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카디아`로의 염원 (화가 PO KIM)
곽인희
2011년 95세의 노화백은 인터뷰에서 말합니다.
약 1,000점의 작품을 갖고 있으며 앞으로 1,000점을 더 그리겠다고, 앞으로 더 좋을 거라는 희망으로 하루를 시작한다고 말입니다. 평생 그림을 그리며 살아온 노화가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화가는 아닙니다.
조국에서 살지 못하고 이국땅에서 살아야했던 외로운 천재 예술가 중 한분입니다.
1917년생이시니 우리나라 근현대사와 맞물려 역동의 시기를 온몸으로 고스란히 겪으신 분입니다.
빨갱이로 몰리는가 하면 반대편 치하에서는 오히려 반공주의자로 낙인찍히기도 하고 지독한 가난으로 키가 자라지 않아 난쟁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어린 시절을 겪었습니다. 등록금을 못내 학교에서 쫓겨나기도 하고 조총련1세대 화가인 형도 있습니다. 625전쟁과 이념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문을 당하고 끔찍한 악몽에 시달려 미국으로 건너가 고향에서 살지 못하는 이산의 뿌리 없는 존재가 되어 뉴욕에 정착한 후 한국적인 색채와 선을 이용하여 동양의 혼과 정신을 작품으로 재현합니다.
90세를 훌쩍 넘긴 나이에도 자연과 인간의 조화, 이상과 현실의 조화를 꾀하는 `아르카디아`로의 염원이 작품의 주제입니다.
책에는 `아르카디아`와 `디아스포라`라는 생소한 말이 많이 나옵니다.
`아르카디아`는 옛 그리스 산속의 천진하고 소박한 생활이 영위되는 이상향을 말하며 `디아스포라`는 자신의 뜻이 아닌 이유로 조국에서 살지 못하고 이국땅에서 사는 `이산`을 뜻합니다.
본명은 `보현`, 1955년 교환교수로 미국에 건너가 뉴욕에서 작품 활동을 펼쳐온 1세대 한인화가입니다. 1955년 미국으로 건너갔으니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을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 수업료를 못내 교실에서 쫓겨나고 밥을 굶고 등교하는 날도 많았다고 하는 아주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분입니다
9살 때 아버지가 자리에 누운 지 2주 만에 돌아가시고 누나와 동생은 각각 폐병으로 3년 동안 한 해 한사람씩 사망했다고 합니다. 보통학교 시절 그림을 잘 그려 상도 받고 우등을 놓치지 않아 졸업 후 사범학교에 합격했으나 키가 너무 작아 신체검사에서 탈락하고 20세 때 일본으로 건너 가 새벽 5시에 일어나 신문배달을 하며 낮에는 미술, 밤에는 법학을 공부합니다. 동경 태평양미술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1946~1955년 조선대 미술학과 교수와 학과장을 지냈으며 학생들과 홍도로 사생여행을 나간 1950년 갑자기 흑산도 지서에서 그를 잡으러 와 6.25가 일어난 줄 알았다고 합니다. 이유는 홍도에서 학생들에게 공산주의 강의를 하고 있으니 처벌하라는 지령이 있어 목포경찰서에 수감 중 치과의사이던 아내가 찾아와 경찰 후퇴직전에 석방되었는데 이번에는 인민군이 다시 ‘친미반동분자’로 그를 잡으러 옵니다. 미군정 때 광주미군사령관의 딸에게 미술 개인지도를 했던 것과 미국 공보원에서 개인전 한 것이 이유였다고 합니다. 1955년 일리노이대학교 교환교수로 한국을 떠날 기회가 되자 그는 미련 없이 한국 땅을 떠납니다. 영문도 모르고 좌익이 되었다, 때로 우익이 되는 불안한 고국과 자신의 처지에 염증을 느껴 다시는 한국으로 안 간다고 결심하고 2년 뒤 1957년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뉴욕으로 가 밑바닥부터 생활하며 오랫동안 철저히 고립된 시간을 보냅니다.
예술의 자유를 찾아 온 뉴욕에서의 삶은 녹록치 않아 시간당 1달러를 받고 넥타이 공장에서 그림을 그리고 백화점에서 디스플레이 일을 하면서 어려운 생활고 속에 시간을 쪼개 그림을 그렸으며 미국에 온 후 10년 동안 때때로 밤마다 경찰이 잡으러 오는 악몽에 시달리며 사는 동안 첫 아내와도 헤어집니다.
비자 만기로 불법체류자가 되어 불안한 생활을 보내다 몇 년 후 영주권을 받게 되어 비로소 비자 없는 불안과 고통에서 벗어납니다. “살다보면 나쁜 것도 나중에 좋게 될 때가 있다.”고 그는 말합니다. 폐병 때문에 학도병으로 안 나간 것도 그렇고 불법 신분도 그렇고, 이 모든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입니다. 그의 그림은 50~60년대는 추상표현주의, 1970년대에는 호두, 양파, 브로콜리, 과일 등의 정밀묘사 색연필 드로잉, 80년에는 삶의 기쁨과 고통을 표현하고. 노년에 이르러서야 자유롭게 꿈꾸는 파라다이스를 그리게 됩니다.
그는 이상향을 발견하기 위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외부세계의 혼란에 대항하는 하나의 대안으로서 예술을 제안합니다. 그의 작품은 삶, 사랑, 욕망에 대한 환희의 찬가이며 인간과 자연의 어울림을 추구합니다.
소외와 고독이 표현된 작품이 있는가 하면 자연과 인간의 행복한 공동체를 꿈꾸는 작품도 있습니다.
“역경은 저에게 가장 큰 교육 이었습니다. 그동안 제가 겪은 힘든 일들 때문에 모든 일에서 인내, 인고, 그리고 수용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2006년의 이 말은 김포의 일생과 작품을 한마디로 표현해주는 말입니다.
그의 초기작품은 한국적인 정서와 강렬한 색채, 서예의 붓놀림 등이 추상속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가 현재 추구하고 있는 작품에서는 과거의 어떤 작업에서도 보여주지 않았던 기쁨이 쏟아지고 있으며 여기에 도달하기까지 거친 정신적 상흔 고통 연구 그리고 부지런한 작품제작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입니다.
그의 작품세계를 요약하면
1960년대의 추상화는 속도와 촉감, 중량감으로 터질 듯한 에너지와 기의 세계를 보여주며 서양과 동양의 융합을 표현합니다.
1979년부터는 싱싱한 과일과 야채를 정교한 필치와 형태의 반복으로 리듬감과 시간적 요소를 개입시켜 생명의 본질을 파고듭니다.
1981년부터는 현실과 초현실의 만남을 추구하여 위아래의 구분이 없는 수평과 수직의 만남, 의식과 무의식, 물리적인 세계와 형이상학적인 침투, 혹은 통합을 추구합니다.
2003부터는 마치 즉흥적인 재즈음악가 같이 의식과 무의식, 상상과 잠재의식의 공존으로 모든 생명체가 한데 어우러져 어둠과 슬픔마저도 화평으로 요해된 세계, 파라디이스 혹은 아르카디아의 세계, 지상의 낙원을 표현합니다.
그는 비로소 아픈 영혼의 상처에서 벗어나 무한의 자유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바람을 작품속에 녹여냅니다. 희망과 향수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때로는 죽음처럼 어두운 과거가, 때로는 유토피아 같은 밝은 미래가 교차합니다.
2007년부터 흰색캔버스에 테이크로 콜라주한 대형작품을 제작하며 그리기 보다는 만드는 데 더 가까운 새로운 조형의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2014년 2월 우리나라 나이로 98세로 운명하십니다.
1969년 재혼한 역시 화가 인 영혼의 동반자였던 실비아와의 공통의 예술적 지향점은 동물, 구름, 그림자, 계절 등 자연에서 영감을 얻어 자유와 해방, 평화와 화해의 갈구, 생명의 찬미를 노래하는 것이었습니다. 글쓰기와 그림은 자기 자신의 삶을 표현하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그는 시대를 뛰어넘어 자신의 작품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를 보여줍니다.
오늘의 풍요보다는 결핍 투성이의 어린 시절이 우리의 삶을 빛나게 할 수 있고 기억의 창고에서 실제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광채로 뒤덮인 보물들을 발견할 수 있으니 너무 억울해할 일이 아니라고 그는 말합니다.
기억의 창고에서 부지런히 광채로 뒤덮인 보물들을 찾아봐야겠습니다
(작품: 김복기외, 2010.5.13., 에이엠아트, Po Kim 아르카디아로의 염원, 67-69, 83, 123, 135)
(차 한잔의 초대/ 뉴욕한인 화가 1호 추상화가 김보현(미국명 김포) 2011.08.04 미주한국일보)
첫댓글 "2011년 95세의 노화백은 인터뷰에서 약 1,000점의 작품을 갖고 있으며 앞으로 1,000점을 더 그리겠다고"
대단하네요. 잘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다시 읽어보니 고쳐야 할 곳이 많이 눈에 띄네요. 책에 실린 시기별 대표작품도 몇장 올리고 싶었는데 저작권 문제가 어떤지 몰라 못올려서 아쉽습니다.
'살면서 내게 닥친 역경은 가장 큰 교육이었다. 그로 인해 인내와 수용을 배웠다.' 는 말이 가슴에 닿습니다.
나는 왜 역경을 보다 더 슬기롭게 헤쳐나오지 못했던가. 후회가 되고 김보현 그 분이 존경스럽습니다.
장문의 독후감 고생하셨어요. 고맙습니다.
독후감 감명 깊게 잘 읽었어요
위대한 예술가의 뒤에는 꼭 훌륭한 부인이 있지요? 역시나 김포화백 뒤에도 예술적 영감을 주는 아내가 있었네요
과찬의 말씀 감사합니다!!! 결혼원고 선생님께 독촉받고 이제사 보내 죄송하네요.
잘 몰랐던 위대한 미술가 한 사람을 알게 됐네요~나중에 작품도 봐야겠어요.. 이 엄청난 조회수~~우와 신기록이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