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잃어버린 백제 첫 도읍지 / 저자 강찬석·이희진 / 출판사 소나무
『잃어버린 백제 첫 도읍지』에서 저자들은 풍납토성이 정말로 잃어버린 백제의 첫 도읍지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그리고 저자들은 여러가지 과학적 근거들을 바탕으로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 일대 지역이 백제의 첫 도읍지, 하남 위례성임을 논증한다.
또한 저자는 백제의 첫 도읍지를 찾는 긴 여정을 매듭지으며 학술적 문화적 가치가 있는 유적과 유물이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학계 기득권층의 취향과 이익에 맞는 것들만 보존되는 고대사학계의 현실을 꼬집는다.
그리고 많은 논란의 종지부를 찍을 핵심 열쇠인 천왕사 심초석의 발굴을 촉구하고 있다.
백제의 첫 도읍지는 어디인가
장수왕이 이끄는 고구려 군에 의해 무너진 하남 위례성, 1500년간 사라진 백제 첫 도읍지가 드디어 그 모습을 드러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감격에 겨워 지나쳐 버린 사실들이 있다. 이제 냉정하게 다시 되짚어 볼 때가 되었다.
풍납토성이 정말로 잃어버린 백제의 첫 도읍지인지. 풍납토성이 아니라면 진짜 백제 첫 도읍지는 어디인지.
풍납토성이 백제 왕성이 될 수 없는 이유
하나, 너무 초라한 규모 :
몽촌토성(6만 7천 평)에 비해 상대적으로 큰 풍납토성(17만 평)의 규모에 감격해, 같은 시기 고구려의 장안성(358만 평), 신라의 왕경(484만 평)을 잊고 있었다.
고구려, 신라와 경쟁하던 백제의 왕성이 고구려, 신라의 10분의 1도 안 되는 초라한 규모라는 것이 납득할 만한 이야기인가?
심지어 장수왕의 공격을 받고 급박하게 옮겨간 백제의 두 번째 도읍인 웅진성도 200만 평이 넘는다.
풍납토성은 왕성이라 하기엔 스케일부터가 동시대 다른 왕성과 비교할 수 없는 초라한 규모인 것이다.
둘, 왕궁의 흔적이 없다:
무엇보다 풍납토성에서는 왕궁이라고 할 만한 터가 발견되지 않았다.
대형 건물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가장 중요한 단서는 주춧돌이다.
장수왕 대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고구려 안학궁에서는 대형 주춧돌만 무려 2,590개가 발견되었다.
백제 왕성보다 일찍 지어진 고구려 환도산성에서조차 대형 주춧돌이 수없이 나왔다.
그러나 풍납토성에서는 단 하나의 주춧돌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것은 초석을 놓고 기둥을 세우는 대형 건물의 단서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보다 훨씬 원시적인 형태의 벽식구조 건물(얇은 기둥을 촘촘히 세우고 벽재를 덧대는 구조)만이 발견되었을 뿐이다.
고구려와 신라의 왕이 주춧돌에 아름드리 기둥을 세운 대규모 왕궁에서 호령할 때, 백제왕은 움집 같은 곳에 살았다? 이 역시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셋, 도시 계획조차 없다 :
풍납토성이 백제 왕성이라면 고구려 장안성과 신라 왕경에서 볼 수 있는 조방제에 의해 계획된 격자형 도시구조가 나타나야 한다.
이것은 주나라 이래 동아시아 도성을 건설할 때 교과서적인 틀로 자리잡은 것이다.
일본 나라 시대에 건설된 도시들도 엄격한 격자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풍납토성에서는 이러한 도시 구조를 찾아볼 수 없다. 주류를 이루는 육각형 집들은 일정한 축도 없이 아무렇게나 배치되어 있고 도로는 정연하지 못하다.
넷, 홍수 피해에 시달리는 위치 :
백제가 과연 왕성을 위험한 강변에 지었을까?
풍납토성의 일부는 이미 홍수로 쓸려간 상황이다.
한 나라의 왕성을 홍수 피해를 계속 받는 강변에 둔다는 것이 상식에 맞지 않거니와
한성 백제 500년 동안 왕궁이 장마나 한강의 홍수에 의해 피해를 입었다는 기록이 단 한 차례도 없는 것으로 보아
왕궁은 한강으로부터 일정거리 떨어져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섯, 역사 기록과 도무지 맞지 않는다 :
"삼국사기" 등 문헌에 따르면
하남 위례성 서쪽에는 넓은 개활지가 있어야 하고, 주위가 온통 산악이며, 하늘이 내린 험한 지형 즉 ‘천험지리天險地利’한 땅이어야 한다.
그러나 풍납토성 서쪽은 한강이 접해있고, 험준한 산악 지형과는 거리가 멀다.
위와 같은 이유와 정황이 풍납토성은 백제 왕성이 될 수 없음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백제의 첫 도읍지는 과연 어디였을까?
하남 위례성은 하남시 춘궁동 일대다
저자들은 건축학적 안목과 문헌의 중요한 대목을 놓치지 않고 거대한 그림 찾기를 시작한다.
북쪽으로는 한강을 띠처럼 두르고 있고,
천지신명에 제사를 지내는 검단산을 동쪽으로 두고,
뒤로는 남한산성을 둔 험난한 지형 가운데 있는 땅,
한성 백제의 성벽과 유물이 출토된 이성산성을 앞으로 두고
서쪽으로 넓은 개활지가 열린 땅,
대형 목탑의 흔적이 발견되었고 지천에 한성 백제의 유물이 뒹구는 땅,
그곳이 바로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 일대 지역인 것이다.
저자들은 이 땅이 잃어버린 한성 백제의 첫 도읍지, 하남 위례성임을 논증한다.
황룡사 9충 목탑에 필적하는 목탑의 심초석이 묻혀 있다 :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불교를 처음 도입하던 삼국시대에는 사찰과 대형 탑이 도시 안에 있었다.
대형 건물의 흔적을 주춧돌에서 찾듯, 목탑의 흔적은 목탑의 중심 기둥을 떠받치는 심초석의 존재가 그 결정적 단서다.
이미 20년 전에 저자는 남한산성 북문 아래 하사창동이라는 마을 가운데 밭에서 천왕사라는 절터를 발견하고 정부에 발굴 요청을 해왔다.
마침내 2001년, 문화재보호재단이 시험 발굴에 들어갔는데 이 절터에서 거대한 목탑의 심초석이 발견된 것이다.
대형 심초석은 신라 목탑의 심초석보다 2미터 아래에 있어 신라 이전에 이곳을 지배했던 백제의 것으로 추정되며,
게다가 백제의 전형적인 가람 형식인 1금당 1탑 형식을 띄고 있었다.
이 심초석의 지름은 무려 205센티미터로 이는 경주 황룡사 목탑에 필적하는 규모의 한국 최초 목탑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186~197쪽 참고)
지천에 널린 백제 유물들 :
춘궁동 일대에는 보물 제332호 광주철불의 좌대라고 추측되는 석조물이 가정집의 장독대 받침으로 방치되고 있는가 하면,
가정집 마당의 빨래판과 정원석으로 이용되고 있는 고대 건물의 초석들은 수도 없으며,
하수도 공사를 위해 중장비를 동원해 땅을 파다 해태상을 발견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동네 어디든 와편이 발견된다고 할 정도로 길거리 곳곳에서 고대건물의 기와로 추정되는 와편들이 그대로 나뒹굴고 있으며,
현지 주민들은 이곳은 땅만 파면 기왓장이 쏟아져 나온다고 증언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남한산성이 있는 청량산에서 북쪽으로 내려오는 줄기에서 이어진 금암산에 접한 이성산성(하남시 춘궁동) 성벽 속에 또 다른 성벽이 발견되었는데,
이 성벽에서 백제 토기가 출토된 것이다.(<이성산성 8차 발굴보고서>) 백제 토기가 발견된 곳은 이곳뿐이 아니다.
서울시 둔촌 아파트에서 하남시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3기의 횡혈식 석실분이 발굴되었는데,
여기서도 초기 백제의 ‘목 짧은 항아리(단경호)’가 나왔다. 이로써 한성기 백제의 횡혈식 석실로 판명되어 학계에 보고되기도 했다.(197~211쪽 참고)
백제의 첫 도읍지는 왜 묻혀버렸나?
이토록 중대한 사실들이 왜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을까?
2001년, 문화재보호재단은 천왕사터의 심초석을 발견하고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본격적인 발굴을 하지 않고 다시 덮어버렸다.
대형 심초석의 진실은 그렇게 아직도 땅 속에 파묻혀 있는 것이다. 이런 일은 지난 20년 동안 계속되어 왔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예로부터, "삼국사기"의 기록에서부터 고려시대 문헌, 조선시대 정약용, 하물며 이병도까지 일관되게 지금의 하남시 일대를 한성 백제의 도읍지로 지목해 왔다.
도대체 언제부터 백제의 첫 도읍지가 엉뚱한 곳으로 둔갑한 것일까?
1980년대 몽촌토성을 발굴하면서 유력한 학자들이 이곳을 하남 위례성으로 지목하자 세간의 이목이 쏠리게 되었다.
그러다 다시 90년대 말, 풍납토성이 발굴되면서 진짜 하남 위례성은 풍납토성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게 된다.
그 근거는 불확실한 끼워 맞추기식 추정 속에 있었지만 전문가라는 이름에 그것은 가리워졌다.
이제 그 학설을 지키기 위해 그에 어긋나는 증거를 틀어막고 왜곡하고 지워버리려고까지 하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백제의 첫 도읍지를 찾는 긴 여정을 매듭지으며 학술적 문화적 가치가 있는 유적과 유물이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학계 기득권층의 취향과 이익에 맞는 것들만 보존되는 고대사학계의 현실을 꼬집는다.
그리고 많은 논란의 종지부를 찍을 핵심 열쇠인 천왕사 심초석의 발굴을 촉구하고 있다
풍납토성은 과연 백제 왕성인가?
언제까지 건축유구 발굴을 고고학자들에게만 맡겨 둘 것인가!
강 찬 석 / 문화유산연대 대표
건축가인 필자가 풍납토성 발굴을 가지고 문제 삼는 데에는 그만한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다른 여러 가지 이유는 차지하고 필자가 풍납토성 발굴을 문제 삼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필자가 풍납토성 발굴을 10년째 지켜 봐 온 유일한(?) 건축가이기 때문이다.
풍납토성은 도시유적이고, 그곳에서 발굴되고 있는 유적이 거의 대부분 건축유구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어느 건축유구 발굴현장을 가 봐도 고고학자들만 붐비지, 노쇠한 원로건축학자 몇 분을 제외하고는 눈 닦고 찾아봐도 건축학자는 찾아 볼 수가 없었던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필자가 풍납토성 발굴을 문제 삼는 것은 지난 10년 동안 풍납토성 발굴을 지켜봐온 건축학도로서 여러 가지 우려스러운 현상이 목격되고 있기 때문이다.
건축유구가 대다수인 풍납토성 발굴에 건축학자는 없고 고고학자들만 있다.
그래서 풍납토성발굴성과에 대한 건축적인 해석에는 당연히 오류가 있을 수밖에 없고, 실제로 오류가 목격되고 있는 것이 현재의 문제이다.
그러면 필자가 생각하는 고고학자들의 건축적인 해석에 대한 오류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가장 큰 문제는 과연 풍납토성이 한성기 백제의 왕성인가 하는 점이다. 풍납토성은 발굴하기 전부터 한성기의 백제왕성으로 지목되어 왔다.
그런데 발굴 10년이 지난 지금 풍납토성이 한성기 백제왕성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필자가 보기에는 발굴을 하면 할수록 백제왕성이 아니라는 고고학적 증거가 더 많이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그 이유로는 첫째, 풍납토성 내에서 발굴된 건축유구 중 백제왕궁으로 추정되는 건물은 단 하나도 없다. 더욱이 한성백제의 마지막왕인 개로왕대의 왕궁으로 추정되는 건물은 아직까지 하나도 없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조에 개로왕과 고구려 첩자 승려 도림이 나누는 대화에 “성안에 궁실, 누각, 사대를 지었는데 장려하지 않음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현재 풍납토성 내에서 발굴된 어느 건축유구도 삼국사기 기록에 나오는 장려한 궁실이라고 여겨지는 건물은 하나도 없다.
둘째, 고고학자들 스스로에 의해 채취되고 분석된 현대연립부지의 건물지 6개체목탄의 탄소연대측정치가 전부 기원전후로 나왔기 때문에 현대연립부지의 건물지들은 백제건국 전후의 건물이지, 5세기말 개로왕대의 건물로 보기 어렵다.
실제로 풍납토성 내에서 발견되는 6각형 건물지는 건축적으로 움집형태의 일반주거지로서 기와집이나 가구식 구조가 아닌 판벽구조를 한 조잡한 형태의 주거지이지, 왕궁은 아니다.
셋째, 일부 발굴된 기하학적 형태의 수막새기와는 유일하게 풍납토성에서만 발견되고 있다. 풍납토성이 한성기 백제의 왕성이라면 비슷한 형태의 기와가 풍납토성 외 지역에서도 발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공주지역에서 흔하게 발견되는 연화문 막새나 불교관련 유물이 하나도 출토되지 않는 것도 풍납토성이 백제의 왕성이 아니라는 이유에 힘을 보태고 있다.
삼국사기 기록에 “침류왕 원년 호승 마라난타에 의해 불교가 들어오고, 왕이 한산에 사찰을 세우고 10명의 승려를 두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왕궁에 사찰을 세우고 연화문막새로 장식했을 것이라고 추정되기 때문에 풍납토성이 백제왕성이라면 당연히 왕성 내에서 연화문 막새를 비롯하여 불교관련 유물이 당연히 발견되어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넷째, 풍납토성 내에서 그동안 발굴된 건축유구 중 초석을 사용한 건축물은 하나도 없다. 발굴이 아직 끝난 상황이 아니라고 하드라도 추후 타 지역 발굴에서 초석을 가진 건축물이 발견될 확률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경당부지를 비롯하여 미래마을부지도 풍납토성내에서 왕궁이 위치할 만한 중요한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초석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향후 다른 장소에서 초석이 발견될 가능성은 더욱 희박하다는 의미이다.
지금까지 발굴된 성과를 토대로 건축학도로서 건축학적인 측면에서 분석한 결과 풍납토성은 백제가 일시 사용했을 수는 있으나, 그 근간은 백제의 왕도가 아니며 더더욱 한성기 마지막왕인 개로왕의 왕도로 볼 수 있는 그 어떤 건축학적인 증거가 없다.
고구려 장수왕의 위세에 밀려 한성백제가 멸망하고 문주왕이 공주로 천도할 때 까지 거의 500년 동안 머물렀던 왕도로 보기에는 너무나 많은 건축적인 제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한때는 군사적으로 고구려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공방을 벌렸던 한성백제의 왕성이라면 만주의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오는, 삼국사기 개로왕조에 나오는, 고구려 안악궁이나 고구려 평양성에서 나오는 그런 장려한 규모의 건물지가 나오지 않는 한, 조잡한 6각형 움집으로 범벅이된 풍납토성을 한성기 백제왕성이라고 주장하는 고고학자들의 주장에 나는 절대로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글■강찬석 건축가·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연구위원 기자
풍납토성이 ‘한성백제’의 왕성으로 굳어지는 듯하다. 성급한 결론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아직 그렇게 결론짓기에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다. 특히 건축학적 측면에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다.
무엇보다 풍납토성이 왕성이었다면 왕성에 걸맞은 건물이 있어야 한다는 간단한 사실부터 해결해야 한다. ‘왕궁의 흔적’이 발견돼야 하는 것이다. 물론 그 동안 많은 건물의 흔적이 발견되었고, 그것이 왕궁의 흔적이라는 주장과 보도까지 있었다.
같은 시기 한반도의 자웅을 겨루던 고구려와 백제의 왕성 유적. 고구려 안학궁(왼쪽 사진)터와 백제 풍납토성에서 발굴된 집터(오른쪽 사진)다. 장대한 규모의 안학궁과 달리 풍납토성 발굴 집터는 움집 형태에 가깝다.
풍납토성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당시 한강 지역의 다른 어떤 곳보다 발달한 형태와 규모여서 여기서 살던 사람들이 당대 최고 신분층이었다고 추정한 것이다. 성벽을 쌓은 방식이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의 도성(都城) 축성 기법과 비슷하다는 점도 풍납토성이 왕성이었다는 증거로 본다.
또 여기서 발견된 와당(瓦當·기와) 초석(礎石·주춧돌) 등은 당시 일반 백성이 사용할 수 없는 특수한 유물이라고 했다. 하지만 건축학적 측면에서 보면 이것들은 결코 왕궁의 흔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지금까지 풍납토성에서 발견된 건물의 흔적들은 왕궁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우선 풍납토성에서는 지금까지 주춧돌이 발견되지 않았다. 왕궁 정도의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상당한 굵기의 기둥이 필요하다. 또 이러한 굵기의 기둥과 기와 등 건물의 무게를 견디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거대한 주춧돌이 있어야 한다. 기둥을 통하여 땅으로 전달되는 건물의 무게를 분산시켜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왕궁 정도의 건물을 지으려면 적어도 수백 개는 있어야 한다. 비슷한 시기 백제의 경쟁자였던 고구려의 왕궁과 비교해 보자. 장수왕 대에 지은 고구려 왕궁인 안학궁(安鶴宮)에서는 대형 주춧돌만 무려 2,590개가 발견되었다. 이 유적을 바탕으로 추정하는 안학궁의 상상도를 보면 서울의 경복궁 못지않게 웅대하고 장중하다.
예를 들면 경복궁 근정전의 크기는 정면 5칸에 30.2m다. 이에 비해 안학궁에서 가장 큰 건물 중 하나는 정면이 19칸에 무려 87m에 이른다. 이 궁전으로 향하는 문 가운데 하나만 해도 정면 7칸, 38m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안학궁은 한성백제시대와 같은 시기의 건물이다. 서기 427년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세운 궁궐이다.
그 이전 고구려의 수도이자 첫 도읍지인 환도산성에서도 대형 주춧돌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풍납토성에서는 주춧돌이라고 볼 만한 돌이 아직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백제 제2의 도읍지인 공주지역에서도 왕궁의 기둥을 떠받쳤던 거대한 주춧돌이 대부분 발견되었다. 그렇다면 앞에서 주춧돌이 발견되었다는 주장은 도대체 무슨 말인가?
그 동안 왕궁의 주춧돌이라고 알려왔던 것을 살펴보자. 가운데 구멍을 뚫은 둥근 형태의 ‘주춧돌’은 큰 건물의 무게를 받치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다. 가운데 구멍을 뚫고 기둥을 끼워 고정하게 되어 있을 뿐, 아래에서 건물의 무게를 받쳐주게 되어 있지 않다. 더구나 그 재질도 일반적으로 주춧돌로 사용하는 돌이 아니라 흙으로 빚어 구워 만들었다.
힘을 받을 수 있을 재료가 아닌 것이다. 풍납토성이 한성백제의 왕성이라고 주장하는 쪽에서는 이런 것을 주춧돌이라고 소개해왔던 것이다. 단지 주춧돌이 발견되지 않은 정도라면 앞으로 발견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풍납토성 도처에서 발견된 건물들은 아예 주춧돌이 발견될 가능성조차 의심하게 한다. 남아 있는 기둥의 흔적은 이들 건물이 처음부터 왕궁 수준과는 거리가 멀었음을 말해준다.
너무 원시적인 건물의 흔적들 이 구조는 이른바 ‘우진육각형’, 즉 찌그러진 형태의 육각형 구조라는 것이다. 풍납토성에서 발견된 이러한 형태의 건물 구조는 한마디로 건축구조적으로 조잡하기 짝이 없는 건축물이라고 말하고 싶다. 청동기시대 이전의 움집에서 주로 나타나는 형태인 것이다.
그나마 풍납토성에서 발견된 건물터 중 가장 발달된 형태라는 것도 그리 나을 것은 없다. 이른바 의례용 건물로 추정되는 경당지구의 ‘여(呂)’자형 특수건물지를 보자. 말머리뼈가 여러 개 나왔다고 해서 ‘제사터’라고 추정하는 곳이다. 그 동안의 발표와 보도를 보면 여기서 기와 전돌 주춧돌이 매우 많이 나왔다고 소개돼 있다.
하지만 이 주장에도 문제가 있다. 이 건물터는 이른바 ‘굴립식’이라고 해서, 주춧돌 없이 구덩이를 파고 땅 속에 기둥을 박은 형태다. 이런 형식의 건물은 우진육각형 집보다 조금 발달한 형태지만, 제대로 주춧돌을 갖춘 건물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더욱이 이 건물 기둥의 지름은 20cm 내외에 불과하다.
우진육각형 집에 비해 약간 큰 정도다. 이 정도 기둥으로는 지금까지 알려진 것처럼 왕과 관련될 정도의 대형 건물을 짓기 어렵다. 기와가 왜 그곳에서 나왔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기둥의 굵기나 건물터를 보아서는 기와를 얹은 목조건물일 수 없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197번지(소위 ‘미래마을 재건축부지’) 일대에서 발견된 건물 흔적이다.
이 건물의 흔적이 각 언론에는 사비시대 백제 궁궐터와 비슷하다는 식으로 보도됐다. 그런데 여기서는 아예 기둥의 흔적 자체가 발견되지 않았다. 이 건물터는 평면 육각형 형태로 굴을 판 뒤 벽 가장자리를 따라 너비 1m 남짓 되는 도랑을 팠으며, 도랑의 내외 벽에는 강돌과 점토로 벽을 쌓아 올렸다.
이 건물은 기둥 없이 벽 자체가 건물의 무게를 받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 역시 왕과 관련한 건물 흔적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원시적이다. 아무리 한성백제시대라지만, 귀족들이 지금까지 나타난 건물들에서 중요한 행사를 치르거나 살 만하다고 느꼈을 것 같지는 않다. 하물며 왕이 이런 집에서 살았을 리 없다.
풍납토성이 한성백제의 왕성이라는 주장이 옳다면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장수왕을 비롯한 고구려의 왕들이 대형 기둥이 지붕을 받치고 지붕에는 무거운 기와를 얹은 화려하고 웅장한 왕궁에서 살 때, 그 라이벌인 백제의 왕들은 ‘움집’ 수준의 건물을 왕궁 삼아 살았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웅진시대 건물과 너무 차이가 난다 조금 더 들어가 보자. 풍납토성에서 나오는 건물의 수준이 이런 정도인 데 비하여, 백제 제2의 도읍지 웅진(지금의 공주)에서의 백제 건축은 사뭇 다르다. 공주에는 백제 시대의 건물이라는 임유각을 복원해 놓았다. 이 임유각의 건축 양식을 살펴보면 조선시대 건물과 기술적 차이는 거의 없다.
뿐만 아니다. 공산성에서 발굴된 백제 시대의 건물도 모두 가구식(나무로 기둥과 보를 짜 맞춘) 구조로 지었다. 공산성 내에서 가구식이 아닌 건물은 한 채도 없다. AD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을 받고 공주로 천도한 백제가 공주에서 이룩해 놓은 건축물에는 풍납토성에서 발견된 것과 같은 우진육각형 집 정도의 건물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풍납토성에서 움집 혹은 굴립식 건축을 짓고 살던 백제인들이 공주로 옮겨가자마자 급격히 건축 기술을 발전시켜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집을 지었다? 그것이 가능한 일일까? 백제가 웅진으로 도읍을 옮기고 나서 사회의 전반적 문화가 달라졌기 때문에 한성백제와 비교할 수 없다는 반론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백제는 공주로 도읍을 옮기고 나서도 한성을 포기하지 않았다. 동성왕 4년과 5년, 21년, 무령왕 7년과 23년, 성왕 26년의 기록에 따르면 백제는 여전히 한성 지역을 관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풍납토성이 한성백제의 왕궁이었다면 적어도 웅진 시대와 비슷한 건물이 조금이라도 나와야 정상일 것이다. 그러한 흔적이 나오지 않는 한, 풍납토성이 한성백제의 왕성이라는 주장은 접어두어야 한다.
풍납토성 안에 건설된 도시구조도 이상하다. 동아시아에서는 도성(都城)을 건설할 때 이른바 격자(格子)구조라고 해서 바둑판처럼 질서정연하게 기획된 구조로 도성 안의 도시를 건설했다. 이러한 구조는 주(周)나라 이래 동아시아의 각 나라에서 도성을 건설할 때 거의 교과서적인 틀로 자리 잡았다. 고구려의 장안성이나 신라 왕경인 경주에서도 이 같은 격자구조는 뚜렷하게 나타난다.
시간이 많이 흐른 후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일본의 나라(奈良) 시대에 건설된 도시들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풍납토성 안에는 아예 ‘도시계획’이라고 할 만한 것 자체가 보이지 않는다. 관련 발표나 보도를 보면 풍납토성도 이런 구조를 가진 것처럼 소개되고 있다. 풍납토성 동쪽 벽에 적어도 3~4개의 성문이 있었고, 중앙에 정문이 있었으며, 남북 방향과 동서 방향으로 교차되는 도로가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이 도로는 도성 안의 중요 공간을 감싸던 핵심 도로이거나 물자를 나르던 길로 추정했다. 하지만 도로가 있다고 해서 그것을 도성의 도시구조라고 할 수는 없다. 현재 발견된 건물의 배치를 보면 도시구조를 기획하고 배치된 것이 아니다. 일정한 방향 없이 무질서하게 여기저기 흩어져 건물이 세워져 있는 것이다.
왕성치고는 규모가 너무 작다 고구려나 신라 왕경만 하더라도 조방구조라 하여 네모나게 구획을 지어 그 지역을 직각으로 지나는 도로가 만들어져 있다. 풍납토성에서 발견된 도로는 그러한 도로와는 거리가 멀다. 전성기를 구가했던 백제가 명색이 도읍지라는 왕성을 이렇게 난개발 했을 리 없는 것이다.
그 규모 또한 당시의 이웃 나라와 비교하면 어이없을 정도로 작다. 사실 여기서 풍납토성의 규모를 말하면 한성백제 왕성에 관심을 가졌던 마니아들로서는 조금 의외일 것이다. 풍납토성이 처음 발굴될 때만 하더라도 대한민국 발굴 역사상 최대 유물이 쏟아져 나왔고, 또 길이 4km, 너비 40m, 높이 9m로 추정되는 풍납토성의 규모에 새삼스럽게 감탄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규모가 작다니?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사실 그전까지 뻔히 드러나 있던 풍납토성의 규모에 새삼 흥분했던 이유는 풍납토성이 본격적으로 발굴되기 전까지만 해도 한성백제의 왕성 행세를 했던 몽촌산성과의 상대적 비교가 작용했음을 의식해야 한다. 그렇다 보니 정말 비교해 보아야 할 비슷한 시기의 고구려·신라, 더 나아가 중국·일본의 왕성 규모와 비교해볼 생각을 하지 못한 측면도 있다.
심지어 나중에 쌓았던 백제의 웅진·사비 도성과의 비교조차 소홀히 했다. 냉정하게 당시 주변 국가들의 도성과 풍납토성의 규모를 비교해 보자. 보통 수백만 평, 북위 구육성의 경우 1,000만 평에 이르는 다른 도성의 규모에 비하면 풍납토성은 너무 초라하다는 점이 쉽게 드러난다. ‘세트’라고 하는 몽촌산성까지 합쳐도 왕성 전체가 다른 나라의 왕궁 규모에 불과하다.
다른 나라, 심지어 같은 백제의 다른 시대에 비해도 초기 백제의 도성이 이렇게 작을 리 없다는 것이다. 성의 규모가 작은 만큼 풍납토성 안에 살았던 인구도 한 나라의 왕성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적다.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조사한 3,200여 평의 흔적을 하나의 샘플로 하여 성(城)안에 살았던 전체 인구를 추산해 보면 모든 요소를 최대치로 가정하고 계산해도 1만1,000명을 넘지 못한다.
이 정도 인구라면 중앙집권적 고대국가체제를 갖추기 이전 단계인 소국(小國) 정도에 불과하다. 명색이 고대국가체제를 갖추었다는 백제의 도성이 있던 도읍치고는 지나치게 적은 수치다. 그러고 보면 그 동안 무시하고 지나갔던 기록들 중에서도 풍납토성이 왕성은 아니었음을 시사하는 것들이 있다.
기루왕 40년의 기록을 살펴보자. “여름 6월에 큰 비가 10일 동안 내려 한수가 넘치니 민가가 무너지거나 떠내려갔다”고 되어 있다. 개로왕 21년 기록에도 “백성의 집도 자주 강물에 무너지니”라는 말이 나온다. 이들 기록을 통해 백제가 한강 지역에 자리 잡았던 시기에 홍수 피해를 제법 보았음을 알 수 있다.
즉, 한강과 가까운 곳에 백성들이 살고 있었다는 점과 홍수 때문에 강물이 넘쳐 강변에 위치한 민가의 피해가 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점을 확인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특별히 백제 때만 그런 것이 아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풍납토성이 자리 잡은 풍납동 지역은 걸핏하면 홍수 피해를 보는, 이른바 ‘상습침수지역’이었다.
‘풍납토성=한성백제 왕성’이라는 성급한 결론 때문에 중요한 사실을 무시해버린 측면 아닐까? “하고많은 날 홍수가 나는 지역에 궁궐을 지었을 리 없다”는 말을 헛소리로만 듣고 넘길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홍수의 우려가 있다고 해서 성곽을 세우지 말라는 법은 없다는 주장도 있을 수 있다.
실제로 강 옆의 평야지대에 쌓은 다른 성도 많다는 사실도 반증으로 내세운다. 백제인들이 둑을 쌓고 홍수를 막으려 했던 노력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백제가 그만큼 홍수를 다스릴 자신과 능력이 있었다는 말이다. 반대로 홍수가 두려웠다면 왕성 아니더라도 과연 강가에 쌓았겠느냐는 반문도 있을 수 있다. 당시는 지금보다 강바닥이 낮아 홍수 위험도 같이 낮아진다는 것이다.
홍수가 났는데도 왕궁만 무사했다? 하지만 앞서 기록을 인용한 이유는, 홍수가 자주 나는 만큼 왕성을 풍납토성이 있는 지역에 지었을 리 없다는 말을 하자는 뜻이 아니다.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한성백제 500년 동안 왕궁이 장마나 홍수 피해를 보았다는 기록이 단 한 차례도 없다는 사실이다.
풍납토성 안에 왕궁이 있었다면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그렇다고 왕궁이 민가와 동떨어진 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할 수도 없다. 풍납토성 안에서는 특별히 수해를 피할 만한 지역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비류왕 30년 여름 5월의 기록에 의미심장한 내용이 있다. “별이 떨어지고 왕궁에 화재가 있어 민가를 불태웠다”는 내용이다.
이를 보아 왕성 안의 왕궁에서 일어난 화재가 백성들이 살던 지역까지 번져 민가를 불태웠음을 알 수 있다. 즉, 왕궁과 백성들의 거주 지역은 왕성 안에 같이 있었으며, 일부 민가는 왕궁에 불이 나면 옮겨 붙을 정도로 왕궁과 상당히 가까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홍수 때 왕궁만 무사할 수 있었을까?
기록에 왕궁이 피해를 본 것은 빠져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왕을 중심으로 적게 마련인 전근대의 기록에서 왕궁의 피해는 적지 않고 백성들의 피해만 적었을 수 있을까? 그다지 타당성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답은 분명하다. 왕궁이 한강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었거나, 왕궁은 홍수 피해를 보지 않을 정도로 일정한 높이에 위치해 있거나 둘 중 하나다.
그런데 풍납토성 안에서는 이에 해당하는 지역이 없다. 만약 풍납토성이 왕도 한성이라면 한수가 넘쳐 민가가 무너지거나 떠내려갔다고 기록할 것이 아니라 민가와 함께 왕궁과 종묘도 떠내려갔다고 써야 옳다.
그런 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풍납토성 안에 왕궁이 있었을 리 없는 것이다. 기루왕 8년 가을 8월조에는 “한수의 서쪽에서 크게 열병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아신왕 6년 “한수의 남쪽에서 크게 열병하였다”는 기록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또 구수왕 7년 겨울 10월 “도성의 서문에 화재가 있었다”, 고이왕 9년 7월 “서문에 나가 활 쏘는 것을 관람하였다”, 비류왕 17년 가을 8월 “궁 서쪽에 사대(射臺)를 쌓고”, 아신왕 7년 9월 “도성 사람을 모아 서대에서 활쏘기를 익히게 하였다” 등의 기록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백제가 한강 지역에 자리 잡고 있던 전 시기의 기록에서 단 한 차례도 동문이나 남문, 북문에 대한 기록이 없다. 이에 비해 도성과 관련한 대규모 행사는 주로 도성의 서쪽에서 벌어졌다. 이들 기록대로라면 도성의 서쪽에 군사열병이나 활쏘기 같은 행사를 벌일 수 있을 정도로 넓은 땅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풍납토성에는 그럴 만한 지역이 없다. 풍납토성의 서쪽은 바로 한강과 붙어 있어 그러한 공간이 없는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나오는 궁 서쪽 문에 대한 기록이 모두 거짓말이 아니고서야 이것만으로도 풍납토성이 도성이었다는 논리가 성립할 것 같지 않다.
지금도 생매장당한 사실들 이 밖에도 한성백제의 왕성과 관련해 반드시 따져보아야 할 중요한 사실들이 생매장당하고 있다. 그 중 하나는 경기도 하남시에 있는 천왕사터 밑에서 나타난 거대한 목탑의 흔적이다. 심초석의 규모로 보아 동양 최대의 목탑이라는 황룡사탑보다 훨씬 크고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존재가 확인된다면 한국 탑의 역사는 물론 여러 가지 역사를 다시 써야 할 판이다. 그만한 목탑이 있었다면 한성백제 시대에는 시가지 한복판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이러한 탑의 흔적이 있다는 사실이 이 지역 발굴보고서에는 빠져 있다. 풍납토성에서 나온 유물들의 탄소연대측정 결과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 중 하나다.
몇몇 유물의 탄소연대측정 결과가 기원 전후로 나오자 온조가 백제를 세웠을 즈음이고 당연히 <삼국사기> 기록을 뒷받침한다는 것까지만 생각했다. 그렇다 보니 많은 데이터가 기원전으로 나온다는 사실은 무시되고 말았다.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풍납토성이 백제 이전의 세력과 연결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렇게 되면 이 지역 문화의 기원과 국가 발전의 역사는 더욱 상대로 거슬러 올라갈 가능성이 커진다. 그러나 지금 이에 대한 논의를 적당히 접어버리면 이의 가능성에 대한 연구는 시작도 되지 못하고 마치 천왕사터의 대형 목탑 심초석처럼 생매장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王城’ 주장은 오히려 백제 죽이기
기존 발견물은 왕성 아니라는 주장 뒷받침… 학계의 공개적 논의 절실
히스토리 뉴스 | 풍납토성, 한성백제 王城 아니다 숨쉬는 역사
글■이희진 역사학자·전 국사편찬위원회 구술자료연구책임자 기자
한국고대사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는 아직도 한둘이 아니다. 그 중에서도 한성백제의 왕성이 어디였느냐 하는 것은 특히 중요한 문제로 꼽힌다. 백제의 역사, 나아가 한국고대사를 보는 시각 자체를 결정하는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식민사학의 논리를 추종하던 한국고대사학계의 기득권층은 백제가 일러야 3세기 중반, 늦으면 4세기에야 나라꼴을 갖추었다고 주장한다.
그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한때 몽촌산성 같이 4세기 즈음에 지어진 성을 백제 왕성으로 밀었다. 풍납토성은 이런 주장에 훌륭한 반증이 될 수 있었다. 3세기 이전에 지은, 그것도 고대국가 이전 단계인 부(部)체제 수준에서는 지을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규모의 왕성이 발견되면 식민사학자와 그 추종자들의 학설은 바로 무너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한성백제의 왕성 문제는 한국고대사의 많은 문제 중에서도 핵심 논쟁거리였다. 풍납토성은 바로 이 때문에 역사의 관심거리로 떠올랐다. 풍납토성을 보존해야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풍납토성을 내세워 철 지난 식민사학 논리만 내세우는 데 급급했던 한국고대사학계의 ‘호랑이’를 몰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풍납토성은 어느 정도 역할은 한 셈이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문제는 풍납토성을 내세우는 만큼, 철저하게 짓밟혔던 백제의 역사를 되찾을 수 있겠느냐 하는 점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풍납토성이 본격적으로 발굴되어 알려지게 된 것만으로도 식민사학자들이나 그 추종자들의 학설은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한다.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잘못하면 작은 성과 때문에 더 큰 가능성을 묻어버리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발굴된 풍납토성의 모습이 당시 다른 나라의 왕성에 비하면 그다지 대단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풍납토성이 한성백제의 왕성으로 굳어지면 백제라는 나라는 별 볼 일 없는 나라가 돼버릴 수 있다는 말이다.
고대 한일관계사 왜곡의 핵심 중 하나는 ‘백제 죽이기’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식민사학자들이 백제를 형편없는 나라로 만들려는 근본 이유는 왜를 동아시아 남부의 국제정세를 주도했던 나라로 띄우려는 데 있다. 백제만 짓밟아 버리면 당시 고구려에 대한 대항을 주도한 세력으로 왜(倭)를 대치할 만한 나라가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백제만 그저 그런 나라가 되면 식민사학자들의 의도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셈이다. 뒤에 설명하겠지만 백제가 정말 풍납토성 정도를 왕성으로 삼았던 나라라면 주변 정세에 이리저리 휘둘릴 만큼 힘없는 약소국가에 불과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다행히 풍납토성에서는 아직 한성백제의 왕성임을 확인하는 증거가 발굴되지 않고 있다.
역으로, 그 동안의 발굴 결과는 오히려 풍납토성이 한성백제의 왕성이 아님을 밝혀주고 있다. 움집 형태의 주거지 발굴이나 장대한 왕궁을 받칠 만한 주춧돌의 부재, 규모의 왜소함 등은 모두 풍납토성이 한성백제의 왕성이 아닐 수도 있다는 증거들이다. 백제 역사를 과대포장하기 위해 없는 사실을 만들어내자는 것이 아니다.
한성백제의 왕성과 도성이 풍납토성 정도로는 설명되지 않을 정도의 규모였다는 주장은 이미 10년도 더 전에 나왔다. 이 주장이 맞는다면 지금 풍납토성을 왕성으로 굳혀버리려는 시도는 전형적인 식민사학의 논리에서 많이 벗어나지 못하는 논리로, 나머지 백제 역사를 다시 묻어버리는 꼴이 될 수 있다.
겨우 동대문 발굴해 놓고 조선 왕궁을 발견했다고 호들갑을 떨며 경복궁을 묻어 버리는 꼴이 된다는 말이다. 여기서 문제 삼고 싶은 것은 풍납토성을 한성백제의 왕성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태도다. 그들은 식민사학의 논리에 절어 있던 기득권층을 상대로 싸우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충을 겪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그렇게 쌓아 올린 공으로 대접받게 되자 자신들이 비난을 퍼붓던 식민사학자들을 그대로 닮아가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그들이 그 동안 한국고대사학계의 기득권층에 비난을 퍼부었던 이유는 식민사학자들이 자신의 주장만 진리인 것처럼 선전하며 새로운 사실을 밝혀내는 것을 틀어막았기 때문 아니던가?
풍납토성보다 더 큰 규모의 한성백제 왕성과 도성이 있었으리라는 주장이 터무니없는 것이라면 정당하게 근거를 대고 반박하면 그뿐이다. 그 따위 주장에는 일일이 반박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는 식의 자세는 학문하는 사람의 올바른 태도가 될 수 없다. 뻔히 내용을 알면서도 반론의 기회마저 마다한 채 공개 논의를 회피하면서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몰아세운다면 자신들이 그토록 비난하던 식민사학자들과 무엇이 다른가?
한성백제의 역사는 돈으로 따질 수 없는 엄청난 잠재력을 안고 있는 자산이다. 그런 자산이 잘못된 논리에 묻혀버려서는 안 된다. 그러한 위험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해 역사적 자산을 발굴하려는 시도를 막는 사람들 때문에 생겨난다. 한성백제의 왕성 문제는 ‘늑대의 횡포가 호랑이보다는 덜하니 참으라’는 식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충분한 근거가 있음에도 일말의 가능성조차 무시하며 논의 자체를 봉쇄하는 것은 학문적 폭력이다. 다른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당장 백제의 왕성을 둘러싼 문제에 대해 새로운 결론을 내리자는 것은 아니다. 공개적으로 정정당당하게 시비를 가림으로써 우리 손으로 우리 역사를 묻어 버리는 우를 범하지는 말자는 말이다.
첫댓글 저도 지리학적 위치상 백제의 위례성은 하남쪽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고구려 초기수도 환도성처럼 그렇게 보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음...지극히 지당하신 말씀인데,...유감스럽게도 '현, 하남시 춘궁동'도 백제의 초기도성이 아닌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아니,,,즉, 그곳이 백제의 초기 도성인 '河南 위례성'이기를 주장하기(바라는) 위한 기록이나 몇몇 유물들이 있을 뿐 4세기까지도 그곳에는 백제가 없었습니다. 물론 그 이후에도 그곳이 백제의 도성이 된 적이 없었고요...힌트는 '河南'인데, 이 '河'는 바로 '黃河'인 것이므로 현,黃河의 하류에서 백제의 초기도성 위례성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역사서에서는 아마 '漢水'라는 강을 건넌 것으로 되어 있지요...그 '漢水'는 '漢나라시기에 黃河의 일부를 부른 이름'이지요...그래서 현,서울에 '漢江'이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해서 풍납동이나 춘궁동 유적들의 역사성이 없다는 것은 결코 아니므로 결코 오해마시기 바랍니다...이들 유적들은 일부 이곳이 백제의 초기 개국지로 보이게 하기 위한 위조된 유적도 있지만,...대부분은 백제의 개국 이전에 실제로 이지역에 살았던 우리 조상들의 유적이거나 그 후대의 유적으로 보이므로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어떤면에서는 백제의 유적 보다도 더 중요하고 또 소중한 유적이 될 것입니다....결코 헛된 개발논리나 잘못된 역사해석에 의해서 귀중한 유적을 조금이라도 훼손시켜서는 않될 것입니다...
안녕하세요...카오스님.....윗글들은 풍납토성이 왕성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측면에서 한반도내라면 풍납동이 아니라 하남에 가까울 것이다는 의미로 올린 것입니다..... 백제가 한반도 내에 있는 것인지 밖에 있는 것인지는 저역시 큰 관심을 갖고 있어, 카오스님의 글과 백랑수님의 글들을 유심히 읽어보곤 합니다........
풋!!!
처음엔 '백제의 첫 도읍지'를 중간엔 '하남위례성'을 뒤엔 '한성백제의 수도' 를 이렇게 총 세개의 백제도읍을
찾는 글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