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 위해 먹나, 먹기 위해 사나.’ 하는 우스갯말이 유행한 적 있었다.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먹기 위해 산다.” 고 대답할 것이다. 살기 위해 먹는다는 것은 왠지 처절함이 느껴지고, 먹기 위해 산다 함은 뭔가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당장 끼니가 없어 풀뿌리를 캘지언정, 이왕이면 산나물의 향취를 즐기기 위함이라고 너스레를 떨고 싶은 것이 내 마음뿐 이런지.
아내 자랑이 팔불출이라 하지만 집사람은 손맛이 뛰어나다. 언론매체에 나오는 것 같은 전문 음식은 할 줄 모르지만, 우리네 밥상에서 자주 대하는 반찬들은 참 잘한다. 그 모양새가 정갈하거나 맛깔스럽기 때문이 아니다. 다소 투박하고 어설퍼 보여도 맛의 깊이가 있다. 새콤한 것은 새콤한 데로 매콤한 것은 매콤한 데로 감칠맛이 있으며, 구수한 것은 구수함이 식도를 타고 위장에 느껴질 정도로 풍미(風味)가 진하다. 간혹 집에서 식사한 지인들이 그 맛에 감탄하여 찬사를 늘어놓는 것 보면 어설픈 솜씨가 아님은 틀림없다.
그런 집사람에게서도 느끼지 못하는 맛이 있다. 화롯불에 은근히 덥혀진 청국장. 가으내 떡메를 쳐서 한 톨 한 톨 주워 모은 도토리를 갈아 만든 묵 밥. 쌉싸래하면서도 구수한 아욱 죽. 주로 어렸을 때 할머니가 해주시던 음식들이다. 나이가 들면서 옛 맛이 그리워지기 때문일까. 집사람을 졸라 그 맛의 기억을 되살리며 재현을 부탁해보지만, 쉽사리 집어내지 못한다. 하긴 이름부터 낯선 음식들을 간도 못 본 그녀에게 만들도록 청하는 것이 무리였지 싶다. 어쩌면 그새 입맛이 변했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단순하고 소박하기만 했던 시골 입맛이 수십 년 도회지에서의 자극적인 맛에 섞여 정체성을 잃어버린 탓이기도 하겠다.
시골에서의 먹거리는 그 분위기조차도 맛있었다. 마른 솔가지 타오르는 아궁이에 놓인 가마솥의 밥 냄새. 마당에 깔린 멍석에 둘러앉아 시원한 바람을 맞아가며 훌훌 넘기던 손칼국수. 윷놀이로 출출해진 늦은 겨울 밤, 빙 둘러앉아 얼굴 마주 보며 살얼음 낀 동치미를 곁들이던 삶은 고구마와 도토리묵. 귀하지도 별나지도 않은 재료들이건만 그 맛에선 미각(味覺)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향수(鄕愁)가 짙게 배어났다. 솥뚜껑에서 노릇하게 익어가던 김치 전, 활활 타오르는 장작개비 불꽃을 따라 보글보글 끓어오르던 돼지 찌게, 찹쌀 반죽에 팥소를 넣어 들기름 둘러 부친 부꾸미. 명칭의 나열만으로도 뇌리에는 고향마을의 애틋한 정경(情景)들이 스쳐간다.
돌이켜보니 어릴 적 시골에서 먹던 음식들이 더 값지고 귀했던 듯하다. 고구마를 고아 만든 엿과 강정. 송홧가루를 모아서 만든 다식. 밭에서 수확한 토종 콩을 맷돌에 갈아 만든 연 두부. 삶은 팥을 띄운 노란 호박죽. 모두 재료가 가진 특성보다는 그 재료의 맛을 제대로 살려내기 위한 오랜 시간의 노력과 정성이 요구되는 음식들이다. 뜨거운 가마솥 곁에 붙어 앉아 끈적끈적 엉겨드는 엿 물을 팔이 빠지도록 주걱으로 뒤젓기, 물에 불린 콩을 국자로 떠 넣으며 양손에 경련이 나도록 돌리던 맷돌질. 그 속에는 가족을 위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정이 녹아있었다. 인스턴트식품들에 치여 잊혀 지던 이런 음식들이 이즈음에 웰빙으로 떠오르는 것을 보면, 선조의 혜안이 놀랍기만 하다. 빠듯한 살림살이에 쉬운 재료들을 이용하여 갖은 정성으로 만들어주던 먹거리가 자양분(滋養分)의 보고(寶庫)였다니. 음식의 맛과 영양은 그것을 만들어내는 정성과도 상치(相値)되나 보다.
삶의 형편이 나아지면서 먹을거리에 대한 관심도 늘어나는 모양이다. 요즘 각 매스컴에는 철 따라 산출되는 각종 식 재료와 그 맛에 대한 보도들이 쏟아져 나온다. 갓 잡아 올린 싱싱한 해물들과 갓 채취한 신선한 야채류가 갖은 양념으로 치장된 채 보는 이의 구미(口味)를 자극한다. 하지만, 그 음식을 접한 후 기대에 못 미치는 식감(食疳)에 곧잘 실망하곤 했다. 간혹 음식 맛이 좋다는 식당들을 찾았지만 소문만큼의 맛의 깊이를 느끼지 못했다. 아마도 정성과 분위기 탓이 아닐는지. 우물에서 숭늉 찾듯, 영리(營利) 목적의 식당에서 애정이 깃든 음식을 찾았던 것이 애당초 무리였을 터이다.
흐르는 시간을 거슬러 갈 수 없듯이 오감(五感)에 남아 있는 맛의 향수를 제대로 찾아내기가 어려워 보인다. 그저 집사람이 가끔 만들어주는 토속음식으로 위안(慰安) 삼을 뿐이다. 어제도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서니 향긋한 쑥 냄새가 현관문까지 은은히 퍼지고 있었다. 일전에 밭에서 뜯어온 쑥으로 쑥버무리를 만드는 중이었다. 게다가 식탁 위에는 도토리가루로 쑨 묵 밥이 한 대접 놓여있지 않는가. 떡메로 칠 때마다 후드둑 후드둑 떨어지던 도토리들, 가을 햇볕에 검붉게 그을려진 알갱이로 가루를 내어 매캐한 솔 연기 피해가며 주걱으로 묵을 쑤던 할머니, 커다란 양푼에 가득 담긴 도토리묵과 잘게 썬 묵은지. 한 입 한 입 넣을 때마다 펼쳐지던 지난 풍경(風景)들이 참으로 아늑했다.
첫댓글 글솜씨를 보니 평범한 회사원이 아닌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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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
회장님 은 확실한 국산토종이구먼...근데 천렵은 안해 보셨나요???