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쪽 나가리(볼)를 띵게야제(던져야지).어이구,쟤는 투스리 이후 그 볼에쥐약인디.쨔(투수)가 상대 분석을 안했네.”
기아가 잠실 인천 수원 등 수도권에서 경기를 벌이는 날이면 어김없이 구장기자실을 휘저으며 걸쭉한 남도 사투리와 푸짐한 넉살로 좌중을 단숨에 잡아끄는 홍보맨이 있다.기아 타이거즈의 윤기두 차장(41).
선수 출신은 아니지만 기아의 전신인 해태 야구단에서 18년을 보낸 터줏대감이다.‘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어지간한 코치 뺨 치는 안목을 자랑한다.
청소년 육상 대표 출신으로 우연히 해태에 발을 들여놓은 게 인연이 돼 야구가 천직이 됐다.이후 매니저로,연봉협상자로,홍보맨으로 현장과 프런트를 종횡무진 넘나든 진기한 이력의 소유자다.
■ 인생의 방향타
조선대학교 체육과 3학년이던 1983년 말.은사인 김응식 교수가 부르더니 당분간 ‘조교’ 노릇을 좀 해달라고 했다.그 해 처음 한국시리즈 정상에 오른해태는 장기 레이스에서 무엇보다 체력이 중요함을 깨닫고 김 교수에게 겨울 체력훈련을 지도해달라고 요청했던 것.윤씨는 이후 6년간 보조와 정식 트레이너를 거치면서 김봉연 김성한 김일권 김종모 등 걸출한 스타들의 체력훈련을 이끌었다.
■ 꿈 많은 육상 유망주
다들 밥벌이가 시원찮았을 70년대.그도 먹을 것은 없고 자식은 많은 한 집안의 아이였다.밥을 먹기 위해서는 뭔가 찾아나서야 했다.72년 광주 학강초등학교 4학년 때 ‘한 입 던다’는 생각으로 달리기를 시작했다.단지 먹고 살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죽기살기로 달렸다.75년 무려 13.5대1의 경쟁을 뚫고모든 비용을 국가가 부담하는 전남체육중(현 광주체육중)에 진학했다.3학년때는 장대 높이뛰기 청소년대표까지 지냈다.한국신기록을 작성하면 국가에서포상금으로 10만원이라는 거액을 주던 시절이었다.돈을 받기 위해 죽기살기로 기록에 도전했다.훗날 해태와 인연을 맺어준 김응식 교수와의 인연도 이때부터다.김 교수는 당시 전남육상연맹 전무였다.
■ 김응룡 감독과의 추억
무뚝뚝하기로 소문난 김 감독이 악수를 청한 일이 딱 한번 있었다.93년 해태가 삼성과 벌인 한국시리즈에서 1승1무2패를 하고 잠실벌에서 내리 세경기에서 이겨 우승을 차지했던 때다.김 감독은 경기가 끝나자마자 일찌감치 주경기장 옆 구단버스로 사라졌다.기자들이 인터뷰를 요청하자 그는 감독을 찾았다.불호령이 떨어질 줄 알았는데 의외로 김 감독은 그에게 악수를 청하며 “수고했다”는 말을 하더란다.잊을 수 없는 감격적인 ‘사건’이었다.
■ 추억이 된 ‘해태공병대’
전지훈련을 갔던 80년대.후반 현지에 간 직원들은 막일꾼이나 다름없었다.유독 아침 훈련을 강조하던 김 감독의 스타일 때문에 프런트에게 대만 전훈은지옥이었다.오전 8시 훈련을 위해서는 5시30분쯤 모든 직원이 일어나 구장으로 달려가 훈련하기 좋게 물을 뿌리며 정지작업을 해야 했다.준비가 제대로안된 날에는 감독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하와이로 옮겨간 90년대 초 전지훈련도 예외는 아니었다.훈련장 사정 때문에훈련지가 수시로 바뀌어 대형 배팅케이지,피칭머신 같은 장비를 트럭을 동원해 밤새 옮겨놓고 뚝딱거렸으니 직원인지 막일꾼인지 구별이 가지 않았다.이때 얻은 별명이 ‘해태공병대’다.
■ 잊지 못할 하와이 파동
96년 2월 매니저로서 마지막 전지훈련에 참가했던 하와이.지나친 통제에 선수들이 반발해 급기야 ‘훈련 거부’로 이어졌다.언론에 알려지기라도 하는날에는 그곳에 간 모든 사람이 무사하지 못할 상황이었다.그는 슬쩍 기자들을 다른 곳으로 유인해 놓은 뒤 숨가쁘게 이호성 등 젊은 선수들을 만나 설득했다.특유의 달변으로 한나절 만에 사건을 무사히 ‘정리’했다.“그때 만약 그 사건이 알려졌더라면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야구계를 떠나야 했을것”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 이력이 난 주말부부 생활
96년 서울로 발령받은 뒤 구단 사정 때문에 잠깐 광주사무소 생활을 했던 때를 제외하고는 3년8개월 동안 주말이면 광주와 서울을 오가는 주말부부 생활을 하고 있다.대학 시절 만난 1년 후배 김봉옥씨와의 사이에서 열세살과 열한살난 두 아들을 두고 있지만 아이들이 커가는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게가장 안타깝단다.광주 서림초등학교 5학년인 둘째 민섭은 아버지의 영향 때문인지 야구를 하고 있다.처음엔 ‘배고픈 고난의 길’을 말렸다.누구보다이 세계를 잘 아는 그라 다른 아이들처럼 평범하게 커주길 바랐다.그러나 어쩌랴.자식 이기는 부모 없고 야구가 밥보다 좋다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