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는 혜안으로 말 그대로 지혜의 눈을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지혜’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한다. 혜안은 지혜의 눈이고, 법안은 법의 눈이며, 불안은 부처님의 눈이라고 한다면 간단하게 끝나겠지만 그렇게 해서는 도무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종잡을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일체 모든 존재의 본바탕에 있는 본질, 불성, 참성품을 깨달아 아는 지혜로, 삼독심 등 일체 모든 번뇌가 사라져 근본불교에서 말했던 무상, 무아, 고, 중도, 연기의 이치를 밝게 아는 지혜를 말한다.
이 눈은 성문과 연각 같은 근본불교 아라한들이 지니고 있는 눈이다. 성문은 부처님께서 가르치는 음성을 듣고 수행하는 수행자를 뜻하며, 스스로 깨닫기 보다는 부처님의 음성을 듣고서야 비로소 수행할 수 있는 제자를 말한다.
이에 비해 연각은 독각, 벽지불이라고도 하며, 성문과는 달리 자신의 노력만으로 깨달음을 얻은 자를 말한다. 이 두 수행자의 공통점은 모두 자신의 깨달음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이에 비해서 대승불교에서 강조되고 있는 보살은 자리이타의 정신으로 자신의 깨달음 보다 중생구제에 더 큰 원력을 세움으로써 원력이 성취되기 전까지는 성불도 뒤로 미룰 정도의 굳은 서원을 가진 수행자를 말한다.
혜안은 바로 성문과 연각 수행자, 즉 자신의 깨달음을 중시하는 이들의 지혜의 눈을 말하고, 법안은 보살 수행자, 즉 자신의 깨달음 보다는 중생구제에 원력을 세운 이들의 눈을 말한다.
대승불교에서는 그동안 성문과 연각 등 혜안을 구족한 아라한을 소승이라고 폄하하면서 법안을 구족한 대승의 보살승을 완전한 이상적 수행자상으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불교의 근본 사상이 나와 너를 나누지 않고, 생사와 열반을 나누지 않으며, 중생과 부처를 차별하여 나누지 않는 가르침을 볼 때 자신의 깨달음을 성취하고자 수행하여 깨달음에 이른 아라한을 소승이라고 폄하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아라한의 입장에서는 나의 깨달음이 곧 온 우주 법계의 깨달음과 둘이 아니다. 나라는 한 생명은 곧 온 우주 법계의 전체 생명과 둘이 아니다. 하나가 곧 일체이고 일체가 곧 하나며(일즉일체다즉일), 한 티끌 속에서도 시방세계를 담을 수 있다(일미진중함시방)고 한 법성게의 게송을 생각해 보라.
한 사람이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이 되었다는 것은 그것이 한 사람의 소승이 자신만의 깨달음을 위해 수행한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체 법계의 깨달음이며, 전체 생명이 함께 깨달은 것과 다르지 않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혜안을 구족한 아라한은 자신의 깨달음을 통해 모든 생명의 모든 중생의 깨달음을 실현해 보인 사람이다. 아라한의 지혜인 혜안을 통해 일체 모든 생명과 존재를 깨닫게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육조스님도 금강경 해설에서 ‘반야바라밀의 진리가 능히 삼세의 일체법을 낸다고 여기는 것을 혜안이라 한다’ 고 했다.
즉 하나의 진리가 삼세의 일체법을 내기 때문에 애써 삼세 일체법을 다 깨닫겠다고 나설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진리 그 하나를 깨닫게 되면 일체 모든 법을 깨닫겠다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 바로 혜안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 혜안이란, 지혜의 눈으로써, 진리의 세계에서 모든 중생들이 결국 하나임을 보는 것이며, 무분별의 세계에서 모든 분별상들을 하나로 회통하는 것이고, 하나가 곧 전체임을 깨닫는 것이며(일즉일체), 이치가 곧 현상계와 둘이 아니게 걸림 없음을 깨닫는 것이고(이사무애법계), 공의 세계에서 색이 하나임(공불이색)을 일체동관하는 눈인 것이다.
반대로 법안을 구족한 대자대비의 보살은 일체 모든 중생들의 깨달음을 통해 자신 또한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사람이다.
일체 모든 중생들이 깨닫지 못한다면 곧 내가 깨닫지 못한것과 다를 것이 없으며, 일체 모든 중생이 깨달음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자신도 완전한 깨달음의 향기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
즉 보살은 법안을 통해 일체 모든 존재의 깨달음이 곧 나의 깨달음임을 실천하는 수행자인 것이다.
육조스님의 해설에 보면 ‘일체 불법이 본래 스스로 갖추어져 있다고 여기는 것을 법안이라고 한다’ 고 했다. 즉 일체 불법은 모든 생명과 모든 존재들 내면에 본래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보살은 그 모든 중생들의 본래 갖추어진 불법을 일깨워 깨달음에 이르도록 하는 대자대비의 법안을 구족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법안은, 자비의 눈으로써, 모든 중생들의 깨달음에서 곧 진리를 보는 것이며, 분별상의 세계에서 무분별의 진리를 보는 것이고, 전체가 곧 하나임을 깨닫는 것이며(다즉일), 현상계와 현상계가 둘이 아니게 걸림 없음을 깨닫는 것이고(사사무애법계), 색의 세계에서 공이 하나임(색불이공)을 일체동관하는 눈인 것이다.
첫댓글 혜안 이라도 가졌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