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구두조(九頭鳥) 호북인(湖北人)
중국은 땅이 넓고 사람도 각각이라 자기들끼리도 각 지역의 사람에 대한 속평이 있습니다. 한국처럼 넓지 않은 나라에서도 서울 깍쟁이, 충청도 양반 하는 식의 말이 있듯이. 일반적으로 중국사람들은 국경 근처의 변경지역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평을 썩 좋지 않게 합니다. 아마 오랫동안 척박한 곳에서 넉넉하게 살지 못해 민심이 강팍해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또 외세와의 전쟁을 겪었던 군사지역이었기에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서쪽의 신장, 청해, 귀주성의 평이 좋지 않고 동북삼성의 평도 좋지 않습니다. 남쪽의 해남성의 평도 좋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예외적인 곳이 하나 있습니다. 국경 쪽 외곽이 아닌 한 가운데 있는 후베이셩(湖北省)의 평도 좋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후베이셩은 둥팅후(洞庭湖)의 북쪽에 있습니다. 창쟝(長江)과 황허쟝(黃河江)을 남북으로 이어주는 한슈이(漢水)가 바로 이 후베이셩을 지납니다. 과거 수, 당, 송 왕조 때 수도인 창안(長安), 뤄양(洛陽), 카이펑(開封)과 서남의 농경지를 이어주는 그야말로 사통팔달 교통의 요지입니다. 그런데 후베이셩은 이렇게 교통의 요지이며 기름진 땅이기 때문에 중국 내 내전이 일어나면 항상 서로 욕심을 내어 격전이 벌어지던 화약고였습니다. 역사적으로 후베이셩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시절은 삼국시대였을 겁니다. 세 나라가 국운을 걸고 이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총력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후베이셩은 삼국지의 역사적 흔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전쟁을 많이 치룬 땅 후베이에 대한 중국인들의 평가는 그리 곱지 않습니다. 후베이런(湖北人)에 대한 중국인들의 평은 머리가 약고 속스럽고 싸움 잘하고 남 잘 속여먹고 별로 믿을 수 없다는 식입니다. 그래서 천재구두조(天在九頭鳥), 지재호북인(地在湖北人老) 즉, 하늘에는 머리 아홉의 괴조가 있고, 땅에는 호북인이 있다는 말이 전래됩니다. 그래서 후베이 출신이라고 하면 바로 지우터우냐오(九頭鳥)?라는 반응이 나옵니다. 지우터우냐오는 원래 후베이 지역 설화 중에 등장하는 기괴한 초능력의 새입니다. 그래서 말뜻 자체는 후베이런을 낮게 평가하는 내용이 들어 있지 않지만 일반인들이 지우터우냐오할 때 들어있는 뉘앙스는 잔머리 잘 굴리고, 태도 돌변하고, 공격적이고 뭐 이런 부정적인 뉘앙스가 많이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중국인들도 우한(武漢)으로 출장갈 때면 구두끈을 조이고 바짝 긴장을 합니다. 우한에 가서 붐비는 시내버스를 타면 지우터우냐오의 本色을 경험하실 수 있답니다. 흔들리는 버스에서 본지 사람에게 발을 밟히면 사과의 말을 듣는게 아니고 "왜 흔들리는 버스에서 빨리 피하지 못하고 발을 밟히고 있소. 기분 나쁘게시리." 라는 시비조의 말을 듣는다고 합니다.
2. 파천황(破天荒)
후베이셩(湖北省)과 후난셩(湖南省)은 둥팅후(洞庭湖)를 가운데 놓고 남북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양 성의 명칭 자체가 호수의 북쪽 땅, 남쪽 땅입니다. 그런데 지리적으로 이렇게 가까이 있는 두 지역의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후난셩은 중국 역사에 기록될 많은 인물들을 배출했습니다. 그런데 후베이셩에는 그에 필적할만한 인물들이 거의 없습니다.
당 왕조 시절 관리를 뽑던 과거제도는 2차 시험을 보았습니다. 1차는 지방정부에서 향시(鄕試)를 보았고 이 향시 합격한 수험자가 다시 2차 중앙정부의 회시(會試)를 응시했습니다. 그런데 각 지역 중 유독 후베이셩(湖北省)은 회시(會試) 합격자를 내지 못했습니다. 지역의 지도자들이 이런 불명예를 해결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했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계속 회시(會試) 합격자를 배출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인재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있는가 하는 한탄과 함께 인간의 힘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하늘이 내린 인재 가뭄이라는 뜻의 천황(天荒)이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이 천황(天荒) 징크스는 유세(劉稅)라는 인물에 의해 겨우 깨졌습니다. 그가 기어이 2차 시험 회시(會試)에 합격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천황(天荒)의 징크스가 깨졌다는 의미로 파천황(破天荒)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후베이도 드디어 고시 합격자를 배출한 지역이 되었습니다. 당시 절도사는 너무 기뻐서 그에게 파천황전(破天荒錢)이라는 이름의 상금을 70만전을 하사했다고 합니다. 기나긴 전란으로 인재들이 사라진 후 후베이는 그렇게 오랫동안 천황(天荒)의 땅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3. 오방잡처(五方雜處)
후베이셩(湖北省)의 셩두(省都)인 우한(武漢)은 창쟝(長江)과 한슈이(漢水)가 합수되는 지점입니다. 국가 기간교통로의 대동맥 2개가 만나는 곳이니 정말로 교통의 허브 중의 허브이며 당연히 四通八達의 교통 요지입니다. 하지만 우한은 四通八達의 명예로운 이름 외에 五方雜處라는 불명예스런 이름이 또 있습니다. 본지인은 10% 밖에 안되고 나머지 90%는 사방 각지에서 유입된 외지인들이기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한은 정체성이 불분명한 곳입니다. 우한시 자체가 원래 우창(武昌), 한커우(漢口), 한양(漢陽) 세 도시가 합쳐진 도시입니다. 토박이가 사라지고 뜨내기들이 자리잡고 있는 곳에 좋은 인심이 생길리 없습니다. 그래서 후베이는 그 뛰어난 지역적 위치에도 불구하고 많은 중국인들이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지역이 되었습니다.
우한 사람들에 대한 스스로의 평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이 글은 武漢市 인민대표 王新國이 우한런들에게 반성을 촉구하는 글입니다. "무한 사람들은 여기저기에서 제멋대로다. 일을 할 때도 이 모양이다. 그야말로 연꽃도 제멋대로 떨어지고, 꾀꼬리도 제멋대로 지저귀는 것과 같다. 젊은이들이 사이다를 마시고 병을 길거리에 그냥 던져버리는 일도 흔하다. 이런 행동은 정말 시민들이라면 할 수 없는 행동들이다. 아무 데서나 함부로 건널목을 건너고 소리 높여 싸움질을 하는 것 등은 현대화된 대도시에서 일어나서는 안될 현상들이다." (1992년 2월2일 新聞信息報)
4. 관우가 죽어서 寃鬼가 된 땅
삼국시대의 명장 關羽는 荊州 땅에서 비통하게 숨을 거둡니다. 지금의 행정명칭으로는 후베이셩(湖北省)이 됩니다. 당시의 荊州라는 지명은 지금의 荊州市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湖北省 전지역과 湖南省 일대, 貴州省 일부 등이 포괄된 넓은 지역을 아우르는 명칭이었습니다. 關羽가 어떻게 湖北省 땅에서 한을 품고 죽게 되었는지 당시 역사를 간략히 소개하겠습니다.
서기 209년 적벽대전의 승리 이후 손권/유비 연합군은 荊州 대부분 지역을 차지하고 조조 군은 후베이셩(湖北省) 북쪽 襄陽과 樊城에 주둔합니다. 또 외교적인 협상으로 손권 측이 荊州 지역을 유비 측에게 임시 양보하고 陸口 (호북성 무한 근처)로 다시 물러나면서 유비의 군은 江陵을 중심으로 주둔하면서 荊州 땅 대부분의 통치자가 됩니다.
서기 211년 유비는 益州 땅 (지금의 사천성, 섬서성 지역)으로 출정을 합니다. 荊州 땅에는 제갈량과 관우, 장비가 남았습니다. 하지만 214년 유비는 益州를 차지하기 위하여 제갈량과 장비, 조운을 모두 총동원해 荊州 땅에는 관우만이 남아 그곳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관우는 이때부터 실질적인 荊州 태수가 됩니다. 유비가 益州를 차지하자 청두(成都)를 새로운 본거지로 주둔하고 최전방 荊州 수비를 계속 관우에게 맡기기 때문입니다. 유비가 益州 땅을 차지한 후 손권 측은 荊州 땅을 반납하라는 요구를 시작해 새로운 갈등이 시작됩니다. 이로서 荊州는 조조 군대, 손권 군대와 관우의 군대가 대립하는 군사적 화약고가 됩니다.
서기 219년 유비가 漢中王 자리에 오르면서 중원의 조조를 타도하겠다고 발표를 합니다. 그리고 관우에게 湖北省 북쪽 襄陽, 樊城의 조조 군을 공격하라 명령을 합니다. 이에 따라 관우는 병력을 이끌고 襄陽城으로 진격을 해 성을 함락시킵니다. 그런데 襄陽과 樊城 두 개의 성은 더블 포스트입니다. 한 개의 성만 차지해서는 이 지역을 차지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관우는 연이어 樊城을 공략합니다. 水功을 사용하여 樊城의 장수 방덕과 우금을 잡습니다. 이 전투로 관우의 위명은 전 중국을 뒤흔들고 조조는 수도를 멀리 옮길 궁리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樊城 공략은 속결되지 못하고 이후 장기전으로 들어갑니다. 그 사이 조조의 구원군이 파견됩니다. 또 관우를 견제하려는 조조와 손권의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관우는 조조의 구원병이 도착하기 전 樊城 공략을 결판 짓기 위해 荊州城의 수비병력을 불러 옵니다. 하지만 결국 樊城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조조의 지원군을 맞게 됩니다. 이후 관우의 군대는 수세에 몰리게 됩니다. 그 사이 손권의 군대는 수비력이 약해진 荊州城을 점령해 버립니다. 관우는 荊州城으로 후퇴하지도 못하고 麥城으로 도망갑니다. 麥城에 도착했을 때 병력은 300여명. 麥城을 수비할 수 없는 병력인지라 麥城에서 빠져 나와 도망치다 臨沮에서 손권 군에게 사로잡힌 후 손권에게 보내져 처형이 되었습니다. 관우가 육체적으로 주검이 된 곳은 손권이 있는 吳 땅이었겠으나 장군으로의 생명이 끝난 곳은 이미 그가 사로잡힌 후베이셩 臨沮입니다. 서기 219년입니다.
관우가 죽은 후 공교롭게 얼마 안 있어 吳의 적장 여몽이 사망합니다. 또 조조도 곧 사망합니다. 그래서 소설 삼국지연의는 관우의 원귀가 이 둘을 죽게 했다는 묘사를 합니다. 그리고 이것도 부족해 관우의 원귀가 직접 목격되는 장면을 만들어냅니다. 관우의 원귀는 이후 민간의 신앙대상이 되어 神으로까지 격상이 됩니다.
정사 삼국지나 소설 삼국지연의나 관우가 패전하는 장면을 세세히 묘사하지 않고 간략하게 생략합니다. 관우 군이 襄陽으로 출정 시 그 규모는 최소한 1만 명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 荊州城에서 또 병력이 보강되었습니다. 그런데 樊城 공략 당시까지 용감무쌍하게 싸우던 관우 군이 어느날 조조의 지원군이 도착한 후 패배를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대패를 해도 1만 여 군대가 졸지에 궤멸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麥城에 도착할 때는 고작 300여명의 병력만 남습니다. 정사 삼국지도 소설 삼국지연의도 그 이유에 대해 명확한 해석을 해주지 않습니다. 다만 중간에 병사들이 이탈이 심했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吳의 여몽 군대가 관우 군을 둘러싸고 “荊州 사람들은 탈영해 가족들에게 가라”는 심리전을 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탈영병이 아무리 많아도 300여명만 남았다는 것은 거꾸로 荊州 출신 아닌 사람만 남고 전부 도망갔다는 뜻이 됩니다. 관우가 부하들에게 엄격해도 혹독했다는 평가는 없습니다. 관우가 荊州 생활을 시작한 것은 거의 10년, 그가 荊州의 수장으로 통치를 한 세월도 6년입니다. 그 세월간 고락을 같이 하였던 荊州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맥성에 도착할 때 300명만 남았습니다.
荊州城이 吳의 여몽에게 넘어간 소식을 들으면서 관우 입장에서는 분노가 끓었을 것입니다. 吳군의 荊州城 침입에 대비해 관우는 나름대로 수비 작전을 조치해 놨습니다. 오군의 진격로에 봉화대를 설치하여 조기 경보를 가능케 했습니다. 그러나 봉화대는 민간인 복장의 吳군 특공대에게 아무 저항 없이 점령 당하고 봉화대 경비병은 오히려 吳군을 이끌고 荊州城으로 가서 荊州城 문을 열게 했습니다. 荊州城 내의 수비군도 吳군에게 순순히 투항하였습니다. 누구 하나도 관우를 위해 목숨을 걸고 성을 지키려 싸운 사람이 없습니다. 荊州城 사람끼리 다치지 않으면 그뿐 관우가 통치를 하던 여몽이 통치를 하던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10년 세월을 荊州 사람과 비비고 살아온 관우에게 이보다 더 큰 좌절은 없었을 것입니다. 관우가 수장으로 통치하던 6년 세월 동안 자기에게 충성 맹세를 하던 수많은 현지인들의 얼굴이 허망하게 떠올랐을 것 같습니다.
관우가 배신감과 분노 때문에 원귀가 되었다면 가장 큰 원인제공자가 누구일까요? 자신의 뒷통수를 치고 荊州城을 무혈점령한 吳의 장군 여몽. 과거 자신이 목숨을 살려줬던 적 조조. 자신에게 공격 지시를 하고 구원군을 보내주지 못한 유비와 제갈량. 하지만 10년 세월을 묻었던 荊州와 荊州사람의 등돌림이 아마 가장 큰 상처가 되었을 것 같습니다.
후베이셩은 요즘 삼국지 유적을 정비해 관광산업을 발전시키려는 노력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1800여년 전 荊州에서 원귀가 된 관우도 이제 후베이셩의 관광 상품 중 하나가 되어 후베이런들의 돈벌이의 주요 자산이 되었습니다. 한 때 荊州 사람에게 버림 받아 죽음을 맞이했던 관우를 이제 후세 후베이런은 불멸의 영웅으로 다시 선전하고 있습니다. 과거를 쉽게 잊어버리고 새로운 권력을 재빨리 받아들이는 것이 난세의 생존방식이고 후베이런은 충실한 실증인입니다. 그래서 하늘에는 九頭鳥가 있고 땅에는 후베이사람이 있다는 말이 생겼겠지요.
5. 후베이의 명승지 - 黃鶴樓
중국인들의 후베이런에 대한 평이 왜 좋지 않은지 적극적으로 이해하려다 보니 후베이가 정말 사람살지 못할 곳처럼 묘사 되었습니다. 하지만 창쟝(長江)과 한슈이(漢水)가 흐르는 기름진 땅 후베이의 자연이 왜 아니 아름답겠습니까? 예로부터 수많은 여행객들이 드나들면서 찬사를 아끼지 않은 명승지가 있으니 그곳이 바로 우한(武漢)의 황학루입니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수되는 양수리의 풍경이 참 아름답지요. 창쟝과 한슈이가 합수되는 곳 우한(武漢)에 황학루가 서있습니다. 황학루는 악양루, 등왕각과 함께 長江의 3대 名樓로 이름이 높습니다.
당 시대에 武漢에서 강남의 양저우로 떠나는 배는 지금으로 따지면 대전에서 서울 가는 새마을 열차 같은 교통 수단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武漢의 황학루는 대전역 같은 곳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만나고 이별을 하였겠습니까? 황학루의 이별을 노래한 시 중에 이백의 시가 유명합니다. 이백의 시로 후베이 소개 글을 마치겠습니다.
옛 친구와 황학루에서 아쉬운 이별을 한다. 봄기운 아름다운 3월의 강은 양주로 떠나네. 외로운 돛배는 아련히 멀어져 푸른 하늘로 사라지니 보이는 것은 이윽고 하늘가로 흐르는 장강 뿐이어라.
故 人 西 辭 黃 鶴 樓 烟 花 三 月 下 揚 州 孤 帆 遠 影 碧 空 盡 惟 見 長 江 天 際 流
(唐 시인 李白, <黃鶴樓送孟浩然之廣陵>) |
첫댓글 좋은 내용입니다.일독을 권합니다~~
후베이에 대한 자세한 공부 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이 글 이강은님이 오래전에 쓴 글인데,묵계님이 뿅~가셨구나..
읽어볼수록 좋아서리~ ㅎㅎ
요비니사진 메일로 보냈으니 구경하시구랴~
너무 좋아서 스크랩 했습니다. 새벽에 깨어 있다가 막판에 좋은 글로 이걸 끄고 출근합니다. 이제 일터로 갈 준비 위해 오랜만에 들어와 느낀 청도한인 분들의 향기를 그만 맡아야겠습니다. 복 많이 받으십시오. *^^*
좋은글 잘 보았습니다. 후베런과 사업한적 있어서 쥬터우냐오는 이해를 할수 있습니다. 그 지역 사람들은 그러합니다.
좋은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전에 같이 근무했던 여직원이 후베이 황깡현 사람인데 참 총명하고 그 지역에 대해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이제는 수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고 하는데 사람마다 다르겠지요.
마오저뚱의 출생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