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3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1)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영으로는 2)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6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7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지난 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아니면 걱정과 염려로 한 주간을 지냈습니까? 대부분이 후자일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걱정과 염려 불안이 왜 생기는 것입니까? 분명하게 현실적으로 무언가 닥친 것이 없는데도 막연한 두려움, 장래에 대한 염려로 인하여 불안하지 않았습니까? 그러한 불안과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하여 무엇을 하셨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의 소유를 늘리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소유를 안전하게 보존하고 더욱 늘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은 매일의 삶이 나의 노력과 실력에 의하여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유지됨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도란 예수님을 믿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년, 십년, 백년, 자자손손의 양식까지 비축하여 두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불안이나 두려움을 없애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전도서 5:10-17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0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11 재산이 더하면 먹는 자도 더하나니 그 소유주가 눈으로 보는 외에 무엇이 유익하랴 12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배부름으로 자지 못하느니라 13 ○내가 해 아래서 큰 폐단 되는 것을 보았나니 곧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 되도록 지키는 것이라 14 그 재물이 재난을 인하여 패하나니 비록 아들은 낳았으나 그 손에 아무 것도 없느니라 15 저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 나온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 것도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16 이것도 폐단이라 어떻게 왔든지 그대로 가리니 바람을 잡으려는 수고가 저에게 무엇이 유익하랴 17 일평생을 어두운데서 먹으며 번뇌와 병과 분노가 저에게 있느니라”
이 세상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얼마나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까? 이러한 삶이 헛되고 헛되다고 솔로몬이 체험적으로도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헛됨 속에 또다시 함몰되어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잘 못된 것인 줄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결코 소유의 늘어남이 만족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근심이 더하여 지는 것입니다. 자식에게 넘어가지도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저 적신으로 왔다가 적신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사는 것은 그저 바람을 잡는 것과 같아서 일평생을 어두운데서 먹으며 번뇌와 병과 분노가 저에게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말씀을 아예 모르는 사람들이야 할 수 없다고 하지만 그러나 이러한 말씀을 매주 들으면서도 우리도 여전히 이러한 삶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은 왜 입니까? 이것이 해 아래 있다는 것이며, 아담아래 있다는 것이며, 죄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재물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자신의 고유의 창조적인 활동-경제, 과학, 학문, 종교-에 스스로 도취하여 사는 것입니다. 자기가 주인이 되어서 자기 행한 일의 결과에 보람과 만족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영광은 나를 위한 것으로 사는 것입니다. 환경에 굴절된 생명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헛되고 저주스러운 삶에서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 부르심이 자기 의로 달려가던 바울을 부르시고 돌이켜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종으로 삼으셔서 복음을 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복음이란 성경에 약속된 대로 아들에 관한 것입니다. 그 아들이 육신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이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주님이 부활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심으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을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그 부르심을 입은 자가 바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합니다. 전에는 자기가 주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종이 되었습니다. 그 종이란 이제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주인의 의도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이것을 부르심을 입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5절입니다. 무엇을 위하여 부르신 것입니까? 그로 말미암아 즉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를 받았고 사도의 직분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직분도 은혜로 받은 것입니다. 이렇게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는 것은 그 이름을 위하여 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직분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여러 가지 직분이 있습니다. 목사가 있고 장로가 있고 집사가 있습니다. 이러한 직분이란 무엇을 위한 직분입니까? 자기 이름을 위한 직분이 아닙니다. 주님의 이름을 위한 직분인 것입니다. 자기의 이름을 과시하기 위한 직분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게 하기 위한 직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비록 서리집사로 임명을 받았다고 하여도 그 직분이란 것이 내 마음대로 살기 위한 직분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위한 직분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울의 직분은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받은 것이며,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인데 자신이 이방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기에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려고 직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바울이 전한 이 복음을 듣는 다는 것은 무엇이 따르는 것입니까? 믿어 순종케 하는 것입니다. 믿음과 순종이라는 말은 분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른 믿음이란 바른 순종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순종이 없는 사람을 보고서 왜 순종이 없느냐고 다그치는 것은 잘못입니다. 순종이 없다는 것은 무엇이 없다는 것입니까?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생명의 관계이기에 반드시 그에 따른 순종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명의 현상이 잘 나오지 않으니 억지로 행함이라는 열매를 갖다 붙인다고 그것이 생명의 열매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식의 열매요 육체의 열매인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사도가 믿어 순종케 된 사실은 어떤 내용입니까?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세상과의 분리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세상은 하나님께로부터 창조가 되었으나 죄로 인하여 이탈되어 있는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 필요한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을 육의 세계입니다. 인간들의 세상입니다. 인간들이 주인이고 왕 노릇하는 세상입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부름을 받으니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에 눈뜨게 되는 것입니다. 참된 현실이란 주님의 약속하신 세상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믿어 순종케 된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의 부르심이란 바울과 동일합니다. 로마에 있든지 창원에 있든지 직분은 다를지라도 부르심은 동일합니다. 어떤 부르심입니까? 거대한 홍수가 나서 떠내려가는 중에 건짐을 받은 것입니다. 이 시대의 조류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줄도 모르고 영원한 멸망 길로 더욱 가속을 붙여가면서 달려가는 우리를 불러내신 것입니다. 이렇게 불러내심은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소유로 삼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행복입니다. 내 인생을 나의 것으로 운전하고 가려니 얼마나 분노하고 염려하며 살았습니까? 이제 주인을 제대로 만났으면 그 주인에게 맡기고 시키는 대로 살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43:1-7절을 봅니다. “봉독”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이 너는 내 것이라고 불러내신 것입니다. 여기서 야곱을 말씀하시는 것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선택하셔서 어떻게 다루었는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계시를 야곱의 생애를 통하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 계시가 무엇입니까? 소유권 싸움입니다. 야곱이 태어나면서부터 태중에 있을 때부터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습니다만 태중에서도 서로 싸웠습니다. 서로 나오려고 싸운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서 태어난 것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차남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약속은 야곱에게 있습니다.
이 당시에는 장자가 되어야 아버지의 상속권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야곱이 형의 배고픔을 기회로 장자 권을 가로채고, 아버지와 형을 속이면서 축복을 받아낸 사람입니다. 그리고 외삼촌의 집에 가서도 자기의 소유를 늘리기 위하여 얼마나 애를 쓰는지 모릅니다. 그러는 중에 아내가 네 명이나 되었고 그 아내들의 시샘과 질투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의 꾀를 사용하여 결국 많은 소유를 가졌지만 그 소유가 자기를 안전하게 지켜주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한 야곱을 하나님의 약속대로 다시 가나안땅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나 얍복강 가에서 불안하여 잠을 자지 못하는 밤에 주님께서 야곱을 만나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이 야곱, 발목 잡은 자, 사기꾼의 이름에서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평생이 험악한 나그네의 세월이었다고 노년에 고백합니다. 왜 그렇게 험악한 세월을 보내게 되었습니까?
자기가 지키려고 한 것들이 오히려 빼앗기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지키려고 하다가 오히려 절름발이가 되어서 평생 자기 힘으로 도망도 가지 못할 신세가 됩니다. 이 사람의 이름이 이스라엘이 된 것입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너는 내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자기를 지키는 줄 알고서 살았던 야곱이기에 험악한 세월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가 복음을 듣는다는 것은 나의 소유 지키거나 늘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의 주인인 것을 알게 하기 위한 부름인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빼앗기더라도 결국 주님의 약속 하나 받는다면 이것이 복음이요 기쁜 소식입니다.
6절입니다.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라는 말씀은 부르심을 입은 자들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름을 입는 것은 로마에서 믿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복음을 전하여 믿어 순종케 하는 것이란 결국 우리의 모든 것이 나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것입니다.
이것이 부르심의 목적입니다. 내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구나! 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 예수를 믿는 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그렇게 힘들고 어려웠던 것은 내 것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힘들고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원래 주인에게 돌려져야 할 것을 돌려주면 얼마나 홀 가분 하겠습니까?
얼마 전 드라마 ‘저 푸른 초원위에’라는 곳에서 주인이 사고로 쓰러질 때 그 집의 머슴이 가로 채서 부자가 되었지만 평생 그것으로 눌려 산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의 딸에게 이실직고 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말 안하고 숨기고 사는 것이 죽는 것 보다 더 괴롭다는 것입니다. 자기 것도 아니면서 빈손으로 와서 모든 것을 은혜로 받아 살면서 자기 것이라고 고집하며 사는 자들에게는 참된 평안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만 즉 주님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만 무엇이 주어지는 것입니까?
7절입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 인사합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은 증거가 무엇입니까? 주님의 소유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이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에 평안이란 것이 불안이 되고, 불안이 오히려 평안이 되는 이러한 은혜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부름을 입은 모든 자들에게 있기를 기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19-20절의 말씀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