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중신학자의 생애와 사상

[쫑진이*^^*]

민중신학은 경건의 삶에서 온다-만수 김정준의 생애와 민중신학-
채 희 동(영성 생명잡지 <샘> 발행인, 목사)


Ⅰ. 고난과 경건의 신학자

만수(晩穗) 김정준(金正俊)은 '경건의 신학자'이다. 요즘 신학자들에게 이러저러한 신학이론과 새로운 학문은 볼 수 있으나 경건은 찾아 볼 수 없어, 그들이 하는 신학이 신학 밖에서 전개되는 타학문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허탈함이 가득하지만, 우리는 경건의 신학자였던 만수에게서 진정한 신학자의 모습을 본다. 그의 경건은 입으로 외치는 경건이 아니요,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경건이 아니다. 남달리 고단했고 위태했던 그의 벼랑끝 삶과 일제시대, 6.25, 유신독재를 지나면서 가난하고 헐벗고 갇힌 자들의 고난을 몸으로 겪으면서 오직 찾을 것은 하나님 밖에 없었다던 만수의 전 생애를 걸고 살아나는 경건이다.
김정준의 경건은 그가 일생을 걸고 연구했던 시편에서도 나타나듯이 고난을 통하여 얻어지고 요청되는 고난 속의 경건이다. 고난이야말로 경건을 더욱 경건되게 하며 참된 경건으로 인도하는 힘이다. 그가 경건의 신학자인 것은 고난의 신학자요, 수난자의 신학자요, 해방의 신학자, 恨의 신학자, 민중의 신학자이기 때문이다.
그의 삶에서 보면 경건은 골방에 갇혀 외쳐대는 경건이 아니라 마지막 생애를 던진 사형수의 심정으로, 때로는 사막의 수도사와 같은 순례의 삶으로, 하늘 아버지와는 한 순간도 떨어져서는 살수 없는 간절함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그의 경건이 교회의 요구나 신학이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의 삶, 곧 고난으로 가득 찬 만수 자신의 삶을 통해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일제시대, 6.25와 유신독재와 같은 민족과 역사의 비극을 통한 고난 경험과 함께 그의 생애를 통해 나타나는 죽음체험과 벼랑끝 체험은 그를 경건의 신학자로 살아가게 하는 요소가 되었다. 우리는 만수의 생애를 통해 경건과 고난이라는 것이 분리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임을 알게 된다. 가장 고단한 시대를 살다간 인간 김정준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고난을 하나님을 향한 경건의 신앙으로 이겨냈던 것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의 삶과 신학에는 고난과 경건이 두 개의 수레바퀴처럼 한 몸이 되어 갔다.
이와 같이 그 자신이 민중의 영성으로 살았을 뿐만 아니라 한국 민중신학의 구약신학적 기초를 놓았던 만수에게 우리는 고난의 신학이란 일컬어지는 '민중신학'이라는 것도 경건의 신학에서 나와야 제대로 된 민중신학을 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가난한 민중, 고난받는 민중의 한 맺힌 삶은 어떤 이념이나 이론의 눈으로 보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애틋한 눈길로 바라보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경건을 통해서만 제대로 볼 수 있고, 그 한을 풀어 줄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민중신학이 다른 여타 신학들처럼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유행신학으로 전락해 가고 있는 것은, 민중신학과 신학자들에게 만수와 같은 경건이 살아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경건은 고난을 이겨내는 힘이며, 고난은 우리를 하나님에 이르는 경건을 얻게 한다는 사실을 민중신학은 만수 김정준에게서 배워야 할 것이다.


Ⅱ. 경건의 모태이신 어머니, 그리고 송창근 목사

김정준은 한일합방 이후 극도로 불안한 때인 1914 11월 6일에 부산 동래 온천장에서 범어사로 넘어가는 산골 속에 있는 산성(금성동)이란 벽촌에서 태어났다. 벽촌 중에도 벽촌인 그 곳은 주로 산골짝에 밭과 논을 만들어 겨우 식량을 마련하고 나무를 팔고 여름이면 열무김치를 해다 팔아 돈을 만지는 곳이며, 물맛이 좋다는 이유에서 만든 누룩이 가정 수공업이어서 이런데 손을 댄 사람들이 경제권을 쥐고 있었고, 김정준의 집안은 그 누룩을 만드는 데 필요한 노동을 팔아 겨우 먹고 살아갔다. 그는 쌀밥 같은 것은 설날과 추석 때만 구경할 수 있는 빈촌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 벽촌에도 복음이 증거 되어, 그의 어머니는 그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이미 예수를 믿는 신자가 되었고, 일제의 수탈과 빈곤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신앙이 자신과 가족을 살리는 힘이라고 믿고 있었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예수를 믿고 있었노라 말하곤 했던 김정준의 경건의 모태는 그의 어머니에게서 찾을 수 있다. 어머니는 가난과 굶주림과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안한 시대 속에서도 아들 김정준을 신앙으로 키우고자 했다. 그러한 어머니의 신실한 신앙은 아들 김정준을 빈촌에 남겨두지 않고 경남 동래의 벽촌 산성마을의 중학생 1호로 만들었고, 그것도 호주 장로교 선교사의 장학생이 되어 기독교 학교인 마산 호신학교에 입학하는 데까지 이르게 하였다.

"이 때 나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받은 신앙으로 이 시험에 합격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이 무렵 내가 처음으로 성경을 구약에서 신약을 통독했다."(크리스챤 신문, 나의 생애와 신학)

이러한 신앙의 힘을 통하여 마산 호신학교를 입학한 김정준은 아쉽게도 1년 만에 학교가 광주 학생의거 사건의 여파로 폐교되고 만다. 그 때 호신학교에서도 일본말 선생을 배척하는 동맹휴학이 생겨 그 결과로 폐교되고 만다. 그는 낙담하여 다시 시골로 와서 나무를 해다가 파는 나무꾼이 되어 지내게 된다. 그러는 중에 호주 장로교 선교부에서 다시 그를 장학생으로 선발하여 평양 숭실 중학교로 전학을 시켜주는 행운을 얻게 된다.
이 때 김정준은 숭실 중학교에서 두 번째 경건의 모태이자 참 스승인 송창근 목사를 만나는 은혜를 입게 된다. 송 목사는 만수의 후견인이었으며 스승이요, 목사였으며 경건의 모태였다.

"조선출 군과 내가 이 때부터 친구가 되었고 그 해 마침 간도 용정 중학교에서 전학해 온 정대위와도 친구가 되었다. 우리 세 사람은 4학년 말부터 우리학교 성경 선생이었던 송창근 목사의 개인지도를 받아 목사가 되기로 약속을 하고 매일 아침 송 박사님이 보시던 산정현 교회에서 새벽기도회를 가졌고 매 수요일 아침에는 조만식 선생, 김동원 장로 등 명사들을 모시고 가르침을 받았다. 이렇게 평양에서 중학을 마치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나는 믿을 수 밖에 없다."(크리스챤 신문)

그는 스승 송창근 목사의 가르침을 받아 목사가 되기로 결심하였을 뿐만 아니라 송 목사가 시무하는 산정현 교회를 통해 조만식 선생을 비롯한 당대의 스승들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그러한 만수의 민족의식, 역사의식과 함께 빠질 수 없는 것은 바로 경건훈련이다. 이 경건훈련은 이 때부터 시작된 새벽기도를 통하여 이루어졌고, 그것은 목회지에서도, 신학교 교수 시절에도 심지어 캐나다, 영국 유학시절에도 거르지 않고 해 온, 그에게서는 중단할 수 없는 경건훈련이었다. 만수의 경건의 세 번째 모태는 새벽기도라 할 것이다. 여기에서 그가 영국 유학시절, 경건훈련으로 인하여 생긴 한 슬픈 이야기가 있다.

"내가 에딘바라 대학강의실(기숙사 옆에 있는)에 매일 아침 새벽기도를 했는데, 어느 날 교실 소제를 하러 온 아주머니가 전에 없이 교실 한 구석에 있는 검은 물체를 보고 낙담을 하고 뛰어가서 학교소사를 데려와 나인 줄은 확인은 했지만, 그 날 충격 때문에 그 아주머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의 새벽기도 장소는 다른 곳으로 할 수 밖에 없었지만, 그 기억이 항상 가장 가슴 아팠다."(크리스챤 신문)

그의 이러한 경건훈련은 삶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떤 상황, 어떤 곳에 있다할지라도 멈출 수 없는 경건한 삶 자체인 것이다. 그의 삶이 곧 경건이었던 것이다.
그는 숭실 중학교 생활을 아주 즐겁고 평화스러운 환경에서 독서를 마음껏 하고, 투창선수로, 또 음악부원으로 활동하며 송 목사가 시무하는 산정현 교회에서 선교활동을 하며 보냈다. 음악을 좋아했던 그는 숭실 밴드부원이 되고, 5학년 때에는 음악부장이 되어 음악을 통한 전국 전도여행을 하기도 했다. 그의 이러한 음악적 재능은 숭실전문학교 시절에는 산정현 교회 성가대를 지휘하게 하였고, 또 이후에는 한국 찬송가 작업에도 깊숙이 관여하게 하는 동력이 되었다.
만수는 체육적 재능도 남달랐는데, 만수가 5학년 때 조만식 선생이 회장이었던 관서체육회 주최로 전국 중학생 육상경기대회에 출전해 당당히 1등을 하여 조만식 선생으로부터 은메달을 타기도 했다. 이 은메달에 관한 에피소드를 들어보면 재미있다.

"어느 날 나와 책상을 같이 쓰는 이양신이가 자기의 회중 시계와 매달을 바꾸자고 제안을 했다. 나는 그 때 내 사정으로서는 시계란 것을 가져 볼 형편은 되지 못했기 때문에 아주 공리적인 생각에서 메달을 주고 시계를 가지기로 했다. 나는 이 시계를 연희전문학교에 다닐 때까지 차고 다녔다. 그러나 연전 당시 나는 지금 아내와 연애를 하고 있었다. 당시 수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그녀를 서울에 불러와 한번 데이트를 할려면 그 때 돈으로 2원 정도는 있어야 점심도 같이 먹고 극장구경도 갈 수 있었다. 나는 어느 토요일 데이트 자금이 없어서 내 시계를 전당포에 잡히고 2원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 후 나는 그 시계를 영 도로 찾지 못했다."


Ⅲ. 신학 입문과 첫 목회에 이르기까지

중학교를 마친 만수는 숭실전문학교에 진학하였다. 그 당시에도 그는 산정현 교회에서 봉사했으며 그 교회의 장로였던 조만식 선생께 학비문제를 상의하자, 그 댁 가정교사로 일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사참배 거부로 숭실전문이 폐교되자 송창근 목사가 부산에서 기독교 사회사업을 하던 성빈학사(聖貧學舍)에 초빙받아 미취학 아동들을 교회에 모아 국민학교 과정을 가르치는 일과 <성빈>이란 월간 잡지를 편집하는 일을 한다. 만수는 1938년 3월, 송 목사가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서울로 압송되어 성빈학사가 문을 닫게 되기까지 그 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봉사와 함께 개인적으로 문필(文筆)의 훈련을 받게 된 시기이기도 했다.
성빈학사를 그만 둔 만수는 그 해에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편입하여 학업을 계속하기에 이른다. 연전 재학시절에 만수는 아내인 주재숙 씨를 만나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 되어 인생의 새로운 동반자를 만나는 의미 있는 해를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소위 대동아 전쟁의 초반기인 그 당시에 일제는 학교 젊은이들을 학병으로 강제 징집할 뿐만 아니라 학교시절을 전쟁의 양성지로 쓸 목적으로 연전을 대동공업전문학교로 개명하기에 이르자, 만수는 1939년 봄에 연전을 중퇴하고 친구 조선출 목사가 이미 학업 중인 동경청산학원 신학부 예과 2학년으로 편입하여 공부를 계속할 기회를 마련한다.
숭실전문 시절부터 시작된 고학은 일본 청산신학원 시절까지 이어졌다. 거기에 평양 숭실중학교 3학년 때, 그의 나이 19세 때부터 발병하였던 폐결핵이 부산 성빈학사 시절을 지나 더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만수는 온갖 시련과 고통을 견디어내며 1943년에 졸업을 한다. 28세의 만수는 1942년 3월 10일 김천 황금동 교회에서 친구 조선출과 합동 결혼식을 송창근 목사의 주례로 주재숙과 결혼한다. 지병이었던 폐가 약한 것을 알면서도 결혼을 하고 평생토록 남편을 간호하며 경건의 삶의 동지로 함께 살아온 부인 주재숙은 한국신학계에 만수를 있게 한 버팀목이었다.
결혼한 그 다음 해 3월에 실시된 목사 고시에 합격하여 목사 안수를 받고 처음 목회지인 불국사 교회(구정리 교회)로 부임을 받게 된다. 이 교회에서 그는 24개월 간 일생에 남을 목회에 열정을 쏟는다. 그의 경건의 뿌리가 새벽기도회라는 것을 앞에서 언급했듯이 새벽기도회 때마다 석유등을 켜고 겨울에는 난로에 불을 피우고 집집마다 다니면서 새벽기도회에 참석할 것을 권면하며 목회에 대한 열의를 다하였다. 그는 이 때의 목회를 "내 삶은 순정의 봉사를 했기 때문에 내가 본 20여 년 간의 신학교육을 위한 봉사보다 더 값이 있는 일이었다"고 회고하곤 하였다. 이러한 경건을 통한 목회는 후에 신학교육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그 후 만수는 4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경북 자인읍 교회에서 목회를 했는데, 그것은 김천 황금동 교회를 목회하고 있던 송창근 목사의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민족의 염원이었던 해방은 바로 그가 김천으로 가던 도중 대구에서였다. 8.15 해방을 맞이한 감격을 안고 황금동 교회에서의 목회와 미군의 통역 일을 하면서 교회와 민족을 위해 열정을 쏟았다. 그러나 그의 지나친 과로가 폐병을 더 악화시켰고, 그는 결국 1946년 부활절 설교 원고를 쓰다가 각혈을 하여 쓰러지고 만다.


Ⅳ. 경건으로 이긴 절망

만수의 삶은 시련과 은혜의 두 단어로 집약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아 온 삶이 그러하지만 앞으로 그에게 닥칠 삶이라는 것도 절망 한 가운데 있는 죽음과도 같은 어둠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살아나는 기적과도 같은 삶이었기 때문이다.
교회를 사임하고 1946년 6월 18일, 그는 마산요양소에 입원하였다. 그는 이 때의 교회사면은 곧 인간사면, 즉 삶을 그만두는 것으로 생각하는 절망을 맞이하고 있었다. 교회와의 이별,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과의 이별, 이제 이 세상의 삶과 이별할 수 밖에 없는 절망인 것이다. 32세의 아직 젊은 김정준은 석 달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의사의 진단을 받고, '공동묘지 병실'이라 불리는 제6급 환자 병실에 갇혀 죽음만을 기다리는 절망의 환자가 되어 있었다.
이제는 헤어나올 수 없는 절망이라는 것을 깨달은 그는 마지막 유서와도 같은 다음과 같은 시를 한 수 적었다.

내가 죽는 날!
그대들은 '저 좋은 낙원 이르니' 찬송을 불러주오
또 요한계시록 20장 이하 끝까지 읽어주오
그리고 나의 묘패에는 이것을 새겨주오
'임마누엘' 단 한 마디만을

내가 죽는 날은
비가 와도 좋다
그것은
내 죽음을 상징하는 슬픈 눈물이 아니라
예수의 보혈로 내 죄 씻음을 받는 감격의 눈물!

..................

오! 내가 죽는 날,
나를 완전히 주님의 것으로 부르시는 날,
나는 이 날이 오기를 기다리노라.
다만 주님 뜻이면
이 순간에라도 닥쳐오기를
번개와 같이 닥쳐와 번개와 같이 함께 사라지기를!

그 다음은 내게 묻지 말아 다오.
내가 옮겨 간 그 나라에서만,
내 소식 알 수 있을 터이니,
내 얼굴 볼 수 있을 터이니!

"내가 죽는 날"이란 제목의 이 시는 다시는 소생할 희망이 없는 절망에서 자기 스스로 신앙에 의해 절망을 이겨 보려는 노력인 것이다. 그는 삶과 죽음을 오로지 하나님에게만 맡기고, 절망을 이겨낼 수 있었다. 그로써 그는 자신의 생명이 의사가 내린 시한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한대로 살 것이라는 확신을 얻게 되었고, 그는 이제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이웃을 위한 삶을 살 것을 결심한다.

"하나님의 시한대로 사는 사람은 그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이 예수의 교훈인 것을 나는 알았다."(삶에 이르는 병, 19쪽)

그래서 그는 죽음의 병실, 공동 묘지 입구인 제6병동실에서 변기청소, 환자의 잔심부름, 중환자인 자신이 중환자인 열 일곱살 난 순이라는 고아 처녀의 병수발을 들어주며 작은 봉사를 해 나간다. 더불어 목사라는 사명을 잃지 않고 하루 한번 환자들에게 성경 말씀을 읽고 그것을 풀이해 주며 죽음이 임박한 그들에게 낙망하지 말 것을 위로하며 하나님께로 인도하였던 것이다.
고아 처녀 순이가 죽어 처음으로 장례 예배를 집례한 이래 요양소에 있는 동안 20회 이상 장례예배를 인도했다. 그는 그 자신이 중증환자이면서 어느덧 요양원에서 목회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병자이면서 요양소 목회를 했다. 거의 한 달에 한 건씩 있는 장례식을 사회할 때마다 남아있는 환자와 함께 나는 울었다. 4월을 <死月>이라하여 조심하자고 했고 <死越>만 하면 또 한 해 살아갈 수 있다고 격려했다. 이 교회는 현재 노회에 가입된 교회로 발전되었다."(크리스챤 신문)

그는 그의 목숨이 있는 순간까지 목사로서 헌신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했던 것이다. 요양소에서 30개월 간 누워 있는 동안 만수는 시편을 암송하며 영혼의 양식을 얻는 기회를 갖는다. 육체는 결핵균으로 쇠약해 갔지만, 시편을 암송함으로써 그의 영혼은 더욱 살쪄가고 있었다. 병상에서 자신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암송하고 연구하였던 시편은 후에 만수의 신학사상에 커다란 주제와 골격을 이루게 된다. 만수가 시편을 암송하고 후에 시편전문 신학자가 된 것은 죽음의 절망에서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기를 호소한 시편 기자의 신앙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절망을 이기고 다시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시편의 경건을 통해서 이다. 시편의 신앙과 경건을 묵상할 때마다 하나님은 그의 몸을 새롭게 소생시켜 주셨던 것이다. 30개월 동안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와 같은 처지의 환자들을 돌보며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몸으로 체험한 만수는 마침내 1948년 11월 30일에 요양소에서 퇴원하여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다.


Ⅴ. 늦이삭(晩穗)에게 주어진 새로운 삶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만수의 삶은 이제부터의 삶은 제2의 인생이라 할 것이다. 요양소에서 퇴원하면서 그는 "관에서 나온 사나이"라는 별명을 달게 되었고, 1954년 캐나다 유학에서 돌아오는 도중에 태풍을 만나 태평양에서 표류하다가 예정보다 25일 늦게 구사일생으로 돌아 돌아옴으로써, "용궁에서 나온 사나이"라는 또 다른 별명을 얻기도 했다.
이렇게 위태위태하게 살아가는 만수는 이제 자기 자신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 내어 맡긴 주님의 삶이라는 고백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하루하루의 삶이 하나님의 주시는 은총으로 생각하며 감사하며 종말론적인 생을 살게 된 것이다.
이제야 비로소 그의 삶은 경건 그 자체의 삶이라 할 것이다. 학문으로서의 경건, 목회를 위한 경건, 혹은 설교를 위한 경건이 아니라 경건은 그의 삶 자체가 되었다. 매일매일의 삶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거룩한 삶, 곧 삶이 예배가 된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다시 태어난 만수는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주의 은혜라 고백하며, 회갑을 맞이한 1974년에는 자신의 서재에 다음과 같은 글을 적어 놓았다.

"은총무한 은총무한 아하.
궁휼무비 자비무량 아하
인애무량 자비무궁 아아."

그는 자신이 회갑을 맞이하기까지 살 수 있었던 것은 다만 하나님의 은총의 손길에 붙잡힌 것이라 고백하며 전적인 하나님 은총론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퇴원한 만수는 다시 송창근 교장의 부름을 받고 1949년 2월에 서울로 올라와 조선신학교에서 교수생활을 시작한다. 교수직과 함께 성남교회의 목사로 봉직하기도 했는데, 1958년 영국 에든버러에 박사학위 공부를 위해 떠날 때까지 8년 간 목회를 하였다. 특히 6.25 이후 담임 목사인 송창근 목사가 납치되어 가신 이후 서울역 앞의 성남교회 지하실에서 허약한 몸으로 목회를 하며 살아남은 것 또한 하나님의 은총이라 아니할 없다.
부산 피날 시절에 한국신학대학의 문을 다시 열고 교무과장의 일까지 보던 만수는 캐나다로 유학 길에 오른다. 마침내 1953년 3월에 캐나다 빅토리아 학교 임마누엘 대학에서 "호세아서에 나타난 헷세드 연구"란 제목으로 논문을 쓰고서 신학사(B.D) 학위를 받았고, 54년 5월에는 토론토 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시편에 나타난 의인과 악의 상극관계"란 논문으로 신학 석사를 받기에 이른다.
캐나다 유학 중에 뜻깊은 일은 그가 북한에 납치되어 순교한 송창근 목사를 기념하는 예배당을 건축하는 꿈을 포기하지 않고 실현해 갔다는 데 있다. 만수의 참 스승이요, 경건의 모태이기도 했던 송 목사의 순교는 그에게 커다란 충격이었지만, 그의 정신을 잇기 위한 만수의 노력은 식을 수 없었다. 그는 건축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삶에 보여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하는 글모음집, <내 잔이 넘치나이다>(My Cup Runneth Over)란 책을 캐나다에서 출판하여 오늘의 성남교회 건축의 꿈을 실현하였다.
1955년 캐나다 유학에서 돌아와 성남교회 담임목사가 된지 3년 후에 그는 영국 유학길에 오른다. 그의 영국 유학의 꿈은 부통령이었던 함태영 목사를 모시고 6개월 간의 세계일주를 마치고 돌아온 이듬해인 1958년에 영국 에든버러대학에서 박사과정을 함으로써 성취되었다. 44세의 만수는 2년 간의 과정을 마치고 <의지(bth)에 나타난 히브리 경건 연구>란 논문의 통과를 보고 1960년 1월에 귀국하였다. 구약학으로 학위를 받은 그는 영국 유학 중에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교에 가서 한 학기 동안 구약 신학자 폰 라트(G. von Rad)에게서 수강했던 일이 인연이 되어 <폰 라트의 신학>(1973년), <폰 라트의 논문집>(1978년)을 출판하기도 했다.
김정준은 자신의 호를 만수(晩穗)라 했다. 즉 '늦이삭'이다. 김정준은 가난과 폐병 때문에 남들보다 늦게 공부를 했고 목사가 되었으며 신학자가 되었다. 병상에 누워 세월을 보내고 인생의 과업을 뒤로 미루며, 또 언제 멈출지 모르는 불안한 자신의 처지를 괴로워하면서 그는 호(號)를 만수(晩穗)라고 짓고, 그 때부터 남들보다 성공이 늦다고 불평하지 않고 살게 되었다.

"나는 이런 체험을 했다. 어느 늦은 가을, 마산 요양소가 있는 가포 바닷가를 산보한 일이 있다. 때는 이미 11월에 접어들어 아침저녁이면 그 기후 좋은 마산이라고 해도 찬바람이 스며드는 때였다. 나는 결핵 환자로 인생의 낙오자라는 자신의 굴욕적인 모습을 달래면서, 다 베어 간 빈 논두렁을 걸어 보았다. 메뚜기도 이미 다 자취를 감춘 때였다. 추수 때 베어 낸 볏단에서 떨어진 씨에서, 아니면 다른 벼 포기보다 유달리도 늦게 솟아난 한 포기 외로운 벼가 아무도 돌보는 이 없는 고독 속에서도 자기의 삶에 세월과 더불어 충실하다 보니 그 몇 알 안 되는 벼이삭을 달고 찬란하지도 윤택하지도 않은 누런 빛을 띠고 고개를 숙이고 있지 않는가? 그것은 다른 벼이삭 보다 늦었다는 비굴이나 자책 때문에 숙여진 고개가 아니다. 비록 늦기는 했지만, 알맹이는 익을 대로 익어 이제는 이삭 줍는 가난한 과부의 손길에 잡혀지면 더욱 좋고, 꿩이나 산새가 와서 따먹어도 좋고, 그런 행복도 못 가지면 그대로 섰다가 때가 이르면 그 마른 벼 포기와 함께 쓰러져 땅 속에 그냥 묻혀버려도 좋다는 환희에 찬 얼굴이 빛나고 있지 않는가!"

44세가 되어 늦깎이 학위를 받고 돌아 올 수 있었던 것도 그 자신의 호처럼 "늦어도 포기하지 말고 알차게 영글자" 라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학위를 받고 돌아온 이후에도 그는 한신대 학장,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한국신학교육에 늦이삭으로 알찬 열매를 맺어갔다.


Ⅵ. 학문과 경건을 통한 신학 교육을 실천하다

만수는 1960년 영국 유학을 마치고 한신대 교수로 있으면서 제일 강조한 것을 두 말할 것도 없이 경건 훈련이다. "그는 학생들을 거의 강제로 새벽기도회에 참석케 하였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허물없이 농담을 잘 하지만 학문의 세계에서는 매우 엄격하였고 학생들의 생활에 대한 규율에 있어서도 율법적이라 할 만큼 철저하였다."(주재용, "만수 김정준의 생애"). 만수는 신학이라는 학문과 경건은 분리할 수 없는 동전의 양면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신학 교육은 바로 이 둘을 기본 축으로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만수는 엄격한 신학수업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예배를 통하여, 교회절기 행사를 통하여 경건 훈련을 시도하였다. 예를 들어 1960년 부활절에 전교생이 학교 뒷산에 올라가서 산상기도회를 가진 일도 있었고, 전도의 날을 정하여 학생들에게 선교의 훈련을 실시하기도 했다.
1961년 9월에 한국신학대학 학장으로 취임함으로써 <학문과 경건>을 통한 신학 교육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고자 하였으나, 자신의 신학 교육을 펼치기도 전에 필화사건에 몰려 학장직을 사임하기에 이른다. 그 때의 심경을 만수는 이렇게 말한다.

"1963년 14년 간 몸담고 내 젊음을 불태워 온 한신대를 떠나던 내 마음에 쓰라림이 없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누구를 탓하기 보다 내가 못나고 오리석어 저질은 필화사건이니 내가 이 아픔을 안고 나가야 한다고 신속히 결정했다. 그러나 나는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시편의 말씀이 내게는 언제나 힘과 소망이 되었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사람아 어찌할 것인가?.... 네가 나를 밀쳐 넘어뜨리려 하였지만 여호와는 나를 도우신다.'"(시 118:6, 13)"(크리스챤 신문)

만수는 학장으로 취임한지 9개월만에 1963년 3월 연세대학교로 옮겨 교목실장, 구약교수, 연합신학대학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다시 한국신학대학장으로 초빙 받을 때까지 6년 동안 봉직한다. 그 당시 만수는 한신대에 몸담고 교수했던 14년 동안에도 즐겁고 유쾌했던 개척자의 보람이 있었지만 가슴 아팠던 일도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7년 간의 연세대학교 생활에서는 한신대에서 경험할 수 없었던 종합대학교의 교육 세계를 경험하면서 마음껏 그의 소신을 신학교육에 투사시키는 전성기를 보냈던 것이다.
특히 세계 교회협의회의 신학기금으로 세워진 연합신학대학원의 초대 원장으로 6년 간 봉직하면서 교단신학이 아닌 연합적 신학 교육에서 신학적으로 행정적으로 에큐메니칼 신학과 신학 교육이념을 실현시켜 나아갔다. 만수 자신이 "연신원 원장으로 재직하는 동안에 신학과 신학교육, 신학적 활동, 이 3자를 연결시켜 보려는 노력을 한 시기로서 일생에 가장 화려하고 보람 있는 때였노라"고 회상했듯이 이 때가 그에게 있어서 가장 의미 있는 시절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만수는 신학교육을 활과 화살로 비유하면서 신학교육이라는 활을 가지고 목회와 선교라는 화살을 쏘아야 한다고 보고, 철저하게 목회와 선교를 중심으로 하여 신학 교육 목표를 실천해 나갔다. 그러면서 최고의 신학이 최상의 목회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러한 신학교육 이념이 구체화되고 실천되어 가는 과정에 만수는 다시 한신대의 부름을 받는다. 함부르크대학에 1년 동안 교환교수로 있으면서 심장병이 악화되어 귀국하자마자 병원에 입원하여 병세가 호전되어 집에서 요양 중에 1970년 4월에 한신대 제8대 학장으로 초빙 받는다. 그러나 병약한 자신을 누구보다 잘 아는 지라 그는 거절하였으나, 교단과 하나님이 필요로 하시면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위기에 처해 있는 학교로 가게 된다.


Ⅶ. 독재에 항거한 경건의 예언자

만수는 학장으로 취임하자 평소에 가지고 있었던 신학 교육 이념, 곧 <경건, 학문, 선교> 대로 학교를 재건해 보려고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만수의 이러한 교육 이념은 구호에만 머물지 않고, 그대로 실천해 나감으로써 실천적이며 경건한 교단신학교로서의 자리를 잡아가는 데 기여를 하게 된다. 특히 그가 강조하는 경건이라는 것이 교회 건물에 머무는 것이거나, 예배를 드릴 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신학이라는 학문에서도 이루질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역사의 현장, 고난받는 민중의 삶 한가운데서 나타나는 예수의 영성인 것이다.
박 정권의 삼선개헌 파동을 비롯하여 72년 유신체제의 충격으로 사회와 학원에 이에 항거하는 시위가 연일 일어나고 한신대 학생과 교수들이 구속되는 사태에 직면하게 된다. 그런 격동기에 한신대 학장으로서 만수는 그의 신앙과 양심에 따라 학생과 교수들의 고난에 동참하였다.
또한 70년대의 교회의 현실 참여운동에도 그는 적극성을 띠고 인권과, 사회정의 실현을 강조하였고, 정부의 탄압에 항거하는 표시로 73년 12월 한국신학대학교수 전원이 삭발을 단행했던 것이다. 그 당시 만수를 비롯한 교수 일동은 반독재 반민주 정권에 대한 항의로 삭발하여 항거함으로써 탄압 받고 억압받았던 민주세력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희망을 얻게 해 주었다. 그 이 후 만수가 재직 중인 한신대는 민주화의 요람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이것은 단순하게 민주화운동의 차원을 넘어 하나의 신앙운동이요, 예수운동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사회참여적 신앙운동은 만수의 경건훈련에서 나왔음은 두 말할 나위 없다. 일생을 가난과 시련, 그리고 절망 가운데 참담하게 살아온 그 삶을 다시 소생시켜 준 하나님의 은총의 힘은 오늘 고난받는 민족과 이 땅의 백성을 탄식소리를 듣고 그들의 한을 풀어야 한다는 경건의 힘이 만수를 중심으로 한 신앙의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72년 10월 유신 헌법이 정해진 다음 해에 학장으로서 설교한 "돌들의 소리"(눅 19:39-44)라는 제목으로 만수는 다음과 같이 역설하였다.

"우리 교회와 크리스천은 예수님 말씀대로 <예>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만일 이 <예>와 <아니오>를 양심대로 말하지 못할 만큼 언론의 자유가 없고 그 바른 말한 일 때문에 매를 맞고 갇히고 모든 시민적인 권리가 일시 박탈당한다고 해도 낙망하거나 비관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말을 못하면 돌들이 소리를 지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당시 포악한 유신정권에 대항하여 이런 설교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예언자적 소망뿐만 아니라 종말론적 신앙을 갖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경건의 힘이 얼마나 시대와 역사를 이끌어 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만수는 이 때부터 신학의 토착화를 강조하고 한국교회를 위한 한국신학의 수립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그는 졸업생이 착용하던 서양식 가운을 폐지하고 한국의 재래관복과 유사한 예복을 고안해서 착용하도록 하였다.
만수는 이렇게 민주화와 한국화라는 신학적 과제를 안고 학장의 직무를 다하는 중에 신학생 데모 주동자를 제적시키려는 당국과 충돌하여 고초를 받게 되고, 이로 인해 그의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어 다시 한번 사경에 이르게 되니, 1976년 1월에 학장직을 사면하였고 건강이 회복되는 즉시 평교수로서 계속 강의하였다.


Ⅷ. 민중신학의 토대를 놓다

은퇴 후에 그의 신학은 진보적인 민중신학적 가능성을 열어 준다. 은퇴 이전에는 구약신학자로서 한국에 구약신학을 소개하고, 또 독창적인 한국사와 이스라엘사를 비교 연구하면서 한국사에 나타난 구원사의 흔적을 모색해 보는 한국적 신학 형성에 기여를 해 왔다.
그러나 만수 자신은 자신의 신학은 서구의 신학을 소개하는 것으로 소임을 다 했다고 말하면서 겸손해 한다. 특히 폰 라트의 신학을 소개한 것을 가장 의미 있는 일로 여겼다. 만수가 평생에 완성한 신학은 <구약신학>과 <시편연구>이다. 구약신학의 연구서로는 [구약개론](1960)을 비롯하여 [이스라엘의 신앙과 신학](1967), [구약신학의 이해](1973), [폰 라트의 신학](1973) 등이 있다. 그러나 여기에 그의 구약신학을 가만히 드려다 보면 아주 재미있고 흥미 있는 창조적인 한국 구약신학이 탄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이스라엘의 신앙과 신학]은 궁켈의 시편연구를 소개한 것인데, 여기에는 "히브리 시문학과 한국 시가"라는 논문도 포함되어 있다. 이 논문에서 만수는 히브리인의 시가와 한국의 고대 가요를 비교 연구함으로써 한국적인 구약신학을 새롭게 시도하기도 했다.
[구약신학의 이해]에서는 서구 문화권에서 구약을 읽는 방법과 해석이 동양 문화권에서 살고 있는 우리 한국인이 어떻게 읽고 이해해야 하느냐 하는 토착화의 문제를 다루었다. 여기에 나타난 그의 신학은 "하나님의 백성의 신학"이라 할 것이다. 특히 이 책에 수록된 제8장 "이스라엘 역사와 한국사"란 논문은 한국사와 이스라엘 역사에 나타난 신앙과 민족의식을 통하여 "한국인도 하나님의 백성이다"라는 사실을 밝히고자 했다. 만수는 이 논문에서 이스라엘만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한국민족도 온 인류 역사와 세계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게 함으로 우리 역사를 새롭게 읽을 것을 역설하였다.
여기에서 만수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고난과 역경을 이기고 해방을 얻은 것처럼 한민족도 그것을 배워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선민 이스라엘의 역사와 한국 역사는 모두가 하나님의 선교의 영역임을 역설하면서 만수는 한국민족도 제2이사야의 고난을 당하는 "야훼의 종"의 사명인 "이방에 빛"을 비추어 주는 선교적 과제를 감당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만수는 민족의 역사 속에서 민족의식과 신앙을 읽어봄으로써 구약신학을 통하여 한 한국신학 형성 작업에 기초를 놓았다할 수 있다.
만수가 서구신학을 섭렵한 후에 한국신학 형성에 관심하면서 더 나아가서는 민중신학, 한의 신학과 같은 진보적인 참여신학으로 발전해 나간다. 그것은 그의 생애 속에 나타나는 경건의 삶과 다르지 않고, 그가 일생을 걸고 연구한 구약의 말씀과 다르지 않다. 그의 민중신학은 곧 히브리적 경건, 곧 세상 죄를 죄고 가는 고난받는 어린양의 경건이기 때문이다.
만수는 임태수 교수가 "만수 김정준의 구약신학과 민중신학"이라는 논문에서 밝힌 것처럼, 다음 다섯 개의 민중신학 논문을 작성하면서 만수신학 후기에는 본격적으로 구약신학적 관점에서 민중신학을 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1979년 한 해에 만수는 무려 "민중신학의 구약 성서적 근거," "역사와 사건과 해석," "희망 : 인간 역사에 동참하시는 하나님의 고통," "한의 신학," "야훼문서와 창조설화에 나타난 인간" 등의 논문을 발표함으로 한국 민중신학의 구약신학적 기초를 놓는 데 일익을 담당한다.
"민중신학의 구약성서적 근거"에서 만수는 기독교신학은 마땅히 민중신학이어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수의 일생이 지배계급의 사람들보다도 정치적 권위와 종교적 권위를 가진 사람들의 지배를 받아오던 일반대중, 그 중에서도 소외당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사시고 가르치시는 데 중점을 두었다는 것을 깨달을 때 필자는 기독교 신학은 당연히 민중의 신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구약성서 전체가 이스라엘 백성의 민족사로 형성되어 있지만.... 전체적으로 지배층 엘리트들 보다 지배를 받고, 풍요보다는 가난, 대접보다는 천대, 영광보다는 수치, 번영과 성공보다는 억압과 압제를 받아 온 민중에 대한 관심을 짙게 하고 있음을 본다."

이렇게 그는 신구약 성서가 민중에 대해 관심하고 있음에 반하여 “지금까지의 구약신학의 과제 속에는 이 민중의 존재와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의지와 행동이 부각되지 못하고 말았다”고 전통적인 서구신학에 대하여 비판한다. 만수는 구약성서 네 부분 즉 토라, 전기예언서, 후기예언서, 성문서에서 각각 몇 가지 실례를 들어, 구약성서에서 민중신학이 가능함을 논증한다.
"한의 신학"은 민중신학의 구체적 시안으로서 이 글을 썼다고 만수는 말한다. 이 "한의 신학"은 서남동 교수의 "한의 사제"에서 암시를 받았다고 그는 밝히고 있다. 그는 한의 정의를 간단히 말한 다음 이스라엘의 한을 몇 가지로 열거한다. 먼저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한에 맺혀 있었다. 그 한을 모세와 아론 등 지도자들도 풀어 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 한을 풀어 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했다(출 5:22-23). 「애가」도 이스라엘의 망국의 한을 노래한 시이고, 시편의 "탄원시"도 한의 현실에서 나온 시이다. 만수는 탄원시의 한 예로서 시편 13편을 든다. 그는 예수는 고통을 당하는 민중들의 한을 풀어 주는“무당의 역할”을 하셨다고 말하면서, 크리스천의 한풀이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 위에 세우는 일이요, 이러한 "한의 미니스트리"야 말로 참으로 "크리스천 미니스트리의 독특성"이라고 말한다.
"역사와 사건과 해석"은 시기적으로 보아 "민중신학의 구약성서적 근거"와 거의 동시에 발표된 논문이다. 이 논문은 출애굽기 1-3장의 역사를 민중신학적 시각에서 다루고 있다. 만수는 "하나님의 백성은 권력 편에 서지 아니하고 수난 받는 민중 편에 선다는 것을 모세에게서 보여준다"고 말하면서, 모세는“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권력과 특권을 가진 자 편에서 행복과 영광을 누릴 수 있었지만, 그는 그 모든 것을 버리고 동족이 수난 받는 현장에서 민중과 더불어 자기의 아이덴티티를 찾았다"고 민중신학적으로 모세를 해석하고 있다.

만수는 그의 생애 마지막에 민중신학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비록 짧은 기간이고, 그가 쓴 민중신학적 논문이 몇 편 되지 않지만, 분명 그는 민중신학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민중신학적 방법과 시각으로 신학을 하기로 작정하고 신학적 고백을 하였다. 만수는 그의 뒤를 이어 활동하고 있고, 또 앞으로 활동할 후학들에게 신학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 안내자요 이정표로서의 역할을 해 주었다. 이러한 토착적이고 독창적인 구약신학과 그의 신학 말년에 심혈을 기우려 발표한 민중신학적 노작들은, 평생을 달고 다닌 심장병 때문에 더 이상 이어가지 못하고 가슴 아프게도 여기에서 그만 중단되고 만다.


Ⅸ. 민중신학은 경건의 삶에서 온다.

구약신학자인 김정준이 경건의 신학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시편을 연구하는 학자로서 성서의 어느 말씀보다도 "시편이 인간 영혼의 해부학"(기상, 1962.2)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편에 나오는 감사와 찬송은 하나님께서 괴로워하는 인간을 그 궁지에서 건져내어 주셨기 때문에 드리는 감격이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자기의 하나님만은 자기를 건져 주실 것임을 확신하고 그 하나님께 애원하고 간구하는 것이 시편의 기도의 내용이다." 바로 이러한 시편의 시들은 경건한 자들이 겪는 고난을 노래한 것이며, 고난이 그들의 경건을 더욱 빛나게 한 기록이다.

"하나님의 성지(聖旨)없이는 은혜도 시련도 없다. 은혜도 그의 큰 뜻에서 오는 것이고 시련도 그 큰 뜻에서 오는 것이니, 내가 어찌 마음대로 취사선택하겠는가? ...오! 주님, 은혜를 주시든지 시련을 주시든지 주님 뜻대로 하옵소서....모두가 축복이니 은혜와 시련에서 주님만 찬송하게 하옵소서."(삶에 이르는 병, 130-131쪽)

고난도 시련도 주님에로부터 오며 은혜와 축복도 주님에게서 온다는 만수의 이러한 신앙고백은 경건과 고난은 주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것은 구약학자로 뿐만 아니라 한국찬송가에 실린 그의 찬송시에도 잘 나타나 있다. 그것은 현행 찬송가에도 있는 "하늘에 가득 찬 영광의 하나님"이라는 찬송가이다.

1. 하늘에 가득 찬 영광의 하나님/ 온 땅에 충만한 존귀하신 하나님
생명과 빛으로 지혜와 권능으로/ 언제나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
성부와 성자와 성령 구원의 하나님/ 우리 예배를 받아 주시옵소서.

2. 사랑이 넘치는 자비하신 하나님/ 은혜가 풍성한 구원의 하나님
참회의 심령에 평안을 주옵시고/ 죄악의 허물을 용서하여 주소서
찬송과 영광과 생명 구원의 하나님/ 우리 예배를 받아 주시옵소서.

3. 연약한 심령을 굳게 세워 주시고/ 우둔한 마음을 지혜롭게 하시고
주의 뜻 받들어 참되게 살아가며/ 주 말씀 따라서 용감하게 하소서
권능과 지혜와 사랑 구원의 하나님/ 우리 예배를 받아 주시옵소서.

4. 주 앞에 나올 때 우리 맘이 기쁘고/ 그 말씀 힘 되어 희망 솟아오른다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옵시고/ 영원에 잇대어 살아가게 하소서
우리의 자랑과 기쁨 구원의 하나님/ 우리 예배를 받아 주시옵소서.

특히 4절에서 고백한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옵시고, 영원에 잇대어 살아게 하소서"는 만수가 입으로만 고백하고 찬송한 것이 아니라 그의 삶, 그의 몸, 그의 전 생애를 드려 고백한 고백시인 것이다.
만수에게 있어서도 "삶"은 그의 신학과 신앙에 중요한 동력이다. 그의 신학은 어떤 이론이란 방법에서 온 것이 아니라 시련과 고난에 가득 찬 그의 삶에서 왔으며, 그의 신앙 또한 그의 삶 자체에서부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삶은 곧 예배요, 그의 몸으로 드린 산 제사인 것이다. 그는 가히 안병무 교수의 말처럼 "한국의 에스겔"이라 할 것이다.
그러기에 만수는 예배하는 삶은 고난과 슬픔을 각오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나'의 고난이 뿐만이 아니라 민족의 고난과 슬픔까지를 포함한다. 이 고난과 슬픔은 너무도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기에 이 고난 한가운데, 한 맺힌 자들의 아우성 한가운데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와 그 분의 도우심을 간구하고 요청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경건이 살아난다. 여기에서 민중신학이 다시 살아난다. 중무장한 사회과학적 이념과 교조적인 이론으로 민중신학이 완성되고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헐벗은 자, 갇힌 자, 눌린 자, 한 맺힌 자들과 함께 그 고난에 동참하면서 그 속에서 절망하지 않고 다시 하나님을 찾아는 신앙, 절망을 이기고 새롭게 소망하는 신앙을 회복하는 경건 속에 지난 20년 동안 잠들었던 민중신학은 경건의 신학자 만수 김정준을 통하여 다시 살아 날 것이다.
만수에게서 경건은 바리새적이고 율법적인 형식적 경건, 다시 말하면 입으로, 겉으로 엄숙한 경건과는 다르다. 그의 경건은 고난 속의 경건, 시련 속에서 찾아지는 하나님, 민중의 절규 속에서 응답하시는 하나님, 한 맺힌 자의 한의 소리를 타고 오시는 하나님, 갇혀서 탄식하는 당신의 백성들의 소리가 함께 탄식하시는 하나님을 내 안에, 우리 안에, 민족 안에, 역사 안에 모시어 드리는 참으로 신령하고 거룩한 일이요, 곧 예배가 되는 것이다.
1981년 2월 3일 그는 경건의 영원한 본향이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셨지만, 그가 우리게 남긴 신앙과 신학적 유산은 참으로 고귀하며 순결하다. 특히 한 때 유행한 흘러간 신학으로, 또한 경건을 잃어버린 천박한 신학으로 낙인찍히고, 또 그 스스로 경건은 민중신학과 상관이 없노라 하는 오늘의 민중신학과 그 신학자들에게 만수 김정준은 말한다.
"민중신학은 경건한 삶에서 온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