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오후 경북 포항의 해병대 교육훈련단. 400m 길이의 각개전투 훈련장 고지에 우뚝 솟은 붉은색의 ‘최강 해병’이라는 글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영일만에서 불어오는 2월의 찬바람이 채 가시지 않은 훈련장에선 올해 첫 입소한 훈련병 941기 400여명이 교관의 지시에 따라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을 번갈아 하며 질퍽한 진흙 바닥을 구르고 있다. 오늘부터 나는 2박3일간의 해병대 신병 훈련에 들어간다.
“사흘간 함께 생활하게 된 조선일보 기자다. 동기(同期)라 생각하고 잘 가르쳐주도록!” 교관의 소개가 끝났다. 6108번 훈련병 철모를 턱 끈으로 짧게 조여 매고 나는 9명의 훈련병 ‘동기’들과 함께 각개전투가 시작되는 참호 속으로 뛰어들었다.
“해병이 물을 무서워하면 되겠나!” 붉은 팔각모(帽)를 내려 쓴 부사관 교관의 불호령에 물 웅덩이로 몸을 날렸다. 지그재그로 돌격하는 자세까지는 그럭저럭 소화했지만, 응용 포복·낮은 포복·철조망 통과가 이어지면서 나는 10여m나 뒤처졌다. 아직 청소년티를 채 벗지 못한 훈련병들이 엉금엉금 기어가는 내 어깨와 엉덩이를 붙잡아 정상으로 끌어주며 “같이 가자”고 외쳤다. 나 때문에 우리 조(組)는 벌로 낮은 포복을 한 차례 더 한 다음에야 고지를 점령할 수 있었다.
작년 한 해 해병대 자원자들의 평균 경쟁률은 4대1에 이르렀다. 지난 98년 이후 매년 2~3대1 이상의 경쟁률을 보여 ‘해병대 입대가 대학 들어가기보다 어렵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계속 불합격하면서도 5~6차례나 도전하는 자원자들도 있다. 편하고 흥미로운 일에만 관심을 둘 것 같은 신세대가 해병대에 자원하는 이유는 뭘까.
옆으로 누워 K2 소총을 오른손으로 붙잡고 왼손과 오른다리의 힘으로 땅을 밀며 전진하던 최민구(22) 훈련병은 “고교 시절 성적 때문에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고 그 뒤로 삶이 제대로 풀리지 않았다”며 “해병대 생활로 남들에게 조금씩 뒤처진다는 느낌을 떨쳐버리고 싶었다”고 했다. “성적 순으로 삶이 결정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싶다”는 최 훈련병에게 해병대는 ‘새로운 인생’의 출발대인 것처럼 보였다.
류장열(23) 훈련병은 해병대 337기인 아버지를 따라 자원했다. 아들이 해병대 후배가 된다는 소식에 아버지는 반겼지만,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말렸다고 했다. 류 훈련병은 “교관들이 들려주는 말 가운데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욱 더 강하게 만든다’를 가장 좋아한다”고 말했다.
해병대 교육훈련단이 최근 훈련병들을 대상으로 지원동기에 대해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사나이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응답이 50.24%로 가장 높았다. 신세대들은 해병대 지원을 승부근성이나 도전의식을 시험하는 기회로 여기고 있었다.
4시간여의 훈련이 끝날 무렵 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추위와 질퍽한 땅 때문에 훈련병들 사이에 “내일 훈련은 더 힘들겠군”이라는 불평이 새나왔다. 교관은 “전쟁터의 해병이 눈비를 두려워하는가”라고 호령했다. 우리는 찬비를 맞으며 숙소까지 1시간여 행군으로 돌아왔다.
지난 1월 7일 입소해 훈련 5주째가 된 이들은 이른바 ‘지옥 주간’에 들어가 있었다. 이때부터 해병대만의 고유한 근성을 키우기 위해 식사량이 평소에 비해 절반으로 줄어들고 취침 시간이 4~6시간으로 통제되며 훈련 강도는 더욱 높아진다. 신병 3대대장 안운호 소령은 “지옥주간은 체력이 저하된 상태에서 극도의 정신력을 요구하는 가장 힘든 시기”라고 말했다.
쇠고기·나물·김치와 된장국으로 차려진 저녁 식사는 10여분 만에 끝났다. 그 뒤 진흙에 뒤범벅이 된 군복을 30여개의 수도꼭지가 달린 야외 세면장에서 불과 5분 만에 세탁하고, 목욕은 30여평 규모의 욕탕 2곳에서 15분 만에 마쳤다. 넉넉지 않은 시설을 400여명이 함께 쓰다 보니 불편이 클 것 같은데도 이들은 불과 1시간여 만에 식사·세탁·목욕을 마친 뒤 다음 훈련을 위해 전투화를 닦고 내무반을 청소했다.
오후 10시쯤 육군의 점호에 해당하는 ‘순검’ 시간이 끝나자 이들은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동기야 수고했다”라는 구호를 외치고 모포 속으로 들어갔다. 앞으로 국사 선생님이 되는 것이 꿈인 오경훈(22) 훈련병은 이 구호를 외칠 때마다 고된 훈련을 마친 동기들 얼굴이 떠올라 “눈물이 핑 돈다”고 말했다. 그는 “먼 훗날 교단에서 제자들에게도 ‘할 수 있다’는 꿈을 심어주겠다”고 어른스럽게 말했다.
내무반의 불이 꺼지기 직전 5분여간 이들은 가족·친구들의 편지를 읽으며 그리움을 달랬다. 침구 속에서 정상권(21) 훈련병은 “힘들어도 결코 체념하거나 굴하지 말라”는 아버지의 편지를 읽고 콧등이 시큰해지며, “어차피 사회에서 힘든 일과 부딪칠 것이라면 혹독한 경험을 일찌감치 해보고 싶다”고 속삭였다.
잠든 지 채 2시간이 지났을까. 자정쯤 갑자기 사이렌이 울리며 ‘야간 비상훈련’ 명령이 떨어졌다. 무거운 눈꺼풀과 몸을 달래며 나간 연병장에서 훈련병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100여㎏ 무게의 통나무 20여개. 훈련병 10명씩 짝을 지어 목봉을 들어올리며 체력과 정신력을 단련하는 ‘목봉(木棒) 체조’가 기다리고 있었다. 한 명이라도 힘을 주지 않으면 나머지 9명이 그 무게를 대신 짊어져야 하기 때문에 ‘전우애’가 극히 필요하다.
같은 내무실의 훈련병들은 “아저씨는 힘 주지 않아도 돼요. 손만 올리고 있어요”라며 격려해줬지만, 목봉을 붙잡은 지 10여분 만에 입에서 단내가 나고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교관의 ‘열외하라’는 명령이 그때처럼 기뻤던 적이 없었다. 훈련병들은 머리 위 좌우로 목봉을 들어올리고, 무릎 높이까지 내렸다 다시 어깨 위로 올리는 동작을 2시간 내내 반복했다.
11일 오전 6시 기상 나팔과 함께 훈련 이틀차가 시작됐다. 이날 포항의 아침 기온은 0도였지만 새벽까지 내린 비 때문인지 체감온도는 영하를 밑돌았다. 참호 속에 뛰어들자 철퍽하는 소리와 함께 웅덩이 속 찬물이 뱃속으로 스며들었다. 체온이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훈련병들은 발을 맞춰 “귀신 잡는 용사 해병, 우리는 해병대, 젊은 피가 끓는 정열, 어느 누가 막으랴…”라는 군가를 쉬지 않고 불러댔다.
12일에는 20㎏의 완전군장을 짊어지고 왕복 28㎞ 행군을 시작했다. 이들의 발걸음이 조금씩 무거워지고 속도가 늦어질 때마다 교관들은 “너희를 군에 보내고 뒤돌아선 어머님의 발걸음보다 무겁겠느냐”며 매섭게 다그쳤다. 행군 내내 내 총을 대신 들어주겠다던 고석진(22) 훈련병은 문학 청년이다. 그는 “이 힘든 경험이 앞으로 글 쓰는 데 재산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해병대 교육훈련단장 이영재 준장은 “신세대들이 무조건 고된 일을 피하려 한다는 고정관념은 잘못”이라며 “스스로 선택한 일에 대해선 힘들수록 보람을 찾는 것이 신세대 해병정신”이라고 말했다.
--------- ●취재를 마치며 - 6주 훈련을 마친 신세대들은 ‘당당한 어른’ ----------
포항발(發) 국내선 비행기에 올라탈 때까지도 군대를 기피하려는 요즘 세상에 젊은이들이 굳이 높은 경쟁률을 뚫고 ‘거친’ 해병대를 자원하는 까닭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2박3일간의 병영 체험은 내가 갖고 있던 선입견을 바꿔놓았다. 그들은 발목이 아픈 동기를 위해 소총과 군장을 묵묵히 대신 짊어질 줄 알았다. 추위와 훈련에 몸살을 앓거나 무릎 통증을 호소하는 환자가 내무반마다 10여명에 이르렀지만 “내가 입실하면 정작 아픈 사람이 충분히 쉴 수 없다”며 양보할 줄도 알았다. 이들은 한결같이 “고통이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해병대에 지원하려면 각 지방 병무청이나 해군·해병 모병관실에 지원서를 내면 된다. 매월 두 차례씩 뽑는 해병대의 전형은 까다로운 편이다. 고교 내신성적과 출·결석 상황을 살피는 서류 전형을 거친 다음 정밀 신체검사·체력검사를 통해 최종 합격자를 선발한다.
지난 97년부터는 여름·겨울 두 차례씩 민간인을 대상으로 해병대 극기훈련을 체험하는 ‘해병대 캠프’가 열리고 있다. 지금까지 1만7000여명이 교육을 받았으며, 작년 여름에는 1600명 정원에 3000명이 넘게 지원해 2대1의 경쟁률을 기록하는 등 인기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