오세……. 아, 오랜만이네, 데르크?”
검붉은 색의 긴 머리칼을 가진 여자가 입을 열자 데르크는 살짝 웃어주었다. 마을에 하나뿐인 옷가게의 주인 레이라였다.
“안녕하세요.”
“그래. 점점 더 멋있어지는 것 같은데? 아, 우유는 잘 먹고 있어.”
“하하, 고마워요.”
“근데 키는 언제 클래?”
순간 거대한(!) 정신적 피해를 입은 데르크는 그 자리에 가만히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라보다도 작은 듯한 키는 그의 일생일대 최대의 콤플렉스였다.
“그런데 너는 누구니?”
레이라가 이라에게 눈높이를 맞추려는 듯 한쪽 무릎을 굽히며 몸을 숙여 이라를 바라보자 그녀는 수줍은지 고개를 수그리며 작게 옹알거렸다.
“이, 이라……. 에요.”
“이라? 예쁜 이름이구나, 나이는 몇?”
“한 50억 정도……. 자세히는 모르겠어요.”
50억 살이라는 이라의 말에 레이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다시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 옷을 보러 온 거지?”
“네.”
“한번 골라 보렴.”
레이라는 이라의 손을 잡고 가판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옷을 보여주었다. 그러다 이라가 옷 고르기에 열중할 무렵 슬며시 그녀의 손을 놓곤 대번에 데르크에게 가까이 다가와 물었다.
“너 저 애 어디서 만났어?”
“네? 아, 어제 만났는데요.”
“어떻게?”
레이라가 진지하게 묻자 데르크는 잠시 고민하다가 어제의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숲에서 갑자기 나타난 소녀, 그리고 그녀를 죽이러 다가온 복면의 사내와, 그가 남긴 한 마디.
“……그거 혹시…….”
데르크는 그녀의 입에서 나올 말을 짐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들 그런 생각을 해 보지 않았을까. 공주와 암살자, 혹은 신비로운 힘을 가진 소녀와 그 힘을 두려워하는 어느 사람의 어두운 과…….
“……딸을 맡기려는 거 아닐까?”
“……예?”
“생각해 봐. 집에 무슨 일이 있어서 딸을 기르지 못하게 되니까 딸을 너에게 보내고 자기는 자객으로 변장해 딸을 멀리서 지켜보다가 나중에 너희 둘이 결혼하면 살짝 껴 들어오거나 사라진다. 어때? 그럴 듯 하지 않아?”
당신 연애소설 너무 많이 봤어. 데르크는 그렇게 말해 주고 싶었지만 애써 참으며 이라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옷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몇 벌의 옷을 들고 총총 탈의실로 달려갔다. 레이라는 여전히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저기, 이거 괜찮아?”
그때 탈의실 문이 열리며 다시 이라가 나타났다. 그녀가 고른 옷이 데르크는 내심 정말 잘 어울린다 생각하며 미소를 지어 주었다. 이라는 어색해하면서도 기쁘고 부끄러운지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마주 웃었다. 데르크는 그 뒤에도 몇 벌의 옷을 더 골라 산 뒤 레이라와 작별했다.
어느덧 점심때가 된 하늘을 바라보던 그들은 몇 가지를 더 구입한 뒤 집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마을의 활기는 정오로 갈수록 그 힘을 더해 갔고, 곧 데르크를 따라 밖으로 나온 이라는 마을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그 여러 가지가 신기하고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던 그들이 장신구 상점을 지날 때였다.
“아, 예쁘다.”
갑자기 이라가 장신구 상점으로 다가가자 데르크는 잠시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며 장신구 가게로 다가갔다. 각종 화려한 장신구들이 그녀의 눈을 유혹하고 있었다.
“뭐 살 거 있어?”
“아니, 그냥 예뻐서. 이거 어때?”
그녀는 장신구들 중 하나를 꺼내 들었다. 엄지손가락과 거의 같은 크기를 가진 파란색 에메랄드가 검은 줄에 매달려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장신구에는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는 데르크도 그 목걸이를 계속 바라보았다.
“으음……. 그거 괜찮다. 파란 이 보석이 맘에 드는데?”
“정말?”
이라는 어린애같이 목걸이를 보고 좋아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는 데르크를 흘끗 바라보더니 조금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에 그녀가 왜 그런지 데르크는 몰랐지만 자꾸만 힐끗힐끗 쳐다보는 그녀의 눈길이 자신의 허리에 있는 돈 주머니를 향하고 있다는 걸 깨닫곤 이내 그녀의 표정 속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사고는 싶지만 오늘 자신을 위해 무리하게 돈을 쓴 데르크에게 미안함이 들었던 것이다.
“저기, 할머니. 이거 얼마예요?”
장신구 가게를 지키고 있던 할머니가 데르크의 물음에 조용히 대답했다
“에메랄드 목걸이? 8헌드.”
……8헌드.
8헌드라는 돈은 오늘 산 서너 벌의 옷과 여러 식료품, 도구, 생필품을 합한 가격보다 비쌌다. 게다가 우유 200병을 팔아치워야 겨우 벌 수 있는 돈인 데다 양털 8kg에 양 모피와 고기를 2kg이나 해치워야 하는 돈이었다. 물론 자신이 8헌드를 갖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건 결코 단순한 돈이 아니었다. 할아버지의 귀중한 유산 중 하나였던 것이다.
그러나 잠시 돌아본 이라의 표정은 애원의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미안함이 가득하던 그녀의 얼굴에 간절함이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여기 8헌드요.”
짤랑
그리고 결국 그는 할아버지의 유산에 손을 대고 말았다. 여자에 관한 것이니 할아버지도 용서해 주실 거야. 뭐 안 그럴 확률이 더 크지만.
“저, 정말 사 주는 거야?”
이라가 두 눈을 깜박이며 묻자 데르크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렇다는 말 대신 목걸이를 들어 직접 그녀의 목에 그것을 매어 주었다. 주인을 찾은 목걸이는 내심 기쁜 듯 태양과 함께 반짝였다.
“이거 고이 간직해야 돼. 알았지?”
“응!”
그녀는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로부터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은 조금씩 가까워져 갔다. 상대방에 대해 자세히 몰랐던 그들은 아침에 일어나 같이 식사하고 같이 시간을 보낼 때마다 서로에 대해 호감을 더하게 된 것이다. 데르크는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빈자리에 서서 자신을 도와주는 이라에게, 이라는 방황의 고독에서 자신을 구해 준 데르크에게.
시간은 또한 수많은 일들을 만들어 그들이 한층 가까운 사이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느껴지는 향긋한 음식 냄새에 자기도 음식을 만들어 보겠다고 나선 이라는 새까맣게 태운 음식을 보여주며 어색하게 웃기도 했고, 우유를 짜려다가 양에게 발길질을 당하기도 했으며, 양털을 깎다가 양털 더미에 뒤덮이는 바람에 하루 종일 재채기를 연발할 때도 있었다. 서로의 시간은 흐르면 흐를수록 긴 끈이 되어 둘을 감쌌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럼 갔다 올게. 금방 올 거야.” “응. 잘 갔다 와~!”
수레에 양털과 우유를 잔뜩 실은 데르크는 지금까지의 실적을 계산할 겸, 또 떨어진 식료품과 생필품을 살 겸해서 마을로 향했다. 전날에 한차례 비가 온 까닭인지 들판과 숲은 더없이 싱그러웠고, 며칠에 한 번 씩 들리는 마을마저 새로운 활기를 되찾은 듯 아름다웠다.
“형~! 나 왔어요!”
“오, 그래. 나간다.”
잠화점 앞에 멈춘 데르크는 아직 열지 않은 잡화점의 문을 두드리며 외쳤다. 그러자 잡화점에서부터 예의 그 금발 사내가 나타났다. 그는 수레 한가득 실어 온 그의 짐을 계산하더니 동그란 금화 10개를 주었고, 그것을 받아 든 데르크는 그가 짐 나르는 것을 도왔다.
그때 금발 사내가 물어왔다.
“요즘 아라라는 애는 잘 있냐?”
“아라가 아니라 이라예요. 뭐 잘 지내고 있긴 하죠.”
“그래? 그럼 어디까지 갔니? 응? 응?”
그의 말 속이 뭔가 음흉한 게 있음을 알아챈 데르크는 슬쩍 얼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무슨 말이에요? 그게.”
“무슨 말이긴. 한 마디로 진도가 어디까지 나갔냐는 거지. 남자와 여자, 그것도 사춘기 소년 소녀들이 있는 곳에 이상한 일 하나 안 일어나겠냐? 더군다나 너희 둘이 곧 결혼할 거라는 소문까지 있던데. 빼지 말고 사실대로 말해 봐. 응?”
“아, 아무 사이도 아녜요! 누가 그런 거짓말을…….”
그러나 부정하는 데르크의 목소리 한 곳에는 자신의 부정을 오히려 부정하고픈 마음이 실려 있었다. 이라 같은 사람과 함께 평화로운 들판을 바라볼 수 있다면……. 아니, 그보다.
‘난 이라에게 있어 무슨 존재일까?’
데르크는 저 스스로 답을 내 보려 했지만 직접 듣는 게 나을 것 같아 재빨리 볼일을 마치고 자신의 통나무집으로 향했다. 비탈진 언덕까지 간신히 수레를 끌고 온 그는 통나무 집 안을 향해 외치며 문을 열었다.
“이라야, 나 돌아왔…….”
……그러나 말을 이으려던 그의 목소리는 문을 여는 것과 동시에 뚝 끊겨 버렸다. 보통 통나무집과 다름없는 벽. 그것까진 좋았다. 그러나 양떼가 정신없이 훑고 지나간 듯 집 안은 엉망진창으로 변해 버린 뒤였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정말 양떼가 집 안을 휘젓고 다녔던 걸까? 아니면 몬스터의 습격?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밖을 내다본 데르크는 이제 막 털을 깎은 새하얀 양들과 그들을 지키던 할아버지의 양치기 개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것을 발견했다. 그곳으로 달려 나갔다. 동그란 상처 자국과 그 속에서 끊임없이 흐르는 붉은 피……. 이건 몬스터도, 양떼도, 천재지변도 아니었다. 인간. 자신이 곱게 길러 온 양들이 한순간에 같은 인간의 총에 떼죽음을 당하고 만 것이었다.
…….눈가가 흐릿했다.
‘누가…….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자, 잠깐, 이라는?’
그는 아직 닦지도 않은 흐릿한 눈을 가지고 집에 들어가 정신없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부엌, 없다. 거실도 없어. 내 방. 역시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할아버지의 방이자, 이젠 이라의 보금자리가 된 방 앞에서, 데르크는 그녀가 제발 이 곳에 있기를 바라며 문을 열었지만.
벌컥
……난장판이 된 방의 모습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여기도 없었다. 다만 볼 수 있는 것은 누군가가 남긴 글귀 뿐…….
‘이라는 마을 뒤쪽 폐 요새로 끌려갔다. 찾기 전에 먼저 이 일에 개입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심각하게 고민해 볼 것. 데빌리시(Devilish).’
……양피지 종이 위로 물방울이 번졌다.
1편입니다! 에에, 처음에 다소 지루했을 수도 있었지마는, 발단을 마련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치룬 일종의 이면지...[퍽!] 막상 퇴고해 보니까 정말 지루하겠다 생각이 들어서 일단 올려봅니다;;
에에...처음에 이걸 쓰게 된 계기는 소년과 소녀랄까요-ㅅ-. 역시 어린애들끼리 해 주면 잘 해 먹겠다[??]싶어 짓게 된 것입니다만, 역시 여러 모로 전 연애소설 같은 것엔 소질이 없어 보입니다;ㅅ; 오랜만에 써서 그런지 중간중간 틀어지는 부분도 있는 것 같아요; 게다가 양치기소년이라는 말을 듣고 동생이 깔깔 비웃고 있다는-ㅁ-;; 문제는, 이걸 먼저 읽어 본 친구가 다소 유치한 감이 든다(!)고 평했다는 건데;; 게다가 2편임에도 1편을 담습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지요...[그래도 설정상 50년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쿨럭;]에구, 외전을 기다리시는 분들은 그냥 6개월 정도만 참아주세요-_-[퍽퍽]
수능끝나니까 할 게 많아졌습니다. 마비노기라는 게임은 진작부터 하고 있었지만 이번엔 10살에 50랩 달성이라는 최대 목표를 두고 분투하고 있다죠-ㅅ-; 게다가 그동안 키보드를 안 쳤으니 타자 속도가 떨어져야 정상인데, 옛날에 한편당 3시간 걸리던 것이 1시간으로 줄어 버린...퇴고까지 끝나면 1시간 반쯤 걸리더군요.[최대타수 650타가 820타까지 늘어나 버렸습니다-ㅁ-;;]
아, 다음 편은 일종의 '탈환'입니다! 그리고 3편부터는 '도주'의 인생이 시작되겠군요. 아참, 전편을 보신 분들을 위한 가벼운 서비스들이 중간중간 곁들어 있으니 잘 찾아 보시길 바랍니다^-^ 그럼 전 3일뒤에 다시 뵙도록 하죠~!
-----다음편 예고-----
2.되찾기 위해서
"......그나저나 오늘 그 여자애 봤어? 드디어 잡은 것 같은데."
"이라가 어디 있는지를 알아야 하는데......"
"이라? 아, 지구를 다스리는 여자애 말인가?"
"이제 좀 협조할 생각이 드나?"
"괜찮아, 이라? 걸을 수 있겠어?"
"찾아라! 여기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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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필, 즐독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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