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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0리 남도길을 열어 가을을 채집하고 왔다. 採集으로 마음 풍경이란 단어를 빌려 後記를 적으려 한다. 가을의 대명사는 아무래도 단풍이다. 어릴 적 가을이 오면 한두 권 정도 책을 가까이 두고 종종 읽던 버릇이 있었다. 읽다만 갈피를 제대로 손쉽게 찾기 위한 방편으로 아름다운 단풍잎을 주어 갈피 곳곳에 야생화를 압화를 만들듯 넣어두던 추억이 많은 편이다. 또한 가을이 오면 어머님의 분부가 있으셨는데 그것은 다름 아니라 살이 아름답게 격자무늬를 하고 있는 창호지문을 문틀에서 문을 뽑은 후 퇴색한 창호지를 새것으로 바꾸라는 것이었다. 물을 뿌려 옛 창호지를 곱게 제거 후 새 창호지를 바르면서 손잡이가 달린 부근에는 붉은 단풍잎을 붙인 후 여러 겹의 창호지를 배 접하여 마감을 하고 양지바른 곳을 찾아 세워 말렸다. 대충 마르면 다시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입술을 모으고 입바람으로 창호지에 물을 뿌려 창호지에 긴장감을 조성해 놓으면 팽팽해진 창호지에서 탕탕 튀는 북소리를 듣을 수 있었다. 가을하면 제일먼저 떠오르는 것은 아무래도 단풍과 관련된 것들이 주류를 이룬다. 아무튼 가을 단풍 구경을 하고 조화를 이루고 있는 산천의 아름다운 경치는 마음에 借景하여 담아 오는 것으로 11월 계획을 세웠던 것을 실천하기 위하여 남행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비움으로 가는 길목 가을, 그 중에서도 늦가을, 산천은 나름대로의 계절의 경계를 허물고 있었다. 가을을 스스로 지우고 백설에게 가을의 터전을 내주기 위한 일인듯 가을의 형색은 사라지고 있었디 그래도 남도 800백리 길로 접근할수록 추색은 살아 있었다. 추암의 정경을 고스란히 지닌 마을, 추암을 시작점으로 선택한 것은 서울을 떠나기 전 이틀 전에 변경한 것이다. 변경의 이유는 걸음 여행 마친 후 다음 행선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함이었다. 장거리 출행에는 무엇보다도 신경써야 할 일은 시간관리다. 그런데 너무 시간관리에 중점을 두다보면 주마간산으로 끝나야 함으로 과정이 참 싱겁게 끝나 버리게 된다. 그렇다면 두개를 다 충족시킬 코스선택이 중요하게 되는 것이다. 이 점을 착안하여 변경하게 된 것이다. 추암도 이제는 현대화 되는 고을로 진화하고 있어 버스에서 내린 나를 당혹하게 만들어 주었다. 전답이 있던 자리에 주차장이 생기고 동쪽으로 기울어 접근할 수 있는 길도 신작로처럼 아스팔트 포장으로 바꿔 놓았다. 혼란을 수습한 후 간단한 준비체조를 하도록 유도하였다.
준비운동은 우리들 신체에 윤활유 역활를 해주어 행동을 자유스럽게 하고 행동의 컨디션으로 이끌어주며 안전사고를 미연에 방지해주는 역활도 있다. 준비를 끝낸 후 또 하나의 선택을 변경한 이유에 대하여 주저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점심식사와 관련된 결정이다. 맑고 건강한 편백나무 숲 안에 설치된 평상에 앉아 먹는 점심식사는 얼마나 근사한지 모른다. 씹을수록 산소와 결합된 맛의 풍미는 상상할 수 없는 음식의 품격을 제공한다. 그런데 갈수록 무게감을 호소하는 소리가 들려 금곡 영화마을 즉 걸음 여행 종료 후 먹기로 이미 변경 공지를 하였지만 쉽게 유혹을 내칠 수 없었던 것이다.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성큼 먼저 길을 열어 형제들과 멀리 떨어져 앞서 나가 임도 시작점에 서서 뒤를 따라 오르는 형제들을 기다렸다.
얕으막한 언덕을 넘으며 누군가 아니 여기에도 주차장이 있는데, 왜! 저 아래에서 내린 것이지 하는 것 같다. 이곳 주차장은 아주 작다. 이곳에 분포되어 있는 펜션, 가게 등이 사용해도 모잘랄 판이다. 그리고 여기서 부터 시작하는 가파른 임도 급격하게 오르면 지쳐버린다. 그리고 컨디션 난조에 빠져버릴 수 있다. 이런저런 사유로 약 0.5km 정도 걷게 한 것이다.
임도를 향해 출발하기 전 단체사진을 만들었다.
잔돌과 중돌이 섞여 있는 임도 가파른 길을 오르려니 성가시다. 두 번씩 쉬어가며 올랐다. 임도 다운 임도를 만나려면 약 25분간 1.7km 정도 올라야 한다. 오르면서 치수를 실패한 원인으로 길이 돌 길이 된 것이라 설명해 주었다. 가파른 흙길에 물 길을 만들어 주어야 흙이 쓸려내려가지 않는 법이다. 그러한 시설을 안하면 흙이 끈임없이 사라져 흙속에 파묻혀 있던 돌들이 드러나고 언덕에 놓여 있던 돌도 물살에 떠내려와 돌 길로 변하는 것이다.
막바지 언덕길을 오르고 있는 중이다. 이곳만 넘어서면 春園 林種國 선생 공덕비가 세워져 있는 곳이 나온다.
전남 순창 출신으로 6.25 전쟁 후 헐벗은 산을 보고 조림사업에 뛰어들어 가산을 풀어 편백나무 조림사업을 해 나간다. 자금이 딸리면 먼저 심어 놓은 편백나무를 담보로 재원을 마련하여 다시 조림사업을 이어간 선생께서는 결국 성공한 조림사업가였지만 이 숲을 통해 개인의 이익을 취한 것은 전무한 분이시다. 조림사업 대부분은 국유림이고 개인 취득하고 있던 산은 빚에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가고 선생은 고향 순창에 영면하신다.
이후 장성군민들은 선생의 공을 기리기 위하여 이곳에 공덕비를 세운 것이다. 편백나무 숲 영향으로 축령산 일대에서 관광업을 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우리들 역시 선생의 조림사업 덕분에 이곳을 찾게된 것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선생의 공덕비를 떠나 편백나무 조림지 중심을 찾아 나섰다. 오랜된 편백나무 숲이 잘 조성되고 그 사이에 맨발로 걸을 수 있는 산책길과 평상을 만들어 잠시 쉬어가며 명상에 잠길 수 있는 장소를 곳곳에 만들어 놓았다. 이곳에 머물며 편백나무에 뿜어 나오는 피톤치드를 마시며 잠시 쉬어 가기로 하였다. 아~~ 너무 공기가 맑다. 전신과 정신 속으로 맑은 공기가 스며들어 청량감으로 가득해 져갔다. 그리고 다시 걸음을 재촉하여 다음 방문지인 임종국 선생과 부인이 잠들어 계신 수목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가는중 습지를 중심으로 설치된 편백나무 숲 오솔길을 따라 걷다
습지로 내려가는 테크길을 걸어 수목장으로 접근하기로 결심한 후 형제들을 이곳으로 이끌어 나갔다. 아름다운 편백나무 숲 영향으로 다들 감탄사가 분위기를 업시키고 아 좋아 정말 잘 왔어들 한다. 이런 말을 듣게 되며 이 일에 앞장 선 보람을 느끼게 된다.
습지 중앙에 마련된 쉼터에 잠시 앉아 늦가을 전경을 빌려 보았다. 하늘거리며 떨어지는 낙엽, 본색은 초록과 푸름이지만 본색에 주눅들어 숨어 있던 노란, 붉은 빛들은 나무잎 줄기가 스스로 물 길을 막을 때까지 기다린다. 물 길이 막히면 그제서야 숨어 있던 색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단풍인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발현된 단풍 색들도 변하지 않는 색으로 마지막으로 치장하는데 그 색은 바로 갈색이다. 그 갈색은 흙위로 떨어져 흙이되어 영원한 색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데크길 끝을 뺘져 나오면 수목장으로 오르는 길이 나온다. 그곳이 수북히 쌓인 낙엽이 너무 아름다웠다. 그리고 빈의자들이 무엇인가 주인을 잃은 의자로서 쓸쓸함이 느껴져 잠시 몇장의 사진을 만들어 가며 늦가을 오후의 시간을 즐겼다.
파스칼 형님께서 스스로 담으신 가을정경들을 보고 즐기시는 순간을 포착해 두었다. 저 위로 가는 길이 바로 임종국 선생의 수목장이 있는 곳이다.
쉬며 사진을 찍고 담소하며 가을을 즐기다 감사의 인사를 드리러 수목장으로 올랐다. 임종국 선생은
春園 임종국(林種國) 선생은 전북 순창군 복흥면 조동에서 임영규의 장남으로 1915년 태어 났다. 순창중학교 3학년 중퇴를 한다. 이후 25세에 1940년 장성군 장재마을로 이주 양잠과 특용작물을 재배하여 소득올려 편안하게 생활하게 된다. 먹고 살기 위한 농업에서 탈핍하여 돈을 벌수 있는 영농을 찾아 고민하다. 장선군 덕진리 야산에서 자라는 인촌 김성수의 삼나무와 편백나무를 발견하고 감탄하게 되어 조림사업에 뛰어드는 계기가 마련된다. 6. 25 전쟁 후 헐벗은 산에 1956년경부터 사재를 털어 자신의 소유 임야에 삼나무 5000주를 심어 1ha 시험조성을 하여 성공하게 되자 본격적으로 몰두하게 된다. 선생은 장성군 북일면 문암리, 서산면 모암리, 북하면 월성리 일대 100ha를 추가 매입하여 편백, 삼나무를 심어 나간다. 좀 더 쉽게 살아나갈 수 있는 사람이 생고생한다고 많은 사람들이 조롱했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조림사업에 매진한다. 1968년경 전국에 몰아 닥친 가뭄에 조림한 나무들이 말라죽어 나가자 우물을 만들어 물지게를 지고 산으로 오르내리며 갖은 정성을 기울여 지금이 편백. 삼나무 숲을 탄생시킨 것이다. 76년까지 계속된 조림사업은 570ha에 280만 여그루의 나무를 심어 지금의 숲을 조성한 숲 축령산 은 1972년 5.16 민족상을 받을 때 1971년 까지 투자한 비용은 7,370만원이다. 당시 10년 자란 나무 한그루가 1000원임을 감안한다면 엄청난 재원을 투자한 것이다.
숱한 위기를 넘기던 선생은 1979년 사채업자에게 산과 나무는 넘어 가게 된다. 결국 그 충격으로 1980년 뇌졸증으로 쓰러져 7년간을 투병하다. 1987년 한국의 조림왕 춘원 임종국 선생은 선종에 든다. 선생은 먹고 살기 힘든 시절부터 삼나무 634,000 그루, 편백나무 1,406,000 그루, 밤나무 54,000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2002년 산림청에서 이곳을 매입할 무렵 산주는 9명이나 되었지만 조림가 임종국선생의 후손들 이름은 한 명도 없었다. 소유하던 산림을 사채업자들에게 빼앗겼기 때문이다. 산림청은 국유림으로 전환시킨 후 조림왕 춘원 임종국 선생의 순창 고향 묘원에서 이곳으로 이장하여 수목장으로 편백나무 숲에 영원한 안식처를 만들어 선생의 영혼을 위로하고 있는 것이다.
선생의 본명은 요셉이고, 부인 김영금의 본명은 율리안나이다. 선생은 자연을 사랑하고 숲을 얼마나 사랑했던지 아들에게 이런 당부를 남긴다. 딸을 낳으면 자연이라 짓고 아들이면 조림이라 부르라 했던 자연인이셨다. 선생 덕분에 이곳을 찾아 행복을 누리는 우린 창조적인 질서와 더불어 춘원 임종국 선생님의 공로를 송구한 마음으로 새기며 모두 한 마음으로 주모경으로 기도를 드렸다.
이어서 낙엽을 모아 고상을 만들었다. 창조적인 질서를 보존하고 가꾸시다 자신의 몫으로는 단 한평의 산지도 남기지 않으신 당신이야 말로 진정한 프란치칸들이 닮아야 할 정신입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선생의 귀품있는 삶에 대하여 떠올리며 존경의 글을 남겼다.
춘원 선생님, 요셉 형제님 ~~^&^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께서 조림하여 후대에게 멋진 숲을 선물해 주신 숲을 보고 묵상하며 축령산 편백, 삼나무 숲에 깃든 춘원선생님의 혼령에게 하직 인사를 드리며 숲을 나섰다. 옛날부터 고창, 장성에는 자신을 희생하며 조국을 위해 헌신한 걸출한 사람들이 참 많다. 김인수, 김성수가문이 그렇고 김익진이란 프란치스칸이 그러하고 춘원 요셉형제님과 율리안나 자매님 부부가 그러하다. 양손을 마주 잡고 나도 모르게 화살기도를 편백나무 숲으로 날렸다. 주 하느님 창조적인 질서인 축령산을 더욱 더 윤택하게 하기 위하여 관리자로서 소임을 다하고 느티나무 수목장으로 영면한 요셉 형제와 율리안나 자매님을 사랑으로 모듬어 주시옵고 남은 가족들에게도 정의로운 발전으로 행복한 삶을 이어 나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옵소서 그리고 요셉 형제님과 같은 창조적인 질서를 올바르게 관리할 제 2, 제 3의 인물이 연이어 나타나도록 기도하오니 들어 허락하옵소서. 아멘. 주님 영원히 찬미받으소서 알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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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프랑스에서 개인이 돌산을 숲으로 가꾼 이야기를 책으로 읽은 적이 있지만 이렇게 한국에서도 한 사람이 평생 동안 편백나무 숲을 가꾼 곳을 직접 몸으로 체험하니 몸과 마음이 다 시원하군요. 걸음여행을 이끄는 안 세베리노 형제에게 거듭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요.
더불어 행복하 하루였습니다. 동행 감사드립니다.
91차 걸음여행^^
전남 장성 축령산 휴양림
매달 한번씩 걸음여행을 하면서 ^^늘 감탄사를 연발케 하고 ......
아름다운 가을 풍경^^
주렁 주렁. 탐스럽게 달려있는 감 나무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산
20년간 삼나무.편백나무 390만 그루를. 심으신 .....
위대하신 임종국 요셉 님..*^
대한민국에 이런분이 계셨다는것이. 자랑스럽습니다★★
삼나무.편백숲 에서 나오는
피톤치드 ^^정말 행복하고 감사한 하루였습니다
이런 좋은곳으로 인도 해주신 세베리노 리더님께
감사드리며.
파란 하늘. 오색 단풍. 피톤치드 내음......
삶의 보람과. 아름다운 가을을....차곡 차곡. 쌓으렵니다~*♥
감사합니다~*♥
잔밥과 잔 찬을 정성스럽게 싸서 나눔해 주시는 성품은 분명 편백을 닮으셨다 하여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라 표현해 봅니다. 더불어 피톤치드 같은 하루였습니다. 다음 계획도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번개도 지금 다듬고 있습니다. 평화가 넘치는 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