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손주와 낡은 승용차를 바라보는 ‘닮은꼴’ 시각
- 이웃집 박영진 교장 선생님의 칼럼 옥고를 읽고
윤승원 수필문학인, 전 대전수필문학회장
내 집 옥상에서 이웃집을 바라보면 한 집 건너 박영진 교장 선생님 댁이 보인다. '전직 교장 선생님'이지만 나는 여전히 ‘교장 선생님’이라 부른다.
전직 교장 선생님을 지금도 변함없이 현직처럼 '교장 선생님'이라 부르는 까닭은 이미 《우리 동네 교장 선생님》이란 제목의 졸저 수필집에서 밝힌 바 있다. 1990년 KBS 1라디오 문학프로그램이었던 <시와 수필과 음악과>에서 방송된 수필이다. 한 대목을 소개하면 이렇다.
[전략] 동네 사람들은 이 분을 그냥 할아버지, 혹은 노인 양반이라 하지 않고 꼭 ‘교장 선생님’이라 부른다. 시골에서 면장을 지낸 사람이 퇴직 후에도 계속 면장님으로 불리듯이, 할아버지도 지난날 몸담았던 교직의 지위가 자연스러운 호칭으로 된 것 같다. 그런 호칭은 보통 할아버지라는 호칭보다 더 친근감이 가는데, 듣는 쪽보다는 부르는 쪽에서 더 정감을 느끼는 부름이기도 하다. [하략]
졸고 수필에 등장하는 ‘교장 선생님’은 내가 이곳으로 이사 오기 전 이웃집 할아버지이었는데 돌아가신 지 꽤 오래됐다. 나는 공교롭게도 이사 다닐 때마다 이웃집에 '교장 선생님'이 사신다.
그분들은 모두 내가 본받을 점이 많은 '교장 선생님'이다. 이곳으로 이사 오기 전에 이웃에 사셨던 교장 선생님을 나는 방송 수필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전략] 과거의 자신을 조금도 내세우려 하지 않고 무언의 실천으로, 검소한 생활을 하시는 분이다. 채송화, 맨드라미, 들국화 같은 꽃씨를 알뜰히 모아두셨다가 길가에 심기도 하고, 봄에 호박씨 모종을 부어 이웃 담장 밑까지 일일이 심어 주시고, 주렁주렁 열리면 받침대까지 설치해 주시는데, 동네 사람들은 몸 둘 바를 모른다. 어찌 보면 하찮은 일 같지만, 오랜 세월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몸에 밴 근면성으로 손을 잠시도 멈추지 않고, 소일하는 모습을 보면 늘 부족한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하략]
◆ 필자의 졸고 수필 <우리 동네 교장 선생님> 「추천사」와 「방송 진행자 멘트」
『평범한 생활 속에서 삶의 지혜와 진실성을 찾아내는 것이 매우 밝은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 KBS 1라디오 『시와 수필과 음악과』 심사위원 <추천사>에서 / 경희대학교 교수 서정범(1990)
지난날에 교장 선생님이었던 분,
그러나 자신의 과거를 조금도 내세우려 하지 않고
말없이 실천을 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시는 분,
채송화, 맨드라미, 들국화 같은 꽃씨를 모았다가
길가에 심기도 하고, 이웃집 담장 밑에도 심어주시는 분,
그런 분이 골목에 함께 살아간다는 것,
하나의 축복일 수도 있고 기쁨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 같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모두가 모여서 사는 것이
우리네 세상입니다.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이 있고,
쓰레기를 줍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줍는 행위를 놓고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저런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흘려버리고 살아가는 수도 있고,
윤승원 씨처럼 글로 표현해 두는 경우도 있습니다.
글을 쓴다고 하는 사실,
우리의 삶을 기록하는 작업이
우리의 삶을 살찌게 할 수 있다면
참으로 유익한 일입니다.
- KBS1라디오 《시와 수필과 음악과》에서 / 진행자 이규항 아나운서
서두가 길었다.
박영진 교장 선생님 댁 앞에는 수령이 꽤 오래돼 보이는 감나무가 서 있다. 봄에 연두색 이파리가 나올 때부터 가을에 홍시가 익어 갈 때까지 나는 박 교장 선생님 댁 감나무를 허락 없이 관찰한다.
감나무를 바라보면서 골목 청소하시는 구순이 훌쩍 넘으신 박 교장 선생님의 어머님을 떠 올린다. EBS 인기프로그램 《장수의 비밀》에도 출연하셨던 분이다.
방송에서는 구순 노인이 빗자루를 들고 바람에 떨어진 감나무 이파리며 잡다한 쓰레기를 말끔히 청소하시는 모습이 나온다. 정겹고 아름다운 골목 풍경이다.
오늘은 박영진 교장선생님이 일간지에 <봄꽃의 이른 개화와 과소비 사회>라는 제목의 칼럼을 썼다.
▲ 박영진 교장선생님 칼럼(금강일보 2021.04.14일자)
[금강칼럼] 봄꽃의 이른 개화와 과소비 사회 < 칼럼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금강일보 (ggilbo.com)
글 속에 나오는 골목 풍경이 내겐 낯설지 않고 유독 친근하게 다가온다. 어린 손주들의 모습이 우리 집 손자와 닮은꼴이다. 같은 처지의 할아버지로서 구구절절 공감이 간다.
[전략] 요즈음 손주들과 함께 지내며 어린아이들의 소비 형태를 보고는 죄스러움을 느끼기도 한다. 포장도 뜯지 않은 간식거리가 이리저리 뒹굴고, 인형과 장난감이 마구 흐트러진 채 여기저기 쌓여 있다. 책상 위에는 크레파스와 연필이 수북하고, 펼쳐보지도 않은 동화책이 책꽂이 안에 웅크리고 있다. 물티슈와 화장지를 마구 뽑아 던져놓고, 멀쩡한 물건도 그냥 쓰레기통에 내버린다. 요즘 아이들은 아까운 것을 전혀 모른다. [후략]
장면이 바뀌어 ‘승용차’가 등장한다.
나는 박 교장 선생님의 승용차를 여러 번 타 본 적이 있다. 문학모임이 끝나면, 함께 참석했던 박 교장 선생님이 나를 꼭 집 앞까지 태워다 준다. 운전 솜씨도 차분하고 여유가 있다. 무엇보다 동승자를 편안하게 안전운전한다. 교통법규도 철저히 지킬 뿐만 아니라 아무리 급해도 과속하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의 칼럼 주제는 ‘안전운전’이 아니라 ‘노후 승용차’에 관한 얘기다. 우리 집 연식 오래된 낡은 승용차와 비슷하다.
[전략] 아이들이 차를 탈 때마다 할아버지 자동차가 너무 낡았다며 새 차로 바꾸라고 성화다. 그러고 보니 지금 타고 다니는 차를 구매한 지 벌써 13년이 지났다. 사람으로 비유하면 노인이나 마찬가지다. 처음엔 검정 승용차에 먼지가 앉으면 하루에도 몇 번씩 털어내고, 내부 세차도 말끔히 하며 깨끗하게 관리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긁히고 부딪쳐 상처를 입고 변색 돼 차에 대한 애정도 상대적으로 식었다. 차를 닦고 관리하는 일도 이제는 손을 놓았다.[하략]
승용차도 정이 들면 한 식구나 다름없다.
박 교장 선생님 표현대로 <몸에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편안하다>.
사물에 대한 이 같은 애정은 누구나 마음속으로 느끼기는 하지만 글로 표현하긴 쉽진 않다. 편안한 운전 솜씨만큼이나 딱 어울리는 비유를 통해 공감을 자아내게 한다.
[전략] 그렇지만 우리 가족을 실어 나르는 애마 노릇을 충실히 해왔기에 애정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으면 몸에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편안하다. 언제든지 시동을 걸고 목적지를 향해 페달을 밟으면 어김없이 안내하면서 속 썩이지 않고 17만㎞를 함께 달려왔다.[하략]
자, 이제 결론이다.
박 교장 선생님 승용차와 ‘닮은꼴 찾기’다.
바로 내가 타고 다니다가 직장 다니는 아들에게 물려준 노령의 승용차와 꼭 닮았다.
아들이 낡은 승용차를 버리고 한 단계 성능 좋은 중형 승용차로 바꾸고 싶다고 할 때, 이 구두쇠 아비가 조금 더 타라고, 아직 멀쩡하다고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조금 미안했던 심사(心思)와 꼭 닮은꼴이다.
박 교장 선생님 칼럼 옥고를 읽고 졸고 소감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소이가 여기 있다.
[전략] 이렇게 깊은 정이 들고 믿음직스러운 소유물이지만, 날이 갈수록 눈에 들어오는 겉모습은 낡고 볼품없이 초라하기만 하다. 헌 차를 타다가 자칫 사고라도 나면 안 된다는 아이들의 걱정을 덜기 위해서라도 차를 바꿔야 하지만 내키지 않는다. 아이들이 걱정해도 내가 스스로 아끼고 절약해 우리의 자연환경을 보존하는 데 조금이나마 이바지하고 싶다. 소비가 결코 미덕만은 아니다.[끝]
2021.04.15.
윤승원 독후 記
첫댓글 모든것에 모범이 되시는 박영진선생님 이시네요.
본 받겠습니다.
살아가면서 좋은 이웃을 만난다는 것은 축복이라 생각합니다.
박영진 교장선생님은 그런 면에서 저의 훌륭한 이웃입니다.
구순 넘으신 박 교장 선생님 어머님도 인품이 훌륭한 분이시고,
사모님 또한 모범적인 가정을 사랑으로 아름답게 가꾸시는 훌륭하신 분입니다.
이득주 사무국장님께서도 칭찬해 주시니 칼럼 독후기를 올린 보람 느낍니다.
감사합니다.
윤회장님
항상 부족한 저를 분에 넘치도록 칭찬해 주셔서 너무 고맙습니다. 기대하시는 만큼 미치지 못하지만 부끄럽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열심히 글을 써서 윤회장님 뒤를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저는 박 교장선생님 옥고에 관하여 어설프게 소감을 적는다는 게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훌륭한 점이 백 가지도 넘는데 극히 단편적이고 지엽적인 겉모습만 부족한 필력으로 나열하니
죄송스러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넉넉한 품으로 겸손하게 받아 주시니, 독후기 한 줄 쓰면서도 인품을 제가 배웁니다.
골목에 주차하신 승용차에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다는 표현을 하셨는데, 제가 지나다니면서 본 바로는
항상 세차를 잘 하셔서 반들반들 윤이 나더군요. 그렇게 승용차 관리를 잘 하시니
앞으로 10년은 넉히 더 타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