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든 싱어(hidden singer)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목요야간반 허명기
휘황찬란한 무대조명 속에 전주곡(前奏曲)이 흐른다. 긴장감이 팽팽하다. 무대 뒤편 부스에는 여섯 명의 실루엣이 붉은 조명을 받으며 노래를 준비하고 있다. 드디어 한 곡의 노래를 한 소절씩 원조가수와 모창 가수 다섯 사람이 부른다. 분명 내 귀에 들리는 노래는 한 목소리다.
우연히 JTBC에서 히든 싱어 프로그램을 봤다. 익살스러운 재간둥이 MC 전현무가 진행하면서 분위를 한껏 고조시키고 있었다. 원조가수와 모창 가수의 노래가 끝나면 판정단의 전자투표가 시행되고 이어서 패널로 참석한 가수와 연예인들의 소감으로 진행되었다. 원조가수의 여러 곡의 노래를 원조가수와 참가한 모창가수들이 한 소절씩 부르면서 원조가수와 가장 근접하지 못한 참가자들이 차례로 탈락하는 과정이다. 여기서 원조가수를 잘 아는 그리고 가수로서 음정과 음색을 잘 파악한다는 패널들도 헷갈릴 정도로 모창 가수의 탁월한 기교가 놀라울 뿐이다. 물론 원조가수도 몸 상태가 좋지 않을 때는 탈락하는 수모를 당할 수도 있다. 정말이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그리고 결선에 다가갈수록 긴장감이 점점 고조되는 흥미로운 프로그램이었다.
한 번은 가수 김광석이 세상을 떠난 지 17년이 지났지만, 그 목소리를 기억하고자 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대결이었다. 그런데 무대에 오르지 못하는 자의 노래와 어떻게 대결할 수 있고, 그 타임을 어떻게 맞출 수 있을까 자못 궁금했다. 릴 테이프로 녹음된 곡을 음원과 목소리를 따로 디지털 녹음하는 과정이 필요했단다. 이미 디지털화된 곡은 불과 몇 곡에 불과했고 아날로그 방식으로 녹음된 곡을 김광석의 목소리로 디지털화하는데 1년이라는 시행착오를 거쳤다고 했다. 그리고 녹화 당일의 타이밍도 중요했을 것이다. 원조가수가 다섯 도전자와 함께 부스 안에서 한 소절씩 노래를 부르는 대결을 만들기 위해서다. 물론 김광석의 부스는 비어있었다. 제작진은 전체 반주를 틀어놓고 순서에 맞게 김광석의 노래를 틀었다. 제때에 잘 트는 것도 중요해서 한 달 전부터 현장 예행연습을 했단다.
이렇게 어려운 과정을 거치면서 김광석과 대결을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아직도 팬들의 마음속에 지우지 못하는 김광석의 흔적이 깊게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서른둘에 머문 그 목소리는 짧았지만, 그가 살아온 역사, 시대. 상처와 정서가 녹아있었다. 청아하지만 구슬퍼서 존재의 심연을 건드리는 목소리. 누구나의 안에 숨어있는 상처를 일깨우는 목소리다. ‘서른 즈음에’의 노래가 ‘마흔 즈음’에, ‘쉰 즈음’ 에로 끊임없이 변주되는 이유이다. 한 사람을 그토록 그리워하면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노래의 대결은 고(故) 김광석의 승리로 끝났다.
김광석이 태어난 대구광역시 중구 대봉동 방천시장이다. 고인을 기리기 위해 동상도 세웠고, 고인의 삶과 노래의 흔적을 살리기 위해 김광석 거리를 만들어 찾아오는 관광객들에게 김광석에 흠뻑 젖게 한단다. 입구에서부터 심금을 울리는 명곡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뚝방 길에는 다양한 벽화를 통해 고인의 기억을 일깨우게 한단다. 줄을 잇고 있는 관광객으로 말미암아 방천시장이 모처럼 활황을 띠고 있다고 하니 아주 고마운 일이다. 경제 활성화의 길이 먼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가까운 곳에 있음을 상기할 일이다.
유년시절 어느 가을날 목이 말라 우물가로 갔다. 두레박으로 끌어올린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숨을 고르고 있었다. 우물 속을 들여다봤다.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겹쳐 보이고 내 얼굴도 검게 비쳤다. 소리를 질렀다. 울림이 크고 좋았다. 그러다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예전과 같은 내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때 당시 유명했던 가수 남진, 라훈아에 버금가는 노래가 아니던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나르키소스가 우물에 비친 자기 얼굴에 반하여 결국 죽어서 수선화가 되었듯이, 나 또한 내 노래에 반하여 우물 속에 얼굴을 묻고 우물가를 떠날 줄 몰랐다. 그렇게 몇 곡을 부르자 피가 거꾸로 몰려 귀밑 목에 검붉은 핏대가 서고, 얼굴이 뻘게지며 눈에 충혈이 생겼다. 나도 가수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에 고무되어 잠시 호접몽을 꾸고 있었다.
1960년대 후반 사춘기에 접어들었을 때의 일이다. 그 당시 유행하던 노래를 배우고자 무던히도 애썼던 기억이 난다. 노래를 배우고자 해도 가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게 전부였다. 형편이 좀 나은 집에서는 축음기가 있어서 레코드판에 녹음된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주로 노래를 들을 수 있는 시간은 KBS 라디오 정오 뉴스가 끝난 뒤 애청자가 사연과 함께 신청하면 40여 분 동안 노래를 내보내던 시절이었다. 그 순간을 이용하여 노래를 따라 부르거나 열심히 가사를 메모해 두었다가 부르곤 하였다. 또 그때에는 라디오도 귀하여 마을회관에 비치된 스피커를 통하여 라디오의 노래방송을 틀어주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배울 기회가 주어져 있지 않은가. 노래방이다. 노래교실이다. 인터넷에서 내려 받거나 해서 노래를 배우는 길이 있다. 참으로 좋은 세상에 살고 있다.
가수의 노래를 따라 하기도 어려운데 모창을 한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타고난 성량과 음색 그리고 기교가 있어야 모창에 도전할 수 있다. 가수 지망생 대부분이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모창으로 시작해서 가수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모창을 잘하는 가수가 가수로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그것은 아류의 가수로 남을 수밖에 없는 뻔한 길이다. 남이 개척한 길을 쉽게 따라가고 독창성과 개성이 없는 공허한 노래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사도 마찬가지다. 남이 창조한 것을 모방한다는 것은 생명력을 잃은 것이다. 그리고 자기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남의 인생을 따라 하는 것으로 백화점식 그리고 길거리 좌판에 나열된 물품과 무엇이 다르랴. 창조한다는 것은 절박함과 절실한 상황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모방인생은 반짝이는 불빛과 같이 한때 화려한 조명을 받을 수 있지만, 그 생명은 오래가지 못한다. 진정한 인생의 가치를 구가하기 위해서는 남을 의식하지 않는 허식을 버리고 자기식의 삶의 목표와 가치관을 갖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2014. 1.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